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늘은 어린 왕자의 하늘이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막의 밤하늘이지만 난 분명 그 하늘을 제일 좋아할 거다.

옆지기와 언젠가는 사하라 사막에 가자고, 그게 안 되면 고비 사막에라도 꼭 가자고 약속했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하늘은 청회색의 파리의 하늘이다. 중학교 때 본 만화일 터인데, 지금은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이 만화의 표지와 제목을 좋아해서 소장했더랬고, 고등학교 때 책장 정리를 하면서 만화가 지망생인 친구에게 준 만화책 목록에 이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나는 건 그 친구 어머니가 공부는 안 하고 만화만 그린다고 내가 준 만화책들을 몽땅 버렸단다. 족히 100권도 넘었는데, 버릴 거면 나에게 돌려주지 그랬냐고 그 친구에게 화를 냈었다. 그러고보니 걘 지금 뭐하나... 결국 만화가 데뷔는 못 하고 팬시 디자이너로 취직한 뒤 몹시 힘들어 했는데, 살다 보니 소식이 끊겼다.)

각설하고 내게 청회색은 어떤 색인가 잘 표현할 자신이 없어 작가님 블로그까지 찾아가 책 표지를 다운 받는데 성공했는데, 사실 딱 이 색의 하늘은 아니다. 내가 '청회색'이라고 표현하는 색은 해가 지고 노을은 사라졌으나 아직 어두워지기 전, 그 검고 푸른 하늘색이다. 참 묘한 기억의 왜곡이다. 어쨌든 난 지금도 '청회색'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건 히드클리프의 하늘과 마그리뜨의 하늘이다. 회색구름이 낮게 깔리고(먹구름은 아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이면 난 언덕 너머로 달아나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며 살짝 미친다. 사실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여기서 바람만 좀 더 불면 난 미칠 수 있어 라며 좋아했는데, 비가 와서 김이 좀 새긴 했다.



마그리뜨의 하늘도 내 기억의 왜곡을 증명하는데, 마그리뜨는 사실 양떼구름이나 뭉게구름을 많이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난 새털 구름이 걸린 파란 하늘을 볼 때면 늘 마그리뜨를 떠올린다. 검은 우산만 있다면 둥실 떠오를 수 있을 거 같고, 내 눈동자는 하늘색이라 믿게 되버린다. 이런 날은 검은 현실을 버리고 땡땡이를 쳐야 하는데, 실제로 성공해본 건 대학교 때 밖에 없다. ㅠㅠ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가을은 이영춘님의 하늘이다. 내 기억 속의 시는 맑고 밝은 느낌이었는데, "쨍그렁 깨질 듯한"이라는 시귀만 기억에 남아 그랬나 보다. 이 시가 이렇게 애잔했나 사뭇 놀라는 중이다. 어쨌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가을 하늘을 볼 때마다 "쨍그렁"을 생각하게 되고, 쨍한 가을이라고 내 마음대로 부르곤 했다.


슬픈 가을 / 이영춘 


쨍그렁 깨질 듯한 이 가을 하늘 
눈물겹다 
무거움의 존재로 땅 끝에 발붙인 짐승 
부끄럽다 
멀리 구름은 유유히 흘러가고 
가을 잠자리들 원 그리며 무리 짓는다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이 가을 햇살 아래 
아, 아프구나! 가볍지 못한 존재의 무게가 

바스락대는 잎새의 온갖 새들 
깃 털고 일어서는 이 가을날 
밤새 무명의 화가로 벽화 그리던 거미들도 
하루살이도, 쓰르라미도, 풀벌레도, 오소리도 
제 모게 이기지 못하여 모두 털고 일어서는 이 가을날에 
나는 
무엇이 이토록 무겁게 허리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뱀꼬리> 하늘바람님과 북플로 수다떨다 두서없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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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1-28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밤하늘에,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마그리트 그림까지 제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글이에요. 스마트폰에 경직된 목 근육을 풀 겸해서 가끔 하늘을 봐야겠습니다.

감은빛 2014-11-29 0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딱 한 번 고비사막의 밤 하늘을 보았습니다만,
너무 오래전이라 그런지 그때의 색감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한 여름이었는데도, 이빨이 덜덜 떨리던 그 무지막지한 추위만 기억납니다.

히스클리프의 하늘은 폭풍의 언덕 삽화인가요?
스산한 분위기가 딱 그 소설을 떠올리게 만드네요.

섬사이 2014-11-29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아이들이 별로 가득한 하늘과 오랜 세월을 견뎌온 크고 우람한 나무를 바라보며 자랄 수 있다면,
그러면 세상은 더 좋아질 거라고.
높은 건물에 가려 하늘은 점점 좁아지고, 도시의 나무들은 병약하죠.
조선인님이 보여주신 하늘들이 모두 다 그리워지네요.

조선인 2014-11-30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전 출퇴근 시간은 하늘만 보고 걸어요. ㅎㅎ
감은빛님, 사막의 밤이 춥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조금 고민되네요. ㅋㅋ
섬사이님, 맞아요, 아이들이 볼 하늘이 너무 부족해요.
 
선화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3
김이설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의 책표지는 항상 여자다. 여자의 이야기를 하는 여자이니 여자 얼굴이 표지인 것도 당연하지만, 여지껏 그녀의 표지는 책보다 한참 모자랐다. 이번에서야 비로소 책과 표지가 하나로 어울렸다. 선화만큼이나 표지도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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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1-20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책과 표지가 잘 어울려요^^
선화만큼이나 표지도 예쁘다! 평이 참 예뻐요^^
 
엄마의 뇌
캐서린 엘리슨 지음, 정지현 옮김 / 나무수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기자가 쓴 책이라 전문성은 부족하지만 그만큼 쉽고 곁가지 내용이 풍부하다. 임신과 출산, 양육의 경험을 통해 뇌는 에스트로겐과 코르티졸과 옥시토신의 분비체계가 달라지고, 이를 통해 여성의 뇌는 사춘기 이후 가장 격렬한 뇌 가소성을 경험하게 되고, 첫째 애를 낳았을 때 학습되고 진화한 뇌는 둘째를 낳았을 때 반복학습으로 배가되며 안정화된다 - 첫째를 낳았을 때와 둘째를 낳았을 때는 변화가 있지만, 셋째 이상부터는 큰 변화가 없다. 즉 감상적이고 우울하고 건망증이 심한 마미브레인 신드롬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변화한 여성의 뇌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와 가족뿐 아니라 직장과 사회에 더 긍정적인 변화를 야기시킬 수 있다가 이 책의 요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성장하였는가.

- 대인관계가 넓어졌다. 여전히 내가 친구라고 인정하는 사람의 범주는 대단히 한정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목인사만 나누고 스쳐갔을 다수의 이웃과 학부모들과 교류를 시도하게 되었다. 

-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향상되었다. 여전히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데는 서툴고, 나의 주의 주장과 고집을 꺾지 않는 편이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더 오래 듣고 더 귀기울여 듣게 되었다. 놀랍게도 더 많이 듣는 것이 더 많이 말하는 것보다 설득에 유리했다.

- 교감 능력이 진화하였다. 원래도 잘 웃고 잘 울고 잘 화내고 잘 슬퍼하는 사람이지만, 이는 감정의 고저가 심하고 표현이 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타인의 고통과 행복에 더 깊이, 더 오래 반응하고 있다.

- 긴장의 고삐를 풀 줄 알게 되었다. 난 나처럼 모자른 사람을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고 평가한 선배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 했다. 이제는 깜냥도 되지 않는 일에 매달려 자학하던 그 시절의 내가 보인다. 어찌 보면 그 시절보다 지금의 나는 훨씬 게으르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더 퇴화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적정 수준에서 포기할 줄 알게 된 내가, 어느 정도 타협할 줄 알게 된 내가, 난 제법 만족스럽다.

- 한 마디로 탄력성과 동기 부여, 정서지능은 성장했다. 통찰력과 효율성도 미미하게 개선된 것 같지만, 워낙 후진 영역이라 그 효과는 미미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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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둘 다 학교를 다니니 작년부터 애들 책은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 있고,

지난해부터 몰아친 긴축재정의 여파로 내 책은 거의 안 사고 있었고,

지난달에는 점심시간에 휘적휘적 걸어서 갔다올 수 있는 도서관까지 생겼기에

도서정가제고 뭐고 난 끝까지 초연하리라 의연하리라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러나 결국.

보관함에 있는 책 중 할인율과 마일리지율이 높은 책만 골라 오전에 한 번.

반값도서 중에 어린이서적을 골라 오후에 한 번.

쿠폰과 적립금과 예치금과 카드사 마일리지를 싹싹 긁어 모아 나름 알뜰 쇼핑을 했다지만,

오늘 하루 사들인 책이 21권... 헉...

올해 연말까지는 더 이상의 책 주문은 없다.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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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11-10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 책을 안보는 지인들마저 물어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일인지 =.=

조선인 2014-11-1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놀라워요. 자본주의 사회인데, 시장경쟁 대신 정부가 가격을 정하다뇨.

감은빛 2014-11-11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는 정말 책 안 사고 지나왔는데,
바쁜 와중에 알사탕이나 적립금 유효기간 지나는 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막판에 한번 질렀네요.

보관함을 뒤졌는데, 생각보다 할인율이 높은 책은 많지 않았어요.
제 취향이 워낙 대중적이지 않다는 걸 또 한번 깨달았네요.

그래도 책 주문하면 받을 생각에 설레지 않으세요?
저는 받아도 당분간 읽을 시간도 없는데도, 막 설레네요. ^^

조선인 2014-11-1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그러게요, 보관함을 엑셀로 다운해서 소팅해본 뒤 생각보다 지금 사야할 책이 많지 않더라구요.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휘유.

다락방 2014-11-11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1 권 ㅋㅋㅋㅋㅋㅋ 전 방금전에 8권 질렀어요. 하하하하하

조선인 2014-11-1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좀전에 더 끔찍한 걸 확인했어요. 분명히 하반기에는 단 한 번도 주문한 적이 없었던 거 같았는데, 책베개 때문에 주문한 거랑, 유홍준 교수님 신간이랑,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소장하고 싶었던 책이랑... 5개월 동안 7번을 주문했더라구요.
이상해요. 이럴리가 없는데. 분명히 긴축재정이라 꾹 참고 책을 안 사고 있었는데.

조선인 2014-11-12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미생까지 질렀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주문하면 안 된다... 정신 차리자.

순오기 2014-11-14 22:45   좋아요 0 | URL
미생까지 질렀다면 잘 하셨지요~ ㅋㅋ
바람돌이님도 부지런히 리뷰 올리고 조선인님도 자주 글 올리고 좋아요~ ^^
 

개인적으로 수지라는 아이돌에 큰 관심은 없지만 나른한 오후 직원들끼리 비타 500을 마시다가.


수지가 엄지손가락을 척 내보이며 나에게 '잘 될 거에요'라고 하니, 꽤 위로가 되었다.

웃긴 건 하필 병뚜껑을 못 따 쩔쩔 매던 모 대리는 '건강하세요'라는 병을 들고 있었고,

마누라의 출산 퇴직으로 갑자기 외벌이가 되어 힘들어하는 모 사원은 '부자되세요'를 받았다.

수십만명은 동일한 문구를 봤을텐데 굳이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건,

그만큼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세상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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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4-11-10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딴 사람도 아니고 수지가 전해주는 한 마디라면...어휴..어휴~~!!

하늘바람 2014-11-10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지 악성 댓글 사건을. 읽고 참 속상하겠구나. 했어요

조선인 2014-11-10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수지 삼촌팬은 어디나 있군요. ^^
하늘바람님, 어?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몰랐네요.

감은빛 2014-11-11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지가 누군지 모르지만, 비타오백 광고 모델인가 봐요.
병 뚜껑에 문구 적어놓는거 오래된 방식인 거 같은데, 요즘도 하나봐요.

그래도 그런 말이라도 위로가 될 때가 있겠죠.
따뜻한 말 한 마디는 누구에게나 늘 필요한 법이죠!

조선인님 힘내세요! ^^

조선인 2014-11-1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감은빛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