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동서울청년회 우등불 가을답사는 용주사로 가게 되었다. 원래는 브라이언 베리 스님과 함께 탱화를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스님의 사정으로 우리끼리만 가게 되었다.
아침 9시에 강남역에서 모여서 10시가 좀 넘어 출발, 1시간 남짓 차를 달려 도착한 용주사는 기대했던 바와는 조금 달랐다. 산속에 있으리라 생각은 안했지만 도로가 바로 옆에 붙어 있을 줄이랴....절 규모 또한 별로 크지 않았다.
용주사 일주문?! 원래 일주문은 기둥이 하나라 일주문인데, 어쨌든 일주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정면 3칸에 맞배지붕의 이 문은 창건당시에는 없었으나 1980년 이후에 경내를 정비하면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주말이라 그런지 삼삼오오 용주사를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양쪽벽에는 사천왕상이 그려져 있어 온갖 잡귀와 악신을 물리치고 절을 수호한다.


원래 용주사터는 신라 문성왕 16년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가 있던 곳이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창건한 절이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 스님으로 하여금 4년 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용주사는 불교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힘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왕이나 왕실의 무덤을 수호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 간혹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조선후기에 와서 사림세력이 부각되고 성리학이 성행하면서 왕실에서의 사찰건립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하여 조선왕조에서의 왕실의 원찰은 더 이상 세워지지 못했으며 이처럼 사회적 여건이 좋지 못하던 시대에 거대한 왕실의 원찰이 세워지게 되었던 연유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인 것이다. 때문에 보통 절과는 다르게 궁궐 건축양식을 띄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주문을 지나 들어가면 매표소가 있고 바로 삼문에 이르게 된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은 좌우에 줄행랑은 지닌 맞배지붕 양식의 문이다.

삼문의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싯구가 주련(기둥이나 바람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 붙이는 글씨.)으로 걸려있는데 일제시대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이다.
용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용주사라고 쓰인 현판 역시 안순환의 글씨이다.



삼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

우리 일행은 사찰을 둘러보기 전에 은행나무 옆에서 각자 준비한 발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탱화에 대해서 발제한 희정언니.

절의 문양에 대해서 발제한 용호형

용문사에 대해서 발제한 나.

혼자 셀프놀이 한 종민이형.

옆에서 땅파고 노는 마로~!

토론이 끝나고 나서는 다시 절 밖으로 나가서 점심으로 순두부를 먹었다.
식당 앞에 묶여 있던 누렁이.

식사를 마치고나서는 본격적으로 사찰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삼문을 지나면 탑이 정면에 보이고, 바로 천보루를 만나게 된다.
탑이 대웅전 앞이 아닌 누각 앞에 놓여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천보루는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누각이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이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된다.
거대한 석조기둥...

누각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승당(僧堂) 서쪽에 선당(仙堂 또는 禪堂)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는 각각 나유타료(那由陀寮)와 만수리실(曼殊利室)이라고 불리는데 스님들의 요사채와 객실로 사용된다.
나유타료는 현재 공사중이고 만수리실만 볼 수 있었다.

천보루에는 '홍제루(弘濟樓)'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원래는 천보루 였다가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된 것이다.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밖에서 보면 천보루

안에서 보면 홍제루

중정에서 본 천보루의 모습.

천보루는 궁궐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건물명칭이 그러하고, 궁궐과 같이 난간을 둘렀으며 좌우로 연결된 나유타료·만수리실이 이를 말해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면서 용주사에 자주 행차하였는데 천보루는 이러한 때를 대비해 행궁규모로 지어진 건물인 것이다.
천보루는 현재 각종 법회 장소로 이용되는데 누각의 내부 측면에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길이 2.44m의 목어가 잉어 모양으로 비늘, 지느러미 등을 사실적으로 갖추고 살아있는 듯이 걸려있다.



천보루를 지나 중정에 들어서면 정문에 대웅보전이 보인다.
흔히 사찰내에서 중심되는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르는데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리킨다. 법호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하고 줄여서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주사에서는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에서 대웅보전이라고 한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식으로 공포(拱包)는 각 기둥과 평방위에 설치한 다포계(多包系)양식이다.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活柱)를 세웠으며,
문은 빗꽃살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사진에 보이는 쇠로 된 길다란 막대기가 문을 받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예는 사찰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올려 제치므로서 불전내부의 서역공간과 외부의 새속고안이 차별 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또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용인데, 용은 법당 전면 기둥과 처마 밑을 비롯하여 법당의 닫집, 천장, 기둥, 벽 등에 주로 장식된다.
대웅보전 어간(御間 : 전면의 중앙칸)의 양쪽 기둥머리에 조각된 용머리.

법당에서는 전면 바깥쪽에 용두(龍頭)가 안쪽에는 용미(龍尾)를 장식한 경우와 건물 앞쪽에 용두를, 뒤쪽에 용미를 장식한 경우가 있다. 이 때 용두는 극락세계를 향해 가는 반야용선(般惹龍船)의 선수(船首)를 상징한다.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참조)
용주사의 대웅보전에 장식되어 있는 용두와 용미

대웅보전 내에 모셔져 있는 삼존상은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다.

가운데가 석가모니불, 오른쪽이 약사여래, 왼쪽은 아미타불이다. 석가여래와 아미타불은 얼굴 형태가 네모졌고, 약사불은 둥근 형태를 지니고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각각 전라도와 강원도 조각승이 깍아서 그렇다고 한다.

삼존상 뒤에 걸려 있는 탱화는 '삼세불의 후불탱화' 이다. 탱화의 제작자에 대해서는 김홍도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고 아직까지도 논란이 분분하다.
탱화는 원칙적으로 한치의 여백도 없이 꽉찬 구도를 묘사하는데 이는 불법의 세계가 법과 지혜로 충만된 완전의 공간이므로 이를 묘사한 불화는 마땅히 빈공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탱화는 서양화법과 같은 원근법, 명암법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탱화는 인물의 표현에 음영법을 쓰고 있다.

삼존상 위에는 화려한 닫집이 있다. 닫집이란 '또 하나의 집'이라는 뜻으로 극락정토를 상징한다.
용주사의 닫집은 천장에는 극락조가 날고 좌우에는 구름속에 동자모습의 비천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각 기둥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불단을 보호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가 파손되고 넷만이 남았다.

대웅보전 앞에는 정조가 식수하였다는 회양나무가 있으나,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온몸에 붕대를 감은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보전의 처마에 장식되어 있는 봉황. 그런데 꼭 닭대가리 같이 생겼다-_-;;;

대웅보전 옆에서 열심히 살펴보고 있는 용호형과 종민이형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는 시장칠등각이 있는데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호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하며 각각의 신을 따로 모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여 이들 세 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용주사의 시방칠등각은 세 신을 함께 모신 전각으로 전각이름이 매우 독특하다. 그 뜻을 살펴보면 먼저 시방(十方)이란 동·서·남·북, 동북·동남·서남·서북, 그리고 상·하의 열 곳으로서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칠등(七燈)이란 칠성, 즉 북두 칠성을 가리키므로 시방칠등각은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이다.

천불전은 말 그대로 천 개의 불상을 모셔놓은 곳이다.

대웅전쪽에서 바라본 천불전과 범종각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오른쪽을 향하면 정면에 법고각이 있고 범종각이 맞은편에 있다. 범종각 안에는 원래 고려대에 만들어진 동종이 있었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고 안은 텅비어있다. 용주사의 동종은 상원사의 동종, 에미레종과 더불어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잇다.


용주사에는 그 밖에 지장전과 효성전 등의 건물이 있다.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이라 한다. 그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용주사에는 지장전이라고 이름하여 지장보살 시왕, 판관 등을 봉안하고 있다.


용주사의 가람배치

마지막으로 탑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구도 한 번 멋지다. -_-;;;

마로를 데리러 일어나는 희정언니.

드디어 마로와 함께...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찍은 사진. 흔들린데다가 옆으로 치우쳤다--;;

보너스로 마로와 희정언니 사진
엄마가 목걸이 사줬어요~!!!

신나서 펄쩍 펄쩍..


이번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사찰답사는 없을 것 같다. 아쉬운 점은 불교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미륵이 뭐고 보살은 뭔지....불상은 또 왜그리 많으며 등등....) 사찰건축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여 그 나마 몇 가지 얻은 지식도 단편적인 이해로만 그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 사찰답사를 계기로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된만큼 앞으로도 사찰을 가게 되거나 하면 관심있게 둘러볼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