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은 전설과 사실을 구분할 수 있는가? 진실에서 진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p18)

책에 대한 확실한 정보도 없이 덜컥 사버린 책. 많은 사람의 추천도 있었고 '바람의 열두 방향'이라는 제목이 특히 더 맘에 들어 덜컥 구입은 했지만 막상 도착한 책을 보니 선뜻 읽히지는 않았다. 책을 받고 나서야 단편임을 알아챈 이유도 있고 어렴풋이 반지전쟁 비스무레한 책으로만 여겼던 내 탓은 더 컸다. 
소설은 분야를 가릴 것도 없이 주어지는 대로 읽는 나지만 그래도 선호하는 분야는 나름대로 있기에 평소에 내가 즐겨 읽는다고는 할 수 없는 SF를, 그것도 60-70년대 쓰여진 책을 읽는다니...
한달은 넘게 처박아 두기만 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나열한 이러저러한 이유로.

연휴즈음 인사를 다니기 위해 장시간 차를 타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간이 길것이라 예상된 날, 서둘러 가방을 챙기다 짧게 읽을 수 있는 책, 작고 가벼워서 작은 가방에 담을 수 있는 책을 급히 고르다 바람의 방향이 내게로 불었는지 이 책을 손에 잡게 되었다. 가볍게 읽어봐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가볍게 읽으려는 내 마음은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샘레이의 목걸이를 읽을때까지만 해도 '어? 이건 뭐냐?'라고 멈칫했지만 파리의 4월, 명인들... 이름의 법칙....땅속의 별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점점 더 묵직한 무언가가 나를 짓누른다. 인간에 대해, 탐욕과 이기주의에 대해, 고독에 대해, 삶에 대해.. 행복에 대해... '본질'에 대한 질문을 자꾸만 던지는 것 같아서.

나는 도저히 그 광범위하고 깊이있는 르귄의 글에 대해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삽십년도 더 전에 쓰여진 그의 글들이 지금 읽어도 강한 에너지를 뿜어낸다는 광고문구가 허튼말은 아니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노트에 빽빽하게 옮겨적은 문장들을 다시 읽어보니 이렇게도 다양한 주제들을 이야기했었나, 새삼 또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눈에 번쩍 띄는 문장은 왜 "보잘 것 없는 인간 하나하나의 뇌가 별과 은하의 형태를 인식해 사랑으로 번역해 내쟎아요(372)"일까.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결국은 '인간'에 대해 느꼈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느낌이어서 그런걸까?
아니... 정말 잘 모르겠다. 나는 이미 바람의 열두 방향으로 끝없는 길을 나서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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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5-03-05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너무 긴 시간이 지난것 같다. ㅠ.ㅠ

깍두기 2005-03-05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르귄의 신도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다음엔 어둠의 왼손을 읽어 보시지요.

chika 2005-03-05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그렇지요? '어둠의 왼손'이라구요? 네~ ^^

2005-03-05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영엄마 2005-03-05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멋진 리뷰를 써내셨군요. 저는 반쯤 읽다 말았는데 언제 다 볼려나..

chika 2005-03-06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이어서 띄엄띄엄 읽어도 좋을거 같아요. 아영엄마도 다 읽고 멋진 리뷰 써 주세요~ ^^
올리브님, 전도서 1장요? 호오~
 
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10월
구판절판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낯선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나는 이가 세상에서 가장 외향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낯선 이를 만날 때는 어느정도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다. 비록 스스로는 그런 두려움을 느낀다는 걸 모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저 사람은 날 놀리고 내 자신에 대한 인상을 망가뜨리고 날 간섭하고 파괴하고 바꾸려는 게 아닐까? 저 사람은 나와 다르지 않을까? 그래, 그럴거야. 그리고 그게 무서운 일이다. 낯선 사람이 낯설다는 점. <아홉생명에서>-238쪽

하지만 난 이 친구가 외롭다고 생각해. 이 친구는 우릴 보지도 못하고 우리가 하는 말을 듣지도 못해. 그건 사실이야. 이 친군 전에도 다른 사람은 볼 필요가 없었어. 전에는 한번도 외로운 적이 없었거든. 자기 자신만 보면 됐어. 평생 다른 아홉개의 자아와 말하고 살면 되었단 말이야. 이 친구는 외로울때 어떻게 하는지 몰라. 이제 그걸 배워야 해. 시간을 좀 주자고.<아홉생명에서>-270쪽

그럼 클론을 만드는 건 모두 잘못된 거야. 그래선 안돼. 복제된 천재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우리의 존재조차 모른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아홉생명에서>-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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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5-03-02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선 사람이 낯설다는 건 정말 무서운일일까...
복제에 대한 글을 읽으며 느낀건, 아무리 똑같은 복제가 생긴다고 해도 그 존재에 대한 고유성은 복제될 수 없을것이라는 것... 자신안에 내재한 외로움은 나의 외향이 생긴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존재에 대한 고유성은 위대하다는 것... 그래서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당신'이 세상에 존재함도 감사하다는 것.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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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난 전선을 놓고 나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예맨을 떠난 순간부터 내겐 또 다른 전선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뛰어들 그 다음 전선이 지금부터는 나의 삶이고 나의 일일뿐이었다. 내가 뛰게 될 그 전선에서 나는 마음으로 울고 웃고 사랑하고 증오하며, 또 짧은 한순간 내가 지닌 모든 열정을 바치게 될 것이고..."(p 178)

솔직히 이 책을 다 읽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냥 이 책을 추천합니다, 한마디만 하고 싶은 심정이다...

냉정함을 배우고 일을 먼저 생각하는 기계적 습성을 익히며 거친 전선에 익숙해지면서 몸에 배인 '냉랭함'이 결국은 도시와 멀어지고 전선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다는, 그 전선에서 외로움을 달랬다는 전선기자 정문태님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몸에 흐르는 차가운 기운이 도시에서 외톨이가 되게 하였다고 하지만, 책을 읽으면 그에게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과 따뜻한 피를 느낄 수 있다. 수많은 전선을 다니며 취재를 하고 있지만 그가 좇는것은 피 튀기는 싸움터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가 바라는 아름다운 세상이리라는 생각을 한다.

노을지는 딜리 바닷가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다시는 전선기자로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그의 마음은 지금 어느 전선을 달려가고 있을까.....

언젠가 반드시 전선기자 정문태의 취재 기록 끄트머리에는 손에 고운 꽃물 들이며 살포시 미소짓는 소녀의 모습, 마음껏 숲길을 달려가며 환한 웃음 짓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곱게 끼워져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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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소년 4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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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습니까?'
'강해진다...?
'강하다'는 것은 '약함'을 아는 것...
'약하다'는 것은 '겁'을 내는 것...
'겁을 내는' 것은...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이지.-53쪽

눈을 뜨고 공포를 똑바로 보는게야.
......
눈을 감으면... 네 눈꺼풀 속에서 공포는 옳다구나, 하고 커져가지.
눈을 뜨고 공포의 정체를 확인해-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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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3-0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멋있는 말이군요! 추천해야쥐.
 
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10월
구판절판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이 세계의 전설과 사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름도 없이 그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행성들, 과거는 신화의 영역이 되고 여행에서 돌아온 자들은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이 벌였던 행동이 신의 몸짓이 되어버린 사실을 깨닫는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전설과 사실을 구분할 수 있을까? 우리의 광속 우주선이 다리를 놓은 시간의 틈을 어두운 광기가 잠식하고 그 어둠 속에서 불확실과 불균형이 잡초처럼 자라난다....

당신은 전설과 사실을 구분할 수 있는가? 진실에서 진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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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5-02-10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샘레이의 목걸이> 첫부분에 나온 글.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은 후여서 더 이 글이 맘에 와닿는것일까?
맨인블랙 영화의 끝장면에서 끝없이 커져가는 사물함과 사물함 또 사물함들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과 비슷하다.
나는 불경스럽게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과거의 일상이 신화가 되었고, 성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나는 진실에서 진실을 구분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