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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신화에 열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재밌는 이야기꺼리라는 정도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설화들을 재밌게 엮으면 흥미를 느끼고 재미있게 읽으면 그걸로 만족하는 옛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 내가 '길가메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최초의 신화, 모든 신화의 원형, 또한 성서의 원형이 담겨있다는 길가메쉬 서사시라는 신화이야기는 '길가메쉬'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듯한 내게 확연한 끌림이 있는 이야기책이 되었다.
그렇지않아도 얼마 전 성서의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주석이 달린 성서를 한번 훑어 보았었는데 이 책이 이외로 성서를 더 넓게 볼 수있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기대감 같은 것도 있었고.
처음 접해보는 신화이야기는 언제나 내게 가슴 설레이는 기대와 흥미를 갖게했다. 이 책을 처음 펴들었을 때의 느낌이 그랬다. 전반적인 설명과 적절한 사진들 - 역사적인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는 듯한 사진들은 '신화이야기'나 읽으며 재미를 느껴보려는 나의 가벼운 마음과는 달리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 알수없는 끌림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사전정보없이 처음으로 '최초의 신화'라는 길가메쉬 이야기를 읽는데다가 같은 내용, 혹은 비슷한 내용의 반복은 초반부를 읽어나가는 나를 당혹하게 하였다. '어? 이건 내가 방금 전 읽은 내용아닌가?'
'뭐야, 이건 앞말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일뿐이쟎아. 도대체 뭐야?' 하는 생각이 들즈음에야 겨우 성서를 읽을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저자에 따라, 전승에 따라 - 그러니까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같은 전승도 여러가지로 해석이 되고 표현이 달라지고 중심주제가 달라지는 것처럼 이 길가메쉬 서사시 역시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는거겠지..라는 멋대로의 생각을 하며 읽어나갈 생각이 들었다. 물론 멋대로의 생각이라 했지만, 이 책은 '수메르어 판본'과 '악카드어 판본'으로 구성된 점토서판 원문을 음역하여 소개하는 것이라 했으니 그닥 틀린말은 아니겠지? 나는 그냥 그렇게 믿으며 다시 책읽기에 전념하였다. 아니, 전념하고 싶지 않아도 술술 읽혀 나가 중간에 멈출수가 없었다.
신화연구라는 측면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그런 연구분야는 모르겠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서를 읽을 때 성서에 나오는 전승이 그 주변 일대의 여러 전승설화의 한 부분을 도입해왔다는 것을 들었고 그런 관점에서 더 흥미를 가질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길가메쉬 신화 이야기는 충분히 엄청난 연구가치가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런 느낌이 드는데 성서학자에게는, 신화와 인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겠지.
이 책을 절반쯤 읽고 있을 때, 우연히 찾아 온 어느 신부님이 내 책상에 놓인 책의 표지를 슬쩍 보고는 '아, 길가메쉬 서사시가 이렇게 나왔군요'라고 말을 했다. 내가 책을 다 읽은 상태였다면 신부님을 붙잡고 길가메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을텐데, 그땐 내가 책을 먼저 읽고 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 모른척했다. 그만큼 아무런 편견, 선입견 없이 이 최초의 신화이야기를 읽고 싶은 열망이 강했었다.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이야기의 반복따위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길가메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움도 알고 있으며, 성서의 흐름과 비슷하게 인간이 창조되고 죄를 범하고 멸망하는 과정이 있으며 성서내용의 숫자를 떠올리게 하는 무수한 숫자가 나온다. 어쩌면 얼뜨기 천주교 신자의 재미있는 설화이야기 읽기일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책을 다 읽고 나서 신부님과 신화전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나중에 한번 꼭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에서 읽은 이야기 이상으로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지금은 주위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없기때문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그 느낌을 정리해보려고 가만히 되새김질을 해본다. 아니, 책을 한번 더 읽어야 하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칠즈음 '창세기'가 떠올랐다.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서 펴낸 새번역성서 창세기에는 주석이 달려있기 때문에 뭔가 연관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책을 펴들어봤다.
"성서의 저자들은 세상과 인류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대근동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 그리고 페니키아 -가나안 지방의 전통들을 망설임없이 직간접적으로 그대로 쓰고 있다...... 고고학의 발달은 동시에 창세기 앞부분의 여러 장들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수정한 저자들이 기계적인 모방자들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이들은 고대 근동의 이야기들을 그냥 가져오지 않고, 자기 민족의 특수한 전통이라는 틀 안에서 그 자료들을 다시 작업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독창성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근동의 설화들을 이용하여 자기네 신앙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 수가 있었다.
......고대 근동의 수많은 문학적 증인들 중에서 여기에서는, '에누마 엘리쉬'라 불리는, 마르둑 신이 이룬 창조에 대한 바빌론의 설화, 바빌론판 홍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웅 길가메쉬의 모험 이야기,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것으로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성읍 주민들이 자기네 신들을 위해서 지은 큰 탑들 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p28, '창세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아, 나는 이미 예전에 '길가메쉬'라는 이름을 들어봤었구나. 그런데 그 영웅을 잊고 있었다니...
최초의 신화를 읽는 가슴 설레임은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최초의 신화이야기라는 길가메쉬의 이야기는 그렇게 흥미를 끌며 읽는 것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득 새로 번역된 창세기를 펴드니 내가 더 가슴벅차게 읽은 또 하나의 이유가 얼핏 스치는 것 같다.
새번역 성서를 작업한 신부님은 제주출신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언어학박사 신부님이셨다. 한국인 최초로 성서학박사가 되셨고, 영어 번역본이 아닌 원문 성서 번역에 십여년을 전념하신 신부님은 번역에 몰두하다 모든 작업을 다 마치시고 나서야 입원을 하셨고 결국 위암으로 2003년 3월에 돌아가셨다.
길가메쉬 서사시라는 책과는 관계없는 듯한 이 이야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내가 새번역성서를 읽으며 성서원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신 신부님께 무한한 존경을 드리는 것처럼, 이 책 길가메쉬 서사시가 영어나 불어 번역본이 아니라 수메르어판본과 악카드어 판본의 점토 문자를 바로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것에서 또다른 감동과 가슴벅참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에 번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말로 옮겨진 신화이야기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감상은 아니겠지.
자꾸만 이 책에 눈길이 가고 이 책을 읽은 느낌을 나누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이유 또한 그것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이 책을 꼭 읽어야 되는가 망설이고 있다면 나는 최초의 신화이야기라는 흥미로움에 덧붙여 고대 수메르어를 우리말로 바로 옮겨놓은 책으로서도 훨씬 가치있는 책이라며 서슴치 않고 추천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