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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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화책이라니... 그래도 조금은 가볍겠지?
여섯개의 시선을 영화관에서 볼 때도 그랬다. 재밌다고 웃으며 볼 수있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깔끔했다. 조금 더 많이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 이런 영화가 제작이 되고 영화관에서 상영이 되고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기는 한가보다, 생각을 했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을 잠시 잊고 있다가 누군가의 리뷰를 읽고서야 생각이 났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구입을 하고 어쩌면 타인의 시선으로 멀찍하니 바라보며 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넘길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책장을 넘겨야 하는 내 손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예전에 내 주위에 약간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산행을 갈 때에도 모두들 못간다고 말렸지만 나는 혼자서 그 언니의 편을 들며 갈 수 있다고, 가는데까지 가자고 했다. 나와 조금 다를 뿐, 앞을 잘 못보고 다리를 조금 절뚝거린다고 해서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이 그 언니를 동정하고 있다고 내 멋대로 생각한 것은 아닌지.. 부끄럽다. 그 사람의 장애가 장애가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는 거이 아니라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라봐주는 것이 바로 동정이 아닌 사랑이라는 것을 이젠 안다.

황당한 사회현실의 풍자에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웃다가 사회적 차별과 모순에 열내며 흥분하며 읽다가 조금씩 조금씩 먹먹해지는 마음을 안고 읽다보니 동정인지 사랑인지 분노인지 허망함인지 모를 눈물이 자꾸만 나오려고 해 더 슬퍼져버렸다. 되돌리고 싶지만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너무 마음아프다. 그래서 더 피하고만 싶었던 현실과 이제는 마주한다. 내가 큰 힘을 낼 수는 없을지라도, 나 하나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나와 또 다른 내가 모여, 십시일반으로 뭉친다면 내가 피하고 싶었던 현실은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 오겠지.

"선물도 하나 없이 빈손으로 돌아온 아빠를 바라보는 어린 딸과, 큰돈을 벌어 오겠다고 떠났지만 결국은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온 병든 남편을 맞는 부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떻게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작지만 소중한 이 선물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까"-김해성 목사

어떻게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할 수있는 일은 타인처럼 모두를 외면하지 않는 일, 마음아프다고 바라보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는 일, 결코 잊지 않는 일. 그래, 잊지 않는 것으로도 자그마한 위로가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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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기행
이영권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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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변방의 시선으로 제주의 구석구석을 만나는 즐거움, 이라 적혀있다.
변방의 시선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석구석을 만나는 즐거움만은 분명하다. 때로는 어린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때로는 희미한 기억속에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또 어떤 것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배워나가며 내 고향을 새로 배운다.

오랜세월동안 스쳐지나갔던 곳들이 새삼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중앙로 거리를 걸으면서, 우리 동네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볼 수 있는 어릴적 놀이터였던 용두암 바당도, 공연을 보러 갈때마다 마주치곤 했던 방사탑이 4.3 해원 방사탑이라는 것도 새롭다.

나는 우연챦게도 4.3 유적지 순례를 다닌 세대에 속했고, 또 우연챦게도 무속기행을 따라 바닷가의 당집도 가봤고, 어느 농가에 모셔진 토속 성상 구경도 다녔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좀 쌩뚱맞은 기행들을 많이 따라다닌 것이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 좀 더 열심히 설명을 듣고 기록해두지 않은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나마 4.3 유적지는 여러번 갔었고 그에 대한 공부도 좀 했었기에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책을 처음 펴들었을 때, 맨 앞머리에 나온 선사시대의 유적을 보면서부터 나는 내가 제주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낯이 익으면서도 낯선 유적들이 나를 무척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더구나 한때는 매일같이 신제주로 가는 길에 지나치는 공항로의 근처에 있는 움집을 보면서 '저게 도대체 뭐야?'라는 생각만 하면서 실제로 그것이 어느날 갑자기 제주 초가집도 아닌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보면서도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아야 했다. 사실 부끄러운 것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제대로 진상규명되지 못한 근현대사의 역사가 가슴아픈 부끄러움을 더해줄뿐이다.
그래서 어렴풋이 알고 있는 얼치기 지식들이 이 책을 읽으며 조금 더 명확해졌고 내가 몰랐던 새로운 역사를 알게 되면서 조금 더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나지만 또 하나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후대에 전해줘야 겠다는 사명감도 일어난다.

지금 제주는 '평화의 섬' 어쩌구 하면서 경제 성장을 위해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그것이 제주도민 모두에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관광산업에 의존하면서 우리의 누이는 캐디가 되어 골프공을 주우러 다녀야 하고 카지노장에서 딜러가 되어야 하고, 우리는 탐라섬의 원주민으로 오돌또기를 부르며 춤을 추는 광대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나는 정말 세계적인 관광지라는 하와이가 부럽지 않다. 아니, 이곳이 하와이처럼 된다는 것이 정말 싫다.
가끔씩 누군가 '환상의 섬, 제주'라는 말을 농담처럼 던지면 나 역시 농담처럼, 하지만 강한 어조로 '내게는 현실의 섬, 내 삶의 터전인 섬'이라 받아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삶의 터전인 이 곳의 역사를 깊이있게 바라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 있다는 것이 고맙고 또한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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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2-09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

chika 2005-02-09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
이 책도 많이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aaljja64 2007-04-1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권,

대학 때 후배인 듯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는데,

우선 하나 사고

병권형 우리 남편과 아이들과 영권이네 보러 제주 보러

올해 제주 갈 수 있길 기도한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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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신화에 열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재밌는 이야기꺼리라는 정도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설화들을 재밌게 엮으면 흥미를 느끼고 재미있게 읽으면 그걸로 만족하는 옛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 내가 '길가메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최초의 신화, 모든 신화의 원형, 또한 성서의 원형이 담겨있다는 길가메쉬 서사시라는 신화이야기는 '길가메쉬'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듯한 내게 확연한 끌림이 있는 이야기책이 되었다.
그렇지않아도 얼마 전 성서의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주석이 달린 성서를 한번 훑어 보았었는데 이 책이 이외로 성서를 더 넓게 볼 수있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기대감 같은 것도 있었고.

처음 접해보는 신화이야기는 언제나 내게 가슴 설레이는 기대와 흥미를 갖게했다. 이 책을 처음 펴들었을 때의 느낌이 그랬다. 전반적인 설명과 적절한 사진들 - 역사적인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는 듯한 사진들은 '신화이야기'나 읽으며 재미를 느껴보려는 나의 가벼운 마음과는 달리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 알수없는 끌림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사전정보없이 처음으로 '최초의 신화'라는 길가메쉬 이야기를 읽는데다가 같은 내용, 혹은 비슷한 내용의 반복은 초반부를 읽어나가는 나를 당혹하게 하였다. '어? 이건 내가 방금 전 읽은 내용아닌가?'
'뭐야, 이건 앞말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일뿐이쟎아. 도대체 뭐야?' 하는 생각이 들즈음에야 겨우 성서를 읽을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저자에 따라, 전승에 따라 - 그러니까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같은 전승도 여러가지로 해석이 되고 표현이 달라지고 중심주제가 달라지는 것처럼 이 길가메쉬 서사시 역시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는거겠지..라는 멋대로의 생각을 하며 읽어나갈 생각이 들었다. 물론 멋대로의 생각이라 했지만, 이 책은 '수메르어 판본'과 '악카드어 판본'으로 구성된 점토서판 원문을 음역하여 소개하는 것이라 했으니 그닥 틀린말은 아니겠지? 나는 그냥 그렇게 믿으며 다시 책읽기에 전념하였다. 아니, 전념하고 싶지 않아도 술술 읽혀 나가 중간에 멈출수가 없었다.

신화연구라는 측면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그런 연구분야는 모르겠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서를 읽을 때 성서에 나오는 전승이  그 주변 일대의 여러 전승설화의 한 부분을 도입해왔다는 것을 들었고 그런 관점에서 더 흥미를 가질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길가메쉬 신화 이야기는 충분히 엄청난 연구가치가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런 느낌이 드는데 성서학자에게는, 신화와 인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겠지.

이 책을 절반쯤 읽고 있을 때, 우연히 찾아 온 어느 신부님이 내 책상에 놓인 책의 표지를 슬쩍 보고는 '아, 길가메쉬 서사시가 이렇게 나왔군요'라고 말을 했다. 내가 책을 다 읽은 상태였다면 신부님을 붙잡고 길가메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을텐데, 그땐 내가 책을 먼저 읽고 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 모른척했다. 그만큼 아무런 편견, 선입견 없이 이 최초의 신화이야기를 읽고 싶은 열망이 강했었다.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이야기의 반복따위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길가메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움도 알고 있으며, 성서의 흐름과 비슷하게 인간이 창조되고 죄를 범하고 멸망하는 과정이 있으며 성서내용의 숫자를 떠올리게 하는 무수한 숫자가 나온다. 어쩌면 얼뜨기 천주교 신자의 재미있는 설화이야기 읽기일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책을 다 읽고 나서 신부님과 신화전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나중에 한번 꼭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에서 읽은 이야기 이상으로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지금은 주위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없기때문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그 느낌을 정리해보려고 가만히 되새김질을 해본다. 아니, 책을 한번 더 읽어야 하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칠즈음 '창세기'가 떠올랐다.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서 펴낸 새번역성서 창세기에는 주석이 달려있기 때문에 뭔가 연관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책을 펴들어봤다.

"성서의 저자들은 세상과 인류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대근동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 그리고 페니키아 -가나안 지방의 전통들을 망설임없이 직간접적으로 그대로 쓰고 있다...... 고고학의 발달은 동시에 창세기 앞부분의 여러 장들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수정한 저자들이 기계적인 모방자들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이들은 고대 근동의 이야기들을 그냥 가져오지 않고, 자기 민족의 특수한 전통이라는 틀 안에서 그 자료들을 다시 작업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독창성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근동의 설화들을 이용하여 자기네 신앙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 수가 있었다.
......고대 근동의 수많은 문학적 증인들 중에서 여기에서는, '에누마 엘리쉬'라 불리는, 마르둑 신이 이룬 창조에 대한 바빌론의 설화, 바빌론판 홍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웅 길가메쉬의 모험 이야기,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것으로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성읍 주민들이 자기네 신들을 위해서 지은 큰 탑들 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p28, '창세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아, 나는 이미 예전에 '길가메쉬'라는 이름을 들어봤었구나. 그런데 그 영웅을 잊고 있었다니...
최초의 신화를 읽는 가슴 설레임은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최초의 신화이야기라는 길가메쉬의 이야기는 그렇게 흥미를 끌며 읽는 것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득 새로 번역된 창세기를 펴드니 내가 더 가슴벅차게 읽은 또 하나의 이유가 얼핏 스치는 것 같다.
새번역 성서를 작업한 신부님은 제주출신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언어학박사 신부님이셨다. 한국인 최초로 성서학박사가 되셨고, 영어 번역본이 아닌 원문 성서 번역에 십여년을 전념하신 신부님은 번역에 몰두하다 모든 작업을 다 마치시고 나서야 입원을 하셨고 결국 위암으로 2003년 3월에 돌아가셨다.
길가메쉬 서사시라는 책과는 관계없는 듯한 이 이야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내가 새번역성서를 읽으며 성서원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신 신부님께 무한한 존경을 드리는 것처럼, 이 책 길가메쉬 서사시가 영어나 불어 번역본이 아니라 수메르어판본과 악카드어 판본의 점토 문자를 바로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것에서 또다른 감동과 가슴벅참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에 번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말로 옮겨진 신화이야기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감상은 아니겠지.
자꾸만 이 책에 눈길이 가고 이 책을 읽은 느낌을 나누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이유 또한 그것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이 책을 꼭 읽어야 되는가 망설이고 있다면 나는 최초의 신화이야기라는 흥미로움에 덧붙여 고대 수메르어를 우리말로 바로 옮겨놓은 책으로서도 훨씬 가치있는 책이라며 서슴치 않고 추천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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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2-08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다들 너무나 추천해서 이제 읽으려고 하는 제 맘이 다 떨립니다~

chika 2005-02-0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리뷰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어쩌면 자꾸 주변머리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말로 옮긴 저자에 대한 칭송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새번역성서의 작업을 끝내신 신부님은 내 고등학교 시절 우리 성당 보좌신부님으로 계셨었고 그 때 내가 힘들때 좋은 말씀을 해주신 기억은 지금도 여전하다.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분이셨고 암에 걸리셨을 때도 결국은 성서번역의 모든 작업을 끝내고 입원을 하실만큼 열정적인분이셨다. 그 방대한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20년이 채 안걸렸다는 것이 그걸 입증한다.
저자 김산해님이 이십여년간을 수메르와 관련된 모든 것과 함께 하였다는 것이 그래서 더 마음에 와 닿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숙제같던 리뷰쓰기도 - 조금은 사변적인 얘기로 흘렀지만 - 끝냈으니 홈페이지를 방문해봐야겠다..!

chika 2005-02-08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댓글을 쓰는 사이에 벌써 읽으셨군요... 리뷰를 쓰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요. ㅠ.ㅠ (그치만 추천은.. 정말 마음 떨리게 해요~ ^^)
빨리 읽으셔서 멋진 리뷰 써주세요. ^^

stella.K 2005-02-0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다 읽으셨군요. 저도 읽고 있기는한데, 너무 쉽게 읽혀서 탈이라고나 할까? 그다지 재미는 못느끼겠더라구요. 전후 문맥을 이해하고 이 책을 읽는 중요성 같은 게팍팍 와닿으면 좀 좋을텐데 아직은 확 사로잡는 뭔가를 발견하지 못했어요. 너무 도판이 많아 끊기는 느낌도 읽고...그래도 읽어야지요. 읽다보면...!

chika 2005-02-09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쉽게 읽혀서 저한테는 얼마나 다행이었는데요! ^^
스텔라님도 빨랑 멋진 리뷰 써주셔야지요~

비로그인 2005-02-11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hika님 안녕하세요. 사실 저는 공짜로 책을 얻은 쪽은 아니고 직접 사서 읽었는데요. chika님의 리뷰를 읽어보니까 이 책에 대한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꼈답니다. 저도 저자 김산해 선생님의 홈피에 가봤습니다. 읽을거리가 있긴 한데요. 방명록을 남기는 페이지는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산해의 횡설수설이라는 곳을 열어보면 그 분의 성향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멋진 리뷰였습니다. 에구 나도 다시 쓸 걸......
 
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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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건 싫건 어린 시절 각인되어버린 그 무엇을 짊어진채, 사람들은 수많은 괴로움과 얼마되지 않는 잗다란 기쁨으로 수놓인, 인생이라는 긴긴 시간을 인내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인생을 인내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은 어린 시절 몸과 마음에 깊숙이 아로새겨진 그 무엇이다.- 저자후기에서


어딘지 모르게 어린 시절의 책읽기에 대한 추억과 감성이 닮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책을 읽었다.

유난히 운동을 싫어하고 - 못해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 내 부모에 대한 환상, 내 친부모는 다른 누구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하늘을 나는 교실을 읽으며 ‘울어서는 안된다’는 소년의 결심에서 오히려 책을 읽던 나는 눈물을 뚝뚝흘렸었는지.....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의 독서편력과 성장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비슷한 느낌이면서도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성장기, 어린 시절의 그 느낌들.

이것이 책을 읽으며 저자와 온전히 동화될 수는 없지만 깊은 공감을 가지며 책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은 그리 기억할 만한 것이 없다. 어린이날이 어린이를 위한 날이라는 것은 다 커서야 알았고, 오전 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받던 세대인 나는 학년이 올라가 오후에 학교에 가야하는 날은 죙일 라디오 앞에서 시간을 들어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가끔 책이나 혼자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시간을 놓치면 학교엘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가슴졸이며 라디오 시보만을 기다렸던 그 오후의 기억만 뚜렷한.

그렇게 가난한 맞벌이 집안의 막내로 자란 쓸쓸한 기억이 내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눈과 머리는 글을 따라 가고 있었고 마음은 거꾸로 내 어린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저자의 말처럼 어린시절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그 무엇인가가 꼼지락거리며 기어나왔다. 누구나 다 어린시절의 특별한 추억거리가 있겠지만 너무도 다른듯한 환경이면서도 어쩌면 이리 비슷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에서는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지으며 나의 추억을 되살려보게 되었다.

내게는 각기 다른 성향의 오빠들이 있었고, 책을 좋아하는 오빠는 나의 책읽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다른 오빠는 온갖 잡기, 바둑이나 장기 심지어 카드놀이까지 꼼꼼히 가르쳐주면서 나를 상대로 자신의 실력을 연마하였었다. 한참 태권도를 배울 때는 내게 발차기 연습까지 하였던가....

그런 일상에서 커가면서 읽었던 책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고 중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온전히 나를 위한 책을 언니에게 선물 받은 것도 생각난다. 직장을 다닌 언니의 첫 월급으로 내가 사달라고 했던 책은 읽을때마다 그 느낌이 새로운 어린왕자였는데...

그때 언니가 사 준 책은 영어공부도 하라는 뜻으로 영어판본과 번역본이 같이 있는 영한문고판 같은 책이었다. 누렇게 뜬 책이지만 지금도 갖고 있으니 벌써 이십여년쯤 전 책이 되어버렸나?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양장본의 어린왕자책도 있고 들고다니며 읽기 쉽게 나온 자그마한 어린왕자 책도 갖고 있지만 그 누렇게 뜬 책이 더 정감어린 이유는 ‘언니가 사 준 책’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겠지?


이 책에는 내가 읽은 몇권의 책 이야기를 빼놓으면 전혀 알 수 없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생뚱맞게 읽게되는 것은 아니다. 책 이야기를 하며 풀어놓는 저자의 이야기에는 뭔가 알 수 없는 공감과 연대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내 마음과 통했던 것일까? 새로운 부임지로 떠나시는 수녀님에게 망설이다 이 책을 선물했더니 훑어보시고는 ‘감동적일 것 같다’는 말씀을 하고 가셨다.

그래, 어쩌면 나도 그랬는지 모른다. 이 책의 부제는 ‘서경식의 독서편력과 영혼의 성장기’인 것처럼 그의 독서편력과 영혼의 성장을 따라가며 나 자신을 투영시켜 보고 감동을 느끼게 된 것인지도. 

아니, 이런저런 이유를 모두 버리고 한 영혼이 지나 온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고 감동받을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독서와는 관계없이, 거창하게 식민지의 역사를 지나 재일교포로 살아야 했던 소외된 그들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과도 관계없이 그저 내가 지나온 어린 시절을 되새기며 나의 인생을 지탱하게 하는 그 힘의 원천을 떠올리게 된다면. 물론 내게는 단순히 어린시절의 추억에 잠겨 떠올리는 감상적인 이야깃거리가 아닌 식민지배의 역사속에 조국을 떠나 돌아오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이들과 분단상황에서 일본에서 지낸 한 가족의 역사가 더 깊이 새겨져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도 이따금, 위기를 모면하고 용케 책장과 서랍속에 살아남은 낡은 책들을 펴들 때가 있다. 낙서와 손때로 지저분해진 책을 한 장 한 장 들추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기뻐하고 슬퍼하던 감정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어수선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성장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자부심과 열등감, 희망과 실의가 격렬하게 교차하던 그 나날들이.(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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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교실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25
에리히 캐스트너 지음, 문성원 옮김 / 시공주니어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날 읽었던 책만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는 나를 보면서 이것저것 책을 권해준 것은 나와 여덟살 차이나는 오빠였고 그 첫번째 책이 바로 하늘을 나는 교실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재미없을 것처럼 이어지는 저자의 서문 때문에 그 책을 슬며시 놔버렸었다.

그리고 언제 읽게 되었을까?

떠오르는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어느날엔가 혼자 집을 지키며 있을 때 하늘을 나는 교실을 집어들었고 그 책을 읽으며 너무 슬프게 울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아마 눈 쌓인 운동장에서 마르틴과 유스투스 선생님이 나눴던 대화를 읽으면서였겠지.


어른이 되어 또 나는 한밤중에 이불 뒤집어 쓰고 울면서 책을 읽었다. 꿈많은 소년들의 활기찬 모습과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용감히 나서는 모습, 친구들과의 풋풋한 우정, 그리고 선생님. 나도 어릴적 꿈은 선생님이었다. 유스투스 선생님처럼 정의롭고 마음 따뜻한,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설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내게 와서 편히 쉴 수 있는 둥지같은 어른이라도 되고 싶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다시 또 지금의 내 모습이 슬퍼진다.


이제는, 다시 또 이 책을 읽게 될 때에는 이불 뒤집어 쓰고 슬피 우는 것으로만 끝나지 말고, 글귀 하나하나에 찡한 감동을 받는 것으로만 끝나지 말고 나도 조금은 유스투스 선생님과 비슷한 모습을 지닌 어른이 되어 있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래를 이끌어 갈 우리의 아이들이 소중하다는 것은 ‘미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라나고 있는 지금 현재가 소중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현재 꿈과 희망과 용기를 갖고 힘껏 날아갈 수 있게 티끌만큼의 힘이라도 되어주는 어른이 된다면 나는 충분히 어른으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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