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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숙영 옮김 / 르네상스 / 2004년 6월
평점 :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꾸로 된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는지 벌써 까먹어버린 느낌이다. 내가 거꾸로 된 세상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80년대말 한참 '거꾸로'라는 말이 유행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시절, 이 세상은 거꾸로 보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어서 그랬었겠지. 아니, 지금은 거꾸로 서지 않아도 제대로 보이나? 도대체가 술취한 놈마냥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결코 맑아지질 않는다. 어쩌면 좋겠냐고!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세상에서 매장되지 않는 사회성을 가진 인간으로 지내기 위해 바쁘게 정신없이 이러저러한 일에 신경쓰는 와중에 조금씩 갉아먹듯 이 책을 읽었다. 한참을 읽다가 문득, 예전같으면 거꾸로 서야 제대로 보였던 세상이 왜 지금은 내가 바로 서 있다고 느끼는대도 제대로 보이지? 라는 생각을 했다. 똑바로 서서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 이런데 왜 나는 비틀거리거나 어지럼증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는걸까?
그 생각이 든 순간 이 책을 재미있게만 읽을수가 없었다. 세상만 거꾸로 된 줄 알았는데 나 역시 거꾸로 된것만 같았다. 슬프구나...
통계수치에 위장되어버린 세상, 관점에 파묻혀 포장된 세상, 말로 인해 달라져 버린 세상....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그렇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힘 센 녀석이 자기 맘대로 지구의 한 쪽에 막대를 푹 꽂고 그 막대선을 중심으로 지구는 돈다, 라고 말하는 어지러운 세상인 것 같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과학은 이미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의 적용조차 해당되지 않는 가진자들의 변명을 위한 정당성의 시녀일 뿐이다.
힘 센 녀석이 낮에 살고 있으면 세상은 낮이 되어버리는 것이고, 크리스마스는 예수와 상관없이 언제나 하얀 눈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어야 멋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마태우스님 리뷰에 쓰인 것처럼 우리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이 책에 딱 한번 언급된다. 사실 구체적으로 대한민국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나는 갈레아노라는 외계인이 대한민국에 위장전입하여 글을 썼다고 생각할 뻔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에게도 빚 하나 지지 않은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한 생활을 보여주는 훌륭한 귀감이었다. 오늘날 그런 이는 외계인이다(p263)"라는 말에서 지구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아주 잘 바라보고 있는 갈레아노, 그가 바로 외계인이다! 라고 생각할뻔했으니 말이다!
농담이냐고? 물론 너무 심각해질까봐 웃어보자고 하는 말이다.
부모가 자식을 고발하고, 아내가 남편을 고발해야 하고, 형제자매가 서로를 감시해야 하며, 한핏줄을 적으로 몰아세워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엄연히 국가보안법이라는 '법'으로 명시되어 있는 세상에서 살려면 외계인이라도 믿어야지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