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눈썹황금새와 아카시아 나무
삐리 보로고로 삐리 뽀로 삐리- 삐리삐이-.
흰눈썹황금새의 노래가 숲으로 퍼져나가자 어둡던 숲이 환히 밝아왔습니다. 숲속의 모든 나무들도 지그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흰눈썹황금새야, 넌 정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구나. 내 품에 둥지를 틀지 않겠니?”흰눈썹황금새에 반한 아카시아 나무가 수줍게 말했습니다.
“아뇨. 전 아름다운 나무를 찾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의 가시는 너무 날카롭군요. 둥지를 틀다가 찔릴까 두려워요.”
“이 가시는 남을 찌르려는 게 아니라 무서운 적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방패인걸. 난 너를 아주 포근히 품에 품어줄 수 있어.”
“오, 죄송해요. 전 차라리 가시가 없는 약한 나무가 좋겠는걸요.”
흰눈썹황금새의 말에 아카시아 나무는 눈물이 날 정도로 섭섭했지만 생전 처음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허겁지겁 자라기만 바빠 볼품없이 조급한 이파리, 꽃 한 송이 필 것 같지 않은 거친 줄기와 가냘픈 산새 한 마리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촘촘히 박힌 의심 많은 가시 가지들…….
“안녕, 겨울이 오기 전에 전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가 봐야겠어요.”
아카시아나무는 흰눈썹황금새가 떠나버리자 밤새도록 우헝우헝 울었습니다. 지나가던 돌개바람이 깜짝 놀라 물었을 때도 떠나버린 새 이야기를 들려주며 종일 울먹거렸습니다.
“아카시아야, 아직 늦지 않았어. 흰눈썹황금새가 정말 귀한 마음을 가졌다면 눈앞의 겉모습만 따지진 않을 거야. 보이는 것은 잠깐이란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만이 영원할 뿐이야. 이제부터 네가 아름다운 나무가 되면 되잖니? 울지만 말고 향기로운 나무가 되어보렴.”
그때부터 아카시아는 아름다운 나무가 되기 위해 온갖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마구 뻗고 싶은 뿌릴 애써 움츠려 다른 나무들이 더 많은 뿌리를 내리도록 자릴 비켜 주고, 날카로운 가시가 불쑥 불쑥 치밀고 올라올 때마다 흰눈썹황금새를 생각하며 참고 눌렀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아카시아의 몸은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러면서 계절이 바뀌고 아카시아는 조금씩 새로운 모습이 되어갔습니다. 가을에는 금빛 이파를 털어 약한 나무를 키우는 거름이 되기도 하고, 가난한 나무꾼에게 제 몸을 삭힌 가지를 흘려주며, 긴 겨울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여쁜 새가 찾아와 둥지를 청해도 아카시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외로움과 그리움에 시름시름 앓게 되었습니다.
아카시아가 가슴을 앓는 동안 해님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나무들을 일일이 어루만져 꽃눈을 틔워 주었습니다. 오월의 꽃들이 다투어 꽃불을 터뜨리기 시작하던 어느 날, 며칠 동안 신열로 앓던 아카시아의 가지에도 봉긋봉긋 열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저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는 아카시아의 눈물이 핀 것입니다. 꽃이 핀 아카시아 나무! 그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달콤한 꿀 냄새에 몰려든 벌들은 달콤한 꿀에 모두 취했고 아카시아는 아낌없이 모두에게 꿀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한편 흰눈썹황금새는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 강남 나라로 날아갔고, 넓은 땅과 온갖 나무들이 있는 숲속에서 겨울을 보내려고 찾아온 많은 철새들과 즐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저렇게 많은 나무들 중에 내가 찾는 아름다운 나무가 있을 거야.’
지식, 행복, 허영의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숲으로 날아간 흰눈썹황금새는 우선 가장 빛나는 잎새를 가진 ‘지식의 나무’를 찾아갔습니다.
“안녕하세요. 지식의 나무님. 당신은 무엇이든 알고 계신다지요?”
“알다마다! 난 이 숲속의 박사니까 무엇이든 물어 봐.”
“전 아름다운 나무를 찾고 있어요. 모든 것을 견디고, 묵묵히 기다릴 줄 알며, 자신을 삭혀 인내할 줄 알고 아픔으로 여문 열매를 맺는 나무를 찾는답니다. 그런 나무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글쎄, 그런 나무가 세상에 있기나 하니?”
“그럼 당신은 무얼 잘 알죠?” “난 땅의 것을 다 알고 있단다.”
“그렇게 안 지식으로 무얼 하지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나요? 전 자신을 피곤하게 하는 지식은 필요가 없답니다.”
흰눈썹황금새는 얼른 ‘지식의 나무’를 떠났습니다. 산을 넘고 숲을 지나다니느라 지친 흰눈썹황금새는 이번에는 풍요로운 과수원을 지나가다 먹음직스러운 과일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나무를 만났습니다.
“피곤한 새야, 내 과일을 먹고 힘이 생기거든 가렴.”흰눈썹황금새는‘풍요의 나무’가 베푸는 인정에 끌려 잠시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자, 이걸 먹어. 내 열매는 한 입만 먹어도 구름을 탄 듯 황홀해질 거야.”“정말 그렇군요. 이 열매는 아픔으로 익힌 열매인가요?”
“아픔이라니? 아픔이 어떤 거니? 왜 아픔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니?”
“쉽게 얻은 열매로는 우리 영혼을 살찌울 수 없으니까요.”
“난 기름진 거름에서 물과 양분을 빨아올려 주는 뿌리 덕분에 언제나 풍성한 과일을 맺는단다. 무엇 때문에 쉬운 것을 두고 땀을 흘리겠니?”
“그렇게 쉽게 열린 과일은 곧 썩는답니다.”
“이제 보니 참 까다로운 새로구나. 아무도 너같이 말하는 새는 없어. 왜 힘들게 살려고 하니? 그러지 말고 너도 여기서 즐겁게 살자꾸나.”
“아, 아니에요. 전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가야 해요. 아함-, 그런데 왜 이렇게 졸음이 올까요? 여전히 목도 마르구요…….”
“내 과일을 먹었기 때문일 거야. 아름다운 새야, 여기 누우렴. 너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그리고 내 풍성한 양식을 내게 줄께.”
“제가 찾는 건 먹을수록 목이 마르는 양식이 아니에요. 전 아름다운 나무를 찾는답니다.”
흰눈썹황금새는 자꾸 가물거리는 정신을 추슬러 풍요의 숲을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아름다운 나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그 후로도 황금새는 아름다운 나무를 찾지 못했고, 슬퍼할 줄 모르는 허영의 나무를 만나 그만 꽃 속에 숨어있던 가시에 찔려 큰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어린 시절 친구였던 슴새를 만난 황금새는 이제 뿌리굴 속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모습에 안타까운 슴새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흰눈썹황금새야, 넌 왜 꼭 아름다운 나무여야 하니? 도대체 그 아름다운 나무란 게 어떻게 생긴 나무니?”
“나무는 겉모습만 보아선 몰라. 보이지 않는 모습이 진짜 모습인걸.”
흰눈썹황금새는 슴세에게 아름다운 나무의 모습을 그려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슴새는 한숨을 휴- 내쉬며 말했습니다.
“흰눈썹황금새야, 그런 나무는 네가 욕심을 낸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릴 때에야 얻어진단다. 네가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이
세상 어디를 뒤져보아도 그런 나무는 찾을 수 없을 거야.”
흰눈썹황금새는 슴새가 하는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네 말을 듣고 보니 그 동안 내가 그렇게 힘들게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다닌 건 그 나무를 찾아 내 것으로만 소유하며 살려는 욕심 때문이었나 봐. 나는 조금도 변하려고 하지 않고, 아름다운 나무만 찾으러 다닌 욕심쟁이였어. 그래서 누구에게나 정을 주는 게 인색했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까다롭게 거절하고 달아나곤 했었지.”
흰눈썹황금새는 동백나무 뿌리굴 속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돌아보며 들떴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습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어느 새 나이 많은 새들은 서둘러 고향 숲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습니다.
흰눈썹황금새는 고향으로 간다는 생각만 해도 힘이 솟구쳤습니다. 먼길을 날아 고향에 다다르게 된 새들에게 고향의 섬들도, 언덕빼기에 사는 망초꽃도, 세잎 소나무도 ‘어서 와, 어서 와!’ 하며 반갑게 맞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바람이 숲 속의 나무들을 흔들고 지나갔습니다. 바람은 말할 수 없이 달콤한 향기를 몰고 왔습니다.
“아, 이 향내 어디서 풍겨오는 꽃향기일까?”
두리번거리며 둘러보던 흰눈썹황금새는 잡목 숲이 날아갈 듯 환한 꽃등을 밝혀들고 아이보리 빛 주렴을 일렁이며 지긋이 생각에 잠겨 있는 한 그루의 아름다운 나무를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자신이 인색하게 고개를 흔들고 떠났던 아카시아 나무였습니다. 아! 눈물의 꽃! 이렇게도 눈부시게 순결한 꽃을 피우다니, 바로 내가 찾아다니던 아름다운 나무다!
“아카시아님, 당신의 가지에서 쉬어도 되나요?”
“어서와서 쉬렴. 나는 너를 그리워하느라고 에인 가슴이 삭아 생겨난 너의 보금자리야.”
“난 당신을 버렸어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걸요.”
“아니, 넌 나에게 아픔을 주고 눈물을 주긴 했지만 기다림과 사랑과 희생을 가르쳐 주었어. 섭섭했지만 널 원망해 본 적이 없어. 아름다운 나무가 되기 위해 그 모든 것이 내겐 약이 되었는걸. 우린 진정한 친구가 되려고 아프게 힘써왔던 거야. 흰눈썹황금새야, 정말 잘 돌아왔다.”
박숙희, <새를 기다리는 나무 중> ‘아카시아나무와 흰눈썹황금새의 이야기’ 요약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