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기다렸는데 도리어 어둠이 오고
환하기를 고대하였는데 앞길은 깜깜하기만 하다.
.....
공평을 고대하나 그것은 사라져 가고
구원을 기다리나 그것은 멀어져만 간다 (이사야 59,9.11)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무기력은 하느님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믿음을 던져버리게 하는 하나의 시험이 된다. 하느님이 이 모든 일들을 어떻게 그냥 두실 수가 있는가?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지 않은가!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지 않고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견디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하나의 도전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바라보고 이해할 때 비로소 이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곤궁들을 볼 경우, 보스니아와 르완다에서 진행된 엄청난 파괴의 행위들을 생각하면, 단순히 기도하는 것으로는 나의 무력감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살인자가 살해한 사람을 밟고 승리를 즐길 수는 없다고 생각하거나, 이 모든 것들과 상관없이 이 세상은 전쟁을 일삼는 미치사람들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자신의 무기력 앞에서 좌절하지 않으려면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참한 현상들에 대해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여 눈을 감아버리고, 전쟁이 일어난 원인을 그 지역 사람들 탓으로 돌려버리고 말면, 쉽고 마음이 가벼울 수 있다. 하느님의 전능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곤궁에 대해 눈을 감게 하는 아편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나를 부추긴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te labora), 관상과 투쟁 (Kontemplation und Kampf), 체념과 저항 (Ergebung und Widerstand, Bonhoeffer), 신비와 정치 (Mystik und Politik)는 서로 함께 있다. 나는 기도하기 위해 단순히 물러나 있기만 할 수 없다. 기도는 하느님이 현재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나를 자주 자극한다. 하느님의 전능에 대한 믿음은 한갓 싸구려 위로에 머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분노와 우리의 무기력 한가운데에서 하나의 작은 희망의 불씨를 붙여서 현명한 행동과 협상을 하도록 우리를 부추길 수 있다.

- 참 소중한 나, 안셀름 그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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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하지 않은 날이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생활이 나날이 엉망이 되어간 건가?
가끔 기도를 해야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쉽게 무시하고 잊어버렸었는데....
이제 다시,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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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4-08-19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느님, 저를 사랑으로 내시고 저에게 영혼육신을 주시어 다만 주를 위하고 사람을 도우라 하시었나이다. 저는 비록 죄가 많사오나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바쳐 찬미와 감사의 제물로 드리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주시옵소서. 오늘도 제 생각과 말과 행위가 당신께드리는 찬미와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함께하여주시기를..아멘!!

ㅎㅎ 실은... 아침기도는 했답니다!
근데 그리스도인이시군요,, 반가습니다. ^^
 
참 소중한 나
안셀름 그륀 지음, 전헌호 옮김 / 성바오로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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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품위, 그리고 한 인격체로서의 유일성을 깨닫는 것이다. 바로 나자신, 나의 참 모습, 그리고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본래의 나'에 대해 눈뜨는 것이다. 나의 가치를 깨닫고 나면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나 자신이 선한 존재란 사실을 믿을 수 있으며, 나 자신 있는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 된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 나의 약한 부분조차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따옴]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말뜻이 '우선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만들어 온 환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생각해온 긴긴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겸손과, 그리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인간성을 받아들일 용기와 관계가 있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사실은 내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 강점들뿐 아니라 약점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애쓴다. 보잘것없고 형편없이 나쁘고 추악하게 느껴진다 해도 그러한 내 모습을 인정하고, 삶을 긍정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나의 어두움과 추악함과 욕망, 억압된 감정들에 대해 좀더 솔직해질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나를 받아들이기 위한 첫 단계임을 깨닫는것이다.

 

가끔씩 느껴지는 무기력함, 세상에 대해, 타인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느껴지는 그 무기력함으로 한없이 가라앉을 때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내가 갖는 가치에 대해 몇번씩 되내어봐도 나 자신의 가치를 느끼기 힘들때가 있다.
그럴 땐 나 자신을 나 혼자만의 방에 가둬놓고 나의 그림자조차 보지 않고 시체처럼 지낸다. 그러다 또 아무런 생각없이 변함없는 일상으로 되돌아가지만.

이처럼 내 안의 깊은 곳에서 근원적으로 나의 가치를 느끼게 하기 힘들 때,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글은 나를 조금씩 끌어올려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래서 이분의 글을 좋아한다. 자신의 체험과 영성으로 쓰여진 글이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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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란으로부터 잠시,
그대의 눈과 귀를 돌리라.
그대의 마음이 스스로 정화되기 전엔,
그대의 힘으로도 이 시대의 소란은
치유될 수 없는 것.

그대의 소명은 이 세상에서
영원을 지키며 고대하고 응시하는 것.
그대는 이미 이 세상사에
묶여 있고 또 풀려나 있으리.

그대를 부르는 때가 오리니
그대, 마음을 준비하고,
꺼져가는 불길 속으로
마지막 불꽃을 위하여
그대를 던지리라.

- 그들이 즐겨부르던 노래 중...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게 숄, 박종서 옮김, 청사, 87년중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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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도 살아 남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강하게 살아 남아라. 한 치의 타협도 없이-. /한스 숄

우리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한 것일 뿐이다. 다만 그들은 감히 발설하지 못할 뿐이다./ 죠피 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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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동굴 속에서
도적이 나온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그는 돈지갑을 쫓는다.
그리고 그는 더 중요한 것을 보았다.
그는, 헛된 싸움을
혼미한 지식을
찢어진 깃발을
겁에 질린 사람들을 보았다.

가는 곳마다, 그는 보았다.
이 보잘것 없는 시대의 공허감을,
그리하여 그는 부끄럼 없이 활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예언자가 된다.
쓰레기 더미 위로 그는
그의 사악한 발자욱을 올려 놓는다.
그리고 이런 기막힌 세상에 대하여
안녕을 속삭인다.

마치 먹구름처럼
비열함으로 뒤덮인
민중들 앞에 선 위선자,
곧 그의 권력은 강대하게 솟아오른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기회를 엿보면서
그의 선거에 제공한
숫자놀음의 도움으로.

그들은 그의 공약을 나눠 갖는다.
언젠가 신의 사자가
다섯 개의 빵을 나눠 주었듯이.
공약은 점점 더 주위를 더럽힌다!
처음엔 개들만 거짓말했으나
지금은 모두가 거짓으로 말한다.
그리고 마치 폭풍이 몰아치듯
지금 그들의 재능은 한껏 부푼다.

싹은 높이 높이 솟아 오르고
땅은 변했다.
민중은 치욕 속에 살며
비열함을 비웃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깨달았다.
최초에 무엇이 꾸며졌던가를.
선은 사라지고
악만 위세를 떨친다!

언젠가 이 위기가
빙벽이 녹아내리듯 천천히 사라지면,
사람들은 마치 어두운 죽음에 대해 얘기하듯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황야 위에
허수아비를 세운다.
슬픔 속에서 기쁨을 불태우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오는 새벽의 빛을 위하여.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시는 아주 훌륭하구나"
크리스토프가 놀란 듯이 말했다.
"아주 굉장하구나. 한스, 넌 그 시를 총통에게 바쳐야겠다. 그것은 국민적인 통찰자에게 전해야 한다"
알렉스는 시의 이중적 의미에 매료된 듯이 외쳤다.
그 시는 누구의 것일까?
"이 시는 이백 년 전에 고트프리트 켈러에 의해 씌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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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미네르바의 올빼미 4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 정종훈 그림 / 푸른나무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엄밀히 따져 제가 읽은 책은 알라딘에 있는 이 책이 아니라 사진에 찍혀 있는 바로 이 책입니다.
수십년(?)이 지나도 책의 제목은 바뀌지 않았군요.
제 기억에 오빠에게 처음 받아 본 선물이 이 책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기억에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당시에 이 책을 읽은 또래 친구들은 없었지요. 저만 혼자 이상한 책을 읽는 것 같아 이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그들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쓰는 리뷰가 리뷰같지 않지만... 그래도 그냥 씁니다. 많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어서입니다.

어제, 오늘 이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매우 얄팍한 책이지만 그들의 삶의 무게에 여전히 내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지금도 세상의 어딘가에서 이들처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그 누군가가 폭압에, 독재에, 전쟁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많은이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외면하며 살아왔구나...생각하니 내 삶이 많이 부끄러워져버립니다. 정말 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

이 책의 후기를 보니 47년에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수업교재로 만들어진 책이라고 합니다. 45년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 독재와 나치의 만행을 그들은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지금 일본에서 행해지는 신사참배의 미친짓거리들과 손으로 태양을 막겠다고 우기는 교과서 왜곡 같은 어이없는 짓들이 떠오릅니다.
삶을 내던질 용기가 내게는 없지만, 잊지않기 위해 외면하지 않기 위해 방관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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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2004-08-18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느껴집니다. 꼭 읽도록 하겠습니다.

chika 2004-08-1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2005-02-01 0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