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크레타섬에 있는 왕의 피로에 갇힌,
반은 사람이고 반은 황소인 괴수)를 죽이고 영광에 젖어 집으로 함해했습니다.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를 외딴 해변에 버릴 기회를 찾았지요. 그리고는 돛을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바꾸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테세우스의 아버지는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테세우스가 아버지한테 자기가 이기면 흰 돛을 달겠다고 했거든요. 이 모든 것으로 보아 눈에 보이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테세우스의 아버지는 상심해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으니까요. 단지 아들이 천을 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아무튼 테세우스의 배는, 노가 서른 개나 있고 어쩌고 한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배었다는데, 몇 년 동안 아테네 항구에 머물렀습니다. 아테네인들은 빛나는 사랑과 영예를 담아 그 배를 테세우스의 업적에 대한 증거로 보존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널빤지 일부가 썩고 몇몇 나사에는 녹이 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인들은 그것들을 빼고 새 널빤지와 나사를 끼워 넣었지요. 몇 년 뒤에는 널빤지 몇 개를 더 갈고 돛대도 갈았어요. 나중에는 로프와 돛도 갈았고요. 끔찍하게 곰팡이가 늘었거든요. 몇 년에 걸쳐 조금씩 교체하다 보니 결국 원래의 부품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르죠.
하지만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그 배가 정말로 이전과 같은 배인지 논쟁하기 시작했어요. 만일 같은 배라면 모든 게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같은 배가 아니라면 그게 더 이상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게 된 시점은 정확히 언제냐는 거지요. 첫 번째 널빤지가 교체됐을 때? 100번째 널빤지가 교체됐을 때? 혹시 마지막 널빤지가 교체됐을 때는 아닐까요? 무언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는 뭡니까?


당신도 알겠지만,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의 배만이 아니에요. 모두가 바뀌지요. 단지 속도가 느릴 뿐입니다. 물건도, 장소도, 사람도, 성격이라는 구조적 판들이 행동이라는 대륙덩어리 아래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모두가 분명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고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세상은 변화하고 반응하며 인과의 법칙에 응답하고 있어요. 배에서 태어나 한 번도 그 배를 떠나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우리는 우리가 고정된 채로 남아 있다고 확신하지요. 오히려 다른 모든 것이 우리 주변을 항해하며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어요.
바로 우리가 테세우스의 배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널빤지로 오래된 널빤지를 교체합니다. 사소한 경험을 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에 노출된 결과 지속적으로 변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는 건가요?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는 없는 것처럼, 같은 사람을 두 번 만나는 일은 불가능할까요?
당신은 당신이 정말로 어제의 벤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 전의 그 벤과 말입니다.
어쨌건, 최소한 당신 안의 널빤지 하나는 그때 이후로 교체되었는걸요.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의 ‘나‘가 무엇인지,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건 그 무엇보다도 우리 내면의 변화입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오직 우리가 인식하는 자신과 달라질 기회를 스스로에게 허락할 때, 우리가 정말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히 믿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정체성 내면의 한 부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쨌거나 변화를 무척 바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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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이 여성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에 의해 집행되었다는 사실(두 여성에 의한 살해는 실질적으로 이 그림이 유일하다)은 정치적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살인자가 하나라면 개인적인 원한이나 임무일 수 있지만, 살인자가 두 사람이라면 공동체를 대변할 수있다. 폭정으로부터 아테네를 구원하고 고대 그리스 폭군을 살해했던 하르모디우스와 아리스토게이톤처럼, 플리니와 알베르티는 이들을 시민 정신의 모범이라 칭했다˝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처단한 것은 자신의 민족 공동체를 대신한 정치 행위이지만, 아르테미시아 그림에서의 공동체는 여성이다. 행위의 주체가 남성을 제압하는 강인한 육체의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이 그림은 남성 권력에 맞선 여성 저항을 상징하는 은유 단계로 올라선다. 케이트 밀릿이 ‘성 정치학‘(요즘 용어로는 젠더의 정치학)이라 명명했던 것이 전쟁이나 선거만큼 심각하고 근본적인 일종의 정치 갈등임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국정과 마찬가지로 젠더에서도 정치적 싸움은 근본적 이슈에 대한 다양한 관점 때문에 생겨나며, 젠더에 대한 태도 역시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분화되었다.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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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 - 인간성의 기원을 찾아가는 역사 수업
닐 올리버 지음, 이진옥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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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철학적 사유가 담겨있는 에세이,라고 짐작만 하면서 이해를 할 수 있는 만큼만 사유를 해 보자는 생각으로 책을 펼쳤다. 고고학자이며 역사가, 작가, 교양프로그램의 진행도 맡고 있는 다방면의 활동이 많다는 저자의 글이 그렇게 어렵게 쓰여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깔려있기는 했지만 이 책은 기대이상이었다. 

기록되어 있는 역사를 해석하는데도 수많은 의견이 있는데 하물며 선사시대의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여러 정황들에 대해 미루어 짐작할수밖에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과학적인 분석으로 보편타당한 고고학적 사실에 접근을 하는 것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의 저자 닐 올리버는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에 더 집중을 한다. 


조류의 흐름이 바뀌는 우연으로 고대 인류의 발자국이 바닷물에 쓸려 사라지지 않고 남아 화석처럼 굳어 남겨졌다가 또다시 흐름이 바뀐 조류에 퇴적물이 휩쓸리며 발견되어 지금의 우리에게 그 의미를 남겨주고 있는데 그것이 그저 두 발로 걸어다니며 집단생활을 이룬 인류의 진화과정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아이의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걸어가는 부모의 모습, 갑작스러운 외부의 위험이 느껴졌을 때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급박한 발걸음에 대한 저자의 상상은 그냥 떠올려보는 그저그런 상상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티비뉴스에 죽은 아내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집안에 그대로 두고 살아있을 때처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본 기억이 있다. 지금 우리의 시선으로는 엽기적인 행동이지만 고대에는 죽음을 애도하며 시신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죽음과 멀찍이 떨어지려 한다'(324)는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추모공원조차 가까이 있는 것을 싫어하는데 이제는 정말 죽음과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부패되는 시신을 가까이 둘수도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이 삶과 별개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늘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기억에 남는 이야기 중 하나는 네안데르탈인 낸디의 이야기이다. 동굴에 남아있는 뼈를 분석한 결과 그는 선천적인 신체장애를 가졌을 것이며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하고 한쪽 눈마저 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네안데르탈인으로서는 꽤 장수를 한 40대까지 살아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가 무리의 다른 이들에게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며 그의 시신 역시 방치되지 않고 매장되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 안에 담겨있는 수많은 의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기적이고 차별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현대의 인류가 고대의 인류에서 '진화'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인지...


"땅속에서 찾아낸 화석들은 우리에게 여러 역사적 사실과 지식을 들려주지만,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왜 그토록 소중한 존재였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곁에 있는 서로를 배려하고 보살피자. 우리 옆의 누군가가 사실은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르니 말이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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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 고양이의 일 - 방배동 고양이를 따라가다
단단 지음 / 마티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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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동물농장 프로그램을 보다가 도심지 가까운 공원에서 발견된 여우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토종인 붉은 여우가 먹이를 찾아 도심까지 내려온 것 같았다. 멸종위기종인 붉은 여우와 공존할 수 있는 이야기로까지 이어졌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 역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집사가 된다는 생각은 절대 못하겠지만 그래도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는 좋아해서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왠만한 고양이 책은 많이 읽어보는 편인데 '사람의 일 고양이의 일'은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과는 조금 다른 결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처럼 별 생각 없이 귀여운 고양이 사진이 많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책을 펼쳐들었지만 금세 사진은 잊어버리고 내용에 집중하게 된다. 지금도 역시 안일하게 생각해왔던 길고양이들에 대한 생각이 조금 많이 바뀌고 있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방배동 산 언저리 공터에 접해있는 집에 살고 있던 저자는 집이 재개발되며 떠나기까지, 2015년부터 2017년 사이 공터에서 생활하던 고양이들에 대한 기록을 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기록 다큐멘터리처럼 철저하고 고양이들의 생활모습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그것 역시 고양이가 아닌 인간의 과점에서 바라 본 것일뿐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 과정이 너무 솔직하고 감정적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집사가 될 생각이 없었던 저자가 어쩌다 집사가 되었고 그래서 고양이에 대해 체험하며 알게 되어가는 과정이 다 소중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안타까운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약한 고양이를 구조해 병원으로 데리고 가 진료를 받게 하지만 새끼 고양이는 인간의 손에 잡혀있던 그 하루의 충격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이다. 큰 결심을 하고 길고양이를 집으로 들였지만 결국 12시간만에 내보내야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모든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건 길고양이보다 집고양이가 더 안전하고 행복하다는 것은 지극히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고양이의 삶일 뿐 고양이가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기준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고양이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고양이는 그저 살아가는 일만으로 존중받을 것이다.
고양이가 존중받는 세상에서는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물을 주는 내 행동도 존중받을 수있을 것이다. 내가 고양이를 돌본다는 이유로 혐오 발언을 듣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나이와 성별과 종에 상관없이 다른 생명을 존중할 것이다. 고양이에게 밥 주는 일의 의미를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일도 고양이의 일도 결국 하나의 의미로 수렴된다.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틀에서 벗어나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도전하고 싸우고 때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 그렇게 모든
‘생명이 하나의 엔들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오길바란다. 그리고 나는 내가 캣맘의 엔들링이면 좋겠다."(243)


길을 걷다 마주치는 고양이들을 보며 최대한 친밀감을 표현해보고 - 쳐다보며 눈을 깜박거리는 것이 고양이식 인사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후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면 엄청나게 눈을 깜박거리곤 했는데 지금까지 응답을 받은 건 한번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친밀감의 표현을 계속해볼 것이다. 고양이가 서로 지나칠 때 콧잔등을 비비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한번 봤었는데 그 두 고양이는 어쩌면 가족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저자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우리의 방식이 있듯 고양이 역시 고양이들의 삶이 있을 것이니 내 기준으로 타인과 인류가 아닌 동물의 삶을 재단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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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니제도의 신석기시대 농부들은 대를 이어 반복되는 세계의 패턴을 파악했다. 오랫동안 온건한 기후가 이어졌고 곡식도 풍요로웠다. 하늘의 별들은 늘 같은 길을 따라 움직이며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사람들은 파종과 수확의 계절 사이에 거대한 거석기념물을 세웠으며 무너뜨리고 다시 세웠다. 그러다 기후와 환경이 변화했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러나 이집트는 이러한 환경 변화를 겪지 않았고 따라서 경로를 수정할 필요도 없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동일한 삶의 패턴이 부단히 반복되었다. 강이 범람하고 곡식이 무르익었으며 농부들은 곡물을 수확하고 저장했다. 작은 부분까지 철저히 관리 감독했던 엄격한 관료제를 통해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집결시켰고, 지구상에서 가장 큰 묘비를 세웠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죽음을 준비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죽은 자의 집은 변치 않는 돌로 지었으나, 허리 굽혀 일하는 사람들이 살 집은 곧 사라질 진흙 벽돌로 만들었다. 평화롭고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던 그들은 삶 이후의 시간을 꿈꾸었다.
반대로 오크니제도의 사람들은 불안정한 환경 탓에 역동하는 삶 자체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곳의 생활은 고단하기 짝이없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사는 일에 몰두했다. 오크니제도에서는 청동기와 철기, 그 밖의 모든 혁신이 탄생했고켈트족, 로마인, 바이킹 등 새로운 민족들이 유입되었다. 고대이집트는 3000년 동안 변함없는 위용을 자랑했으나, 그 변함없음 때문에 변화를 겪지 못했다.
한 폭의 정물화처럼 평화롭고 안정적이지만 큰 변화가 없는삶. 또는 굽이치는 파도를 따라 쉼 없이 나아가 변화를 일궈내는 삶, 당신의 인생은 지금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둘 중 어느쪽에서 살아가고 싶은가?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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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22-07-29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은 다 굽이치는 파도 속에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조선말부터 계속 격동의 세월을 살고 있는 한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