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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평점 :
그 소녀를 내가.. 죽였던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책을 읽은 것 같은데 그런 나의 기억력을 의심하며 책을 펼쳐들다가 익숙한 듯한 전개에 그저 일본 가옥 구조의 보편성으로 인해 내 기억이 왜곡되었을거라 위안하며 계속 읽었는데 결국 그 위안마저 거짓이 될판이다.
짧은 기록이라도 있을까 몇몇 페이퍼를 뒤적여보기는 했지만 증거가 될만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고 다만 내 기억속에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는 몇가지의 에피소드는 점점 뚜렷해지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 내가 이 책을 읽은 것 이라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까마득히 몰랐다. 소녀를 죽인 범인이 ......
예전에는 하라 료의 하드보일드한 분위기에 선뜻 적응이 안되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읽으며 사와자키 탐정의 이야기가 왜 이리 좋은가 하고 있다. 아마도. 어줍잖게 범인이 누구일까,에만 몰두하여 책읽기를 하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사와자키 탐정의 행동과 말 모두 의미있는 것이라 여기며 문장을 곱씹고 있기 때문일 것 같다.
이야기의 시작과 중심은 언제나 그렇듯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이다. 탐정사무소로 걸려 온 사건 의뢰 전화를 받은 사와자키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의뢰인을 찾아 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의뢰인은 요구대로 6천만엔이 담겨있다며 트렁크를 그에게 전하며 딸을 돌려달라고 한다. 영문을 모르는 그에게 경찰이 들이닥치고, 의뢰인이라고 전화를 건 사람의 딸이 유괴되었으며 몸값을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에서 온 사람에게 전해야 무사히 딸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며 사와자키는 그런 사건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이후 유괴범의 몸값 전달에 응하는 심부름꾼으로 사와자키가 지명되었고, 유괴범과의 공범 의심을 받는 사와자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몸값을 운반하다 폭행사건에 휘말리며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 돈가방을 분실하게 된다. 유괴된 소녀의 생사여부도 파악할 수 없고, 몸값은 분실되었으며, 공범의 누명을 벗기는 했지만 범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는 사와자키는 유괴된 소녀의 외삼촌으로부터 또 다른 사건 의뢰를 받는다. 자신의 자식들이 혹여 금전적인 이유로 유괴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통해 사와자키는 주변 인물들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유괴된 소녀의 행적을 추적해가는데......
내가 죽인 소녀는 서둘러 가지 않고 천천히 관련된 인물들과 그에 얽힌 사연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면서 전체적인 이야기의 틀을 볼 수 있는 짜임새가 있는 탐정소설이다. 문장속에서 냉소적이면서도 재치있는 사와자키를 느낄수도 있으며 오래 전 작품이라 전화를 통한 사건과 실마리, 쪽지, 미행, 종이비행기 통신(!)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읽으면서도 범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해 마지막까지 긴장감으로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 축복받을만한 기억상실일지니! -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탐정놀이보다는 어떻게 범인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사족(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 서평쓰기를 미뤄두다가 마침 드라마 그린마더스클럽의 최종회를 보다가 범인은 가까이에 있다,라는 공통점을 발견해 둘을 연결해보고 싶었지만 이건 스포일러 없이는 얘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이제 소설도 다 읽어버리고 드라마도 끝나버리고 이번 주말에는 어떤 재미를 찾을까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