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약속을 안지킬것으로 알고들 계시는지...100번재 리뷰에 댓글을 다시는 5분께 선물을 드린다고 공지를 했음에도 아직도 다섯분을 채우지 못한다니...

그냥...선물이 공염불이 될것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계시는건지....아니면 제가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시는 모양인지요? 거...참....준비할 선물을 몽땅 불우이웃 돕기에 갖다 줘버려??  그런데 불우이웃 돕기로는 적절치 못한 것들인데...아니라면 100번재 리뷰에 댓글을 달지도 못할 정도로 리뷰가 형편 없어서일까? 오만 생각을 다 해 보지만 이제 겨우 4분의 댓글이니 마감을 할 수도 없고.....나~ 원....

  댓글 기다리느라 팥죽만 먹었더니 배만 부르잖아요????

누구든 1분만 잽싸게 댓글 다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말입니다....버스 지나가면 다음 버스 오지만, 댓글 지나가면 다음 댓글 없답니다(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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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2-2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유아블루님이 댓글을 다셨네요. 5분 찼습니다. ㅎㅎㅎ

2004-12-22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22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04-12-2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물도 좋지만 댓글을 달 만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죠...

수수께끼 2004-12-2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크~~~마립간님...무슨 댓글에 지식이 필요해요? 그저 100번째 축하한다고 하셨으면 되었을텐데요..^&^ 아고 가장 큰 후회를 하실분이 마립간님 같은데요??

. 2004-12-2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사전지식이 콩알만큼도 없는 저도 답글을 달았지 않습니까 ㅡ_ㅡ;;

2004-12-23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23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팥죽(멥쌀)

4인분 / 0Kcal
조리시간 : 1시간
난이도 : 중
팥죽(새알심)

4인분 / 0Kcal
조리시간 : 1시간
난이도 : 중
팥죽(새알심,..

4인분 / 0Kcal
조리시간 : 1시간
난이도 : 중
팥호박죽

4인분 / 766Kcal
조리시간 : 50분
난이도 :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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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지의 어원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로서 일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24절기는 태양력에 의해 자연의 변화를 24등분하여 표현한 것이며, 태양의 황경이 270도에 달하는 때를 '동지'라 고 합니다. 동지는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께 들면 '노동지'라고 하는데, 이는 동지가 드는 시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입니다.


2. 동지의 유래

동지는 일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 음(陰)이 극에 이르지만, 이 날을 계기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여 양(陽)의 기운이 싹트는 사실상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이며. 중국의《역경(易經)》에는 태양의 시작을 동지로 보고 복괘(復卦)로 11월에 배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주(周)나라에서는 11월을 정월로 삼고 동지를 설로 삼았는데 이러한 중국의 책력과 풍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옛 사람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경사스럽게 여겨 속절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동지를 신년으로 생각하는 고대의 유풍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전통사회에서는 흔히 동지를 '작은 설'이라 하여 설 다음 가는 경사스러운 날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동지를 지나야 한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살 더 먹는다' 라는 말이 전하기도 합니다.


3. 동지의 풍속

중국의《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재주 없는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疫疾)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하여 팥죽을 쑤어 물리친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로 팥죽의 축귀(逐鬼) 기능에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지팥죽이 절식이고, 팥은 붉은 색 깔을 띠고 있어서 축사(逐邪)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역귀(疫鬼) 뿐만 아니라 집안의 모든 잡귀를 물리치는데 이용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점은 음양사상(陰陽思想)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즉 팥은 붉은 색으로 '양(陽)'을 상징함으로서 '음(陰)'의 속성을 가지는 역귀나 잡귀를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상도 지방에서는 팥죽을 쑤어 삼신·성주께 빌고, 모든 병을 막는다고 하여 솔잎으로 팥죽을 사방에 뿌리는 풍습이 남아 있습니다.

또 경기도 지방에서는 팥죽으로 사당에 차례를 지낸 후, 방을 비롯한 집안 여러곳에 팥죽 한 그릇씩 떠놓기도 합니다. 한편 지방에 따라서는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도 하였습니다. 한편으로 동지에는 동지팥죽과 더불어 책력을 선물하던 풍속이 전하는데 이에 대해《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11월 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시식(時食)으로 팥죽을 쑤어 이웃(隣里)과 즐기리라 새 책력(冊曆) 반포(頒布)하니 내년(來年) 절후(節侯) 어떠한고 해 짤라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리하다.

 옛부터 "단오(端午) 선물은 부채요, 동지(冬至) 선물은 책력(冊曆)이라"는 말이 전하여 옵니다. 전통사회에서는 단오가 가까워오면 여름철이라 친지와 웃어른께 부채를 여름 선물로 선사하고, 또 동지가 되면 책력을 선사하는 풍속이 성하였습니다. 책력은 농경사회에서 생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생활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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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12-2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 어머니께서 끓여 주셨던 팥죽 생각이 납니다. 위 팥죽 그림을 보니 새알심 팥죽이었던것 같습니다. 팥죽을 먹었던 기억이 아물아물 하네요.

그림으로 팥죽을 끓여주신 수수께끼님!~~가암사아합니다.
 



12월 21일 오늘이  바로 일년중 낮이 가장 짧다고 하는 동짓날입니다.

요즘은 5시만 지나도 어두컴컴 땅거미가 밀려오고 밤은 지겹도록 길어졌습니다

예년에는 동짓날은 집집마다 팥죽을 끓였고 그 첫술은 언제나 고시레의 몫이었죠

일년동안 속세에 더렵혀진 몸을 청소한다고 대문앞과 마당...그리고 담벼락에 뿌리며

고시레~ 고시레~ 악귀야 물러가라~

그러던 팥죽도 이제는 인스턴트가 판을 칩니다. 정성이 아무리 많다한들

휘휘 젓는 어머님의 가녀린 팔 힘이 들어간 팥죽보다 맛있겠어요?

이 집 저 집 친구들 집을 돌아가며 한그릇씩 대접받던 팥죽이었는데

지금은 어디 팥죽이나 제대로 끓일 줄 아는 집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만들지는 못해도 예전 팥죽과 똑 같고 방짜 유기에 담긴 팥죽을

위의 사진처럼 퍼 왔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온갖 잡귀를 다 내 쫒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알라디너의 위상으로 더욱 건강하시라고요...

모락모락~ 김이 식기전에 어서 드세요.....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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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2004-12-2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참.....이상하게 먼저올린 글에 딸렸던 모든 음악이 한꺼번에 동시에 다 연주가 되네요?? 단번에 다 들으라는 배려인지...아니면 제가 실력이 없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으시면서 음악을 분류하세요...죄송~~^&^

조선인 2004-12-21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테고리로 열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페이퍼로 열면 괜찮아요. *^^*

물만두 2004-12-21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팥죽이 제 팥죽보다 더 맛나 보이는 건 노래와 함께 먹어서 그런 것일까요^^ 근데 팥죽과 노래가 참 구슬픕니다...

. 2004-12-22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이 동짓날이었군요. 어쩐지 TV에서 무의탁노인들에게 팥죽을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했습니다.
 

 1. 들어가는 말

  우리 나라에서의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라의 융성했던 1000년 고도인 경주의 발굴도 대부분이 일본인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순수하게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하여 발굴된것은 1946년의 경주 호우총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발굴이 행해졌는데 호우총 발굴의 결정후에도 박물관의 업무인계를 위해 남아있던 아리마스라는 일본 학자의 풍부한 발굴 경험을 빌까도 생각을 했었지만 송석하 선생을 비롯하여 초대박물관장이던 김재원 선생등이 우리 손으로 발굴 할것을 주장하여 순수하게 우리 손으로 무덤을 파헤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발굴 현장에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발굴 현장은 대통령이 어디 납시는때의 경호는 저리가라입니다. 출입은 고사하고 멀리서 망원렌즈로 현장을 촬영하는것 조차도 막을 정도로 무척 삼엄합니다. 물론, 지키는 사람이 있어 총이나 칼로 제지를 하는것은 아니지만 발굴 종사자의 대부분은 외부의 공개를 지극히도 꺼리는 입장입니다. 광복이후에 우리 손으로 발굴을 한다는 것은 한번도 발굴에 참여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덤벼드는 매우 위험한 일이겠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가 봅니다. 이 때는 미 군정청이 존재했던지라 군정청의 허가를 득하고 발굴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발굴조사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엄청난 무덤을 발굴 연습장으로 삼은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호우총으로 결정이 나기까지 경주지역의 어디를 파볼까? 라는 문제로 고민을 했을 정도로 계획된 발굴이 아니었었습니다. 호우총에서는 청동항아리에 16자의 명문이 새겨진것을 발견하고 이 청동항아리가 광개토대왕 사후 3년뒤에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어 명문에 새겨진 호우(壺우:한자의 '우'가 없어 그냥 씁니다)즉 항아리라는 의미를 붙여 호우총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재미있는것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에는 발굴 유물중 대표적인 유물의 이름을 무덤에 붙여줍니다. 총(塚)이란 주인을 모르는 무덤을 칭하는 것인데 금관이 나오면 금관총, 천마그림이 나왔으니 천마총...스웨덴의 왕자가 왔다가서 그 방문을 기념해서 서봉총 등등 이름도 붙이기 나름인것 같습니다.

 하여간, 이렇게 중요한 무덤의 발굴 경험이 없었던 우리의 발굴단은 말 그대로 그저 상식이 통하는 선에서 발굴을 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에 발굴에 임했던 분들이 나중에 우리 발굴에서의 중요한 선구자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호우총 발굴은 '진단학회'회원이 주로 참여를 하였는데 이 때의 회원으로는 김재원, 임천(전 민속박물관장 임영주 부친), 이건중,서갑록, 이병도, 이상백, 이숭녕, 홍종인 씨 등등이었습니다.

 2. 공주 무녕왕릉의 발굴

 이렇게 진짜 무덤을 아무런 발굴 지식도 없이 파헤친 호우총 발굴단 이래 경주 감포의 감은사지등 사적과 유적지, 그리고 구석기 시대의 선사유적지 등등 제법 많은 유물들이 발굴을 통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발굴 작업을 해 나가면서 발굴의 노하우를 쌓았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그러던 중 1971년...공주의 송산리 무덤군에서 우기를 대비한 수로 보수작업을 하던 인부의 삽 끝에 뭍어나는 이상한 소리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무녕왕릉의 발굴이 시작됩니다. 첫 발견은 6월 29일인데 무덤과 무덤 사이에 물골을 고르던 인부의 삽끝에서 우연치 않게 무녕왕릉이 발견된 것입니다. 경주의 무덤이나 부여의 무덤 그 어느것 하나 도굴꾼의 손이 닿지 않은것이 거의 없었던 실정에서 1400여년전의 무덤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사실이었습니다. 그것도 무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당시의 공주박물관장 김영배는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발굴을 하려고 서둘렀는데 다행히 현장에 있던 문화재관리국 직원이 욕을 먹어가면서 현장을 사수하고 서울에서 발굴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는데...이 일은 차라리 김영배 주도로 발굴이 되었더라면 서울에서 내려온 발굴단이 저지른 과오를 범하지 않았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서울에서는 급하게 발굴단이 편성되었습니다.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을 비롯하여 지건길, 한병삼, 장인기, 이호관 선생등이 조사단으로 공주로 급파 되었고 이런 엄청난 사실앞에서 흥분한 조사단은 철야발굴을 결정하고야 말았습니다.  당일은 비가 내리는 관계로 하룻밤을 더 보내고 다음날 아침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연도를 구성하고 있는 첫 벽돌을 들어내는 순간 허연 기체가 무덤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모두들 보았습니다. 어던 사람은 과학적인 원리를 설명하며 무덤속의 찬 공기가 바깥쪽의 더운공기와 닿아 생기는 서리 현상이라고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무덤속에 있던 혼백이 나가는 모습이라고도 합니다.  어찌되었건 이 무덤의 주인공이 501년에 즉위한 무왕이라는 것이 지석을 통해 밝혀지게 되었고 기자들에게 공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장품 수습 이전에 무덤의 규모를 실측하느라고 이곳 저곳에 줄자를 가지고 재며 다니는 발굴단원의 발밑에서는 1500여년을 견뎌온 유물들이 부숴지고 있었습니다.

  길게는 1년도 모자랄 발굴 작업은 대충 유물의 위치를 모눈종이에 기록하고는 쓰레기 줏어담듯 자루에 담았고 몰려드는 구경꾼과 사진기자로 인해 조속히 수습하여 일단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되겠다는 강박관념이 백제 무덤의 발굴에 천추의 한을 남겼음은 물론이고 우리 나라 발굴사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된것입니다. 무덤속은 이사가는 사람들이 깨끗이 치우듯이 그렇게 깨긋하게 정리를 하고 만 것입니다.

  무녕왕릉에서는 엄청난 유물이 나왔습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무녕왕의 사망 기록이 일치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증명하는 지석의 53자의 글자로 확인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물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한번 언급을 하겠지만 백제의 왕과 왕비(또는 여종)가 나란히 누워있는 무덤의 발굴은 이렇게 싱겁게 끝이나고 말았는데 발굴 조사단 모두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를 합니다. 특히 삼불 김원룡 선생은 사망하는 날 까지도 무녕왕릉의 발굴 실수를 자책했다고 합니다. 이런 졸속 발굴은 무덤에 들어가면서 많은 유물의 손상을 가져왔는데 연도를 지키던 돌짐승의 다리를 부러뜨린일은 물론이고 금속공예품과 목제조각품을 이리 저리 넘나들며 실측을 하느라 와작거린일 등등 고고학자의 입장에서 평생 한번 만나기 힘든 엄청난 유물의 조사를 이렇게 망쳐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셨던 고 한병삼 선생께서 들려주셨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왕릉을 비롯한 무덤은 함부로 파헤쳐서는 안돼..."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데....잠자리도 뒤숭숭하고 갑짜기 맑은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소낙비가 내리질 않나...교통사고도 나고..."

"무덤을 파헤칠때는 혼령이 나가는것을 볼 수 있어...몸도 아프고 사람이 죽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병삼 선생은 말년에 몹씨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아직도 한참 활동하실 나이에 아깝게 타계하시고 말았는데...그것이 발굴과 관련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3. 마치는 말

 후일 고 김원룡 선생은 무녕왕릉 발굴의 실수는 본인 자신의 실수나 아쉬움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에 대한 큰 죄를 지은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당시의 발굴장비는 형편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록을 위한 촬영장비는 물론이고 어두운 무덤등을 대낮처럼 밝힐 변변한 전등 조차 없었던 때였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덤속을 밝히게 될 전등의 조도나 밝기도 정확하게 측정하여 유물에 손상읠 입히는가에 대한 선행 조사도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엄청난 실수가 후학들의 발굴에 조금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커다란 교훈으로 남겨지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발굴 현장은 발굴이 끝나고 조사가 끝나게 되면 방치하고 있습니다. 서울 근교나 경기도의 일부 지역에서도 발굴 종료후 방치로 인하여 오히려 발굴을 안하니만도 못한 지역이 무수히 많이 있는데 이런것들은 제도적 모순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발굴비용은 책정이 되어 있음에도 발굴후 정비사업이나 보존에 관한 예산은 책정이 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발굴조사단이 파헤쳐 놓은 지역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또 다른 모습의 폐허로 변하고 있습니다.

 서울 인근에서는 남양주에 위치한 조선 최대의 사찰인 회암사의 발굴이 아직도 진행중에 있습니다. 물론, 유물관도 있으나 현장 사무소에서 방문 목적을 설명하면 사진 촬영등을 제외하고는 발굴 지역을 안내받을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유물을 하룻밤 사이에 발굴했던 무지함을 교훈으로 일일히 붓끝에 물을 뭍혀 혹시라도 작은 유물에 상처를 줄까 조심해서 발굴에 임하는 모습...특히 전문인력의 부족으로 전공 학부의 학생들의 참여가 불가피하여 대부분의 발굴이 학생들이 방학중인 뜨거운 여름과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이루어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발굴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험과 자신이 있으니 다행이지 지금 발굴을 통한 조사가 긴요하지 않다면 우리 후대에 보존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발굴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것이 없습니다. 문화재의 보존에서 첫번째는 원형보존인데 땅속에 뭍혀있는것 만큼 원형이 잘 보존되는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나중에 완벽한 보존방법이 보편화 되었을 때 그들 후손의 뛰어난 기술을 빌수 있다면 우리의 문화 유산은 세세손손 후대에게 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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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2-2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바로 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꾸벅.

사실 무녕왕릉 이야기는 조유전씨 책에서 보긴 봤는데,

좀 더 생동감있게 수수께끼님의 말씀으로 듣고 싶었어요.

에, 또, 좀 다른 얘기인데 서봉총은 이름 바꿀 계획이 없나요?

처음 서봉총의 이름 유래를 들었을 때 무척 황당하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서봉총이라고 불리는 거 같아서요.

그리고 주문 하나 더.

언제 기회되시면 미륵사지 석탑 복원 문제에 대한 님의 생각도 궁금해요.

수수께끼 2004-12-21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바로 답변 드립니다. 현재 동탑이 복원되어 떡 허니 버티고 있지만 아무리 동탑의 부재중 남은 부재를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요즘 만든탑은 복원을 했다해도 요즘탑이지 백제 무왕때의 탑이 될 수 없습니다. 가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수십억을 드여서 복원했던 탑이 서탑이 주는 느낌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현대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을 한다해도 시공을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이랍니다. 그 세월의 때를 어찌 입힐 수 있겠습니까?

서탑의 복원도 마찬가지로 봅니다. 일단 해체를 완료하였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복원을 하겠지만 지금 그 복원 문제로 조금은 시끌거립니다. 차라리 해체를 말던가....아니라면 예전과 같이 복원을 해야지...문제는 해체 이후의 부재로는 예전과 같은 복원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복원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보강재로 다른 석재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럴경우 늙은이 얼굴에 어린아이 눈망울을 가져다 붙인다면 어색한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어려운 문제인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조사지만 인근 마을의 댓돌이 탑의 면석같아보이는 것이 많은데...이는 아마도 동네의 옛 어른들이 미륵사지에서 떨어져 나온 돌중에서 쓸만한 석재를 집에 가져가서 댓돌이나 기타 용도로 사용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인근 지역에 있는 유사한 석재에 대한 조사도 진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복원이란 원래의 것 그대로 만든다는 의미인데 증개축의 개념이나 완전히 신규로 만드는 행위라면 복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종의 다른 재료를 이용한 이식인 셈인데 이런 방법이 문화재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무척 다양한 의견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고로 정영호 박사등을 비롯한 원로 학자들은 복원에 상당히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으며, 동탑이 완벽한 컴퓨터 설계의 첨단 공법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에도 탑의 무게가 안쏠림이 되지 못하여 조금씩 바깥쪽으로 하중이 이동되는 현상을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의 미륵사지 석탑은 그나마 1천년 이상을 버텨왔지만 복원된 동탑은 한 세기를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기도 합니다. 느낌도 전혀 다른 두 개의 석탑....그 속에서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건립되는 구조물에 대하여 재삼 타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수수께끼 2004-12-2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족을 단다면 무녕왕릉 발굴에 참여했던 분들의 이야기는 다소 조금씩 다릅니다. 그 당시 발굴조사단 인원중에 대부분은 벌써 세상을 떠나셨으며 지건길, 이호관, 조유전 선생등이 남아 있는 정도인데 무녕왕릉 발굴 당시에 관한 이야기들이 조금씩 다르답니다. 한편으로는 구수하게 이야기 처럼 전해드리고 싶고 또 제가 한병삼 선생께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라 재미있게 말씀드리고 싶어도 자칫 발굴에 참여했던 분들께 누가 될수도 있어 간략하게만 열거를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문화재에 관한 명칭 변경은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는 문제인데 쉬운것은 아니랍니다. 워낙 이견이 많아서이며 또 한가지는 다르게 이름붙일 특별한 구실이 없다는 점도 서봉총이 그대로 남게된 배경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조선인 2004-12-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 전 미륵사지 석탑 복원에 대해 동탑은 도로 허물어버리고(가관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꼭대기의 장식?이 기괴하게 여겨져요. -.-;;), 서탑은 가장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기단 부부만 터에 그대로 남긴 뒤 별도의 공간에 동탑과 서탑 '모형'을 따로 세웠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

반딧불,, 2004-12-2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륵사지 갈 때마다 참 아쉽습니다.

예전에 탑 앞에서 사진이라도 몇 장 찍어둘껄 싶어서요.

아이가 어리니..나중에 찍자 하면서 미루다가 어쩌면 정작 우리 아이가 보야 할 때에는 못 볼 듯 해서요..



미륵사지의 서탑 옆에 예전에 큰 나무 두 그루 있었던 것 기억하세요?

너무나 변해 버리는 모습에...아니 아예

그게 맞는 것인지도 모르게 변형될 모습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섭니다.



왕궁리 5층 석탑의 복원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아직도 참 많이 남았던데요.

참..반가워서 그냥 글 적었습니다.. 인사드립니다.

수수께끼 2004-12-21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반갑습니다. 미륵사지탑은 일본인들의 시멘트 덧칠이 무척 보기 싫었지만 그나마 그렇게 했기에 나머지라도 제대로 보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을 본 뜬 탑으로 부재 자체가 석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조선인님의 말씀이 맞는 말씀일지도 모릅니다만, 어떤 전시의 기능을 고려해야 할것 같습니다. 동탑의 상륜부가 매우 어색해 보이는것은 사실이지만 탑의 비례로는 그런 크기가 나오는데 문제는 과연 그런 모습의 상륜부였나 하는 것입니다. 미륵사지 1차 발굴때부터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하는 연못이 있었던 사실이 발굴결과 밝혀졌었지요...저야 늘 찍는 사진인지라 사진을 많이 찍어 두었지만 나중에...라고 미루셨다면 지금은 영원히...로 변해버리고 말았군요...두 그루의 나무는 제 생각에는 버드나무로 기억이 됩니다. 당간지주 인근에도 버드 나무가 몇 그루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리고 왕궁리 5층 석탑은 복원이 아니라 해체 수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래전인 1965년에 황수영박사 주관으로 해체 수리를 하였으며 당시에는 사리함과 순금판에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새긴것이 발굴 되었는데 당시 조립시의 부주의로 붕괴 위험에 처해서 지금은 해체 수리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인근에는 발굴 작업이 병행되어 한 동안 고려의 탑으로 알고 있는 이 탑의 편년을 재고해야할 백제의 기와가 발견이 되고 있어 앞으로 학계에서 왕궁리 5층탑이 백제계 탑이냐 또는 백제탑이냐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백제의 탑을 본뜬 고려시대의 탑이라는데 동의하지 않고 있는 입장입니다. 일부 학계에서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해체 수리시 탑의 기단부 내부와 밑에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기와무지가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이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 생각을 달리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체 수리시에 인근에 있던 고려시대의 기와를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집어 넣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해체 수리하는데 요즘 시대의 기와를 기단부 내부나 터 다지는데 집어 넣었다면 후대 사람들이 이 탑을 해체하여 요즘 기와가 나왔다고 이 탑을 2000년대의 탑으로 본다면 얼마나 우스울까요? 양식이나 형태로 보아서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백제계 탑이 아니라 백제탑으로 보고 싶답니다....

조선인 2004-12-21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모아서 언제 책자로 내주세요? 네? 부탁이에요. ㅠ.ㅠ

반딧불,, 2004-12-2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말 많이도 아쉽습니다.

그리고, 항상 생각합니다.

결국 관심의 문제이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구요.



왕궁리 5층 석탑..자주 갑니다.

알아서 가면 더욱 좋겠지만, 몰라도 둘러보는 것만도 행복한 것이니까요.

많이도 아쉬운 미륵사지입니다...



해체 되기 전에 사진 찍어둘껄..하다가..

어쩌다보니 못 찍어서 얼마나 아쉬운지요..

모든 사람이 전문적인 수준일 필요는 없겠지요. 사랑하고..

그리고,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먼저겠지요.

느낄 수 있는 마음만 심어주는 것만도 성공이거니 합니다. 힘들겠지만요.

수수께끼 2004-12-2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지를 둘러보게 되면 언제나 엄숙함에 젖어들고는 합니다. 그것은 사적지 속에 담긴 역사의 흔적을 느끼며 먼 과거로의 여행이기에 더욱 숙연해지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안타까우시겠지만 미륵사지에서의 촬영은 영원히 불가능할것 같습니다. 그만큼 문화재는 한번 손상이 가게 되면 영원히 우리곁을 떠나 버린다는 나름대로의 경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궁리 5층 석탑에 자주 가신다니...그 쪽의 지명에 대해 한번 알아보시는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것입니다. 왕궁리라는 명칭도 그렇지만 고도리(古都)라는 이름도 시사하는바가 큽니다. 현재는 마주보는 석불 두개만 달랑 서있는 이 지역이 왜 옛 도시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을지요....무언가 오래전부터 도시가 있었고..이제는 사라져 버렸기에 고도라는 명칭을 사용한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신다면 의외의 재미있는 사실을 아시게 될것입니다. 시골의 지명이 왕궁리(王宮)라는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죠? 어딘지 왕궁이 있었기에 붙여진 지명이지 허허벌판을 왕궁리라고는 하지 않을것이 아니겠잖아요? 이런 저런 내용에 대한 궁금증의 해소가 바로 지적 호기심에서의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그 멋진 왕궁리 5층 석탑에 자주 가신다니 부럽기만 하답니다 ^&^~~

반딧불,, 2005-01-09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사는 곳이니까요.

어쨌든..그 쪽으로의 공부는 지난 여름에 실컷 찾았었지요.

스스로 정리가 안되고, 넷에서 찾은 자료들이라서 한정된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즐기는 편이긴 합니다.

계속 못 들어와서 이제사 답글 답니다. 죄송합니다.



제 주변부터 하나하나 알아가고, 정리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네요.

전번에 다녀온 감상 하나 썼는데,,서버가 불안해서 날아갔답니다.

무엇이든 아는만큼 보이겠지요. 그냥 저야 문외한이지만, 보고 느끼는 것만도 행복합니다.
 

100번째 리뷰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극단적인 사기극에 대응하는 의미에서 "한국 벽화고분"을 택하였습니다. 고 삼불 김원룡 박사의 1980년도 저서로 제반 여건이 많이 달라졌음에도 특별히 이 책을 선택하게 된것은 이 책이 우리 나라의 고분벽화에 대한 첫번째 연구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입니다.

 이 외에도 고구려 고분 벽화에 관한 자세한 연구서는 전호태 등 여러분이 저술을 하였지만 특히 대규모의 화보로는 1993년 조선일보사의 특별 취재팀에 의하여 우리 나라에 소개된 중국 지역의 고분벽화로 "아...고구려"展(1993년 전시)의 도록인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의 고분을 찾는 국내 학자들도 많이 있지만 공개를 하지 않고 있는 중국 당국으로 인하여 조선일보사 특별취재팀과 같은 생생한 고분 벽화의 모습을 접하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 중국의 벽화를 접했던 일본 학자들의 말을 빌면 그 박락이 결로 현상에 의하여 극심하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보존 방안도 강구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다음에 "아..고구려"전의 도록에 대한 리뷰를 할 기회가 있겠지만 안타까운 우리의 문화유산이 보존 부실로 결실되는것도 안타까운데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려는 중국 당국의 처사가 몹씨 괴씸하기 그지 없으며 그와 더불어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우리 정부의 행태에 대하여 한심함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다음에 "아...고구려"전 도록 리뷰시에는 중요한 사진도 곁들여 소개토록 하겠습니다.

 겸하여 약속드린대로 100번째 리뷰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에 대한 작은 선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너무 오랜동안의 침묵을 가졌던것이 아닌가 하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새해에도 더욱 알찬 리뷰 작성을 위하여 노력할것을 100번째 리뷰 작성을 마치면서 약속 드립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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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12-19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깜짝이야! 이게 100번째 리뷰인 줄 알았어요!

조선인 2004-12-19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속았어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