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우리 나라에서의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라의 융성했던 1000년 고도인 경주의 발굴도 대부분이 일본인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순수하게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하여 발굴된것은 1946년의 경주 호우총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발굴이 행해졌는데 호우총 발굴의 결정후에도 박물관의 업무인계를 위해 남아있던 아리마스라는 일본 학자의 풍부한 발굴 경험을 빌까도 생각을 했었지만 송석하 선생을 비롯하여 초대박물관장이던 김재원 선생등이 우리 손으로 발굴 할것을 주장하여 순수하게 우리 손으로 무덤을 파헤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발굴 현장에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발굴 현장은 대통령이 어디 납시는때의 경호는 저리가라입니다. 출입은 고사하고 멀리서 망원렌즈로 현장을 촬영하는것 조차도 막을 정도로 무척 삼엄합니다. 물론, 지키는 사람이 있어 총이나 칼로 제지를 하는것은 아니지만 발굴 종사자의 대부분은 외부의 공개를 지극히도 꺼리는 입장입니다. 광복이후에 우리 손으로 발굴을 한다는 것은 한번도 발굴에 참여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덤벼드는 매우 위험한 일이겠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가 봅니다. 이 때는 미 군정청이 존재했던지라 군정청의 허가를 득하고 발굴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발굴조사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엄청난 무덤을 발굴 연습장으로 삼은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호우총으로 결정이 나기까지 경주지역의 어디를 파볼까? 라는 문제로 고민을 했을 정도로 계획된 발굴이 아니었었습니다. 호우총에서는 청동항아리에 16자의 명문이 새겨진것을 발견하고 이 청동항아리가 광개토대왕 사후 3년뒤에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어 명문에 새겨진 호우(壺우:한자의 '우'가 없어 그냥 씁니다)즉 항아리라는 의미를 붙여 호우총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재미있는것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에는 발굴 유물중 대표적인 유물의 이름을 무덤에 붙여줍니다. 총(塚)이란 주인을 모르는 무덤을 칭하는 것인데 금관이 나오면 금관총, 천마그림이 나왔으니 천마총...스웨덴의 왕자가 왔다가서 그 방문을 기념해서 서봉총 등등 이름도 붙이기 나름인것 같습니다.
하여간, 이렇게 중요한 무덤의 발굴 경험이 없었던 우리의 발굴단은 말 그대로 그저 상식이 통하는 선에서 발굴을 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에 발굴에 임했던 분들이 나중에 우리 발굴에서의 중요한 선구자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호우총 발굴은 '진단학회'회원이 주로 참여를 하였는데 이 때의 회원으로는 김재원, 임천(전 민속박물관장 임영주 부친), 이건중,서갑록, 이병도, 이상백, 이숭녕, 홍종인 씨 등등이었습니다.
2. 공주 무녕왕릉의 발굴
이렇게 진짜 무덤을 아무런 발굴 지식도 없이 파헤친 호우총 발굴단 이래 경주 감포의 감은사지등 사적과 유적지, 그리고 구석기 시대의 선사유적지 등등 제법 많은 유물들이 발굴을 통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발굴 작업을 해 나가면서 발굴의 노하우를 쌓았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그러던 중 1971년...공주의 송산리 무덤군에서 우기를 대비한 수로 보수작업을 하던 인부의 삽 끝에 뭍어나는 이상한 소리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무녕왕릉의 발굴이 시작됩니다. 첫 발견은 6월 29일인데 무덤과 무덤 사이에 물골을 고르던 인부의 삽끝에서 우연치 않게 무녕왕릉이 발견된 것입니다. 경주의 무덤이나 부여의 무덤 그 어느것 하나 도굴꾼의 손이 닿지 않은것이 거의 없었던 실정에서 1400여년전의 무덤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사실이었습니다. 그것도 무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당시의 공주박물관장 김영배는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발굴을 하려고 서둘렀는데 다행히 현장에 있던 문화재관리국 직원이 욕을 먹어가면서 현장을 사수하고 서울에서 발굴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는데...이 일은 차라리 김영배 주도로 발굴이 되었더라면 서울에서 내려온 발굴단이 저지른 과오를 범하지 않았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서울에서는 급하게 발굴단이 편성되었습니다.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을 비롯하여 지건길, 한병삼, 장인기, 이호관 선생등이 조사단으로 공주로 급파 되었고 이런 엄청난 사실앞에서 흥분한 조사단은 철야발굴을 결정하고야 말았습니다. 당일은 비가 내리는 관계로 하룻밤을 더 보내고 다음날 아침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연도를 구성하고 있는 첫 벽돌을 들어내는 순간 허연 기체가 무덤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모두들 보았습니다. 어던 사람은 과학적인 원리를 설명하며 무덤속의 찬 공기가 바깥쪽의 더운공기와 닿아 생기는 서리 현상이라고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무덤속에 있던 혼백이 나가는 모습이라고도 합니다. 어찌되었건 이 무덤의 주인공이 501년에 즉위한 무왕이라는 것이 지석을 통해 밝혀지게 되었고 기자들에게 공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장품 수습 이전에 무덤의 규모를 실측하느라고 이곳 저곳에 줄자를 가지고 재며 다니는 발굴단원의 발밑에서는 1500여년을 견뎌온 유물들이 부숴지고 있었습니다.
길게는 1년도 모자랄 발굴 작업은 대충 유물의 위치를 모눈종이에 기록하고는 쓰레기 줏어담듯 자루에 담았고 몰려드는 구경꾼과 사진기자로 인해 조속히 수습하여 일단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되겠다는 강박관념이 백제 무덤의 발굴에 천추의 한을 남겼음은 물론이고 우리 나라 발굴사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된것입니다. 무덤속은 이사가는 사람들이 깨끗이 치우듯이 그렇게 깨긋하게 정리를 하고 만 것입니다.
무녕왕릉에서는 엄청난 유물이 나왔습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무녕왕의 사망 기록이 일치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증명하는 지석의 53자의 글자로 확인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물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한번 언급을 하겠지만 백제의 왕과 왕비(또는 여종)가 나란히 누워있는 무덤의 발굴은 이렇게 싱겁게 끝이나고 말았는데 발굴 조사단 모두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를 합니다. 특히 삼불 김원룡 선생은 사망하는 날 까지도 무녕왕릉의 발굴 실수를 자책했다고 합니다. 이런 졸속 발굴은 무덤에 들어가면서 많은 유물의 손상을 가져왔는데 연도를 지키던 돌짐승의 다리를 부러뜨린일은 물론이고 금속공예품과 목제조각품을 이리 저리 넘나들며 실측을 하느라 와작거린일 등등 고고학자의 입장에서 평생 한번 만나기 힘든 엄청난 유물의 조사를 이렇게 망쳐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셨던 고 한병삼 선생께서 들려주셨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왕릉을 비롯한 무덤은 함부로 파헤쳐서는 안돼..."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데....잠자리도 뒤숭숭하고 갑짜기 맑은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소낙비가 내리질 않나...교통사고도 나고..."
"무덤을 파헤칠때는 혼령이 나가는것을 볼 수 있어...몸도 아프고 사람이 죽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병삼 선생은 말년에 몹씨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아직도 한참 활동하실 나이에 아깝게 타계하시고 말았는데...그것이 발굴과 관련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3. 마치는 말
후일 고 김원룡 선생은 무녕왕릉 발굴의 실수는 본인 자신의 실수나 아쉬움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에 대한 큰 죄를 지은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당시의 발굴장비는 형편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록을 위한 촬영장비는 물론이고 어두운 무덤등을 대낮처럼 밝힐 변변한 전등 조차 없었던 때였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덤속을 밝히게 될 전등의 조도나 밝기도 정확하게 측정하여 유물에 손상읠 입히는가에 대한 선행 조사도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엄청난 실수가 후학들의 발굴에 조금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커다란 교훈으로 남겨지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발굴 현장은 발굴이 끝나고 조사가 끝나게 되면 방치하고 있습니다. 서울 근교나 경기도의 일부 지역에서도 발굴 종료후 방치로 인하여 오히려 발굴을 안하니만도 못한 지역이 무수히 많이 있는데 이런것들은 제도적 모순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발굴비용은 책정이 되어 있음에도 발굴후 정비사업이나 보존에 관한 예산은 책정이 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발굴조사단이 파헤쳐 놓은 지역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또 다른 모습의 폐허로 변하고 있습니다.
서울 인근에서는 남양주에 위치한 조선 최대의 사찰인 회암사의 발굴이 아직도 진행중에 있습니다. 물론, 유물관도 있으나 현장 사무소에서 방문 목적을 설명하면 사진 촬영등을 제외하고는 발굴 지역을 안내받을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유물을 하룻밤 사이에 발굴했던 무지함을 교훈으로 일일히 붓끝에 물을 뭍혀 혹시라도 작은 유물에 상처를 줄까 조심해서 발굴에 임하는 모습...특히 전문인력의 부족으로 전공 학부의 학생들의 참여가 불가피하여 대부분의 발굴이 학생들이 방학중인 뜨거운 여름과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이루어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발굴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험과 자신이 있으니 다행이지 지금 발굴을 통한 조사가 긴요하지 않다면 우리 후대에 보존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발굴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것이 없습니다. 문화재의 보존에서 첫번째는 원형보존인데 땅속에 뭍혀있는것 만큼 원형이 잘 보존되는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나중에 완벽한 보존방법이 보편화 되었을 때 그들 후손의 뛰어난 기술을 빌수 있다면 우리의 문화 유산은 세세손손 후대에게 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 如 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