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농활팀의 철수에 관한 전모가 다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는 이번의 원인은 1.같이 술을 먹고 잠을 자던 중 발생한 사태  2."아가씨/아줌마"호칭으로 빚어진 문제로 나뉘고 있습니다. 첫번째의 일은 서로의 주장이 다르기에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일이라서 그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 하기는 그렇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호칭이 성차별이라고 과민하게 반응한 농활팀의 논리는 여기저기 두들겨 맞기 딱 좋은 일이더군요.

 이번 사태를 보는 여러 눈총은 그저 따갑기만 했을 것입니다. 법대 총학생회장은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은 분명 학생들에게 있음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법대 총학생회장은 이번 농활이 농민의 요구가 아닌 농활팀의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며, 농활의 주 목적이 '성평등'이라면 스스로 원해서 가는 농활의 목적 자체가 잘못 선정된...잘못된 농활이 아닐까 합니다. 더구나 법대 총학생회장은 농민을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가 마치도 심훈의 상록수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계몽 의식을 가지고 농민을 대한다고 하니 이 또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제가 농촌봉사활동을 갔을때만 해도 계몽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그것은 신문명과 문화를 접하는 수단의 부재가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실제 농촌에는 티비는 고사하고 전기 조차도 안들어와 도대체 정치나 경제, 그리고 도시의 삶이 어떤지를 알 수 없었을뿐만 아니라 전 근대적인 농사법에 대해서도 신기술에 의한 영농법의 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정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도시에 자가용 차량이 없이 사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농촌에는 이제는 거의 1대 이상의 차량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농촌도 도시에서 받아들이는 것과 똑 같은 시간대에 보고 느끼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농촌의 농민을 계몽하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잘못 갖게되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농활팀과 농민회의 나름대로의 알력도 이번 사태의 하나의 빌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농활팀의 농활에 대한 명확한 활동계획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토로를 통하여 준비되지 않은 농활이었음을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과거 4년전에 이러한 문제가 붉어져 나왔을때 명확한 행동지침을 설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라면 어떠한 문제도 발생될 수 있기에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자체적으로라도 명확하게 행동지침을 정하고 대응을 했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충분한 협의 없이 철수라는 초강경 무리수를 강행한 학생회의 철수는 농활이 봉사인지..아니면 농민과의 전쟁인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농활의 기간이 3박 4일이라는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기간에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이야기인지요...그리고 농활을 간 학생들이 현지 농민과 농활중에 술자리를 함께 가졌고, 서로 취해 골아 떨어질 정도로 술을 마셨다면 이는 농활의 기본을 벗어난 농활을 빙자한 MT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보게 만드는 일입니다. 예전에는 20여일을 보내면서 마지막날 헤어짐을 아쉽게 생각하며 술자리를 했지만 이제는 농활의 원동력은 술힘을 빌어야만 가능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농활팀도 차량에 기름이 들듯 당연히 술잔을 목구멍에 부어야 하겠지요. 그것도 농민회가 요구해서도 아니고 스스로들이 농활을 가서 농민을 도와주겠다는 학생들이 벌인 말 그대로 한심한 작태에 지나지 않을뿐입니다.

 더구나 농활팀과 농민회의 폭로전 양상을 띠는 이번 경우는 법대 총학생회장의 자기반성 처럼 지금까지 농활을 이루어 놓은 선배들에게 이들은 무슨 면목으로 변명을 할지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작태가 언론과 대중의 비난의 과녁이 되자 묵시적으로 함구하기로 했던 내용에 대하여 자기 면피용으로 제시하는 행위도 학생답지않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이제 농민회와 농활팀의 골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만난 농민회 회장의 말은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학생들이 농촌에 내려와서 할것이 무엇이 있나요? 면에서 학생들이 오니 일정기간 문제 없이 지내다 가게 해 주라는 부탁도 있고...  차라리 보건소에서 진료받지 못하는 의료봉사팀이나 오면 고맙기라도 하지...농활팀이 돌아가면 뒷정리 하는일도 보통이 아니랍니다"

 이 말 속에는 차라리 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농촌에 일손이 부족하기에 피뽑는 일 하나라도 도와줄 학생들의 손길을 반기는 것인데 농활팀이 마을에 들어오면 손님치례해야 하는 일이 더 큰 문제라는 이야기 입니다. 농민들도 농활팀을 손님으로 여기고 있고, 그에 맞춰서 농활팀은 손님을 자처하며 술 대접이나 받고....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따질 그런 꺼리 조차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태는 농민이나 농활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벌써 수십년간 이어져 오던 농활이 중단 위기를 맞게 된것입니다. 저도 대학때 죽어라고 농활을 떠났던 사람이기에 더더욱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이번 일이 서로간의 사과나 양해로 끝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가 보기에 이제는 어느 대학 농활팀이고 농촌에 들어가기가 무척 힘이 들게 될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농활 자체의 존폐도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갈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활은 서울에 있는 대학이나 지방에 있는 대학이나 다 참가를 합니다. 그런데 제가 과거부터 유심히 지켜보아도 친농민적인 농활팀은 역시 지방대학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여 서울대학교가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이 모인 학교이고 그 학교의 농활팀이라면 지성인의 농활팀이어야 함에도 어느 벽촌에 있는 이름없는 대학교의 농활팀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만일까요? 이런 문제는 농활이 끝나면 강평회나 반성회 등을 통하여 충분히 토의가 되고 새로운 농활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기회로 삼아야 함에도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점차 학생 정치꾼의 모습이요, 농촌에서까지 투쟁하는 투사의 모습을 남기려 하는지...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막말로 농민이 아무리 까졌다고 해도 도시사람의 되바라져 까진 모습보다 훨씬 순수하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말인지요?

 서울대 농활팀은 자기변명으로 일관해서는 이번 사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책임이 사라지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그들은 단지 서울대 농활팀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책임을 면키 어려운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적어도 싫든 좋든 우리 나라에서는 최고의 지성이 모인 대학임을 인정받고, 또 인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번일에 농민과의 폭로전 양상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교만을 반성을 하는 계기로 삼도록 해야 할것입니다. 아무리 서울대 농활팀이 잘했다고 우긴들....이해는 할 수 있어도 그대들은 지성이기에....그대들 스스로 농민보다 잘났다고 인식하고 있기에...그대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 如       村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번 서울대 농활팀의 철수를 계기로 예전에 대학생활을 장식했던 농활에서 발생했던 몇 가지 이야기를 회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경암회"라는 학교 써클의 일원으로 농활에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출발 며칠전부터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던지 거의 일주일간은 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농활을 대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농활에 참석하는 봉사자가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자격요건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이 일은 지금도 흐믓하며, 또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농활을 해서인지 지금도 농촌에 가서는 주변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생긴 경우에는 양말을 벗고 논 바닥에 뛰어들기도 하는데 이런것이 아마 잘 다듬어졌었던 농활을 경험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 똥지게를 나르기 위한 맹 트레이닝...

 제가 대학 입학후 처음 맞는 방학에 농활을 출발하는 지역은 충남 예산군 한산면 봉림리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예산역에서 내려 흙먼지가 폴폴거리는 삽교 마을을 지나 미리 먹을것을 장봐온지라 어깨 가득 무거운 짐을 지고는 거의 4시간 가량을 걸어서 마을에 도착을 했던 당시에는 아주 오지였습니다. 저희 써클의 회장은 농촌 출신이었는데 신입생에게 체력 단련을 시킨다면서 어디서 구해왔는지 물레틀을 가져와서는 마닐라 포대에 넣고 요리조리 끈을 이용해서 어깨에 맬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신입생들에게 그것을 메고 운동장을 한바퀴씩 돌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키도 제법 크고 힘도 나름대로 빵빵했다고 생각해서 가장 먼저 그 일을 하게 되었는데 막상 양 어깨에 메고나니 이게 보통 무거운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레틀은 온통 통나무로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입생들이 낑낑~거리며 운동장을 도는 모습을 회장(농활때는 대장이라고 호칭했습니다)은 자리도 뜨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일명 <똥지게 나르기>라는 이 훈련은 농활 출발전의 7월초의 뜨거운 날씨 속에서 매일 10바퀴씩 5일간 계속 되었습니다. 중간 중간 농활을 위한 자체조달 부식을 사러가서 짐을 지고 오기도 하였지만 물레틀에 비하면 감자 한 가마도 별로 무거운 것이 아닐 정도로 물레틀은 정말 무거웠는데 첫 날, 어깨에 물집이 생기고 아프기 시작했던것이 농활을 떠날때는 딱지가 앉아 별로 아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농활중에 실지로 똥지게를 지는 일은 없었기에 농활을 다녀와서는 은근히 5일간의 트레이닝에 대한 불만도 있었는데 다녀와서 보고회를 하는 과정에서 회장이 체력단련을 위한 트레이닝의 한 방법이라고 이해를 구하여 경험이 많은 회장의 사전 준비에 경탄을 했습니다. 회장은 농활에서 자칫 발생할 수 있는 체력 저하를 우려하여 미리 체력을 강화토록 하였던 것입니다.

2. 저수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잠을 잤는데 어찌 대장이 알고 엄벌을??

 농활은 정말로 힘겨웠습니다. 매일 아침 6시 기상...그리고는 각자의 임무를 부여받고는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뙤약볕 밑에서 일을 해야만 했고, 늦은 저녁을 먹고나면 자정을 넘겨가면서 반성회를 가졌습니다. 당연히 졸음은 더위와 함께 우리의 가장 막강한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날...저는 저수지쪽으로 논의 물꼬를 만드는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오전에는 이 논 저 논의 물꼬를 저수지 방향으로 잡고 말라비틀어진 검은 진흙덩이와 씨름을 하면서 열심히 작업을 했습니다. 농활을 왔으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그런데 점심을 먹고나니 우선 식곤증으로 도저히 작업을 수행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논에 난 좁은 농로에서 잘 수도 없고 만약 자다가 수시로 순찰을 도는 대장에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저는 그날밤 반성회 시간에는 거의 인민재판식 성토에 시달리게 될것이 뻔하니 몸을 잘 숨기고 잘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때 생각난것이 바로 저수지의 물속에 들어가서 자는 것입니다. 마을 저수지라 그리 깊지도 않고 또 저수지의 경사면도 완만해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저는 옷을 입은채로 저수지에 들어가서는 완만한 경사지에 얼굴중 숨쉬기 위한 공간만을 물 밖에 내 놓고는 거의 1시간 가량 잠을 잤습니다. 아주 완벽한 피서를 겸한 낮잠이었습니다. 얼굴이 조금 따가웠지만 온 몸이 물속에 담겨 있었으니 정말로 완벽한 피서를 겸한 낮잠이었지요.   저녁 반상회 시간에 각자 그날 수행했던 작업의 설명과 작업량, 앞으로 해야할 작업량 등을 보고를 하는 자리인데 저는 열심히 논의 물꼬를 만들었다고보고를 하는데, 갑짜기 대장이 옆에 있던 몽둥이를 집어 들더니 "엎드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혹시 잠자는 모습을 대장에게 들켰나보다고 생각하며 엎드려서는 엉덩이가 불이 날 정도로 얻어 맞았습니다.

 매질을 마친 대장은 한번만 더 농땡이 부리고 잠을 자면 정말로 무거운 벌을 주겠노라고 엄포(?)까지 놓는 것인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대원들이 무얼하는지 다 아니까 엉뚱하게 딴짓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을 하는데....아뿔싸....물속에서 자는 모습을 들킨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제 얼굴에는 물속에 잠겨있던 부분과 물 밖에 나와있던 인중 윗부분이 확연하게 표시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대장은 제 얼굴이 이상한 모습으로 탄것을 보고는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인지 또는 과거 있었던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행동을 유추해 내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거울을 보니.....에고...제 얼굴은 정말로 멋진 가면을 쓴 모습이었습니다.

3. 오늘은 아침 당번 ...메뉴는 뱀탕이다....

 매일 2명이 다른 대원보다 일찍 기상을 하여 대원들의 조식을 장만해야 했습니다. 새벽 4시쯤 일어나서 20여명의 아침밥을 장만을 하는 일인데 밥 단지를 올려 놓고 장작불을 지피며 대충 밥이 익는 냄새를 맡으면서 반찬은 무엇으로 할까를 고민하다가 대원들의 영양 보충을 위한 기발한 생각을 해 내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싸리 빗자루에서 제법 든든한 싸리가지를 몇 개 뽑아서는 농로에 나갔습니다. 농로에는 생각대로 개구리와 물뱀들이 있엇는데 싸리나무 가지를 휘둘러 3마리의 물뱀과 몇 마리의 개구리를 잡아 왔습니다.(음...제가 그렇게 무지막지 하냐구요? 그런게 아니고 농활을 하면서 극한적인 생활을 하다보니 생존을 위한 음식과 잠에 대한 욕구만 강해져서 뭐...눈에 뵈는게 없었습니다....저도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제 아침식사 파트너는 기겁을 했지만 제 계획(그 때는 순전히 대원들의 영양 보충만 생각을 했었습니다)을 듣고는 그 파트너도 동의를 했습니다. 개구리 다리와 뱁의 껍질을 벗기는 일은 그 친구가 했고, 저는 칼로 잘게 다지는 일과 음식을 만드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지금도 뱀을 먹지 않지만 그아직까지 물뱀도 먹는 뱀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개구리와 뱀을 커다란 쇠칼로 열심히 다졌습니다. 아주 잘게 다져진 덩어리는 분명 일반 고기와 다를바가 없어 보였고, 이것을 이용해서 시원한 된장국을 만들었습니다.

 대원들은 "오늘 식사당번 음식솜씨 최고다!!" 라는 찬사와 함께 커다란 가마솥에 담긴 국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습니다. 저는 먹고 싶지도 않았지만 미처 제가 먹을 국물 조차도 남아있지 않아 먹지를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반성회 시간....오늘의 맛있는 요리의 재료를 발표하자 여학생들을 필두로 여기 저기서 웩~웩~ 거리면서 난리들인 것입니다. 그 무섭던 대장은 흐믓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원들에게 고단백을 공급해 주느라고 수고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뱀이라면 기겁을 하는데 그 때는 어찌 그런 음식을 만들 용기가 다 생겼는지....지금도 수수께끼(? ===> 어디서 많이 본듯한 단어입니다)입니다.

 제게 있어 농활은 도시보다 뒤떨어진 빈농을 위한 진정한 봉사의 기회로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대학생활의 낭만이라는 기억은 아예 없고 어떻게 하면 농민들에게 반감을 주지 않으면서(농민들에게는 도시민은 선망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었으니까요...) 그들의 일을 도울 수 있을까에 대하여 상당히 고심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농활 기간인 20여일은 아예 죽었다고 각오하고 농활에 임했던 것이 당시 함께했던 대원들의 공통적인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이번 서울대생들의 농활 철수 기사를 접하며 제가 겪었던 농활에서의 에피소드 몇 개를 적어 보았습니다.

                                                                          < 如        村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eylontea 2004-07-0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수수께끼입니다... 그래서... 서재 주인 이름이 수수께끼???

호랑녀 2004-07-09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1학년 때는 순진하게 집에다 농활가겠다고 보고했다가 감금!당했고, 그 노하우 때문에 그 담부터는 말을 하지 않고 갔죠. 서울에 남아 공부 좀 해야겠다고 말하면서...ㅋㅋ
경상도 어디로 갔는데, 딸기 하우스를 하는 마을이었어요. 아저씨 한 분이 교통사고를 당해 거의 방치가 된 하우스 몇 동을 책임지고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려놓는 일을 했는데... 한 일주일 걸렸던 것 같습니다.
여대라서 몽둥이 찜질 같은 건 없었구요 ^^
낮에 동네 아이들 데리고 다니면서 놀았는데... 둘째날부터는 다들 차라리 밭에 가서 일을 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그때 일주일의 경험이, 농부의 며느리가 되어서 가끔 써먹을 수 있었습니다. ^^

조선인 2004-07-0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학년 때 안동으로 지역이 바뀌기 전까지 영양으로 농활을 갔습니다.
그곳은 워낙 물이 귀한 지역이라 규율의 대부분이 물 절약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루 딱 1번 씻는데 저녁에 물 반바가지로 이닦고 세수하고 발씻고, 그 물로 밭에 물주고.
10박 11일의 기간 동안 머리 감는 건 5일째 밤에 딱 1번 허락되고, 목욕은 불가.
계속 물을 재활용해야 하니 비누나 치약, 샴푸도 쓰면 안되고.
물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었던 정말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가을산 2004-07-09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한조각 거들랍니다.
제가 생선회를 처음 먹은 것이 봉사 덕이었으니까요. 어인 일로 비싼 생선회를? ^^

학생이었을 당시만해도 의료봉사를 가면 매일 수백명씩 진료를 받으러 왔었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료도 하고 역학조사도 하고 보건위생에 대한 교육도 하느라 점심은 먹을 시간이 없고, 새벽에 한번, 한밤중에 한번, 이렇게 두번 식사를 하는데, 마지막 날은 그나마 아침밥도 못먹고 오전진료만 하고 오후에 귀경을 해야 했습니다.

오후에 출발해서 어찌어찌 바닷가의 도시에 도착한 것이 거의 저녁때,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것이 전날 저녁이었으니, 거의 24시간을 굶은 샘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수고 많았다고 저희를 데려간 곳이 횟집이었습니다. 저는 생선회 못먹었는데.. ㅜㅡ
동기들은 덥썩덥썩 잘도 집어먹고, 생선회는 쑥쑥 줄어들고....
사람이 살자니, 24시간 굶었을 뿐인데..... 저도 생선회를 먹고야 말았습니다.
그 맹맹한 맛이라니.

지금도 생선회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는 '먹을 수' 있게 되어서 사회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


 
한국의 마애불 - 하늘과 땅이 동시에 열리는 공간
이태호.이경화 지음, 유남해 외 사진 / 다른세상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그저 평평한 바위를 보면 옛 사람들은 무엇이건 남기고 싶었을까? 아니라면 인간의 삶을 마치는 순간 또 다른 용화세계로의 승천을 꿈꾸어 왔을까? 우리 나라에는 참으로 마애불이 많다. 마애불이란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하는데 그 위치가 까마득해서 아찔한 느낌을 주거나 또는 길 옆의 너럭바위나 할것없이 우리 나라 전역에는 약 200여개의 돌에 새긴 부처가 자리를 잡고 있다. 마애불이 깊은 산중에 있거나, 또는 사람이 올라가기에는 너무 험준한 바위에 새겨졌기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동안 마애불에 대한 연구가 미진했던 것이 사실이었는데 전남대학교 이태호 교수는 그중 108개를 택하여 이 책에 담았다.

 바위에 새겨진 불상 하나로서 불교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던 옛 사람들의 의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백두대간이 몸속에 숨기고 있던 뼈에 해당하는 화강암에 어느것은 열심히 쪼아서, 어느 불상은 낮게, 또는 높게 양각으로, 또 어느 불상은 일부는 돋을새김으로 하고 일부는 선각으로 하는등 다양한 방법으로 조성된 마애불의 조성 동기가 저자는 산악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산을 생활신앙의 모태임을 말하며 마애불도 이러한 숭산(崇山)신앙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애불의 기원은 우리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산악숭배, 암각화, 고인돌 등의 거석문화 등과 결합하여 발전한 것으로 저자는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마애불의 도상학적 근거는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에 있는데 우리 나라의 지형적 특성에 다라 중국이나 인도와는 달리 원래의 바위가 놓인 자리에 불상을 조각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108개의 마애불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 앞서 첫번째 꼭지로 "한국 마애불의 유형과 변모"라는  마애불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1.마애불, 바위에 새긴 부처  2,한국적 신앙형태의 불교유적  3,마애불의 양식 변천과 예술미  4,마애불에 투영된 한국인의 심상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자는 이 글이 <불교문화연구> 제 7집에 실었던 논문을 수정해서 재 수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2부에서는 마애불에 대한 본격적인 안내로 들어가는데 2부는 크게 3개의 작은 꼭지로 구분하여 첫번째 꼭지는 '산 속 깊은곳에 숨은 은자'라는 주제로 모두 35개의 마애불을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 및 조선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마애불이 갖는 아름다움과 배치 형태, 그리고 수인과 법의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 미술사학적 설명을 담고 있다. 두번째 꼭지는 '삶터에 내려앉은 지킴이'로서의 마애불로 깊은 산중이 아닌 우리네 삶터 주변에 새겨진 마애불에 대하여 역시 시대별로 구분하여 설명을 하고 있으며, 마지막 세번째 꼭지는 높은 지역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게 조성된 마애불을 묶어 '세상을 굽어보는 하늘미륵'이라는 주제로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 시대에 걸쳐 조성된 마애불을 시대순으로 구분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한국 마애불목록'을 권말에 붙였는데 여기에는 명칭과 조성시기, 크기및 지정형태, 그리고 마애불의 소재지와 본문에서 다룬 쪽이 어디인가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정신문화연구원의 사진담당 유남해의 사진을 담았는데 ,작가가 상업 사진작가가 아닌 순수 사진작가라서인지 이 책에 실린 사진은 독자들을 훨씬 푸근하고 아늑함 속에서 읽을 수 있고 또 단순한 책속의 사진이 아니라 마애불이 주는 인간을 향한 무한한 자비를 느낄 수 있도록 자연광 위주로 촬영하였음을 알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이 책은 일반 안내서로서의 기능과 미술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개관서로서의 기능을 다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의 부피를 고려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왕에 처음으로 다양한 마애불을 담을 요량이라면 나머지 100여개의 마애불도 담았으면 하는 욕심이 들지만, 예술적 감상기준이나 미술사학적 중요성을 우선하여 선정을 한것으로 판단되는 이 책의 내용만으로도 우리 산하에 자리잡고 있는 마애불을 이해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할것이다.

                           < 如       村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의 향기 문화
박중곤 지음 / 가야넷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의 역사는 오랜 동안 외세의 침략으로 인하여 겨우 살아가기에도 바빴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고, 그 각박함속에 여유나 멋도 지극히 제한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은 이런 각박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영위하는 민족이라는 오해를 말끔히 씻어내고 있다. 저자 박중권은 우리의 전통 향기를 현대에 되살리기위해 국내외를 무던히도 돌아다닌 한국 허브연구회 부회장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저자의 노력만큼이나 전통의 향기문화와 현대의 향기문화가 어우러진 멋진 향기를 찾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우리민족에 있어서의 향기문화는 어떤것일까? 서향의 향처럼 자극적이지 않아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몰랐던 우리의 향기 문화는 의외로 우리 생활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으며 이러한 우리의 향기 문화는 우리 문화의 특징인 은근함속에 같이 담겨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은은하게 우리의 생활에 녹아드는 향기는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하며, 눈으로 읽을수도 없고, 육안으로 감별할 수도 없으며, 귀에 들리지 않지만 늘 우리곁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향기 문화는 서양에서 처럼 자극적인 향기를 뿜어대며 "나 여기 있소.."라고 스스로를 과시하지도 않으면서도 늘상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모두 여덟개의 큰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부터 여섯개의 꼭지는 우리 나라의 지방으로 구분하여 그 지방의 특징과 전설, 그리고 그 지방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나름대로의 향기문화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첫번째 꼭지는 강원도편으로 아우라지 나룻터에서 울려퍼지던 정선아리랑과 생강나무를 이용한 여인네들의 화장수, 삼탕, 쑥탕, 난초탕, 국화탕 등 식물의 향을 뿜어내는 건강목욕법, 설탕보다 달콤한 수국의 줄기와 잎을 이용한 감차 등 민초들의 향 문화를 담고 있다.

 두번째 꼭지는 바다와 만나는 경상도의 향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는 단순하게 후각으로 느낄 수 있는 향기분만 아니라 입으로 느끼는 향기문화와 불자의 마음을 우려낸 백련차, 입으로 느끼는 향신료의 대표격인 초피와 추어탕과의 만남, 우리네 서민들이 우리 산하 어느곳에서도 캘 수 있어 늘 가까이했던 둥글레차,와 서양에서 들어온 치커리차를 담고 있고, 세번째 꼭지는 격조높은 향기문화의 전승으로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향기문화를 담고 있는데 신라시대때 부터 옆구리에 차고 다녔다는 향낭, 최고의 건강식품인 더덕이 갖는 향기와 수없이 많은 전통차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동,서양의 허브와 허브 농장을 소개하고 있다.

 네번째 꼭지는생활에 스며든 향기를 담고있는 전라도 지방의 향기 문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광활한 평야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사용하여 빚은 곡차(술)로 문을 열고 있다. 한상 가득 차려진 한정식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香酒로 진도의 홍주를 비롯하여 도소주, 과하주, 이명주, 창포주, 국화주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선조들이 술과 향을 더불어 마실 수 있는 지혜를 가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다섯번째 꼭지는 땅에서 솟는 향기의 고장인 충청도의 향 문화를 설명하고 있다. 원래가 고려인삼의 본향인 양반 땅 충청도는 어디를 가던지 인삼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 있을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고장이다.이러한 인삼을 바탕으로 창포향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김종석씨의 창포농장을 찾아 이곳에서 생산되는 창포 향수등 창포 추출물을 이용한 향기 산업을 다루고 있다.

 여섯번째는 제주도, 울릉도등 바다위에 뜬 향기의 섬들을 다루고 있다. 한국의 남국이라 불리우는 제주의 유채꽃밭에서 채취되는 제주 향수, 그리고 천혜의 자연 보고인 울릉도의 향기와 불고기의 비린내 비슷한 향이나는 어성초차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일곱번째 꼭지는 향수와 향기가 갖는 상업성에 대하여 저자 나름의 의지를 토로하고 있으며 마지막 꼭지에는 세계의 향기 기행으로 향수산업이 가장 발달했다는 프랑스와 정원에서 자연그대로의 향기를 찾는 영국, 온통 냄새나는 식물인 허브로 넘치는 일본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우리 나라를 비롯한 각국의 허브관련 농장을 방문하여 그 지방에서 어떻게 식물을 이용하여 향기산업을 발전 시키는가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설명을 해 주고 있으며, 우리 나라 정선지방의 '아라리 자연향', 대자연을 품은 강원도의 'sorak', 신라 천년의 향기를 담은 'sorabal', 지리산의 야생화의 청초함을 가득 담은 'nogodan', 그리고 남국의 멋을 담은 'cheju' 향이라는 브랜드로 시판되는 우리 고유의 향기의 우수성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각 지역에서 개발된 향기는 소위 향수라는 이름으로 상업화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원래의 특산물에서 추출했다기보다는 조향사의 배합능력으로 이미지화한 상품이기에 보다 근원적인 우리의 향수와 향기 문화를 찾는 일이 시급함을 알아야 할것이다.

 저자는 향기 산업을 눈에 보이지 않는 황금이라고 표현하며 향수를 액체 황금이라고 하였지만 이 책에서 어떻게 해야 이러한 황금을 내 손에 쥘수 있는가에 대한 제시는 하지 않고 있다. 외국의 향기문화와 향수 산업을 둘러보고 온 저자의 입장에서라면 우리 나라의 향기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나름대로의 방안을 제시를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늘이 내린 선물로 비유되는 자연으로부터의 향기는 다양하게 발전시킬수 있음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 은은하게 우리의 생활속에 향기와 함께 배여있는 향기문화....지금부터라도 새로운 향기문화를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운 삶속에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대생들이 농활에서 호칭 문제로 농민들과 다툼을 벌이다 급기야는 농활을 철수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촌로가 칭하는 "아가씨...아줌마"라는 용어가 언어적 성폭력이라며 철수하고야만 서울대 농활팀의 결정을 보며 씁쓸함을 감출수 없습니다.

 저 자신도 대학때 "경암회"라는 농활 써클에 몸담고 4년간 매 방학때마다 농촌을 찾아 농민을 위해 소위 농활이라는 활동을 했었기에 농활이 어떤것인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농촌이나 도시나 별로 생활상의 격차가 없던 시절이 아닌지라 정말 농촌은 변변한 농기계 하나 없이 매번 수작업으로 벼를 심고, 소쟁기질을 해야하며, 제대로 된 탈곡기나 타작기가 없어 손으로 벼를 털어야했던 가난했던 농촌을 찾는 일이기에 20여일 농활을 다녀오면 피골이 상접하는 정도였지만 뿌듯함이 가슴속에 가득 찼던 그 느낌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서울대 농활팀의 철수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문제는 과연 그들이 농활에 어떤 문제의식으로 접근을 했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농활은 대접받기 위해 가는것도 아니고, 대학시절의 추억과 낭만 만들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몇 년전, 농활을 하는 학생들과 잠시 자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미리 준비한 돼지고기와 술로 하루를 마친 피로를 달래고 있었는데, 제가 농활을 다닐때는 그런 사치란 아예 금기의 대상으로 감히 일을 도와주러 가는 주제에 호의호식 할 수 없다는 것이 불문률처럼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학생들은 오후 휴식시간이라고 느티나무 밑에서 여기저기 누워 낮잠도 자고는 하였습니다.

 잠이 부족하고, 낮 동안의 농촌 일손을 거들고도 시간이 모자라 밤 시간에 모여 앉아 그날 있었던 봉사활동에 대한 토론과 내일 행할 봉사활동에 대해 논하며 깊은 밤까지 잠을 자지 못했던 농활이 이제는 너무도 변해버린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농활을 다녀오면 마치 월남인처럼 새카맣게 타버린 얼굴에 하얀이를 드러내고 웃던 그 모습이 이제는 놀러가듯 농촌을 찾으니...실제 농민들인들 속으로 제대로 반기기는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물론, 농활을 가고자 하는 학생들의 대부분은 일손이 모자라는 농촌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돌아오겠다는 각오로 출발을 한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사태는 주와 객이 바뀐 조금은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아닌가 합니다.

 인터넷 매체에서 이에 대한 설문조사가 진행이 되기에 잠시 제 의견을 표하고 결과를 보았는데 80%가 넘는 사람들이 서울대생의 철수에 대해 부정적인 의사표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농민회의 말처럼 도시민과 농민...더군다나 급진적인 학생과 보수적인 촌로의 사고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만약, 서울대생들이 촌로들의 사고를 자신의 사고에 맞춰달라고 하였다면 이것은 농활이 아니라 대접받으러 간격입니다. 누구에게 도움을 준다는것은 도움을 받을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필요로하고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봉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상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사태는 그런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도 그들의 선배로서 지금도 농활을 나간 학생들을 보는일이라도 생기면 유심히 그들의 활동을 지켜보았지만, 입이 백개라도 그들의 농활은 선배들의 농활에서 보여줬던 노력보다 결코 잘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배웠다는 학생들...더구나 우리 나라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행동이 전혀 배우지도 못한 촌로들을 상대해서 철수라는 결정을 내렸다면...앞으로 이들이 사회에 나와 타협이나 상생의 길을 찾기보다는  "'모아니면 도 "식의 사생결단만 추구한다면...오늘의 철수 사태는 단순히 농활 철수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고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아무리 머리가 좋은들 타협과 순응과 참음의 지혜를 갖추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뭉친 행동밖에는 달리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들의 이러한 행동이 경솔했음을 분명히 밝히며, 그들의 선배로써 충고를 하고 싶습니다. 농활을 행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분명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전의 농활은 정말 여러곳의 감시속에 행해졌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가운데서도 데모가 극심할때도 농활팀은  농촌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는 절대 금하는것이 철칙으로 받아들여졌었고, 감시기관에서도 그런면은 안심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봉사라는 차원에서 오로지 농민만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후배들이여....그대들은 농민들로부터 대접받기를 원하여 농활을 갔던것이었나?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차마 그대들에게 털어놓고 말하지는 못하겠다는 어느 농민의 하소연처럼 그대들의 농활 행태가 봉사보다는 오히려 누가되는것은 아닌지를 다시한번 생각해보게나....우리때는 집안에서 잔다는것은 생각도 못했었다네...어디 봉사활동을 한답시고 가서 농민의 집에 버젓하게 등대고 잠잘 생각을 했겠나? 쓰지않는 곳간에서 옹기종기 등대고 모기쫒으며 겨우 짧은 잠은 이룰수가 있었네....그대들이 제대로 자고 제대로 먹고, 피둥피둥 살이라도 쪄서 온다면....그대들은 한 여름 농촌에서 재미있게 피서나 하고 온것일세... 그대들이 농활을 마치고 떠나온 자리에서 농민들은 그대들의 흔적을 지우며 두번 다시는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네....겨우 호칭문제로 그대들은 떠나왔지만 그대들의 잘못된 판단은 단지 그대들이 서울대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도 신문의 기사거리에 충분히 오르내리라는것도 염두에 두게나....그리고..많은 사람들이 그대들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는것도 염두에 두고....농민을 위한 배려를 할 마음을 갖지 않았었다면 두번 다시는 농활을 간다는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게나....

 정말.....농민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배려하고 이해해야할 입장에 있는 대한민국의 지성이라는 학생들의 작태에 울화가 치밀어 몇 자 적어봅니다...그렇게 떠나와서는 창피함을 알아야지 이런 저런 이유를 단다는것 조차도 못마땅합니다. 늦었지만 그들이 진정한 지성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반성의 소리를 듣게 되리라 믿습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eylontea 2004-07-08 0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저도 저 기사보고 조금은 황당했더랬습니다..

호랑녀 2004-07-08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의 대학생(저는 87학번)과 2000년대의 대학생은 참 다르구나 생각했더랬습니다.
저희때는, 저희들의 행동이 혹시라도 대학생이라고 티낸다고 생각하실까봐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도 조심했었지요. 난생처음 그렇게 많은 아이들의 보모노릇을 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밥 먹었던 게 체했던, 그래도 평가와 반성을 하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꼿꼿이 앉아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대학생 조카아이를 보니 농활을 굉장히 낭만적으로 생각하더군요. 거의 엠티 수준인 것 같아요. 신문에 나지 않은, 뭔가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스무살 아이들에게 아줌마 아가씨라는 호칭이 굉장히 기분나빴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친구들은 벌써부터! 대접받는 데 익숙해 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조선인 2004-07-08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황당한 일이네요.
호칭이 문제가 되다니 농활간 건가요, 부킹간 건가요.
전 여대를 나왔는데 계집들끼리 집나와 싸대는 꼴을 볼 수 없다는 마을 주민들 입장 때문에, 입촌을 허락받지 못해서 할수없이 주말마다 밤차타고 내려가 일요일 하루 일하고 다시 밤차타고 올라오는 걸 반복하던 끝에 결국 농활대 입촌을 허락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허락을 갈구했던 건 봉사를 하러 가기 위함도 아니고, 브나로드를 위함도 아니요, 그곳에 배움의 길이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을산 2004-07-08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기상이변에 의한 재해가 아니라면 '도와주기 위해' 농활을 갈만한 곳은 거의 없습니다.
갈만한 곳이 없는데도 전통대로 어디건 꾸역꾸역 가야한다니, 준비하는 학생들로서도 힘들겁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봉사'나 '활동'을 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 그리고 준비가 필요하겠죠.

몇 년 전 '자원봉사 거부선언'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한 장애인이 쓴 것이었는데, '자원봉사'를 한다고 하면서도 클라이언트(복지상담이나 자원봉사의 수혜자)에 대해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전혀 사전 지식이 없이 와서 오히려 상처를 주고 가는 자원봉사자가 많아서 경각심을 주기 위한 글이었습니다.

안가느니만 못한 요식적인 활동은 과감히 통폐합해서 정말 제대로 할 사람들을 위한 활동만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수수께끼 2004-07-09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저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농촌의 고통과 어려움...그리고 농촌에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편인데, 농활을 떠나는 대학생들이 농활을 가서 발생될 수 있는 제반 문젯점에 대해 사전에 스터디를 하지 않은것 같아 답답했습니다.
저학년일때는 호랑녀님 말씀처럼 하루 일과를 결산하면서 제대로 숨도 못쉬고 선배들로부터 농활에서 범했던 실수에 대해 엄하게 꾸짖음 당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시대가 바뀌고 농촌에서 정말 일손 이외에 특별한 도움을 받을 여지가 없어 점차 농활의 의미가 쇠퇴한다고는 하지만, 일단 농활은 자신의 방학기간의 여유시간을 봉사라는 이름으로 버리는 것이기에 대상 농촌에 대한 우선적인 배려가 고려되어야 할것입니다. 물론, 제가 심하게 심하게 꾸짖기는 했지만 농활을 떠나는 요즘의 대학생 농활이 문제 야기를 목적으로 출발하지 않았으리라는것은 당연했으리라 생각되지만,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최종 결정을 내렸었더라면 이번 사태와 같이 지탄을 받는 일로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발불고 행차를 알리며 거대한 규모로 농활을 출발하기보다는 어디 정말로 일손이 필요한 깊은 산골에 혼자 가더라도 진정으로 일손이 부족한 농촌을 도울수 있는 농활이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