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면은 <금동계미명 삼존불>과 같고 뒷면의 명문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명문을 그대로 배꼈다는 북한의 불상이 정말 가짜인가? 어떻게 동 시대에 제작된것이 아님에도 명문은 똑 같을까? 배꼈다고 하는 명문의 내용은 무엇인가? 등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래의 그림 두개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그림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전면과 광배 뒷면의 사진입니다.



 

 

 

 

 

 

 

 

 

 

 

 

 

이 불상은 1963년도에 경남 의령에서 농부에 의해 발견이 된 불상으로 신라의 영토였던 지역에서 발견이 되어 아직도 논란이 많은 불상인데 뒷면의 명문에 의하여 고구려의 불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불상은 정영호 선생에 의하여 수습되었는데 당시 이 불상이 안치된 장소는 절터나 무덤이 아니라 임시로 무너져 내리지 않을 정도의 돌 함을 쌓고 그 속에 넣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정영호 선생은 이 불상이 북한군의 호지불로 후퇴 당시에 임시로 숨겨 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충식 선생은 이 불상의 크기가 16.2cm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호지불로 소지하고 다니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기에 정영호 선생의 북한군 호지불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신라 영토에서 발견된 것은 다소 의아하지만 경주의 호우총(壺우塚)에서 광개토대왕의 무덤에 사용되던 청동호우가 발견된 사례도 있어 다른 각도로 생각을 해 볼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이 불상은 발견후 광배 부분에 손상을 입어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같이 동강난 것을 접합을 했습니다.  장충식 선생은 만약 호신불로 소지하고 다녔다면 금을 입힌 불상의 어느 귀퉁이는 마모가 되었을텐데 전혀 그런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이 불상의 제작연대에 대한 논란입니다. 延嘉는 고구려의 연호로 己未年인데 539년부터 60갑자의 차이를 학자마다 보이고 있어 539년, 599년, 479년, 419년으로 보는가 하면 심지어는 시대를 아주 낮춰서 고려 광종시대인 959년으로 편년을 잡는 학자도 있는것 처럼 편년에 대한 정확한 결론도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전반적인 의견은 539년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불상의 세부 표현기법이나 양식을 논하는것은 조금 어렵기에 생략을 하고 바로 명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광배의 뒷면에는 47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명문은 모두 해독이 가능한데 명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延嘉七年在己未高麗國樂良

東寺主敬第子僧演師徒十十十十人共

造賢劫千佛流布第十十九因現義

比丘法潁所供養

연가 7년 기미년에

고려 낙랑 동사라는 절의 주지이며

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 승연을 비롯한

사도 40명이 현겁 천불을 만들어 유포한

 29번째 인현의불을

비구인 법영이 공양한다

 

  이 명문은 국내에서도 단 두글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입장이며 최근에는 불교의 경전인 <현겁경>에 나온 내용을 주장하여 비교적 타당성을 인정하는 추세인데, 문제는 오역한 명문을 북한의 유물에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컨닝을 하였는데 다시 고친것을 모르고 틀린 답을 그대로 적어낸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럼...문제가 되는 내용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불상을 발견한 후에 학자들은 명문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위의 파란 밑줄친 내용을 다르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因現義 이라고 해석된 부분을 回現歲佛로 해석하였던 것인데 이 명문에는 붉은 표시를 한 "歲"와 回現歲佛에서의 "歲"는 비슷하게 새겨져 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回現歲佛' '回現義佛' 해독하는것이 타당하다 할것입니다.  회현세불이란 의미는 억지로 해석하자면 다시 태어나는 부처라는 의미가 되는데 그런 의미로 사용될 경우의 새로운 세상이란 의미는 '現世'가 맞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回現義佛이란 한자는 <현겁경(賢劫經)>에서 말하는 因現義는 것을 밝혀내게 된 것입니다.

좌측 사진에 나타난 '回'자는 '因'의 고어로 판단이 되는 것이며 이는 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제29인현의불"과 같은 내용으로 가운데 들어있는 'ㅁ'이 바깥의 'ㅁ'좌측에 붙은 글자라는 것입니다. 고어라는 것도 경전의 내용과 일치하기에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 유물인 <연가7년명 금동일광삼존불>에는 모두 46자의 명문을 담고 있는데 47자의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에서 '主'자가 빠졌고 마흔을 뜻하는 "十十十十"대신 "此"로 음각되어 있는 것입니다.

 똑 같은 명문이 서로 다른 불상에 새겨진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특히 잘못 판독되었던 부분을 그대로 배끼는 실수를 북한 유물에 저질렀던 것입니다. 주최측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북한의 유물에 새겨진 명문은 후대에 새겨진 것이라는데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 편이지만 유물 자체는 고구려 유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 유물이 평양의 고구려 왕궁터에서 발굴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좌측의 명문 확대사진에서는 분명히 "回(회)"로 읽어야 될 한자입니다만, 문헌자료에 해당하는 불교의 경전인 <현겁경>이 있었기에 회가 아니라 "因(인)"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미술사학에서는 이렇게 문헌자료와 실물자료의 일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한솔동의보감에서 열렸던 전시회에 출품된 북한의 유물은 어떤 경로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전시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북한에서는 국보급 유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주최측에서 주장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유물 자체는 비교적 나이가 들은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 유물에 대한 명확한 출처를 밝힐 수 없었기에 똑 같은 명문을 새긴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먼 훗 날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한가지...저도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명문에 대한 구구한 논란이 될 때 "回"로 이해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관련 문헌을 찾아내고 그러므로써 명문에 대한 올바른 판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정확한 출토 경위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어야 할것이며 중국의 불상의 형태에 대한 연구로 제작년대가 언제인지도 명확하게 밝혀져야 할것입니다.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는 539년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비교적 많은데 이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바로 불상의 탄생이 언제인가를 알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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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6-22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꾸우벅~
그러나 모든 것이 명확히 밝혀지려면 통일이 되거나 남북교류가 활발해지거나 해야 가능하겠네요. 아쉬워라. 쩝.

수수께끼 2004-06-2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최소한 남북 학자간의 공동연구는 있어야 고구려 유물에 대한 정확한 재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조금씩 추진되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결과들이 나오리라 기대를 해 봅니다.

두뚜뚜 2008-12-0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도 연가6년명을 가지고 잇는데 . 감정결과 짜뚱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너무나 흡사하고, 글씨체가 너무나 흡사하기에 지금의 국보급하고 같이 만들어진 짜뚱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학자분들이 좀더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고 열심히 해서 진,가를 가릴줄 아는 분들이 되엇으면 합니다.
 

  (1)편에 이어 북한의 불상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불상의 형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사진은 신문에 난 사진을 옮긴 것인데 좌측이 북한의 문화재라고 주장하는 <연가7년명 금동일광삼존상>이며 <우측이 우리 국보 72호로 지정되어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계미명 금동삼존불상>입니다.

신문사진을 스캐닝해서인지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지만 좌측의 북한 유물은 우측의 유물보다 비교적 정교하게 제작이 되었습니다.

 똑 같아 보이는 두 개의 불상은 인물의 선이나 옷자락, 그리고 광배(인물상 뒤어 있는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왼쪽의 것은 인물도 선명하고, 옷 주름이나 손의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게 표현이 되어 부드러움 보다는 날카로운 면이 돋보이는 편이며 오른 쪽의 국보 72호는 연꽃 대좌를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편입니다. 이런 면 이외에는 광배에 담겨있는 문양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북한의 유물에 나타난 광배의 문양은 선(線)의 형태가 강하게 나타 난 문양이며, 우리 국보는 선이 아니라 낮은 돋을 새김을 하여 화염의 형태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북한의 유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또렷함이고 남한의 유물은 부드러움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드린것은 두 유물을 비교하여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선은 국보 72호로 지정된 <금동계미명 삼존불>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알아보겠습니다.



좌측의 사진이 바로 국보 72호인 <금동계미명삼존불>입니다. 이 불상은 구리로 만든 불상에 금을 입힌것으로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보살이 있습니다. 높이는 17.5cm이며 광배만의 높이는 12.5cm로 광배가 전체 높이의 약 2/3 정도 됩니다. 이 불상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나타난 삼불상 양식을 따른 삼국시대 작품입니다.

 가운데 석가여래의 갸름한 얼굴은 약간 앞으로 숙여져 예불을 드리는 중생을 굽어보는 형식이며 입가에는 살짝 웃는 미소를 머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소는 서산에 있는 삼존불의 미소(이 미소를 김원룡 박사는 '백제의 미소'라고 이름 붙였습니다)처럼 신격화보다는 인간에게 친밀감을 준다고 하겠습니다.

석가여래의 머리부분 뒷편에 둥근 형태는 두광(頭光)이라하여 성스러운 부처의 머리 윗쪽에 남는 서기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이 두광은 4개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맨 가장자리의 원 안에는 연꽃과 당초, 인동초 문양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뒷편은 몸의 서기를 나타내는 신광(身光)인데 불꽃(火焰:화염)무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삼존불은 대좌와 본존, 그리고 광배를 각각 따로 만들어서 꼬다리로 조합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분별로 주조하면 보다 섬세하게 만들수 있는데 이와는 반대로 <연가7년명 금동불>은 전체가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불상에서 자세히 살펴 볼것은 이러한 문양이 선으로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주물에 의하여 많이 또는 조금 튀어나오도록 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양각, 또는 돋을 새김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불상의 조성은 주로 밀랍을 이용해서 기본적인 조형물의 바탕을 만든 후에 틀을 만들어 구리를 녹인 물을 부어 만든 것입니다. 북한의 유물은 방법은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밀랍을 이용한 바탕의 틀을 만드는 과정에서 세밀하게 양각의 형태로 만들지 못하고 선을 그은 것 처럼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불심이 깊지 않은 사람이 제작을 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옛날만한 세밀한 기술을 발휘할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부처를 섬기기 위해 만들었다면 북한의 유물과 같이 대충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불상을 비롯한 종교와 관계돤 것의 조성에는 많은 정성을 필요로 하며, 마음마저 정갈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대충대충 하지는 않기 때문에 불심과는 관계 없이 조성된 것으로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위의 좌측 사진은 본존의 세부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육계라고 부르는 머리위의 살상투가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으며 얼굴의 세부 표현은 인자한 표정으로 상당히 섬세한 표현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측의 사진은 광배의 뒷 부분인데 윗쪽에는 명문이 있고 아랫쪽에는 본존과 연결하는 꼬다리가 있습니다. 이 삼존불의 광배 뒷면에는 모두 17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1자는 아직까지 판독되지 못하였습니다. 음각된 명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癸未年十一月一   日寶華爲亡  父趙ㅁ人造(계미년 11월 1일에 보화가 돌아가신 아버지 조ㅁ인을 위하여 만들다)                 * 명문중 'ㅁ'은 아직 정확하게 판독이 되지 않은 글자 입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신문에 게재된 사진으로 봐서는 두 불상의 형태는 비슷하나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더 중요한것은 광배의 뒷쪽에 있는 명문(銘文)입니다. 북한 유물의 명문은 위의 명문이 아니며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명문을 그대로 배꼈다는 것입니다. 국보 119호인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광배 뒷면에 어떤 명문이 있기에 그 명문을 그대로 배낀 가짜라고 하는지..... 그 이야기는 (3)편에서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如       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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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6-21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갈수록 궁금증만 유발시키고... 중간 중간 똑똑 끊으시다니... 잔인하십니다.
꼭 한참 재미있게 영화보고 있는데 광고가 튀어나와 황당해지는 주말영화같습니다. ㅠ.ㅠ

비로그인 2004-06-2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크!!....죄송합니다. 너무 길게 쓰면 오히려 읽으시는데 불편하실것 같아 일부러 끊었던 것인데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조금 길더라도 한꺼번에 다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미안~~
 

중년!그 아름다움!!!




요즘은 유난히 중년이라는 낱말을 많이 듣는다
그 안에는 기쁨보다 아픔이
즐거움보다는 서글픔이 진하게 깔려 있어 종종 나를 당혹케 한다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 벌써 불혹의 나이
지천명이라는 아쉬움
젊은 날들의 회상
앞으로의 날들이 지나온 기간들보다
짧다는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중년이란 참으로 신비스런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고 싶다



젊음은 예쁘고 화려하지만
중년은 아름답고 신비스럽다
지나간 삶 속에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추억을 가꿀 줄 알고
고독의 의미를 잘 알고 있고 오늘의 가치를
내일을 준비하는 여유가 있어 더 깊이 있게 생각할 줄 알기 때문이다



높고 높은 파아란 하늘처럼
뜨거운 폭염을 가셔내고
빨갛고 노오란 병풍으로 산을 물들인
늦가을 풍경처럼 중년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 풍경에는 익힌 세월에서의 따뜻한 배려가 있고
다른 이들을 껴안는 온기가 있고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자신감이 있고
항상 고여서 흐르는 사랑의 강물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생활에서
만족하지 못하듯
나 역시 가끔 내 생활에 염증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오늘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생활해서 후회없는 지금의 오늘을 기억하고 싶다



늙어간다는 초조함도 피곤의 짜증도 버리며
삶이란 시간과 함께 가는 것이며
그 속에서 조금씩 성숙해지며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이라 믿기에

중년 그 신비스런 아름다움
이른봄 풍경을 색칠하며 서로를 사랑하며
여유있는 중년이라는 길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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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6-18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중년이군요. 그런데 전 나이를 잊고 있었네요.
신비스런 아름다움을 과연 내가 풍기고 있는지, 모를 일이에요. ^^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내 모든 시선에 여유를 가져야겠어요.

비로그인 2004-06-1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나이를 잊고자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시하지 못한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젊게 살고 싶어도 젊은이들 사이에 끼어도 내 마음같이 젊게 봐주지 않고, 무늬만 중년이라고 아무리 외쳐댄들....이제는 어절 수 없는 중년....아름다운 중년으로서의 신비로움과 자신속에 살아야 할것입니다. 나이 마흔이 되면 자신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데...과연 나 자신은 그런 책임을 지며 살고 있는지...무늬만 중년임을 강조하지만, 사고는 늙다리로 구태가 뭍어나지 않는지....하지만 속으로는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은 아직도 순수한 18세라고 말입니다...

비로그인 2004-06-1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퍼갑니다................
 
한국 불교미술 연구 스터디 파일 4
장충식 지음 / 시공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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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시공사에서 study file라는 시리즈물로 출간된 전문서적의 하나이다. 회화, 도자, 그리고 조선의 화가 윤두서을 엮은 책과 같은 시리즈로 네 번째 책이다.장충식 동국대학교 박물관장이 그 동안 미술사학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발표했던 50여편의 논문중에서 1차로 선정한 20편의 논문을 싣고 있는 불교미술사학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6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불교 조각, 석조건축, 불교회화에 이어 현장조사를 통하여 논란이 되었던 사안을 입증하기 위한 논문, 마지막에는 금석문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불교미술의 인식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개괄서와는 달리 저자가 학계에 몸 담고 많은 유물을 접하면서 잘못 알려진 내용이나 또는 조사가 미진했던 부분에 대한 보강조사와 논란이 되었던 유물에 대한 의견을 저자의 끈질긴 노력으로 원래의 자리로 바르게 가져다 두려는 과정을 담고 있다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것은 저자가 유물을 접하며 그동안 타인에 의하여 발표되었던 논문이나 연구 결과에 대한 의문이 발생할 시 많은 자료를 찾아내어 타인의 주장이 잘못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이른바 불교미술 바로세우기의 고된 작업이라는 연구 결과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자칫 결여된 객관성으로 타인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논문의 불확실성에서 출발한 저자의 의문은 다양한 문헌자료 속에서 하나 하나 양파껍질을 벗기듯 그 정체성을 밝혀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문중에는 다른 사람의 오독에 대한 즉각적인 반론 보다는 저자가 갖는 오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구도자의 마음 가짐으로 필자 나름대로의 증거를 들이대는 해답을 추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책은 단순한 안내서가 아니기에 전공자가 아니라면 상당히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 있다. 특히 저자가 주장하는 것과 상충되는 내용을 담은 논문을 읽고 비교하지 않는다면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 있는데 저자는 다양한 문헌자료를 제시하면서 오도되거나 오독된 자료에 대하여 단호하게 선을 긋고 있다. 이는 충분한 자료 확보에 의한 자신감에서 나온 결론이라고 할것이며 이러한 결론은 우리의 미술 사학의 깊이를 한층 깊게 해 준다고 하겠다.

 저자는 오랜동안 미술사학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많은 유물을 접해왔고 나름대로의 뚜렷한 주관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사리 봉납에 관한 사항으로 <계단도경>에 의한 사리탑의 설치이다. 이런 논리는 유일하게 저자가 강력히 주장하는 사항으로 통도사 금강계단이나 금산사의 계단 등등 계단과 사리신앙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담고 있다. 이 분야는 아직 연구가 미진하여 반박 또는 동조하는 경우가 없으나 보다 다각적인 연구를 통하여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특이하게도 저자는 마지막 부분을 일반 미술사학자들이 잘 다루지 않는 사경으로 장식하고 있다. 이는 오랜동안 사경을 연구해 온 저자의 사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서 배출되는 자신감이라 할것이며 단순한 도서로서의 기능만 강조되고 있는 사경에 대하여 저자는 이러한 사경을 미술이라는 관점에서 접근을 하고 있다. 이는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金, 銀 등으로 대장경을 베껴 써온것을 찬란한 문화의 한 영역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은 금석문과 새로 발견된 문헌자료를 접하며 저자가 느꼈던 감회와 분석 결과에 나타난 의외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새롭게 발견되는 금석문이나 문헌자료에 의하여 기존의 유물을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을 엮었으며, 말미에는 <삼국유사> 卷3 탑상편의 체재에 대한 문제와 몇 항목에서 나타나는 혼란과 모순을 객관적 입장에서 조망하고 있다.

  저자는 문화 유물에 관한 의문에서 시작하여 현장답사는 물론이고 찾지 못했던 문헌자료를 엄청나게 확보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객관적 자료는 자칫 오독되거나 잘못 알고 넘어가는 부분에 대한 정립임과 동시에 불교미술사를 행하는 전공자에게 바른 해법을 찾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할것이다. 30여년간의 연구 발표 논문은 단순한 보고서와는 달리 문제점에서 발생하는 의문의 해답을 찾기위한 출발로 시작되어 객관적인 입증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논문이 나오기까지는 저자의 엄청난 노력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불교미술사학에 관한 전문 학술서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담고 있는 명저라 하고 싶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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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사학이란 학문이 참으로 재미는 있지만 쉬운 학문은 아닌것 같습니다. 우선은 워낙 방대한 분량의 문헌이 남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 대한 완전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문헌자료를 인용함에 있어서도 우선은 많이 읽고 찾아본 사람이 유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문헌 자료에서 인용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인용된 부분이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문헌 자료의 신빙성에 대해서도 재고를 해 보아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실증자료와 문헌자료의 일치여부가 옳다, 그르다를 말하기에는 곤란한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들 정사라고 하는 <삼국사기>와 야사에 속하는 <삼국유사>가 대표적인 문헌자료에 속하는데 이 마저도 사실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자료가 모두 고려시대에 편찬이 되었기에 고려 이전의 사실에 대한 역사적 내용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맞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후대에 문화재와 미술사학을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백제의 무왕이 세웠다고 하는 미륵사지의 발굴시에 신라 관직명이 음각된 작은 항아리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그렇다면 이 작은 조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백제 건축물로 알고 있는데 신라의 유물이 나왔다면 일차적으로는 "여기서 왜 신라의 유물이 나오지? 이 탑이 그럼 신라와 연관이 있나?"라는 의문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조에는 무왕이 세운 탑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정도 <삼국유사>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당대에 작성한 것도 아니요...직접 보고 작성한 것도 아니기에 사실은 이야기를 적은 내용이라고 할것인데, 다만 '어디어디에 의하면...'이라는 출처가 있어 일반적인 이야기 책과는 달리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어디 어디에...'라는 것에 대한 검증은 문헌이 남아있지 않은지라 할 수 없는 형편이고 그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백제가 세웠다고 알고 있는 미륵사지 탑의 바닥에서 신라의 유물이 발견 되었으니 생각을 고쳐 신라가 쌓은 탑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무척 많이 있습니다. 익산 왕궁리에 있는 5층탑은 분명 백제의 양식을 간직한 탑인데 탑 아래 고려시대의 기와가 나왔다 해서 제작연대를 고려로 보게 되었는데 이 또한 탑에 문제가 있어서 탑을 고쳤다던가 하는 사실은 전혀 무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궁리 5층탑은 해체수리를 하면서 사리장엄구가 발견이 되었고, 다른 것으로 대신 채워 넣었으며, 그 유명한 신라의 감은사지 석탑도 해체 수리를 하면서 새로운 사리장치를 납입하였는데 후대...우리의 후손들이 탑을 다시 고쳐야 할 경우 지금 넣은 물품을 보고 신라의 탑이 아니라 2000년대의 탑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이 경우는 단순 매납이겠지만 사실은 언제 언제 누가 고쳐서 다시 세웠다는 내용도 함께 매납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런 친절한 내용을 적은 경우는 극히 드문 형편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혼돈을 갖고 조사나 연구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발굴 결과에 대한 연구의 부족으로 학자간에 공감대 형성이 부족하여 상호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보이는 것은 정확한 문헌 자료의 부재에서 오는 결과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황룡사탑의 높이가 80여미터라느니...또는 100미터가 넘었다느니....당시 인구가 얼마였다느니, 또는 거북선의 모습과 내부 구조가 이렇다 저렇다니...등등 너무도 많은 분야에 달랑거리는 기록 한 장 제대로 남기지 않은 조상덕에 후손들이 옳으니 그르니 하는 볼성 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토인비는 "기록을 하는 민족은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고 <역사의 연구>에 적어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자의 중요성은 태양의 아들이라고 자처했던 잉카의 인디오 문명이 기록의 부재로 인하여 무성한 추측만 남은것을 봐도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것 같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저는 타임머쉰이라도 있다면 카메라를 달랑 메고 당시로 돌아가서 당시 상황이나 모습을 사진에 가득 담아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소!!"라고도 하고픈 마음입니다만 그런 일은 단지 꿈에 불과한 공상일 따름이라 앞으로도 많은 부분에 대하여 "왜?"라는 의문으로 다양한 검토와 연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알쏭달쏭 문화재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우려하는 마음이 하나 생겼습니다. 제가 쓰는 글은 단지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주십사는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아하~ 그게 그랬구나" 라고 단정을 하신다면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학설을 접하면서 나름대로 스스로가 판단하는 가장 근접한 학설에 고개를 끄덕여 주시면 된다고 하겠습니다.

  얄미운 우리 조상님네는 거북선의 그림 하나 제대로 남긴것이 없어 후손들이 무척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조상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이에 대한 끊임없는 반론, 그리고 반론에 대한 반론을 위한 연구, 이러한 반복과정이 다소는 지루하고 볼성사납다 할지라도 사실에 점차 근접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초기 1세대 학자들은 제대로 조사를 하거나 연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답니다. 그 분들을 결코 폄하하는것은 아니나 당시의 현실은 모든 여건이 제대로 연구를 할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며, 미술사학이라는 학문에 있어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때인지라 많은 부분 잘못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한 교정 작업이 현재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잘못이 바른 답인줄 알고 넘어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이순우가 쓴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보고서 1,2>가 나온지 한참이 되었음에도 맞다 틀리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제깐놈이 뭘 안다고 그래?"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되고 있다고 보시면 될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후손을 위해서라도 잘못 조사된 부분이나 연구된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인정을 하고 재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바로 <알쏭달쏭 문화재 이야기>는 과거에 조사되고는 두 번 다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우리의 문화재 중에서 의문이 간다거나 재론을 필요로 하는 유물을 한 번 짚고 가자는 의미에서 마련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부 알고 계시는 분야에서는 고개를 갸우뚱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 란을 통해서 논의되는 유물은 한 번쯤 되새김질을 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꼭 정답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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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2004-06-18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새겨듣겠습니다. <알쏭달쏭 문화재이야기> 재미있게 유익하게 보고있습니다.

두심이 2004-06-18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밥 숟가락 하나, 도자기 하나가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고 해서 무관심하게 흘려버려야 할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하나하나가 모여 그시대상을 나타내는 것일 테니까요. 이렇게 님이 보여주시는 정성으로 다음세대에 똑바로 된 하나를 아는 후손이 생겨날것이고, 역사라는 것이 그 작은 정성이 모인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