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 (2)편에서는 의문점을 제시하고 왜 그러한 것이 의문점으로 대두되는가를 하나하나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을 살펴보면 그 시대에 나타난 탑의 조성양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선 탑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가 일반적인 탑의 석재와는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며 특히 일반형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하였는데 왜 다른 탑과는 다를까? 라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문 몇 가지를 정리하여 보면

 1. 석탑을 구성하는 석재는 왜 다른 탑과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을까?

 2. 탑의 몸돌은 1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 층마다 받침이 모각(돌에 새겨진 형태)되어 있으나 유독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 상층 갑석에는 탑의 몸돌을 받치는 받침이 없을까?

 3. 탑의 기단석에는 용의 문양이 있는데 발톱이 다섯개로 이는 당시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의 황제만이 다섯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사용할 수 있는데 어떻게 발톱이 다섯개인 용을 문양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까?

 4. 임진왜란을 겪으며 사찰이 전소되었을 때 이 석탑도 그 피해를 보았는데 탑신석은 불길이 닿은 흔적을 보이나 유독 용문양이 새겨진 기단석에서는 불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까?

 5. 기단의 귀퉁이에는 죽절형(竹節形)의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음에도 탑신에는 단순하고 간략하게 날카로운 칼로 판 것 같이  선으로 우주의 형태만을 나타내고 있을까?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신륵사 다층석탑을 고찰해 보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왜? 대리석을 이용하여 탑을 조성하였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신륵사 경내에는 또 다른 탑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물 제 226호로 지정되어 있는 다층 전탑이 바로 그 탑입니다. 전탑은 주로 안동지방과 칠곡의 송림사 5층 전탑, 제천의 장락동에 있는 전탑과 같이 경상북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에 건립되었었는데 경기도 땅인 여주에 조성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남한강의 지류를 타고 전래된 것이 아닐까 판단됩니다.  신륵사가 위치한 지형은 鳳尾山입니다. 뜻풀이를 하자면 봉황의 꼬리처럼 형성된 산입니다.그리고 이 산에는 바위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신륵사 주변에서는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석재를 구하기가 어려워 돌을 벽돌처럼 다듬은 전탑을 조성하게 된것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전탑의 기단부를 형성하고 있는 화강암은 그 입자가 굵고 풍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보아서는 신륵사 인근에서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여 탑을 만드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리석이라는 석재를 그 재료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리석은 우리나라 황해도 해주 인근에서 양질의 대리석이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산량이 적은것은 물론이고 대리석의 크기 또한 대형이 아니어서 대리석을 이용하여 큰 탑을 조성하기는 불가능 하였고, 이에 따라 탑은 크기가 크지 않는 3m 내외로 조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문은 매 탑신이 옥개석을 포함하여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탑신 받침석이 모각되어 있으나 유독 상층 기단의 갑석 위에는초층 탑신을 받치는 받침석이 없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신륵사가 중창된 시기는 기록에 의하면 1467년입니다. 중창 당시 이 절은 세종 영릉의 資福寺로 중창된 절입니다.  만일 당시 왕실의 명령에 의하여 조성된 사찰의 탑이라면 과연 이렇게 부분이 결구된 형식의 탑으로 조성이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탑은 일반적인 조형물과는 달리 부처님을 대신하는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탑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功力을 필요로함은 물론이고, 탑을 조성함에 있어서도 온 정성을 다함은 당연하다 할것인즉 탑의 기단석위에 있는 1층 몸돌 받침석을 빼먹고 조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세번째의 의문은 문양에 관한 의문입니다. 조선은 明과 淸이라는 거대한 중국의 두 황제국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했었습니다. 매년 조공을 바쳐야하는 형제의 나라로서 중국 황실의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용의 발톱이 5~7개인 것은 바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두 황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륵사가 당시 아무리 임금의 원찰이었다 해도 황제를 상징하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문양으로 넣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발톱 5개를 가진 용의 문양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종대를 전후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라 칭한 이후에나 도자기 등에 발톱이 5개인 용의 문양을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륵사 다층석탑에는  제가 (1)편에 올린 사진에서 보는것 처럼 용의 문양은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용의 문양에서 발톱이 5개로 표현된 경우는 드문 예로 이에 관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 의문은 탑신석에서는 화재에 의한 그을음의 흔적을 볼 수 있으나 유독 아랫쪽인 기단석에서는 왜 그 흔적을 찾기 힘든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신륵사는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석재로 만들어진 탑은 그 와중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석재라서 다른 목조건물 처럼 화재에 견딜 수 있었지만 화재의 피해를 입었으며 사찰을 복구할 때 이 탑도 손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탑을 닦아 내었을것인데 유독 용문양이 조각된 기단석 부분만 닦았을까요?  물론, 그럴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부처님을 대신하여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불탑을 관리함에 있어 어느 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닦고 다른 부분은 방치한다는 것은 불가의 속성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화재로 인한 석재의 그을음은 아무리 닦는다고 해도 열에 의한 피해로 석재의 재질이 변함으로 인하여 화재의 잔재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현대의 신기술로도 불가능한 일임을 비추어 볼 때, 화재 당시에 이 탑의 기단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혀 피해가 없었거나 또는 화재후 다른 대리석재로 바꾸었다는 등의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 섯번째의 의문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 문양과 탑신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이 너무 극단의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아래 사진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인데 영락형(목걸이형)의 장식으로 조성되어 있음에 비해 탑의 몸돌 모퉁이 기둥은 아무런 조각도 없이 단순하게 얕은 선으로 모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단과 탑의 몸돌이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단석에는 매우 섬세하고 공을 들여 용의 문양과 더불어 귀기둥에도 세심한 조각을 했음에 비해 탑의 몸돌에는 겨우 흔적만 알 수 있도록 모각을 한것에는 분명히 어떤 사연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단지 조각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였다는 이유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다른 여타의 탑도 신륵사 탑과 같은 형태를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탑은 선대의 탑을 모방하여 제작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신륵사 탑에서는 일반적인 조선시대의 석탑의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탑을 조성하고 있는 석재는 대리석으로 일반 화강암과 같이 입자가 굵지 않아 조각하기에는 비교적 수월한 편임에도 일부에는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또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표현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제작 공정이라 궁금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신륵사 다층석탑은 몇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문점은 문헌기록이 있다면 자세히 풀어갈 수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이 의문점을 풀수 있는 단서가 없어 아쉬움을 남김니다. 조선시대의 이형석탑의 하나로, 대리석으로 조성된 이 탑은 그 제작 시기부터 재고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초기의 조사 결과에 따라 중창 당시에 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만, 나옹선사가 입적한 절로서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탑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절의 조성과 동시에 조성됨을 비추어 본다면 조선시대 이전의 이 절의 탄생과 관련지어 볼 필요가 있다 할것입니다.

 <에필로그>

  제 스승께서는 제가 제기한 다 섯 가지의 의문에 대하여 일단의 제자를 대동하고 신륵사 탑의 간략한 재조사에 임하셨었습니다.  주로 5가지의 의문 사항을 확인하는 조사였는데 대부분 제가 제시한 의문점에 동조를 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30여년전 다리가 없어 강나루에서 신륵사로 건너가서 조사를 하였으며 당시 그런 깊이 있는 조사를 하지 못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제가 제기한 5가지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시면서도 편년(제작년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노 학자의 조사결과를 번복한다는 것은 힘든 결정이었기에 그러셨던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신륵사탑의 기단석은 처음부터 같은 탑의 부속 석재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외부(혹은 외국)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유입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문양으로 보아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에서 도입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신륵사에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기단부가 심각한 손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왕실의 원찰로서 기단부를 새롭게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 탑의 정확한 편년을 위해서는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엇을 것으로 판단되는 기단석으로 사용되었던 대리석과 원래의 탑의 석재였던 몸돌 대리석에 대한 재질 분석을 통하여 원산지를 확인하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할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조급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탑의 건립연대를 밝히기 위한 작업으로 지속적인 연구속에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如         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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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6-1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다섯개의 발톱이 뚜렷하네요.
음...

두심이 2004-06-17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하네요..왜 그런지. 언젠가 또다른 문헌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되면 알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4번째 의문이 제일 궁금합니다. 계속적인 연구 부탁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자연속의 인간:은빛여울에는 쉬리가 산다
김익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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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손에 들고 책장을 휘리릭~ 넘기며 도판만 봐도 마음이 여유로와 진다. 도시속에서 생활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나라 민물에 사는 물고기의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어찌 여유롭고 풍요로워지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어렸을 때 누구나 여울에서 고기를 잡던 기억까지 떠 올리니 추억의 주머니마져 톡톡~ 털어내게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전 탄천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을 보았는데 저런 오염된 물속에서도 살아가는 물고기가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가까이 가서보고는 놀란적이 있었다. 그 낚시꾼의 살림그물 속에는 놀랍게도 붕어와 피라미, 그리고 갈겨니가 그득 들어있는 것이었다. 인간이 오염시킨 환경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종족 보존을 위하여 사투를 하며 살아왔고, 오염된 물 속에서도 살 수 있는 적응 능력을 키워왔었나보다.

 이 책은 중앙일보에서 발행한 "책으로 읽는 자연다큐멘터리" 시리즈중 한 권이다. 이 시리즈가 다 그렇듯이 이 책도 인간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연속의 생물...그 중에서도 물고기를 담고 있다. 저자인 전북대학교 김익수 교수는 이 책의 시작을 "물고기와 상징으로 본 물고기의 의미"로 열고 있다. 종교에서의 물고기의 상징과 우리 문화 속에 숨쉬는 물고기를 재미있게 풀어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생계의 수단으로 물고기를 필요로 하게된 배경과 우리 나라의 물고기에 대한 기록인 <재물보>, <자산어보>, <전어지> 등도 소개하고 있다.

 제 2장에서는 '물고기가 만든 소우주 하천 생태계'라는 주제로 물고기가 어떤 생김새이며, 물고기의 각 부분이 하는 기능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한편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천 생태계에서 나름대로의 영역을 꾸미며 살아가는 물고기의 먹이와 하천 생태계의 변화로 사라져가는 우리 물고기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하천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제 3장에서는 먹거리로서의 물고기를 분류하고 있다. '뛰어난 맛을 자랑하는 쏘가리', '진흙속의 영양덩어리', '긴 수염을 자랑하는 메기' 등등 식용으로 활용되는 물고기의 식생 실태와 습성, 그리고 잘 잡히는 지역을 담고 있으며, 제 4장에서는 우리 물빛을 닮은 우리 고유종에는 어떤것이 있으며, 그 이름이 붙여진 유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 민물고기의 서식지가 어디 어디이며 지금의 환경 변화를 보여주고 있어 우리 물고기의 보존을 위한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도 제시하고 있다.

 제 5장은 이러한 우리 나라의 물고기가 어떻게 자손을 퍼뜨리는가를 담고 있다. 변하는 환경속에서도 물고기는 스스로 터득하고 지금까지 행해졌던 대로 종족보존을 위한 생식 활동을 하게 되는데 우리 나라의 물고기의 번식활동은 어느곳에서 하고 있나를 알게 해 준다. 한편으로는 산란을 위한 물고기의 혼인식이 어떻게 인가니 모르는 사이에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자세한 관찰 결과도 보여 준다. 제 6장에서는 저자 김익수의 어류 학자로서 걸어온 과정을 보람과 그 보람을 얻기 위한 고생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말해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 민물학계의 대부격인 최기철 박사와 토종 민물고기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등을 담고 있다.

 마지막 7,8,9장은 환경 오염으로 인하여 우리 나라에서 사라져 가는 물고기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고 잇다. 특히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피폐해진 우리의 하천에서 살고 있는 우리 물고기의 현주소를 명확히 파악하고자 하였으며,사라져 버린 물고기와 너무 많아져서 문제가 되는 물고기 등을 예로 들며, 지금의 상태 그대로 두면 사라지게 될 물고기들을 나열하고 이들의 멸종을 막기 위한 방편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

 인가은 자연과 떨어져 살 수 없음에도 인간의 편리 추구로 인하여 물고기가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은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있다. 개발이 생태 사슬에 돌연변이를 촉발시켜 서서히..서서히...앓아가며 신음속에 사라져 가고 있다. 개발이나 보존이냐를 택하는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저자는 항변한다. 그 결정은 조금만 더 멀리 내다보며 무엇이 더 가치가 있는가를 헤아릴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자연은 더 나은 미래를 인간에게 보장해 줄것을 저자는 믿고 있다.

  침묵하는 자연, 그리고 침묵하는 강물속에서 물고기도 침묵한다. 금수강산 맑은 내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왔던 우리의 민물고기는 이제는 명종이냐 적응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멸종이나 적응이나 둘 다 물고기들에게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이곳 저곳의 물가에는 떼죽음 당한 물고기들이 허옇게 떠 오르고 있다. 인간이 길러 먹는 물고기로 인한 부영양화, 소나 돼지를 사육하며 물로 스며드는 축산폐수 등등 우리의 민물고기가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은 점점 더 어려워 지고 있다.

 저자는 이처럼 변화하는 주변 환경을 예로 들며 물고기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자연환경의 보존을 주장하고 있다. 위성사진으로보는 인공호수 시화호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개발과 오염, 남획으로부터 생태계를 지키는 길도 제시를 하고 있는데 그 세 가지 방법의 핵심은 우리 나라 물고기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와 애정이다. 이제 세계는 1992년 리우환경회의 이후 자연을 파괴한것에 대한 경각심과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한 개발과 보존의 조화추구 노력에 다 같이 힘을 합치기로 했다. 우리 나라의 물고기는 우리가 지키며 그들의 식생 환경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영원히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하게 될것이다.  이 책은 우리 나라의 물고기에 대한 습성과 종류, 서식지의 소개와 더불어 산천의 여울에 물고기가 뛰어 놀 수 있는 여건 마련을 추구하고 있다 할 것이다.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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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미술사
문명대 지음 / 한언출판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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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저자 문명대의 <한국 불교미술의 양식>과 붙어 있어야 할 책이다. 저자는 양식과 형식을 함께하는 "한국불교미술사"가 너무 두꺼워져서 부득이 두 권으로 나누었다고 하였으나 원래 양식과 형식은 하나됨이 당연한데 다른 도서처럼 한 권으로 묶지 않은점은 다소 불만이다. 결국 이 책은 <한국불교미술의 양식>과는 쌍둥이인 셈이다. 저자가 주장하듯 형식은 양식의 이해가 선행이다보니 두 권의 책으로 나누어 번갈아봐야하는 불편함을 독자에게 주고 있다 할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서론격인 序章과 5개의 큰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서장에서는 과연 불교미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한 내용들로, 불교미술의 정의와 종류, 의의, 기원과 전파과정 및 변천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 장은 "불교미술의 기원과 전파"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의 불교미술의 발전에 대하여 불상이 나오기 이전인 무불상시대의 불교미술과 북부지역인 간다라의 불교미술, 남부지역인 마투라지역의 불교미술에 대하여 설명을 하면서 동 시대에 나타나는 불상의 표현 모습의 차이점을 설명하여 두 지역의 불교미술품에 대한 판단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 또한 우리 나라에 불교가 유입되기전 먼저 불교를 받아 들였던 중국에서의 불교미술의 발전을 남북조 시대의 불교미술과 운강, 용문, 돈황 등 3대 석굴의 불교미술에 대한 조영시기와 특징 등을 설명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唐시대의 불교미술을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불교 미술이 중국에서 가장 성했던 당나라의 불교미술 부분에서는 간략하게 넘어가고 있어 우리 불교미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상세하게 알 수 없는 아쉬움을 주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4개의 꼭지는 "한국의 불교조각", "한국의 불교회화", 한국의 불교건축", 한국의 불교공예"로 불교 미술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다 다루었다. 저자는 불교미술에 있어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지 않고 분야별로 구분하여 시대적으로 설명하므로써 동 시대에 어떤것이 이루어졌었나를 비교하기 쉽도록 하였다. 특히 "한국의 불교조각"편에서는 불상을 중심으로 상당한 분량을 설명하고 있는데 시대적으로는 '발해'의 불상과 삼국시대 이후의 '후삼국'의 불상도 언급하고 있어 이 분야에 관심을 둔 독자라면 상당한 도움이 될것이다. 그러나 "불교조각"의 범주에 포함하여 고찰되어야 할 탑에 나타나는 각종 조각에 대해서는 건축분야에서 탑이라는 하나의 건조물에 포함된 부속물 정도로 설명하여 우리 나라 불교 미술에 있어서 조각의 완전한 설명을 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뿐만아니라 범종이나 불단, 그릇등의 조각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한것이 없어  이 책에서는 절름발이 '한국 불교조각'이 되고 말았다.

 '한국의 불교회화'는 고려 불화에 관하여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저자는 고려불화에 있어서의 주제와 아름다움, 양식에 관하여 한창 융성했던 고려시대의 불교미술에 있어서의 불화가 갖는 의미를 설명하므로써 왜 고려불화가 유명한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주고 있다. "불교건축"에 잇어서는 사찰을 비롯한 석탑, 부도등을 주로 다루었으며, 사리기도 건축의 범주에 넣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장에서도 저자는 발해를 별도의 시대로 구분하여 기와와 사원터등에 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불교 공예편으로 향로, 범종,전돌, 향완 등과 더불어 사리기를 설명하고 있어 이 장에서도 불교미술에 있어서의 공예를 다 다루지 못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저자는 <한국불교미술사>라는 큰 타이틀에 미치지 못하는 내용을 담고 말았다. 한국의 불교 미술을 한권의 책으로 엮는다는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전공자들의 필수 지침서가 될 수는 없을것이다. 이 책은 그나마 분야별로 나누고 시대적으로 살펴 보았기에 대체적인 불교미술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많은 부분에 대하여 언급이 없어 이 책은 전공서라기 보다는 일종의 안내서나 입문서로서의 기능이 크다 할것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언급하였듯 한국불교미술사를 평이하게 서술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책이라고 보면 될것 같다. 사족이지만 책의 내용에 들어가기전에 18페이지에 달하는 화보를 담고 있는데 종이 재질로 인하여 우리의 불교 문화재의 아름다움이 반감되어 버렸는데, 단순한 출판이 목적이 아니라 독자의 편에 서서 써비스할것이 무엇인가를 고려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如      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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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의 남한강을 끼고 신륵사라는 고찰이 있습니다.  이 절을 처음 건립한 시기는 신라의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을 뒷받침 할만한 유물이나 유적은 물론이고 문헌자료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 우왕(禑王)2년인 1376년에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서 입적하면서 절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조선조에 이르러서는 경기도 광주의 대모산(지금 남한산성의 송파쪽)에 있던 世宗의 묘를 여주로 이장하면서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절 이름도 報恩寺로 바꾸고, 전각이나 건물을 새로 꾸몄습니다.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고려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조성된 많은 유물이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입적한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선사의 부도를 비롯한 유물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층석탑이 있으며, 강변에는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세운 전탑등 다수의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신륵사의 유물중 다층석탑의 건립연대에 대한 의문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학문에서 형성되는 학파라는 개념은 한 스승 밑에서 배우는 입장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탑은 30여년전에 필자의 스승이 조사를 하여 그 조사 결과가 오늘날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탑을 조사하면서 제 스승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탑의 조성연대를 조선시대로 보고 있지만 저는 건립 시기가 조선시대 이전의 고려말, 또는 그 이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탑은 우리 나라에 있는 1300여기의 탑중 20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와는 달리조선은 억불정책으로 탑이 많이 조성되지 않은것이 이와 관련이 있거나 또는 기왕에 절간이 세워지면서 탑이 세워져 있었기에 새로운 탑의 건립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륵사 석탑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제가 보는 조형수법과 탑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 그리고 탑에 장식된 문양에 나타나는 조각 형식등에 대한 의문점으로 이 탑에 대한 재 조사를 했던 것입니다.  스승의 조사 결과를 제자가 번복하는 일은 학파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대단한 모험을 하는 일이지만 몇 가지 이 탑이 갖는 의문점을 기준으로 그 의문에 대한 하나 하나의 조사로 이 탑에 접근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탑으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먼저 탑의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2층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여러 층의 탑신(탑 몸통돌)을 얹은 사각형의 석탑인데 세부 조형을 살펴보면 신라나 고려의 조형수법과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기단석에 비룡(飛龍)을 조각하는 경우는 매운 드문 경우로 이것은 신륵사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의 내용을 담았는지 모르겠지만 조각 수법이 무척 세련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자칫 무겁게만 보일 수도 있는 탑의 무게를 조각이 덜어주고 있습니다.

 이 탑의 재료는 대리석인데 이 석재는 당시에는 구하기도 힘든 석재인데 왜 대리석으로 조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과연 이 탑이 보여주고 있는 양식으로 판단할 때 이미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의 탑인지..아니라면 언제 조성된 탑인지를 정확하게 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탑은 3m에 불과한 비교적 작은 석탑이지만 기단부 부터 탑의 몸돌인 탑신부에 이르기 까지 각 층의 돌은 모두 1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석탑의 각 부재를 1개의 돌로 만들게 된것은 대리석이라는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탑을 크게 만들 수 없는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탑은 일반적인 석탑의 전형을 그대로 따랐지만 각 부재에 있어서는 그 세부 감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는데 이 또한 재료가 대리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단부는 지대석 윗면에 단엽으로 복련문양을 조각하고 그 위에 2층으로 된 기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랫층 기단 갑석의 윗면과 윗층 기단 갑석 아랫면에도 연화문(蓮花紋)을 장식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에 나타난 용의 문양이나 우측 사진인 기단에 나타난 문양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며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                                                          <신륵사 다층석탑의 상하층 기단>

탑의 몸돌인 탑신부는 현재는 8층 탑신부 까지 남아 있지만, 몇 군데 옥개석의 체감율이 맞지 않아 원래의 정확한 탑이 몇 층이었는지를 추정하기는 쉽지가 않으며 탑의 맨 윗부분인 상륜부는 현재는 철제로 된 찰주(刹柱)만 남아 있고 다른 부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점을 살펴보면 신륵사 다층석탑은 지대석 윗면에 연꽃문양을 조각하여 화사한 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기단부에 연화문을 장식한 예는 많지만 이 탑 처럼 지대석에 연화문을 장식한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기단부에 있어서는 면석의 각 우주(귀퉁이 돌)에 화문(花紋)을 모각한 것이라든가, 기단 상층 깁석을 기단 하층 갑석의 하반부형(下半部形)으로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무거운 느낌을 줄이고자 하는 점은 이 탑에서 주목할만한 형식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지대석에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한 수법은 주로 스님의 무덤인 부도(浮屠)에 조각되는 수법인데 특이하게도 이 탑에서는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없던 문양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 (2)편에서는 이 탑이 갖는 5가지의 의문점을 제시하고, 그 의문점을 하나 하나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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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6-1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4-06-1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족한 글이라 송구스러운데 balmas님께서 가져가시기 까지 하신다니 더 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퍼가시는 님들을 위해서라도 자세하게...그리고 정성껏 글을 써야 되겠습니다.

두심이 2004-06-1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대됩니다. 제가 이렇게 좋은 자료들을 거져 읽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메시지 2004-06-1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신륵사를 세종대왕을 떠올리는 매개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문화재를 보는 시각을 좀더 깊게 갖고싶은데 쉬운 일이 아니네요. 님의 글이 도움이 됩니다.

비로그인 2004-06-1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심님...당연히 많이 읽어주신다면 더 없이 고맙겠습니다. 자주 들러서 보고 가시고 가끔은 흔적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메시지님...자꾸 보며 하나씩 이해하려고 하신다면 어렵게만 느껴지던 우리 문화재도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시게 될것입니다. 고개만 끄덕이는것 보다는 찾아 볼 기회가 되신다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신다면 그 순간부터는 전문가가 되시는 것입니다.
 


 

 

 

 

 

 

 

 

 

 

 

 

노트북 키보드 보호막도 준비를 안했는데 사랑하는 강아지가 이런 일을 벌인다면...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하는건지요?  특히 가을산님은 이런 위험이 항상 잔재하고 있을텐데....최소한 노트북의 키보드는 바꿔야만 하겠죠?   미쳐.....

                                                                                       < 如        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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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6-1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악~! 안돼~~~! ^^

sunnyside 2004-06-10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마이 갓~~ 근데 강아지 안 말리고 사진 찍고 있는 이 사람은 뉘신지...? ^^;

▶◀소굼 2004-06-10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범노트북이였던가...저런식으로 물을 흘려도 밑으로 새게 만든 노트북이 있더군요^^

비로그인 2004-06-10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단을 쳐도 강아지는 눈만 멀뚱~ 멀뚱~ 다들 아시잖아요? 강아지가 잘못을 하고나서는 눈만 멀뚱거리는거.....그런데...복날은 언제죠??

비로그인 2004-06-11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복날에 저 강아지 잡아도 한입밖에 안됩니다.우리을 즐겁게 해주는 강아지 그냥 예쁘게 봐주세요..참 몇대 때려주는거 잊지 마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