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는 모임이 조금 늦은 시간에 끝이 났습니다. 오랜동안 모임을 이끌어 오시던 회장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시기에 환송연을 겸하다보니 석별의 아쉬움이 제법 길었던것 같습니다. 거의 자정이 다 되어 끝이 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창밖으로는 밤공기가 싱그럽기까지 했습니다. 서울의 교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혼잡하고 저녁 7시 30분에 시작하는 모임 장소에 가려고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출발을 했지만 거의 2시간이나 길바닥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도착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그나마 자정 무렵에는 차들도 제각기 잘 곳으로 들어가서인지 싱싱 달릴 수 있었습니다.

2. 예술의 전당 앞쪽에서 신호 대기중 언뜻 플랭카드가 눈에 들어오길래 읽어보았습니다. "내일은 어버이날...부모님께 전화를 겁시다" 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그러고 보니 내일이 어버이 날이었습니다. 어버이날은 카네이션이라도 달아드리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잠시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양재동을 들리기로 하였습니다. 청계산 입구에 즐비한 꽃집이 생각나서였지요

3. 자정이 넘은 시간임에도 몇몇 꽃집은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어버이날이라서인지 호텔 등지에서 주문받은 카네이션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는데 제가 카네이션을 사겠다고 했는데도 팔 물건이 없다고 합니다. 주문 받은 꽃다발을 만들 수량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이 켜져있는 이곳 저곳의 화원을 들려도 모두가 같은 대답이었기에 마지막 집에 들어가서는 통사정을 해서 코싸지 2개를 겨우 구할 수 있었습니다.

4. 본가가 제가 사는곳과는 3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근무를 하면서 본가에서 다니고자 했지만 부모님께서는 두분이 일흔을 넘긴 상태에서 아들 수발을 할 수 있느냐면서 제게 원룸을 추천해서 그 말씀에 동의를 하고 원룸에서 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일주일에 적어도 3번은 본가에 들려야지 하는 마음이었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1주일에 한번 찾아뵙기도 힘이 들더군요. 사실 아침 출근을 위해 아침밥을 지어줘야 하고 또 밤에 늦게라도 다니게 되면 걱정하시는게 부모님의 심정인지라 저도 부모님의 뜻에 따르기로 한것이지만 지금도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수시로 전화로 확인을 하시는 편입니다.

5. 오늘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서 본가로 갔습니다. 노친네들이시지만 이른 새벽이라서인지 두 분께서는 아직 잠자리에 계셨습니다. 주방에서 두 분이 깨실라 살그머니 쌀을 씻어 밥을 앉히고 미역을 넣어 국을 끓였습니다. 나머지 반찬이야 있는 반찬을 그대로 꺼내 식탁위에 상을 차렸습니다. 그 때서야 어머니가 먼저 일어나시고는 깜짝 놀라시길래 카네이션 코싸지를 가슴에 달아들이며 "감사합니다...그리고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 녀석아 속이나 썪이지 말아라.." 하시면서 그래도 흐믓해 하셨습니다. 출근시간이 다가와 저는 식사만 차려 드리고는 바로 본가를 나왔습니다.

6. 어렸을 때 부터 부모님은 제게 더 없이 커다란 의지처이자 장애물이었습니다. 항상 제 눈에는 거대한 산 처럼 여겨졌고 그 거대한 산은 영원히 그렇게 존재할 줄 알았었습니다. 몇 년전부터 가끔 식사를 하면서 부모님의 옆 얼굴이나 마주 보는 얼굴을 대하면서 두 분에게서 이제는 세월의 골이 상당히 깊게 패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몸의 살도 많이 빠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쪼그라드는 얼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길어야 15년이 이 두 분의 수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큰 아들로서 두 분께 너무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음이 정말로 죄송함을 느끼게 만들더군요.

7. 한 5~6년전만 하더라도 TV뉴스나 언론 보도를 보며 아버님과 의견이 다르면 기를 쓰고 아버님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전형적인 보수적 사고를 가지신 부모님과 조금은 개혁적 사고를 가진 아들이 사사건건 부닥치는 일은 흔한 일로 그럴때마다 아버님은 저를 나무라고는 하셨지만 고집 쎈 아들녀석은 한번도 아버님에게 지려고 하지 않았었습니다. 제가 두 분이 이제는 늙었음을 가슴속에 받아들이고 나서는 아무리 아버님이 소위 <말 같지 않은 말씀>을 하시더라도 모두 수용을 하고 있습니다. 설령 제가 속이 뒤집힐 정도로 틀린 말씀을 하시더라도 이제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답니다. 제가 철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부모님을 대하다보니 오히려 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말씀을 안하고 계실지는 몰라도 이제 두 분께서는 저를 든든한 산으로 여기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두 분이 정정하게 살아계심 조차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 제가 누리는 큰 행복임이 틀림 없고 두 분이 큰 산에서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 힘을 예전 처럼 발휘하시지는 않더라도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렇게 큰 산으로 자리하고 계실 겁니다.

 단지 어버이날이고 제가 밥 한끼를 차려드려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어머니를 뵙고 출근을 하니 그렇게 마음이 가볍고 기쁠수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것이 그나마 효도가 아닐까를 생각하면서 이제 조금 더 부모님을 많이가슴에 담아 둘 공간을 만드는데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는 두 번 다시 뵙지 못할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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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06-3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분이군요 ^^
 

1. 그란 다름이 아니라 복싱을 하던 '심성영'이라는 친구를 말함입니다. 통합병원에서 전역 결정이 내려지고 육군 본부에서 최종적으로 전역 결정이 내려져서 그는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함께 전역 인사(통합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소속이 변경이 되어 전역 신고는 통합병원에서 하게 됩니다)차 부대를 방문 하였고 우리는 그 동안 그를 위해 모금해 두었던 500여만원을 전달하였습니다.

2. 그는 무척 살이 쪄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복싱은 계체량 종목으로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에 운동 중에는 미처 살이 찔 틈이 없습니다만 잠시라도 운동을 멈추면 급격하게 살이 오르는데 이 친구도 시력악화로 운동을 하지 못하다보니 눈에 띄일 정도로 몸이 불어 있었습니다. 시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어 한쪽눈은 0.01로 나오고(0.01이라는 시력이 있다는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좀 나았던 눈은 0,1이 채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이 친구가 물음에 답변하는것은 시력이 보여서가 아니라 목소리로 판단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3. 말씀드렸었지만, 이 친구는 '눈의 유전적 요인 + 복싱선수로서 시합및 훈련간 머리의 충격'이 시력 약화의 직접 원인이 된것으로 판명이 났고 최종적으로는 국가보훈처에서 시행하는 중앙보훈심의 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장애등급이 판정이 날것입니다. 물론, 복무중 장애로 인한 전역이기에 원호대상이 되고 얼마간의 연금이 주어지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만 23세의 그가 앞으로 두 눈을 버리고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하면 천만금이 나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500여만원은 모금액으로는 체육부대에서 가장 많이 모아진 금액이라고 하는데 이 금액은 단지 그의 일생중에 찰나에 일순간 동안의 평안만 가져다 주는 미약한 정도일 뿐일것입니다. 식당에서 어렵게 일하시는 그의 홀어머니의 가슴에는 얼마나 커다란 상처가 남겠습니까?

4. 그는 그래도 웃으면서 저희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를 대하며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은 그 자리에 참석한 부대 관계자의 공통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뭐라 제대로 된 위로의 말을 찾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던 자리였던것 같았습니다. 저 자신도 지금은 그로 인해 마음이 무척 아프지만 언젠가는 그도 제 마음을 떠나게 될것입니다. 아니...그를 떠나보내게 될 제 마음의 간사함이 더욱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다른 어던 불행보다도 크게 여기는게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두 눈의 시력이 감퇴되는 것은 그의 불행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일지라도 그와 함께 했고, 시합후 땀 범벅이 된 그를 껴안아 주었던 저이기에 쉽게 잊혀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가 웃으면서 제 곁을 떠나듯이 늘 그 웃음으로 세상을 이겨나갔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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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시 쉴 시간을 갖는 동안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방치해 두었던 슬라이드 필름을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슬라이드는 현상을 하고나서 마운트에 넣고, 매 장마다 84매로 구성된 이름표를 출력하여 어디에 있는 무엇을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접착식으로 된 스티커를 붙여야 합니다. 책상이다 책꽂이다, 또는 책상 위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필름을 대충 추리니 언뜻 보기에도 2000장은 되는것 같았습니다. 한번 촬영을 나가면 보통 36컷 짜리 필름을 10통을 사용한다고 해도 360컷이 되고 몇 차례 다녀오면 금방 2000컷 이상의 자료가 발생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2. 화일에 들어 있는 필름을 한장씩 잘라서 마운트에 집어 넣는 작업은 필름면에 손가락이 닿지 않도록만 하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랍니다. 단순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라 조금은 지겹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그 필름이 무엇이라는 것을 마운트에 붙이는 것이랍니다. 한글에서 문서만들기를 택하고 거기서 슬라이드용 문서만들기에 이 필름이 무엇이라는 것을 인쇄를 해서 마운트마다 붙이면 끝나는 것인데 이것도 매번 촬영 대상이 달라 금방 식별이 가능하다면 그나마 빨리 마칠 수 있는데, 비슷한 대상을 찍었던 필름이라면 정말 분류에 애를 먹게 됩니다.

3. 예를 들어 건축물이나 석조물 등은 금방 구분이 가능하지만 내부의 단청을 찍었다던가 또는 탑의 세부를 촬영한 필름은 뒤섞이면 찾는데 무척 애를 먹게 됩니다. 어느 경우에는 찾다 찾다 어디 것인지를 몰라 미분류인 상태로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 하면 될것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필름을 수십통 현상하다보면 그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지요. 이렇게 분류를 마치고 스티커가 첨부된 필름은 필름 보관용 박스에 넣어져 보관을 하게 되는데 수 천장의 필름을 널부려뜨리고는 하나 하나 정리를 해 나가면 조금씩 방안의 여유 공간도 늘어나게 되지요.

4. 그런데 방금 끝날것만 같던 이 작업도 벌써 열흘이 넘었음에도 마치지 못하고 방과 거실에 깔려 있습니다. 출근과 퇴근시에는 침대에서 몸만 빠져나와 옷을 입고 널부러진 필름이나 필름 보관용 플라스틱 박스를 밟을까봐 조심 조심 발걸음을 옮기게 되고 퇴근 후에는 어디 필름만 정리할 시간이 있나요? 시간이 없는 경우에는 겨우 발을 디딜곳만 골라서 딛고는 또 내일로 미루고 넘어가게 됩니다. 말하자면 책상과 침대...그리고 세면장 입구를 제외하자면 온 바닥에 지뢰가 맏혀 있는것이나 다름없어 발걸음 하나 옮기기도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5. 뭐...위에 분류작업이 쉽지는 않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거의 제 게으름에 의한 산물이라고 해야 할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프로라서 필름으로 밥을 먹고 사는 실정이라면 절대 이렇게 방치하다시피 놔두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아닌지라 시간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들락날락 거리는 제 입장에서도 어서 치워야지...라는 의지만 굴뚝 같답니다. 그나마 하루에 십 수컷이라도 차근 차근 정리를 해 가니 발을 디딜 틈이 조금씩은 넓어지고 있어 다행이 아닌가 합니다만, 또 촬영을 하고 돌아오게 되면 지금 바닥에 널려 있는 필름보다 더 많은 필름이 깔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6. 오늘도 퇴근해서는 발을 높이 들고 지뢰밭을 피해 가야할것 같습니다. 기왕 게으름에 대해 이곳에 글을 올렸으니 조금 속도를 빨리해서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게으름의 가장 큰 원인은 필름을 들여다 보다가 구분이 되면 바로 스티커 작업을 해서 출력을 하고는 붙여야 하는것을 그 필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이러니 진도가 늦어지는것 같습니다. 오늘부터는 정말 후다닥~ 해 치워서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짜증날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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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5-03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내심이 많이 필요한 작업일 것 같네요.

비로그인 2004-05-04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맞는 말씀입니다. 인내심도 중요하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전문성이 있기에 전업 작가가 해야할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참에 전업할까요?
 

1. 우리 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당연히 국가를 상징합니다. 특히 외국에 나가서 우리의 태극기를 보면 왠지 모르지만 가슴속이 찡~해지면서 코끝도 덩달아 찡~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  국내에서는 저녁 6시만 되면 방송이나 공공기관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던 하기식 방송이 사라진지 오래이고 파출소나 공공기관에 걸려있는 태극기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지는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던 태극기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운동장에서 또는 거리에서 흔하디 흔한 상품처럼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을 외쳐대며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또는 이마에 태극 문양이 담긴 머리띠를 질끈 동여메고 우리 나라를 응원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대단한 애국자인듯 뿌듯한 가슴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2. 그런데, 한가지 생각을 좀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녁 6시에 관공소에서 태극기를 내리던 행사는 왜 없어졌는지를 알아본다면....그리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해 태극기의 손상이 우려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시 계양을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한번쯤을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묶었던 사슬에서 와장창 해방된듯한 기분에 젖어 들었을 때, 국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발생을 했습니다. 그것은 저녁 6시에 방송에 맞춰 시행되던 관공서의 하기식 행사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모두 걸음을 멈추고는 하기식에 참석을 했었는데, 어느날 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런 행위를 아무런 꺼리낌없이 그냥 남의 집 개가 짖는 정도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3. 파출소에서는 방송에 맞춰 하기식을 하며 파출소에 있던 경찰들 모두가 국기봉 앞에 집결하여 하기식 동안 경례를 하던것이 이제는 시간만 되면 한사람의 경찰만이 태극기를 내려서는 접어들고 파출소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것이 자꾸 언론에 보도가 되자 정부에서는 이 판에 하기식이고 뭐고 그냥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계속 게양을 하자! 라는 발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을 열창하던 국민들의 행사가 끝난 다음의 거리 풍경을 보면 과연 우리가 우리의 국기인 태극기에 대해 얼마만큼의 존귀성을 부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광화문에서 행사가 끝난 후 그 바닥은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널부러진 태극기의 잔해가 그득했습니다. 세탁을 해서도 사용하지 않도록 되어 있을만큼 그 존엄성을 인정받았던 태극기는 이제는 행사시에 잠시 사용되는 일회용 도구로 전락해 버린것이었습니다.

4. 저는 가끔 외국에 나갑니다. 그것도 개인 자격이 아니라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인솔하고 말입니다. 왼쪽 가슴에는 우리 태극기가 달려 있고 뒷 등판에는 <KOREA>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츄리닝을 입고서 말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이던 우리는 우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각국의 선수가 다 모인 자리에서는 각 나라의 국가가 어느정도로 인식이 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미국, 프랑스, 이태리, 독일 등등의 국가들은 유니폼 자체를 자국기를 이용하여 디자인 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국기에 담긴 색(주로 띠로 이루어진 국기에 들어간 색입니다)을 유니폼에 최대한 살려 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자기나라 국기를 저렇게 함부로 사용하지?"라는 의문을 갖기도 했지만 그런 디자인은 국기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훌륭한 활용사례인 것이었습니다.

5. 미국 국기는 옷에도, 그릇에도, 간판에에도 들어가는등 정말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국기를 생활속의  용품에 다양하게 접목하여 디자인화 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성조기를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국기에 대한 모독을 가장 엄하게 다루는 나라중의 하나가 바로 미국이듯이 정말로 국기에 대한 모독행위에 대해서는 전 국민이 분노하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국기가 바로 국권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합중국이라고도 불리는 다양한 인종이 함께하는 미국내에 어느인종을 막론하고라도 널리 퍼져있는 인식이기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성조기를 불태운다던가 하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를 미국에 대한 도전이요 파괴 행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6. 중부고속도로...  충무깃점 334km  상행선 우측편에는 3층 높이의 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중부고속도로와 직각으로 놓여진 형태로 북쪽은 하행선이 잘 보이고 남쪽은 상행선이 잘 보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 옥상의 남쪽과 북쪽 면 한 가운데 우리의 태극기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낮에뿐만 아니라 밤에는 잘 보이도록 불을 밝혔는데 특히 밤에는 태극기가 마치 액자에 담겨있는 것 처럼 잘 보입니다. 건물에 태극기가 걸린 경우가 일반적이기에 이렇게 옥상위에 담과 같은 넓은 평면을 마련하고 태극기를 그린 경우는 저로서는 처음이기에 무척이나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말로만 애국을 부르짖으며 이전투구하는 모습이 자주 언론에 보도될때면 저는 이곳을 지나면서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라는 자문을 하면서 이 태극기를 봅니다. 아마 정상 주행을 하는 차량이라면 길게는 2~3분 정도 볼 수 있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 사간...태극기를 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지가 궁금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런 태극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치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옥상에 태극기를 그릴 생각을 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도 궁금해 집니다. 그분이 어떤 의도로 태극기를 그리게 되었는지 그 연유도 알고 싶고요...  일회성으로..또는 단순 행사용품으로 전락해버린 우리 국권을 상징하는 태극기...  그 태극기를 옥상에 그려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만든 분.... 과연 어느것이 정상인지...혼돈의 세상속을 살아가는 삶 속에서는 좀처럼 가늠하기 힘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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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무실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남한산이 한눈에 들어오던 곳에서 도심속에 자리잡고 있는 봉원사(koex 앞의 절) 처럼 조용하고 아늑한 곳의 2층이 제 사무실입니다. 12만 여평의 대지중에 유일하게 제 사무실 가는곳은 전북 부안의 내소사 입구처럼 양쪽으로 커다란 소나무, 플라타나스, 떡갈나무 등등이 늘어선 길을 따라 500m 남짓을 들어간 호젓한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2. 여러 가지 마음이 아파야 했던 일들이 정리되고 이런 호젓한 곳에서 시간이 나면 책이나 볼 기회를 갖게 된것이 제게는 늘 원했던 일이라서 나름대로 만족을 하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통해서 보면 구리  판교간 고속도로의 남한산성 램프와 수서 분당간 도시고속 도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주 멋진 곳이지요. 단 한가지 흠이 있다면 창문을 열면 차량이 질주하는 소음이 조금 귀에 거슬리는 정도이지만 그리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듯 하답니다.

3. 제가 이 사무실로 옮긴것은 지난 4월 26일 이었고 그날은 마침 비가 내리던 날이라 비록 약간의 흙이 차바퀴에 뭍어도 숲길은 새로운 생명의 보금자리인냥 그렇게 푸르게 가슴속에 다가왔었고, 흐느적 거리는 봄 비 마져 저를 반기는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창문의 방향이 서남향이라 비교적 오후의 햇살을 많이 받을것 같았으나 비가 오는 창문을 통해 바라다 보는 도로의 모습은 또 다른 멋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4. 지난주중에는 정말 날이 좋았지요....  봄 날씨 치고는 덥다고 느낄 정도로 화창한 날이기에 두개의 창문을 활짝 열어 두었습니다. 싱그러운 바람이 사무실을 가득 메우는 느낌으로 왠지 상큼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책상에 앉아 제 일을 하며 시간이 조금 흘러가면서 저는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거름 냄새 비슷한 냄새가 나는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저는 단지 어디에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잠시 거름을 주나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5.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러 가자고 사무실 직원이 왔길래 방문을 나서면서 " 참 좋다, 조용하고...서울 시내에 이렇게 절간 처럼 조용한 곳이 우리 부대속에 있었던것을 몰랐었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깥으로 나 있는 계단을 내려가는데 역시 예의 그 거름 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무슨냄새지?  거름 냄새 같기도 한데??" 라고 일행에게 말하자 "아...그건 바로 저기 있는 밭에서 나는 계분 냄새입니다" 라고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5. 가만히 아래쪽 담장 넘어를 보니 도로와 사무실 사이에 담장을 벗하여 작은 밭이 있는데 고랑이 파여있고 열병하듯 비닐로 덮여있는 밭 이랑 가운데에 동그랗게 공간이 나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무슨 채소인지는 모르지만 봄이라서 파종을 하고 계분을 뿌린 모양이더군요. 제가 처음 창문을 열었을 때는 냄새를 느낄 수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후각이 마취가 되어 잘 느끼지 못했던 냄새는 바로 계분 냄새였던 것입니다.

6. "에고...어쩐지 경치가 좋다 했더니 망했구나..."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맴돌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 심정을 알기라도 하는듯 " 봄에는 잠시 냄새가 나는데 채소가 자라고 풀이 무성해지면 냄새가 사라져서 괜찮아집니다" 하는 것입니다. 어쩔수 없이 송화가루가 이리저리 날리는 봄 동안에는 맡아야만 한다는 말이겠지요.

  오늘은 서울 시청앞에 녹색광장이 마련되어 시민 누구나가 그 공간에서 마음껏 자연을 만끽하게 된 날입니다. 아직은 분수와 잔듸가 전부이지만 이제 나무도 심어 제대로 가꾸게 된다면 센트럴파크 처럼 아름다운 도심속의 공원이 되겠지요. 비록 계분 냄새가 난다고 해도 서울 시내에서 이렇게 호젓한 숲길을 걸어 사무실에 이르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길섶 좌우에는 할미꽃을 비롯하여 민들레가 하얀 덩어리를 만들고( 민들레중에는 흰색, 노랑색만 있는줄 알았는데 빨강색 민들레도 보았습니다) 산딸기가 노란 꽃을 피우고는 '조금만 기다리면 맛있는 열매를 주마'고 이야기 하는 듯한 숲길...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릴수 있음은 제게는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제 사무실 지역을 <체육부대 속의 조계사>로 명명을 하였습니다. 그만큼 독립건물이 호젓한 숲속에 있으니 마치 절과 같이 느껴지니 말입니다. 그깟 계분이야 자연에서 얼마든지 맡을 수 있는 우리의 냄새이고 일부러라도 맡고자 하는 냄새니까 말입니다.  그런데.....한번 생각해 보시겠어요?  손님이 제 방을 방문 했을 때 계분 냄새를 맡으며 커피건 녹차건, 생강차건 차를 마신다는것이 정말 잘 어울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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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03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 정말이지 누구를 초청하기 전에는 제 방에 들리는 사람들이라고는 결재를 위한 사무실 사람들 뿐이랍니다. 특히 독립건물로 입주 인원도 극소수인지라 막말로 도나 딲으면 될성 싶습니다. 계분은 바로 인근의 꽃단지에서 필요로 하여 만들고 있는 퇴비라고 하는데 자꾸 맡다보니 이제는 제법 익숙해 진것 같습니다. 어디...서울에서 이만한 공간을쉽게 갖을 수 있겠어요? 이마저도 제게는 행운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