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맞이한 아침, 태풍이 섬에 상륙해 사람이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비바람이 엄청났음에도 4.3 때 제주도민들이 숨었던 다랑쉬굴을 찾아갔다. 평소엔 사람들로 빽빽하다던 올레길에 태풍으로 아무도 없었다.
비와 바람을 뚫고 간신히 굴 입구까지 걸어 들어갔다. 온몸이 젖고장화 안으로 빗물이 고여 걸을 때마다 질퍽질퍽했다. 나무와 풀들이 바람에 요동을 쳤다.
태풍 속에서도 자연은 이렇게도 아름다웠지만 4·3을 생각해보며 죽음을 피해 도망 다니던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싶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춥고 배고팠을까?
늙은 부모님과 아이들을 데리고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다. 막다른 골목이었으리라. 바다를 건너 육지로 갈 수도, 추위 속에서 산으로 피할 수도 없었던 그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조여왔다.
이 불어오는 바람이, 저기 한없이 몸부림치는 억새가, 저렇게 서로 맞물려 굳건히 몸을 지탱하는 검은 돌들이, 미친 듯 요동치는 저 파도가, 바다가, 마치 그때를 기억하는 듯싶었다.
이튿날 언제 그런 태풍이 있었나 싶게 햇볕은 따스하고 부드러웠고 바다는 옥빛이었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며칠 제주에서 보내며 그냥 그렇게 머물러 살고만 싶은 마음을 무시한 채 간신히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의 여행은 짧았지만 제주도에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돌을 그려도 제주도에 다녀온 전과 후의 마음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