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산문 속에서 입 다물기와 5장- 제인 오스틴의 겉 이야기(와 비밀 요원들)의 두 개의 장은 제인 오스틴 작가의 소설을 집중 분석하여 비평 또는 공감한 글이다.
‘산문 속에서 입 다물기‘란 그 시절 영국의 관습과 법의 위용에 따라 오스틴의 소설은 신분을 박탈당한 젠더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오스틴은 자신의 모든 소설에서 여주인공의 인물을 통해 재창조 되어야 하겠지만, 때론 소설 속 인물들을 침묵시키고, 회피하고, 거짓말을 하게 만들어 산문 속에서 종종 입을 다문 경우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시선집 중 288 편의 시에서 ‘난 무명인이오! 당신은 누구시오?.....유명인이 되는 게- 얼마나 처량한지!‘ 라는 시에서 ‘나는 무명인‘이란 말을 인용하여 빗대고 있는 장면도 인상깊었었는데, 산문(소설 또는 시) 속에서 무명인(침묵하거나, 회피하여 존재를 감추는)이 되어버리는 것은 곧 산문 속에서 입을 다물어버린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오스틴의 작품 속에서 그 역할(산문 속에서 입 다물기)을 배당받은 인물들은 오스틴이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었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 비꼬아 놓아 독자 스스로 가려내 읽고, 생각해 주길 바란 뜻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분명 오스틴의 숨은 뜻을 파악해야 할 그런 점이 있었을 게 마땅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오호~ 이런 뜻이 숨어 있었다니? 놀라워하며 읽은 대목들이 무수하여 역시 평론가는 다르구나! 깨닫게 되었다. 평론가의 해석대로 읽고 흡수한다는 건 내가 주체가 되지 못하는 독서의 위험이 따를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깨닫지 못했으면 뻗지 못했을 그 잔가지들 방향의 자유로움과 전구에 불이 번쩍 들어오는 그 느낌을 깨닫지 못할 아쉬우이 분명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오스틴의 소설을 안 읽어서 아둔하게 이 책이 읽히는 것처럼, 읽은 소설이었어도 작가의 해석을 읽으며 비로소 감탄하는 내 모습에 또 아둔함을 느끼는 이중의 무지의 세계는 그리 기분 나쁘진 않고, 조금 재미는 있다.
아마 소설이어 가능할테고, 여성 작가의 숨은 뜻을 파악하여 새롭게 알게 되니 더 신기하고 재미있다.
암튼 자꾸 옆길로 새기 전에 얼른 오스틴의 소설로 다시 돌아와,
먼저 오스틴의 초기 작품인 <레이디 수전>을 이야기해 보자면,
읽으면서 무척 어리둥절했던 소설이었는데 비평을 읽고 나니 조금 이해가 되었다. 작가의 여느 소설 속 주인공들은 현명하고(‘설득‘의 앤 엘리엇처럼), 당차고(‘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베넷처럼) 조신하고(‘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처럼) 성숙(‘이성과 감성‘의 앨리너 대시우드처럼‘)한 모습이었는데 레이디 수전의 모습은 이기적이고, 잔꾀가 많고, 속물적인 여성으로 줄곧 그려진다. 결말 부분에서는 회개하여 딸과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예상을 깨고 딸에게 결혼 시키려 했던 남자와 결혼을 해버리는 엄마라니?
이해가 안갔으나, 오스틴의 초기작품이라고 하니 신인 작가의 모험심에 기댄 작품이어 그러한가보다. 생각했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몇몇 비평가들은 레이디 수전의 런던식 태도가 시골을 사랑하는 그녀의 딸과 어떻게 대조되는지, 어머니의 수다스러운 생기와 섹슈얼리티가 딸의 침묵 및 정결함과 어떻게 비교되고, 예술과 자연이 어떻게 대립되는지 탐색했다. 그러나 레이디 수전이 혈기왕성하게 쾌락을 좇는데 반해, 그녀의 딸은 활기 없고 연약하다. 사실상 레이디 수전의 딸은 자연을 적절하게 대변한다기보다 훨씬 수동적으로 사회화되어 있는 듯 보인다. 사실 그녀는 수전의 매력 없음(그녀의 딸에게 잔인한 면)을 강조하기 위해 필요할 따름이다. 매력 없음은 레이디 수전처럼 교활한 여자들에 대한 흥미를 억누르려는 오스틴의 반사작용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레이디 수전과 프레데리카(수전의 딸) 의 관계는 교활한 여성과 천사 같은 의붓딸 백설 공주의 관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레이디 수전은 거의 편집증적으로 딸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딸은 자아의 확장이자, 사회적 추방의 위험을 무릅쓰고 파괴하거나 초월하려고 애쓴, 피할 수 없는 여성성의 투사물이기 때문이다.
(311 쪽)
속으로 이상한 여자라고 욕 했던 수전은 왕비였고, 엄마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딸 프레데리카는 백설 공주였다니?? 그러니까 오스틴 작가는 극적 고조를 위해 딸을 침묵시키고, 회피시켰던 것이다.
옳다고 보아 온 역할이 곧 모두 정당하고, 다 옳은 게 아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충격이었고, 놀라웠고, 실은 재미도 있었다.
악녀로 둔갑된 여성의 악역은 실은 관습적 문화를 깨부수는 역할이었던 것이다. 드라마를 보더라도 개인적으로 악역에 여성을 대입시키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남성 악역보다도 부러 더 악랄하고, 더 자극적으로 나타내는 듯해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 연기자들의 연기가 한몫 했겠지만 이상하게 내겐 좀 불편해 보였다. 헌데 이런 나의 시선도 어떤 틀에 갖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악녀는 실은 악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착한 역의 주인공은 어쩌면 유리관 속에 갖혀 있는 대중이 원한 그래서 더한 발전이 있을 수 없는 현재에 머물러만 있는, 실은 감금되어 있는 여성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맨스필드 파크‘ 이야기 속 패니와 노리스 이모 이야기도 인상깊었다. 맨스필드 파크 소설은 책을 덮는 순간까지 나는 노리스 이모를 욕했었다. 주인공 패니에 대한 차별적 대우가 계속 눈엣가시였었다. 노리스 이모는 과부가 되어 금전적으로 의존할 곳이 사라질까 늘 전전긍긍하여 자신의 신분에서 인색하게 재정을 관리하고, ‘토머스 경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얄미웠었는데, 노리스 이모가 패니를 그토록 뿌리깊게 증오하는 이유는 패니가 토머스 경 이모부의 보호를 원하는 경쟁자, 또 하나의 무력하고 유용한 의존자로 보기 때문(334 쪽)‘ 이었던 것이라고 한다. 반대로 버트램 이모(나는 버트램 이모도 한 번씩 의문스러웠었는데, 무관심한 건지? 착한 건지?)는 선량한 역할을 자처하는데 이 인물은 ‘죽거나, 죽어가기 때문에 수동적인, 오스틴 소설 속에 나오는 ‘선량한‘ 어머니들처럼 레이디 버트램의 순종의 필요성과 재정적으로 안전한 결혼의 절대적 중요성, 그리고 이런 가치에 어울리는 무지를 가르친다(335쪽)‘고 한다.
패니는 어쩌면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침묵시키고, 회피하게 만든 산문 속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인물이 아녔을까? 싶다. 그리하여 노리스 이모가 더 못된 악역으로 돋보였던 것 같다.
메리와 헨리 인물도 각각 세속적이며 뻔뻔한 캐릭터로 만들어 버려 패니는 더욱 동정을 받고, 특히 메리는 저주받은 이브가 되기도 했다.
‘선량한‘ 어머니의 모습과는 달리 나쁜 노리스 이모의 모습은 여성의 힘, 노력, 정열이 생존과 즐거움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335 쪽)하고 있고, 메리는 패니와 대조적인 인물로 대립시킴으로 저주받은 이브였지만, 실은 현실을 직시하여 솔직하게 할말을 하는 역할이었는데 책에선 오스틴 작가를 가장 닮은 역할이 메리였다고 한다.
<오만과 편견> 을 펭귄북스로 읽었는데 그 책의 서문이 무척 인상적이다. <오만과 편견>은 <첫인상>으로 1790 년도에 세상에 먼저 나왔었다. 완성된 시점은 1797년 정도라고 하니 꽤 오랜시간 집필을 한셈이다. <오만과 편견>을 처음 구성할 당시 프랑스 대혁명 직후, 영국이 프랑스와 교전 중이었다. 당시 피트가 이끄는 강압적 정부는 영국에서 혁명 활동을 근절하려 했다고 한다. 이것은 제한적으로 성공하였고, 개인적인 것이 그야말로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에드먼드 버크의 반혁명 저서 <프랑스에 혁명에 대한 고찰>은 온정주의, 세습 재산, 귀족 정치로 대표되는 봉건 전통을 유창하게 옹호하였고, 성 관련 습속 및 가족을 정치적 의제에 핵심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버크는 ‘우리의 공적인 충심은 가정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면서 ‘귀족 여성에 대한 도량 넓은 충절‘을 볼 수 없게 됐다고 한탄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766 년에 출간되어 1790 년과 1810년 사이에 여러 번 재출간된 제임스 포다이스의 <미혼 여성들을 위한 설교집>이 유행하다 못해 귀족 여성들에게 필독서로 읽히는 분위기였던 듯 하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의 어머니인) 는 <여권 옹호>에서 포다이스의 설교집을 강력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오스틴 작가는 에둘러 비판을 했는데 소설에서 콜린스라는 못난 인물을 통해 엘리자베스 자매들 앞에서 포다이스 설교집을 읽으며 조롱당하는 형식으로 비판했다.
오스틴 작가는 역사를 전혀 모르는 외계인 취급을 당하는 여성작가였지만, 그녀는 결코 역사를 외면하며 결혼에 집착하여 소설을 쓴 작가가 아니었다.
‘오스틴은 역사란 남성의 가식으로 구성된 한결같은 드라마인 동시에 고딕적인 로맨스와 마찬가지로 허구(그것도 매우 해로울 수 있는 허구)일 뿐이란 것을 암시한다. 또한 여성이 역사에 참여할 수 없고 역사의 장에 거의 완전히 부재해왔기 때문에 이 역사라는 허구는 결국 여자에게 무관심할 문제일 뿐임을 오스틴은 암시하고 있다.‘(277 쪽)고 한다.
오스틴의 각각의 소설에서 남성 지배적인 역사를 외부자의 각성하는 반항하는 관점으로 보는 장면들을 곳곳에 배치해 놓은 점도 흥미를 끈다.
그리하여 오스틴 작가는 어쩌면 소리 없이 강한,
진정 페미니즘 작가가 아니었을까? 생각에 머물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