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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1~3권 세트 - 전3권 - 개정신판 ㅣ 열하일기 (개정신판)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훌 륭 한 울 음 터 로 다 :
하하하, 성탄 전야
성탄 전야, 근심이 가득한 하루였다. 거제도에서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 사과상자 두 개를 병렬로 놓은 듯한 택배 상자를 보자 그 크기만큼 근심이 쌓였다. 설마...... 상어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 ? 대방어였다. 대두 자랑이라면 어디 가서도 꿇리지 않는 나이지만 대방어의 대가리 역시 무시무시한 크기여서 눈앞이 캄캄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호호호. 할렐루야, 아멘, 주님의 은총이 ! 거제도 권사님은 은혜로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크기가 작은 생선이라면 걱정은 나중에 하고 일단 냉장고 안에 넣어두면 되지만 대방어는 크기 때문에 냉장고에 넣을 수가 없어서 먼저 손질부터 해야 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칼을 쓰는 몇몇에게 알음알음 물어보며 대방어 해체 작업을 했다. 사시미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무딘 식칼로 생선을 손질한다는 게 이만저만 이제 그만. 아, 그만하고 싶다고 ! 무엇보다도 칼을 다루는 칼잡이가 내게 방어사상충을 골라내야 한다고 말했을 때에는 충격이었다. 기생충인데 고래회충과는 달리 살속을 파고들어서 눈에 띄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눈 부릅뜨고 골라내쇼. 기생충이 단백질 덩어리여서 먹어도 상관은 없소만........ 나는 촛불 대신 칼을 들고 생선을 해체하며 기생충을 골라내는 일로 성탄 전야를 보냈다. 블러드 크리스마스 !
성탄 전야, 영화를 무려 5편이나 봤다. 첫 번째로 본 영화는 영화에서 여자가 가장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장르는 바로 소복 입은 귀신이 나오는 영화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 월하의 공동묘지, 1967 >> . 소복 입은 귀신이 어찌나 호탕하게 웃으시던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두 번째로 본 영화는 << 여곡성, 1986 >> 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소복 입은 여자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원한이 사무쳐서 저승에 가지도 못하고 이승에서 피맺힌 복수를 하는 사람이 왜 이토록 크게 웃는 것일까 ?
세 번째 영화는 << 돼지꿈, 1961 >> 이었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본 장면은 소주잔이었는데 그때에는 소주잔이 지금 유통되고 있는 소주잔보다 크기가 2배나 컸다. 소주잔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서 크기가 작은 맥주잔 같았다. 네 번째 영화는 << 엽문 4 >> 와 마지막 영화는 << 범죄도시 >> 였다. 뭐, 그럭저럭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흥미로운 영화는 아니었다. 나는 옛날 한국 영화가 재미있다. 그 시대 풍속과 세태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사회학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옛날 영화가 미시사회학를 다룬 서적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귀신은 숨 넘어 갈 사람처럼 웃어 젖히는 것일까 ?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를 여행할 때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요동 벌판을 보고 호곡장(好哭場)이라고 말한다. 울기 좋은 장소, 울음터'라는 뜻이다. 연암은 << 열하일기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발췌문이 조금 길지만 연암 박지원의 사상을 꿰뚫는 명문이니 꼭 읽어보시길. 열하일기의 화룡점정이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서 말하였다. “좋은 울음터로다. 울만 하구나.” 정진사가 말했다. “이런 하늘과 땅 사이의 큰 안계(眼界)를 만나서 갑자기 다시금 울기를 생각함은 어찌 된 것이오?" 내가 말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오. 천고에 영웅은 울기를 잘하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 하나, 몇 줄 소리 없는 눈물이 옷소매로 굴러떨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네.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은 울음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네. 사람들은 단지 칠정 가운데서 오직 슬퍼야 울음이 나오는 줄 알뿐 칠정이 모두 울게 할 수 있는 줄은 모르거든. 기쁨이 지극하면 울 수가 있고, 분노가 사무쳐도 울 수가 있네. 즐거움이 넘쳐도 울 수가 있고, 사랑함이 지극해도 울 수가 있지. 미워함이 극에 달해도 울 수가 있고, 욕심이 가득해도 울 수가 있다네. 가슴속에 답답한 것을 풀어버림은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없거니와, 울음은 천지에 있어서 우레와 천둥에 견줄만하다 하겠소. 지극한 정이 펴는 바인지라 펴면 능히 이치에 맞게 되니, 웃음과 더불어 무엇이 다르리오? 사람의 정이란 것이 일찍이 이러한 지극한 경지는 겪어보지 못하고서, 교묘히 칠정을 늘어놓고는 슬픔에다 울음을 안배하였다네. 그래서 죽어 초상을 치를 때나 비로소 억지로 목청을 쥐어짜 ‘아이고’ 등의 말을 부르짖곤 하지. 그러나 진정으로 칠정이 느끼는 바 지극하고 참된 소리는 참고 눌러 하늘과 땅 사이에 쌓이고 막혀서 감히 펼치지 못하게 되네. 저 가생(賈生)이란 자는 그 울 곳을 얻지 못해 참고 참다 견디지 못해 갑자기 선실(宣室)을 향하여 큰 소리로 길게 외치니, 어찌 사람들이 놀라 괴이히 여기지 않을 수 있었겠소.” 정진사가 말했다. “이제 이 울음터가 넓기가 저와 같으니, 나 또한 마땅히 그대를 좇아 한 번 크게 울려 하나, 우는 까닭을 칠정이 느끼는 바에서 구한다면 어디에 속할지 모르겠구려.” 내가 말했다. “갓난아기에게 물어보시게. 갓난아기가 갓 태어나 느끼는 바가 무슨 정인가를 말이오. 처음에는 해와 달을 보고, 그 다음엔 부모를 보며, 친척들이 앞에 가득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오. 이같이 기쁘고 즐거운 일은 늙도록 다시는 없을 터이니 슬퍼하거나 성낼 까닭은 없고 그 정은 마땅히 즐거워 웃어야 할 터인데도 분노와 한스러움이 가슴속에 미어터지는 듯 한다오. 이를 두고 장차 사람이란 거룩하거나 어리석거나 간에 한결같이 죽게 마련이고, 그 중간에는 남을 허물하며 온갖 근심 속에 살아가는지라 갓난아기가 그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스스로를 조상하여 곡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단 말이지. 그러나 이는 갓난아기의 본 마음이 절대로 아닐 것일세. 아이가 태속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막힌 데다 에워싸여 답답하다가, 하루아침에 넓은 곳으로 빠져나와 손과 발을 주욱 펼 수 있고 마음이 시원스레 환하게 되니 어찌 참된 소리로 정을 다해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런 까닭에 마땅히 어린아이를 본받아야만 소리에 거짓으로 짓는 것이 없게 될 것일세.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는 것이 한바탕 울 만한 곳이 될만하고,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산(金沙山)이 한바탕 울 만한 곳이 될만 하오. 이제 요동벌에 임하매,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일천 이백 리 길에 사방에는 모두 한 점의 산도 없어 하늘 가와 땅 끝은 마치 아교풀로 붙이고 실로 꿰매 놓은 것만 같아 해묵은 비와 지금 구름이 다만 창창할 뿐이니 한 바탕 울 만한 곳이 될만 하오.”
-『열하일기(熱河日記)』 중 「도강록(渡江錄)」의 7월 8일자 일기.
열하일기의 호곡장 부분을 읽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저승에서 돌아온 소복 입은 귀신이 이승에서 왜 그토록 호탕하게 웃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오 _ 라고 묻는, 웃음과 울음이 본질이 같다는 열암의 통찰을 생각하면 귀신이 한 평 남짓한 관속처럼 " 캄캄하고 막힌 데다 에워싸여 답답하다가 하루아침에 넓은 곳으로 빠져나와 손과 발을 주욱 펼 수 있었으니 " 그가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다시 웃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면 귀신의 한바탕 웃음이 애처롭다.
눈물은 때로는 마른 웃음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마른 웃음은 또 때로는 젖은 눈물로 환유 되기도 한다. 즐거운 크리스마스에 소복 입은 귀신이 나오는 옛날 영화를 보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