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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영화평론집 세트 - 전2권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필사의 탐독
정성일 외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사 랑 하 는 딸 에 게 :
정성일과 임권택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임권택 영화 가운데 새롭게 눈을 뜬 계기를 마련한 영화로 << 족보, 1979 >> 를 뽑는다. 틈만 나면 하는 소리여서 평론가 정성일과 영화감독 임권택 사이에서 오고 가는 말풍선을 빼놓지 않고 귀담아들었던 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다.
두 사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젖은 땔감 같은 사이여서 마른 땔감보다 뜨겁게 숫불(" 떼래야 " 나 " 숯불 " 이라고 표기해야 맞는 표현이겠지만 나는 비문도 훌륭한 문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내 문장은 비문의 깊은 뜻을 이해해야 오모한 맛을 느낄 수 있다)처럼 빨갛게 타오르곤 했다. 이때 정성일은 임권택 영화라는 이름의 우물만 집중해서 파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정성일은 임권택 영화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날씨가 화창하구나. 정성일이 한국 영화 비평계의 텐트폴로 일필휘지를 날리며 롤모델로
㉠ 장 르느와르 영화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앙드레 바쟁을, ㉡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탐구에 일생을 바친 도널드 리치를, ㉢ 찰리 채플린을 연구한 데이빗 로빈슨을, ㉣ 모두 다 초기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를 비판할 때 나홀로 그를 지지했던 하스미 시게히코를, ㉤ 알프레드 히치콕에 대한 기념비적 집착을 보였던 프랑소와 트뤼포 평론가 흉내를 내며 비평계를 평정할 때, 강북 변방의 어두컴컴한 ●●동에서 비디오가게를 전전끙끙하며 웨스 크레이븐 감독이 연출한 << 왼쪽 마지막 집 >> 을, 샘 레이미의 << 이블데드 >> 를, 조 단테의 << 그렘린 >> 을, 피터 잭슨의 << 배드 테이스트 >> 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웠던 나는 임권택 영화에 대한 까닭 모를 내 악의를 떨쳐낼 요량으로 << 족보 >> 라는 영화를 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때마침 시네마떼끄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길래 짬을 내서 << 족보 >> 를 감상했(었)다. 그런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라고나 할까 ? 이 영화는 정성일이 말하는 것처럼 대단한 영화도 아니고 그저 그렇고 그런 시시껄렁한 문예영화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임권택 영화가 불편한 지점은 잰더 인식의 철저한 결여'에 있었다. << 서편제 >> 에서 남성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 딸에게 독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을, << 하류 인생 >> 에서 남편이 성관계를
거부하는 아내를 때린 후 강간하는 씬 다음에 나오는 장면(부부강간을 당한 아내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남편에게 안겨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과일쥬스를 만들고 있다)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서편제 >> 에서 아버지로 등장하는 소리꾼 유봉(김명곤)이나 << 하류인생 >> 에서 깡패인 최태웅(조승우)은 여성을 그저 남성 욕망을 해소하는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캐릭터에 불과했다. 뒷목이 뻣뻣하시다구요 ? 아내와의 잠자리가 두렵다구요 ? 자두 자두 자두 자두 잠이 오신다구요 ? 그런 남성에게는 자두 맛 남성 자양 강장 드링크. 원 ! 기 ! 옥 ! 이름 또한 어찌나 남근적인지.
< 봉 > 이 사전적 의미로 기다란 몽둥이나 봉알의 수컷을, 오타다. 봉황의 수컷을 뜻하니 유봉을 다른 식으로 창씨개명하면 태웅이 될 터이다. 太雄, 이 얼마나 테스토스테론적 이름인가 ! 임권택 감독에게 여성이라는 계급은 " 호모사케르 " 에 불과하다. 옛날 영화이니 당대의 감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변명은 최근 영화라 할 수 있는 << 화장, 2015 >> 에서도 여실히 그 버릇이 드러나서 설득력을 잃는다. << 화장 >> 에서는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분변으로 더러워진 아내의 병들고 헐거워진 여성 성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나는 이 장면이 왜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폭로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헐겁고 더러워진 여성 성기가 육체적 쇠락을 상징하는 오브제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왜냐하면 굳이 여성 성기를 보여주지 않아도 병실에 누운 아내의 몸 자체는 이미 쇠락한 육체를 설명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해 소변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인공 관을 성기에 꽂아야 하는 남편(안성기)은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헐거워진 남성 성기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고개 숙인 남근이 폭로되기는커녕 기분 좋을 만큼 빳빳하고 새하얀 시트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시든 자지에 대한 배려인가 아니면 동변상련인가 ? 그런데 이 차별적인 시선 차이를 지적하는 남성 평론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김훈의 원작 소설 << 화장 >> 에서 병들어서 헐거워진 아내 성기와 전립선 비대증으로 고생하는 남편 성기는 매우 중요한 서사적 대비 장치였는데도 남성 평론가는 애써 이 사실을 외면했다. 내가 뒤늦게 << 족보 >> 라는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은 내 편견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영화 << 족보 >> 는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명문가 양반 설씨 노인이 주인공이다. 그는 성씨를 바꾸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노인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자 일본 관청은 온갖 수작을 꾸민다. 노인에게는 혼인을 앞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이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예비 사위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은 조선총독부가 꾸민 계략. 그들은 장차 사위가 될 남자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노인에게 인도인 자격으로 서명란에 서명을 해야 된다고 말한다. 단, 조건이 있다. 가석방 인도 서약서는 조선통독부 관공 문서이기에 반드시 창씨개명한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딸과 약혼한 남자는 옥살이를 치러야 하기에 딸은 파혼에 처할 위기에 빠진다. 딜레마, 딜레마, 딜레마, 오 ! 딜레마. 이 영화의 절정 부분이다. 과연 노인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때 노인은 내 눈을 동그랗게
뜨게 할 만한 기묘한 결정을 내린다. 설씨 노인은 옥순(딸)에게 히마리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 옥순아 ! 네가 결정할 수밖에 없구나. 아비하고 네 낭군 될 사람하고,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거라. 난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하마. " 노인은 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지만 딸 입장에서 보면 선택권은 없다.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성을 바꾸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노인은 딸에게 어느 것이 더 합당한 윤리적 선택이냐고 묻지만 이 질문은 굉장히 폭력적이다. 왜냐하면 딸에게 선택권은 없다는 사실을 노인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답정너,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 질문은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 달콤한 인생 >> 에서 부하였던 이병헌이 총을 들고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두목에게 묻는 질문을 닮았다. " 왜 그랬어요. 네에 ?! 말해봐요. 왜 그랬어요 ? " 부하는 두목에게 대답을 강요하지만 두목은 그 어떤 대답을 해도 죽는다. YES라고 말해도 죽고, NO라고 말해도 죽고, NO COMMENT라고 말해도 죽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죽는다.
부하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그저 예의 차원에서 묻는 질문일 뿐이다. 아니나 달라. 딸은 자신의 욕망 대신 아버지의 욕망을 선택한다. 설씨 노인은 자신의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 딸을 이용했던 소리꾼 유봉과 동일한 인물이다. 소리꾼 유봉과 설씨 노인 모두 딸을 거세시킴으로써 남성 욕망을 완성하는 / 유지하는 아비다. 이토록 완고했던 노인은 아들 손자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차별을 받는다고 하소연하자 결국에는 창씨개명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니까 딸의 욕망은 교모한 수법으로 거세할 수는 있었으나 차마 아들(의 손자)의 욕망을 거세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임권택 영화는 늘 이런 식이지만 놀랍게도 그의 영화를 수식하는 것은 휴머니즘이다. 이런 게 휴머니즘이라면 차라리 똥 묻은 개가 낫다. 아버지를 계승하려는 욕망은 재벌 2,3,4,5세가 갖춰야 할 품격이지 예술가가 갖춰야 할 덕목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예술은 아버지 세대를 죽여야 빛날 수 있는 후레자식이다. 착한 아들은 필요 없어 ! 한국 영화가 살기 위해서는 임권택이라는 견고한 성역을 부숴야 한다. 정성일 평론가가 습관적으로 내뱉은 상투어 중 하나가 " 윤리학 " 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그 윤리학의 이름으로 임권택 영화를 진지하게 다시 분석하라고 충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