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 스타일, 시인





▷ 위험사회 :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지어다

초가집에서 큰불이 나는 경우는 없다. 초가삼간 다 타봐야 빈대 몇 마리 죽을 뿐이다. 큰불은 대궐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킬 때 발생한다. 층이 쌓일수록, 그리고 높이가 높을수록 그 건물의 리스크도 그것과 비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는 청개구리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결핍을 숨기기 위해 되레 선빵을 먼저 날린다. 새우깡이라는 과자 이름은 새우깡이 없다(결핍)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광고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붕어빵이라는 이름도 붕어가 없다는 결핍을 숨기기 위한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마천루 광고는 하나같이 편리와 안전을 강조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광고가 청개구리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천루가 불편과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그러니까 하이테크 방제 시설과 보안 시설을 갖췄다고 광고하는 건물은 정반대로 가장 위험한 공간인 셈이다.  /  주제 사마라구 소설 << 눈먼 자들의 도시 >> 는 도시가 마비되면 살기에 가장 불편한 곳이 마천루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곳은 전기만 끊겨도 지옥이요, 변기에 물이 공급되지 않아도 지옥이 되는 곳이다.  변기가 막힌 채 타워팰리스에서 열흘만 견뎌 보시라. 하여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지어다. 또한 영화 << 다이 하드 >> 는 최첨단 방제 시설과 보안 시설을 갖춘 초고층 빌딩에 인간 " 버그 " 가 침입하면 속수무책으로 위험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 결과적으로 외부 침입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나카토미 빌딩이 자랑하는 하이테크 방제 시스템은 경찰의 빌딩 내 진입을 차단함으로써 테러범을 보호하고 인질을 더욱 곤경에 빠지게 한다. 안전하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증거다.






 

 

 

 


 



▷ 박근혜의 침대 : 자세가 태도를 결정한다

총은 위험한 무기이고 칼은 조심스러운 도구다(불도 마찬가지이다). 총과 칼을 다루는 사람은 운전면허를 갓 딴 초보운전자와 비슷해서 처음에는 이 위험한 도구를 섬세하게 다루기 때문에 사고가 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익숙하게 숙련되었다고 방심하는 순간에 안전사고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 그렇기에 칼(총, 불)을 손에 익힐수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스타일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끝이 뾰족한 촉이나 칼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감안한다면 스타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무기가 되기도 하고 도구가 되기도 한다. 좋은 스타일, 좋은 디자인, 좋은 문장은 여러 구성 요소를 조심스럽게 다룰 때 발생하는 아우라'다 / 스타일이란 까다로운 녀석이다. 과잉을 강조하게 되면 키치가 되고 결핍을 강조하면 컬트가 된다. 한껏 멋을 내겠다고 온갖 악세서리를 몸에 걸치고 천안 삼거리를 워킹하는 사람은 << 세상에 이런 일이 >> 에 나오기 딱이다. 스타일 결핍보다 촌스러운 것은 스타일 과잉이 아닐까 ?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스타일이란 녀석은 꽤나 까다로운 녀석. 결핍을 보완하되 과잉으로 빠지지 않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과잉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결핍을 꺼내들면 촌스러워진다(스타일이란 기본적으로 과시적 욕망인 과잉에 기초한다). 그러니까 과잉을 기초로 하되 과잉처럼 보이지 않는 방식이 세련된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좋은 예가 애플사에서 출시된 아이폰이다. 얼핏 보기에 아이폰은 디자인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밋밋한 디자인이다. 그냥 납작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하지만 바로 아이폰의 디자인 결핍이야말로 가장 세련된 스타일 과잉의 예이다. 왜냐하면 복잡한 디자인보다 훌륭한 디자인은 심플한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루이비통 가방이다. 남대문 짝풍 루이비통과 진품의 차이를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짝퉁 루이비통은 누가 봐도 루이비통 가방이라는 정보를 외부인에게 제공한다. 가방에 대문짝만 하게 루, 이, 비, 통이라는 로고가 박혀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도 비교적 화려하다. 반면, 진품은 상품 로고의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디자인도 비교적 심플하다. 루이비통 가방 중에서도 가장 비싼 제품은 무인상품 디자인을 닮았다. 로고는 가방을 열어야 비로소 보인다. 가방 안에 로고가 박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방을 열어 명함을 주고받는 이들만이 그 가방이 루이비통이라는 사실을 안다. 홍라희 여사가 굳이 자신이 들고 다니는 가방이 루이비통이라는 사실을 서민들에게 과시할 필요는 없으니깐 말이다. 쉽게 말해서 끼리끼리 놀겠다는 심산이 반영된 디자인이다  /  좋은 문장도 과잉을 기초로 하지만 결핍처럼 보이게 만드는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 멋진 문장을 완성하겠다고 부사, 조사, 접속사, 감탄사 따위를 남발하는 문장은 모자, 목걸이, 스카프, 팔찌, 카우보이 혁대, 체인 따위를 모두 두른 과잉 패션과 같다. 아따, 멋쪄부러 ~ 환장하게 멋쪄부려 ~ 페루애, 멋쪄부러잉~                 그러나 액세서리는 각자 훌륭한 패션 조미료 역할을 담당하지만 액세서리들의 총합이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50도인 물과 50도인 물이 합치면 물 온도가 100도가 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기는 한껏 멋을 낸다고 하지만 그가 걷는 길은 쁘레따뽀르떼가 아니라 세상에 이런 길 위를 걷는다  /  패션에서 결핍보다 촌스러운 것이 과잉이라는 사실은 멀리 볼 것 없다. 내 꼬락서니를 보면 답은 나온다. 좋은 패션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다짐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미학적으로 뛰어난 의자가 사실은 불편한 의자인 것과 같다. 몸뻬가 촌스러운 옷의 상징인 이유는 몸뻬가 너무 편하다는 데 있듯이 컴퓨터 의자가 싼 의자의 상징인 이유 또한 그 의자가 너무 편하다는 데 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불편한 의자에 앉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불편은 지속적으로 뇌에 자극을 주기 때문에 태도와 자세를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시시각각 교정이 가능하다.  내가 인간 관계에서 불편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이유이다. 자세를 잊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 이런 길을 걷게 된다  /  가구 중에서 가장 편한 것은 침대요, 가장 편한 장소는 화장실이다. 21세기 성인 중에 " 우선 눕고 볼 일 " 과 " 우선 누고 볼 일 " 에 집착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침대의 여왕, 박근혜'다.  침대는 자세를 허물어뜨린다는 점에서 나쁜 자세를 유도한다. 좋은 자세가 좋은 태도를 유지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좋을 리가 없다.

 




 

 

 

 

 

▷ 시 : 무학의 힘

시인이 많은 사회일수록 좋은 사회 같지만 사실은 시인이 없는 곳이 낭만적인 사회다. 대한민국 출판 시장에서 해마다 새 시집이 쏟아지고 있지만 그것은 문학이 부흥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반대로 문학이 쇠락하고 있다는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명징한 증거다. 십자가가 많을수록 부흥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구원이 불가능한 사회라는 것을 암시하듯이 말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부족은 인디언이었다. 언어는 있으나 문자는 없는 인디언 부족은 < 친구 > 라는 말을 " 내 슬픔을 함께 지고 가는 자 " 라고 부른다. 여기에 수우 족은 < 12월 > 을 " 나무껍질이 갈라지는 달 " 이라고 부르고 < 1월 > 을 " 해에게 눈을 녹일 힘이 없는 달 "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람 이름은 " 오줌을 눌 때 휘파람 소리가 나는 자 " 라고 부르는 식이다(참고로 내 인디언식 이름은 어쩌다 낳은 한숨이다). 이 정도면 박목월도 울고 갈 서정이다. 이들이 나누는 일상 대화를 상상하면 아찔하다. " 내 슬픔을 함께 지고 가는 자여, 눈 녹일 힘이 없는 달이 차면 오줌을 누면 휘파람 소리가 나는 자와 함께 술이나 한 잔 하세 " 인디언 사회에서는 만득이도, 삼식이도, 영구도 모두 시인이다. 시는 언어는 있으나 문자는 없는 세계에서 빛이 난다. 그렇기에 문자를 배우기 전의 아이들이 말할 때 시적 아우라가 발생하는 이유이다. 시의 본질은 무학이다. 하여 나는 이토록 가방끈이 긴 세대가 이토록 많은 시인을 배출하고 있다는 점이 영 못마땅하다. 인디언의 시적 언어에 감탄한 여행객이 그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인디언 시인은 누구인가요 ? "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 시인이 뭐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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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맥클레인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죽도록 고생하는 사나이.  실벳탸 스텔론이 용병이 되어서 베트남에서 싸울 때 브루스 윌리스는 형사가 되어서 뉴욕에서 흰 쫄티와 맨발로 악당과 싸운다. 전자는 해외 용병이고 후자는 자치 경찰'이다. " 아사리판 나와바리. 오오,  오호츠크 시밤바들아 "  이 두 마초가 닮은 점은  타자의 사유지   에서 폼 나게 총싸움(질)을 한다는 점이다한 방 쏘면 해결될 걸 열 방 쏜다. 어차피 그들은 돌아갈 고향이 있으니 싸움터가 심해 밑바닥 뻘보다 더 참혹한 폐허가 되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쏘가리도 아니면서......  닥치는 대로 쏜다.

미국이 내세우는 전쟁 전략은 언제나 동일했다. " 남의 나라에서 폼 나게 싸우기 " 미국 본토가 < 적 > 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경우는 일본 가미가제 공격과 알카에다 공격이 유일했다.  가미가제가 모더니즘적 증후라면 9.11테러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증후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카토미 전투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펼치는 대리전 이다. 영화 속에서 브루스 윌리스는 고개 숙인 남자'가 될 판이.  < 그 > 는 직장에서는   ① 골치 아픈 동료였고, 아내에게는 ② 무능한 남편이었으며,  딸에게는 ③ 유령'이나 다름없는 아저씨에 불과하다. 가정은 위기일발 상황에 놓여 있다. 나카토미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아내는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처녀적 이름으로 직장 생활을 한다.   

그러니깐 아내는 < 홀리 맥클레인 > 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결혼 전 이름인 < 홀리 제네로 > ​로 처녀 행세를 하는 것이다.   맥클레인 형사는 나카토미 빌딩 로비에 있는 방문자 명단에서 아내가 처녀적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린다.  맥클레인 가문을 부끄러워하는 아내.  설상가상, 참기름처럼 생긴 회사 동료가 아내인 홀리를 " 홀리 " 는 더러운 꼴도 본다.  맥클레인'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아내로부터 제거(거세)된 상태'다.  지금 그의 페니스는 발기와 거세 사이에 있는 것이다잘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꼴린 것도 아닌 상태.  마치 휴대폰 표시창에 방전을 알리는, 깜박거리는 아이콘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남근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존 맥클레인 형사, 추락한 자존심을 세울 수 있습니꺄 ?

이 영화에는 재미있는 역설이 돋보인다. 전쟁터의 주요 무대인 < 나카토미 빌딩 > 은 하이테크 벙커로 최고의 방재와 보안 시설을 자랑하는 건물이다. 그런데 테러리스트는 오히려 디지털화된 보안 시스템 때문에 보호받는다. 경찰은 나카토미 하이테크 보안 시스템 때문에 건물 내부로 진입할 수 없다. 빌딩 철문은 먹이를 문 악어의 입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다시 말해서   :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철통 보안 시스템이 역설적으로 적을 보호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역설은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하이테크가 오히려 위험을 강화하는 역기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기술 발전은 리스크의 파이'를 키운다.  초가집이 불타면 단순한 화재가 되지만  초고층 빌딩이 불타면 재앙이 되는 법이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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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영화평론집 세트 - 전2권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필사의 탐독
정성일 외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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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랑  하  는     딸  에  게   :



 




정성일과 임권택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임권택 영화 가운데 새롭게 눈을 뜬 계기를 마련한 영화로 << 족보, 1979 >> 를 뽑는다. 틈만 나면 하는 소리여서 평론가 정성일과 영화감독 임권택 사이에서 오고 가는 말풍선을 빼놓지 않고 귀담아들었던 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다.

두 사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젖은 땔감 같은 사이여서 마른 땔감보다 뜨겁게 숫불(" 떼래야 " 나 " 숯불 " 이라고 표기해야 맞는 표현이겠지만 나는 비문도 훌륭한 문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내 문장은 비문의 깊은 뜻을 이해해야 오모한 맛을 느낄 수 있다)처럼 빨갛게 타오르곤 했다. 이때 정성일은 임권택 영화라는 이름의 우물만 집중해서 파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정성일은 임권택 영화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날씨가 화창하구나. 정성일이 한국 영화 비평계의 텐트폴로 일필휘지를 날리며 롤모델로

㉠ 장 르느와르 영화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앙드레 바쟁을, ㉡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탐구에 일생을 바친 도널드 리치를, ㉢ 찰리 채플린을 연구한 데이빗 로빈슨을, ㉣ 모두 다 초기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를 비판할 때 나홀로 그를 지지했던 하스미 시게히코를, ㉤ 알프레드 히치콕에 대한 기념비적 집착을 보였던 프랑소와 트뤼포 평론가 흉내를 내며 비평계를 평정할 때,  강북 변방의 어두컴컴한 ●●동에서 비디오가게를 전전끙끙하며 웨스 크레이븐 감독이 연출한 << 왼쪽 마지막 집 >> 을, 샘 레이미의 << 이블데드 >> 를, 조 단테의 << 그렘린 >> 을, 피터 잭슨의 << 배드 테이스트 >> 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웠던 나는 임권택 영화에 대한 까닭 모를 내 악의를 떨쳐낼 요량으로 << 족보 >> 라는 영화를 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때마침 시네마떼끄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길래 짬을 내서 << 족보 >> 를 감상했(었)다. 그런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라고나 할까 ?   이 영화는 정성일이 말하는 것처럼 대단한 영화도 아니고 그저 그렇고 그런 시시껄렁한 문예영화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임권택 영화가 불편한 지점은 잰더 인식의 철저한 결여'에 있었다. << 서편제 >> 에서 남성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 딸에게 독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을, << 하류 인생 >> 에서 남편이 성관계를

거부하는 아내를 때린 후 강간하는 씬 다음에 나오는 장면(부부강간을 당한 아내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남편에게 안겨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과일쥬스를 만들고 있다)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서편제 >> 에서 아버지로 등장하는 소리꾼 유봉(김명곤)이나 << 하류인생 >> 에서 깡패인 최태웅(조승우)은 여성을 그저 남성 욕망을 해소하는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캐릭터에 불과했다. 뒷목이 뻣뻣하시다구요 ? 아내와의 잠자리가 두렵다구요 ? 자두 자두 자두 자두 잠이 오신다구요 ?  그런 남성에게는 자두 맛 남성 자양 강장 드링크. 원 ! 기 ! 옥 !   이름 또한 어찌나 남근적인지. 

< 봉 > 이 사전적 의미로 기다란 몽둥이나 봉알의 수컷을, 오타다. 봉황의 수컷을 뜻하니 유봉을 다른 식으로 창씨개명하면 태웅이 될 터이다. 太雄, 이 얼마나 테스토스테론적 이름인가 !  임권택 감독에게 여성이라는 계급은 " 호모사케르 " 에 불과하다. 옛날 영화이니 당대의 감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변명은 최근 영화라 할 수 있는 << 화장, 2015 >> 에서도 여실히 그 버릇이 드러나서  설득력을 잃는다. << 화장 >> 에서는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분변으로 더러워진 아내의 병들고 헐거워진 여성 성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나는 이 장면이 왜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폭로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헐겁고 더러워진 여성 성기가 육체적 쇠락을 상징하는 오브제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왜냐하면 굳이 여성 성기를 보여주지 않아도 병실에 누운 아내의 몸 자체는 이미 쇠락한 육체를 설명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해 소변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인공 관을 성기에 꽂아야 하는 남편(안성기)은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헐거워진 남성 성기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고개 숙인 남근이 폭로되기는커녕 기분 좋을 만큼 빳빳하고 새하얀 시트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시든 자지에 대한 배려인가 아니면 동변상련인가 ?  그런데 이 차별적인 시선 차이를 지적하는 남성 평론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김훈의 원작 소설 << 화장 >> 에서 병들어서 헐거워진 아내 성기와 전립선 비대증으로 고생하는 남편 성기는 매우 중요한 서사적 대비 장치였는데도 남성 평론가는 애써 이 사실을 외면했다.  내가 뒤늦게 << 족보 >> 라는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은 내 편견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영화 << 족보 >> 는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명문가 양반 설씨 노인이 주인공이다.  그는 성씨를 바꾸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노인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자 일본 관청은 온갖 수작을 꾸민다.  노인에게는 혼인을 앞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이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예비 사위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은 조선총독부가 꾸민 계략. 그들은 장차 사위가 될 남자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노인에게 인도인 자격으로 서명란에 서명을 해야 된다고 말한다.  단, 조건이 있다. 가석방 인도 서약서는 조선통독부 관공 문서이기에 반드시 창씨개명한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딸과 약혼한 남자는 옥살이를 치러야 하기에 딸은 파혼에 처할 위기에 빠진다.  딜레마, 딜레마, 딜레마, 오 !  딜레마.  이 영화의 절정 부분이다. 과연 노인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때 노인은 내 눈을 동그랗게

뜨게 할 만한 기묘한 결정을 내린다. 설씨 노인은 옥순(딸)에게 히마리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 옥순아 ! 네가 결정할 수밖에 없구나. 아비하고 네 낭군 될 사람하고,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거라. 난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하마. " 노인은 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지만 딸 입장에서 보면 선택권은 없다.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성을 바꾸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노인은 딸에게 어느 것이 더 합당한 윤리적 선택이냐고 묻지만 이 질문은 굉장히 폭력적이다. 왜냐하면 딸에게 선택권은 없다는 사실을 노인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답정너,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 질문은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 달콤한 인생 >> 에서 부하였던 이병헌이 총을 들고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두목에게 묻는 질문을 닮았다. " 왜 그랬어요. 네에 ?!  말해봐요. 왜 그랬어요 ? " 부하는 두목에게 대답을 강요하지만 두목은 그 어떤 대답을 해도 죽는다. YES라고 말해도 죽고, NO라고 말해도 죽고,  NO COMMENT라고 말해도 죽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죽는다.

부하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그저 예의 차원에서 묻는 질문일 뿐이다. 아니나 달라. 딸은 자신의 욕망 대신 아버지의 욕망을 선택한다. 설씨 노인은 자신의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 딸을 이용했던 소리꾼 유봉과 동일한 인물이다. 소리꾼 유봉과 설씨 노인 모두 딸을 거세시킴으로써 남성 욕망을 완성하는 / 유지하는 아비다. 이토록 완고했던 노인은 아들 손자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차별을 받는다고 하소연하자 결국에는 창씨개명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니까 딸의 욕망은 교모한 수법으로 거세할 수는 있었으나 차마 아들(의 손자)의 욕망을 거세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임권택 영화는 늘 이런 식이지만 놀랍게도 그의 영화를 수식하는 것은 휴머니즘이다.  이런 게 휴머니즘이라면 차라리 똥 묻은 개가 낫다. 아버지를 계승하려는 욕망은 재벌 2,3,4,5세가 갖춰야 할 품격이지 예술가가 갖춰야 할 덕목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예술은 아버지 세대를 죽여야 빛날 수 있는 후레자식이다. 착한 아들은 필요 없어 ! 한국 영화가 살기 위해서는 임권택이라는 견고한 성역을 부숴야 한다.  정성일 평론가가 습관적으로 내뱉은 상투어 중 하나가 " 윤리학 "  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그 윤리학의 이름으로 임권택 영화를 진지하게 다시 분석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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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21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중권 팟캐스트에서 정성일이 임비어천가 부르는 거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영화를 즐기는 편도 아니고 임권택 감독 작품은 제대로 본 게 하나도 없는데, 저같은 무지렁이로 하여금, 와 임권택이란 사람 잘 모르지만 어쨌든 열라 위대한 사람인가봉가, 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지요.

과연 왜 훈민정음 만들고 처음 찍을 글로 용비어천가를 골랐는지 깨닫게 하는 대목이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1 13:34   좋아요 0 | URL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성일 키드인데
정성일이 워낙 막강한 힘을 발휘하다 보니 그 키드들은 무조건 임권택 영화를 극찬하더군요.
미학 어쩌구저쩌구 할 때에는... 정말 저는

천년학과 달빛 길어오르기가 좋은 영화인지 진짜 묻고 싶습니다..

수다맨 2017-12-2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솔직히 윤리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애용하는 평론가들(문학계에서는 신형철)을 딱히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큰 개념에 기대어 자기 글의 지적 우위와 도덕적 성격ㅡ나 똑똑한 인간이다, 나 윤리 의식 대단한 인간이다 등등ㅡ을 높이려는 평론가의 작의가 너무 빤하게 보여서입니다...
한 감독의 작품 세계를 지지하고 옹호하기 위해서 난해한 개념과 진부한 숙어를 호출하는 평론가들의 글쓰기는 이제 거부감이 드네요. 게다가 그 감독이 추구해온 성과란 사실 공장장의 오래된 짬밥과 대량 생산물에 불과해 보이는데, 여기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버라고 봅니다.

2017-12-2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2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와리가리

 


 


장난감이 없던 시절에 아이들은 주로 자기 몸을 장난감의 일부로 사용했다. 말뚝박기에서 술래가 되면 스스로 말판을 자처해서 타인의 항문에 자기 머리를 처박는 일을 사슴도 아니면서 서슴없이 행해서 학이 그 모습을 보고 학을 떼곤 했다. 학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슴이란 짐승은 상종도 못할 놈이로구나.                          

나는 말뚝박기라면 자신이 있어서 공격수가 되면 100미터 밖에서 도움닫기를 해서 목표 지점 앞에서 도약하여 내 꼬리뼈를 인간 장난감 말판의 일부였던 친구 등판에 꽂았다. 드라큘라의 송곳니보다 날카로운 내 꼬리뼈는 무기였으리라.  한 놈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쓰러지면 나머지 말판도 도미노처럼 쓰러져서 이내 개판이 되었다. 이 정도면 막가는 거제 ?  또다시 술래가 된 녀석들은 복수를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어릴 때 놀던 놀이를 회상하다가 문득 " 와리가리 " 라는 놀이가 생각났다. 왔다리갔다리를 줄인 말이다. 룰은 간단했다.

< 이쪽 > 에서 < 저쪽 > 으로 넘어간 후 다시 < 이쪽 > 으로 넘어오면 1살이 되고, 이 행위를 반복하면 나이를 추가로 얻을 수 있는 놀이인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일종의 월담(월경)하는 놀이 형태였는데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국경수비대가 있어서 잡히면 죽어야 했다. 오늘 내가 이 놀이를 떠올린 까닭은 안철수와 국민의당이 보여주는 행태 때문이다. 안철수는 몸값 한 번 불리겠다고 이쪽(민주당)에 붙었다가 단물만 쏙 빼먹고는 저쪽(국민의당)으로 갔다가 이제는 다시 그쪽(바른정당)으로 가려는 것이다. 최종 목적지는 자유한국당일 것이다. 아무리 정치판이 이판사판 공사판의 아사리판이라 해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하는 법인데


안철수는 이제 철판을 깔았나 보다. 국민의당도 마찬가지다. 당이 많아야 정치가 건강하다며 다당제를 외쳤던 인간이 이제는 정치 노선이 같다면 합당해야 된다는 논리를 사슴도 아니면서 서슴없이 펼치고 있으니 이 꼴 저 꼴 다 배알이 꼴리는 학이 학을 떼기 좋은 풍경이다. 상종도 못할 놈들이로구나. 지랄이 풍년이다. 나잇값 한 번 올리겠다고 철새처럼 와리가리 하다가 이제는 헤매고 있다. 한때 멘토의 우상으로 나이 사십 대에 이미 자서전을 발기하시고, 오타다. 자서전을 발정하시고, 오타다. 자서전을 발로 쓰시고, 오타다. 자서전을 발간하시고 초등학생의 텐트폴'로 우뚝 솟은 안철수의 와리가리 놀이를 보면서


역시 옛말은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애나 어른이나 하는 짓은 똑같구나. 안철수와 말뚝박기 놀이 한 번 하고 싶다. 내 꼬리뼈로 너의 등짝을 스매싱해 주마_ 이런 마음이 든다. 와리가리 놀이를 해도 좋다. 안철수가 한 살 더 먹겠다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야밤에 도주할 때 국경수비대인 나는 너의 전담 마크맨이 되어서 뒷덜미를 잡고 내동댕이치리라. 요놈, 요놈.  이 쥐새끼 같은 놈 !                             나는 지체 높은 어르신이 철없는 어린 것을 훈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영 못마땅할 뿐만 아니라 철없는 어린것이 지체 높은 어르신에게 위로를 받고자 고개를 조아리는 꼴도 영 못마땅하다. 

자신을 구원해 줄 멘토는 없다. 그들이 내뱉는 " 힐링 " 은 돈을 벌기 위한 늑대 저자의 " 하울링 " 이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일 뿐이다. 인생은 어차피 각자도생이요, 독고다이다. 나는 인간이라는 종은 모두 다 도토리 키재기여서 어린놈이나 늙은 놈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멘토랍시고 나랏 말쌈이 듕국과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해서 가여븐 멘티를 위로하는 꼴을 보면 그 또한 가증스럽기는 마찬가지.  끝으로 안철수와 그 일당에게 노래 한 곡 띄운다. 혁오가 부릅니다. 와리가리 !



 

 

 

 

본문과는 상관없는 덧대기     ㅣ      문재인 대통령 중국 방문 홀대론의 핵심은 중국이 국빈 접대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논조로 기사를 쓴 언론이나 기자가 진심을 가지고 썼다고 생각한다. 부처 눈에는 모두가 부처로 보이고 돼지 눈에는 모두가 돼지로 보이는 법이다. 언론과 기자들이 문재인 홀대론 기사를 내보내는 것은 그들이 평소 대접을 받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정도 지위에 있다면 그 정도 대접은 받아야 하는 거 아이가 ?  그렇기에 메이저 언론의 정치 부장이 간장 종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악담을 담은 글을 칼럼이랍시고 내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기자 정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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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2-20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뚝박기에서 맨 끝의 말이 되었을 때 허리에 가해진 그 충격과 고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ㅜㅜ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0 20:18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맨끝이 좋은 자리입니다. 끝에서 두 번째가 진짜 죽음이죠..ㅎㅎㅎㅎ

cyrus 2017-12-2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에 있을 때 몸으로 놀기 좋아하는 부소대장 때문에 말뚝박이 엄청 많이 했어요. 길어야 세 달 동안 다른 부대에 파견 근무를 해요. 그곳에 진짜 놀 게 없어요. 막사와 훈련장, 이게 전부에요. PX도 없어요. 떨어지는 낙엽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년 병장도 예외 없었습니다.. ㅎㅎㅎ 신기하게도 그거 하면서 허리 아작 난 장병들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1 13:3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제가 말뚝박기 중독이어서 전 쉬는시간마다 이걸 했는데 허리에 금이 간 적이 있습니다. 금이 간 게 아니라 허리 삐긋.. ㅎㅎㅎ 언제 한번 알라디너들 모여서 말뚝놀이 한번 하죠..ㅎㅎ
 
아동의 탄생
필립 아리에스 지음, 문지영 옮김 / 새물결 / 200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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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없다


 



ㅡ 피터 브뢰헬, 아이들의 놀이 1559







" 어른(이 된다는 것) " 을 주제로 글을 하나 써야 하는데 아무리 쥐어짜도 글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리저리 글감 자료를 찾다가 매우 흥미로운 그림 하나를 발견했다. 피터 브뢰헬의 풍속화 << 아이들의 놀이 >> 에는 아이들이 200명이 출연한다. 그들은 각자 혹은 끼리끼리 모여서 75가지의 놀이를 재현한다. 팽이 돌리기, 굴렁쇠 굴리기, 말뚝박기, 기마놀이, 돌치기 놀이 등 말 그대로 " 놀이 백화점 " 인 셈이다. 내가 이 그림에서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림 속 아이가 어른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돋보기가 없다면 그림을 확대해서 세세하게 살펴보면 아이가 어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른이 아이를 흉내 내며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종합하면, 이 그림은 아이와 어른 구별없이 놀이를 즐기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 17세기 이전에만 해도 아이는 7세 정도가 되면 어른 취급을 했다. 그들은 어른의 공동체에 속해서 술도 마시고, 노름도 하고, 섹스도 즐겼다.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 임꺽정 >> 의 저자 홍명희는 나이 13세에 결혼해서 서른에 손자를 보았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라고 ?! 아니다, 그는 20세기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아이와 어른을 구별하는 것은 필립 아리에스의 주장대로 근대 이후가 만든 프레임이다. 그는 << 아동의 탄생 >> 에서 아동이라는 계층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근대 이후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할 목적으로 발명된 신제품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른이라는 계층도 헛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반드시 유년 시절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지위이기 때문이다. 올챙이 시절 없이는 개구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유년이 헛것이라면 성년도 헛것이다. 그러므로 어른이라는 계급은 판타지다. 한마디로 어른은 없다. 진실은 단순하다. 어떤 진실에 대해 20자 이내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철학의 영역에서 다퉈야 할 문제이지만 20자 이내로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진실에 가깝다. 간단 명료하게 말하겠다. "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 " 나이 가지고 유세 떨지 말자.




본문과는 상관없는 발문 ㅣ ㉠ 대부업 광고 문구 중에 " 여자니까 쉽게 " 라는 표현이 있다. 여성을 특별 우대하겠다는 표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 여자는 멍청해서 복잡한 것은 못해 " 라는 뉘앙스로도 읽을 수 있다. 여성 우대보다는 여성 홀대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현세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보기에는 근대 이전에는 아이를 보호하지 못하고 어른 취급하는 태도가 아동 학대(방치)처럼 보이지만 아이를 억압하고 학대하는 쪽은 현대인이다. 아이를 위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억압의 결과이다. 그것을 외면한 채 아이와 어른을 구별하는 것은 차별이다. ㉡ 길(밖)에서 자유롭게 놀던 아이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아이와 어른을 구별한 후 아이들을 길에서 내쫓는 것이었다. 그래서 억압자는 학교를 세운 후 그곳에 아이들을 감금한다(학교가 교육 시설이 아니라 억압하기 위한 제도라는 사실은 푸코의 << 감시와 처벌 >> 에서 자세히 다루지만, 이미 그 이전에 필립 아리에스가 << 아동의 탄생 >> 에서 자세히 다루었던 주제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소개한 두 책은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책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 어른에게 복종할 것 " 이다.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는 평등은 어른에게 까불면 맞는다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규율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어른의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그들에게 주어졌던 자유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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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19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를 보는 성인을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른’을 권위적인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술 마시고, 섹스하고, 노름하고, 유흥주점에 가는 것을 ‘어른’이 누릴 수 있는 놀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놀이에 푹 빠지면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의 행복까지 파괴해요. 절제할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책 읽고 만화 보고, 피규어 모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2-19 21:02   좋아요 1 | URL
저는 만화라는 장르가 문자로 텍스트를 꾸미는 문학보다 한 단계 위라고 생각합니다. ^^
꼭 보면 책 안 읽는 사람이 만화책 무시하고는 하죠..
 

 

 

 

 

 





불행한 당신에게





 

5년 전이었나. 당시에 내 친구는 해외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헬조선에서 사무직 노동자로 사느니 차라리 천국 같은 곳에서 육체노동자로 사는 게 백 번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결심을 하면 실행은 신속하게 진행하는 편이라 다음해 친구의 이민 소식이 들렸다. 내가 어느 나라로 이민을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방긋 웃으면 하늘을 가리키며 천국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 뜻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며칠 뒤 조간신문에 난 기사를 통해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기사 제목은 생활고 끝에 일가족 동반 자살이었다.

그 친구가 돌아왔다. 천국에 사는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행 목적으로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살기 위해서 다시 왔노라고 말했다. 천국은 살 곳이 아니더군. 따분한 곳이야. 천국에는 불행한 사람은 없는데 행복한 사람도 없어. 행복이 뭐야 ? 불행의 상대적 개념이잖아. 이승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인간이라는 게 말이야...... 타인의 불행에 기생해서 자신의 행복을 만드는 족속이더군. 잘 생각해 보라고. 그렇잖아. 이웃이 행복하면 우리는 그들을 축복하기는커녕 질투가 먼저 나. 반면에 이웃이 불행에 빠지면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삶에 만족을 해.

그게 인간이라니까. 우리가 문학이나 드라마 따위를 왜 보겠어 ? 그 이야기 속에서 불행을 엿보기 위해서 보는 거야. 문학 속 주인공치고 제대로 행복한 놈 봤어 ? 아, 난 천국에서는 못 살겠더군. 시바..... 죄다 행복한 놈뿐이야. 그곳에서 불행의 스펙터클을 구경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지.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내려왔다네. 그때는 몰랐는데 나는 페루애가 참 좋아. 넌 좋은 놈이었어. 너를 보면서 나는 꽤나 행복했거든. 너의 불행이 다수에게는 행복을 주니까. 고마운 녀석, 내가 한 턱 쏜다아 ~

농담처럼 시작한 글이지만  :  나는 불행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가 행복할 수는 없다. 행복은 불행을 먹고 자라나는 기쁨이니깐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괴수 영화에 나오는 괴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불행을 자처한 예수처럼 가난한 예술가는 자신의 불행을 통해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한다. 그것은 휴머니티를 위해 쓰러지는 괴수영화의 괴물과 같다. 영화 속 괴물은 도시를 파괴하며 대나무도 아니면서 우후죽순처럼 솟은 도시를 쑥도 아니면서 쑥대밭으로 만들지만, 괴물의 위악은 붕괴된 가족을 복원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내가 니체에게 홀딱 반했던 데에는 그가 쓴 위대한 잠언 때문이 아니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자신이 길렀던) 병든 말을 부여잡고 통곡했던, 학대받아 숨진 말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연민 때문에 미쳐 버린 불행에 있었다. 하물며 고흐는 말해서 무엇하랴. 그래서 나는 불행한 자가 성스럽다. 우리가 들장미 소녀 캔디를 좋아하는 이유도 캔디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하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나애리가 아닌 하니를 응원하는 까닭은 하니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박근혜가 조금 더 불행해졌으면 한다. 무기징역보다는 사형을 원한다. 그래야 우리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좐인한 인간이라 욕하지 마라. 그동안 그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의 삶은 불행해졌으니까. 잔을 높이 들자. 너의 검은 불행에 앞에서 건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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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18 17: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상의 시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땐 몰랐는데, 그의 난해한 시를 꼼꼼히 읽을수록 이상의 불행한 삶에 눈길이 갔습니다. 이상은 자신의 불행한 삶을 암호와 같은 시 속에 숨겨놓았어요. 이상은 자신이 폐병에 걸려서 각혈하는 상황을 시의 소재로 삼았습니다. 이상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에게 ‘불행’이 없었다면 이런 기이한 작품들이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18 17:44   좋아요 3 | URL
제가 항상 주장하는 것 중 하나가 다 가진 사람은 굳이 문학 따윈 하지 않죠. 뭔가 결핍이 있기에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문학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표맥(漂麥) 2017-12-18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암 박지원이 말했습니다, 참다운 문학의 동기는 득의(得意)가 아니라 불만(不滿)이라구요... 퍼뜩 생각이 나게하는 곰발님 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19 17:07   좋아요 2 | URL
한국에서 박지원만큼 호탕하고 호연지기한 분도 안 계시죠. 진정한 자유인이자 가식이 없는 어른이었으며 평등 사상이 몸에 벤, 그리고 유머감각이 탁월한 분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12-21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이 이달의 페이퍼에 선정되거나 다른 곳에 실렸으면 하네요.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합니다. 지속되는 행복이란 불가능하거니와 참 따분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행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 더욱 값진 것이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1 13:27   좋아요 1 | URL
행복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에너지가 꽤 만만치 않거든요..
그만큼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인데 이게 과연 그렇게 가성비가 뛰어난 것인지 의문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12-21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발님 글 링크 복사해서 제 서재 페이퍼에 소개했는데 괜찮을런지요?? 선 복사 후 허락인데,,, 허락해주시겠죠^^ㅎ?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1 13:26   좋아요 1 | URL
다 같이 읽자고 쓴 글인데 마음껏 복사하셔도 됩니다. 하여튼 고양이라디오 님 서울 입성 축하드립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