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두고 두고두고 읽을 세 권의 책
청하 출판사에서 출간된 << 두이노의 비가 /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한기찬 번역 >> 를 읽었을 때 전율했다. 한글로 번역된 시집을 감동 깊게 읽었다는 것이 민망하기는 하지만 어쩌랴, 내가 외국어 까막눈인데 말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 두이노의 비가 >> 는 백 번 넘게 읽었다. 십 년 동안 이 책은 하루도 빠짐없이 내 가방 속에 들어 있어서 시도 때도 없이 읽은 기억이 난다. 종이가 바스러져서 가루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한 책이기도 하다. 우여곡절 끝에 청하에서 출판된 한기찬 번역본을 구해서 다시 읽고는 있으나 이 책도 가루가 되어 사라질 날이 오리라(아는 사람은 다들 아는 이야기이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 아이보리 비누로 손을 씻는 버릇이 있다. 즉, 책을 험하게 보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자주 읽다 보면 이렇게 그지 같은 책이 된다).

내가 릴케를 전공한 문학도도 아니니 릴케 시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는가마는(변학도가 춘향의 깊은 뜻을 모르듯이) 그의 시를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캄캄한 우주에 홀로 버려진 미아가 된 듯해서 << 그래티비 >> 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두이노의 비가 9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 행복이란 다가오는 손실에 앞선 이득일 뿐이니 " 이 시집은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 내용이 깊고 오묘하다. 만약에 당신이 이 시집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그것은 신이 당신에게 내린 행운이다. 이처럼 곁에 두고 두고두고 읽는 책이 또 한 권 있다. 롤랑 바르트의 << 사랑의 단상 >> 이다.
동문선이라는 그지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지만 진흙 속에서도 진주는 빛을 발하는 모양이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버릇이 있거나 종이를 접는 습관이 있는 이라면, 이 책을 읽을 때에는 그 모든, 그 모오오오든 버릇을 버려야 한다. 첫 행부터 페이지 마지막 끝 행까지 끊김 없이 줄을 긋는다는 것은 밑줄의 효용 측면에서 보자면 밑줄을 모욕하는 행위에 속하며 페이지마다 종이 끝을 접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독자인 당신은 밑줄과 종이접기를 모독할 권리가 없다. 두 작품은 모두 황홀할 만큼의 미문으로 작성된 문장이지만 처절하다는 점에서 겉만 번지르르한 문장과는 사뭇 다르다.
울 때에는 통곡할 줄 아는 촌스러운 신파도 겸비한 작가들이다. 웃을 때 예쁘게 웃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는 없겠지만, 나는 울 때마저도 예쁘게 우는 사람을 보면 징그럽다. 왜냐하면 울 때마저도 예쁘게 우는 얼굴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연기자는 울 때에도 예쁘게 우는 법을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가짜로 꾸며낸 격정일 뿐이다. 울 때에는 못생긴 얼굴로 쏟아내도 된다. 그런 얼굴처럼 그런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 생각된다. 페르난도 페소아의 << 불안의 책 >> 을 완독한 상태는 아니지만 곁에 두고 두고두고 읽은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문학이란 행복하지 않은 자가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특권이 아닐까 싶다. 릴케는 비가 9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어찌 삶이라는 시간은 시작부터
사라져 가는 걸까. 주위보다 좀 어두운 음영 드리우고
모든 잎새 가장자리마다 잔물결 일으키고 있는
월계수처럼(바람의 미소 같이). ㅡ 또 어찌하여
삶이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것인가 ㅡ 운명을
피하면서 그리워한다는 말인가......
오오, 삶이 행복해서가 아니다,
행복이란 다가오는 손실에 앞선 이득일 뿐이니.
- 비가 9
페소아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을 저주할 수 있는 글을 쓴다. 그것은 무죄다. 행복한 자가 행복을 저주하는 글을 쓰는 것은 오만이지만 불행한 자가 행복을 저주하는 것은 용서 가능한 독설이다. 올해의 끝은 << 불안의 책 >> 으로 마무리할까 한다. 문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 좋은 책을 만난다는 것은 기분이, 그러니까, 음... 기분이 째지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