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 향 의 공 동 체 :
우리가 남이가
친구끼리 우정을 과시할 때 흔히 하는 말이 우리가 남이가 _ 이다. 이 < 말 > 은 그 발화 주체가 남성일 때에만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말이 여성에 의해 발화될 경우에는 시시껄렁한 흉내나 전복적 패로디로 인용될 뿐이다. 여성에게 우정이란 고작 여고 동창생 시절에만 유통되는, 유통 기간 날짜가 찍힌 통조림에 불과했다.
우정은 대대로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 브라더후드 / brotherhood " 는 " 시스터후드 / sisterhood " 보다 우월하고 농도가 진한 격정 서정 멜로'였다(라고 남성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나는 형제애와 동성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남성 혈맹의 꽤나 끈적끈적한 서정(우정)이 과도한 선전에 의해 왜곡된 미담이 아닌가 싶다. < 우정 > 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수평적 관계가 유지될 때 발생하는 감정인데 20세기 끝자락에서 21세기를 관통하는 동안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자본화되면서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로 전환되다 보니 수평적 관계는 수직적 관계로 변질되었다.
유사 친족 관계였던 불알후드는 쪼개져서 1등, 2등, 3등으로 분리되었다. 당연히 불알후드의 끈적끈적한 우정도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여전히 우리가 남이가 _ 라고 외친다. 가족끼리 우리가 남이냐 _ 라고 묻는 것은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질문이지만 친구끼리 혹은 남남끼리 우리가 남이냐 ? _ 라고 묻는 것은 이상한 질문 방식이다. 에이, 알면서 왜 그래 ?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가 남이냐며 거짓 우정을 과시한다. 영화 << 친구 >> 에서는 불알친구들이, << 넘버 3 >> 에서는 양아치들이, << 내부자들 >> 에서는 협잡을 도모하는 정치 모리배들이,
<< 사생결단 >> 에서는 뇌물을 주고받는 비리 공무원끼리 은밀하게 외치는 주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욕망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불알후드라는 이익 공동체를 결성한다. 그것은 우정이 아니라 욕망의 동일화 과정이다. 키케로는 이익이 우정의 접착제라고 말했다. " 우리가 남이가 " 의 지정학적 버전이 바로 아파트 문화'이다.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는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단지 내 아파트 주민들은 동일한 행동 패턴을 보이는 주거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남이가 _ 라고 말할 수 있는 남남의 자격이 아닐까.
아파트 구조는 공간 배치는 물론이고 가구 배치까지 동일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미적 취향에 따라 가구가 배치된다기보다는 전원 콘센트 위치에 따라 전기 제품과 가구가 배치된다. 거실에 놓인 소파와 티븨의 위치는 1층부터 16층까지 항상 동일할 수밖에 없다. 아파트 주민들은 똑같은 장소에서 똥을 싸고, 똑같은 장소에다 소파를 놓고, 똑같은 곳에 티븨를 배치한다. 행동이 동일하다 보니 생각도 서로 닮아가는 경향이 엿보인다. 생각이 닮아간다는 것은 곧 욕망이 서로 엇비슷하게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선(動線)이 노선(路線)을 낳는다. 아파트는 획일화, 집단화, 통일화된 문화의 전형이다.
이처럼 한국인은 개인보다는 집단 속에서 만족을 느낀다. 뭉치면 살고 흝어지면 죽는다. 흥남부두에 눈보라가 휘날리던 근대 정신은 여전히 현대 정신으로 살아서 정신을 지배한다. 최근 10대와 20대를 상대로 한 설문 조사 결과, 롱패딩을 소유하고 있다는 응답은 45%였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롱패딩을 구입하지 못한 사람에게 ) 올해 롱패딩을 구입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구매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자의 비율은 자그마치 25%였다고 한다. 이 둘을 합하면 올해는 70%의 젊은이들이 롱패딩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고 예상되된다고 하니,
이 기형적인 소비 패턴에 대하여 핫하다고 해야 할지, 힙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학을 떼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2017년 겨울은 롱패딩으로 대동단결했으니 그들 또한 " 우리가 남이가 " 를 외칠 만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 직립보행하는 애벌레여 ! 고마해라, 마이 입었다 아이가. 식구(食口)가 끼니를 함께 나누는 사이라면 친구는 세월의 동시성과 세대의 공동성을 확인하는 사이'이다. 생면부지인 사람이어도 출생년도가 같으면 친구가 될 수 있다. 이 쉬운 결속과 이 신속한 의지와 조건 없는 환대는 친구라는 개념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결속되는 친구는 정말 좋은 것일까 ? 친구보다 좋은 인간관계는 없다지만, 나는 남남의 끈끈한 애정 문화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 취향의 공동체 " 이지 " 출생(년도)의 공통점 " 은 아니다. 그렇기에 인간관계에서 친구와 우정과 나이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계급과 계층과 주거 환경과 통일된 패션 스타일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우정은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기에 내 우정은 우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선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 우정 비스무리한 느낌을 취향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 취향 > 은 비슷하되 개성은 다양한 관계를, 만나면 편하되 조금은 불편한 관계를, 전화나 문자를 씹어도 서운해하지 않는 관계를 원한다. 그것이 내가 목표로 삼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번 주말에 모이게 될 2차 주정뱅이 클럽 모임은 제목 그대로 취향의 공동체'다. 낮에는 꼴뚜기처럼 튼튼한 허벅지로 나갔다가 새벽이 되면 문어 다리가 되어 흐느적거리는, 모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정 후 뭣 같은, 수족관 속 개불처럼 히마리 없이 살아가는 이들의 공동체 모임이라고나 할까 ? 세미나 제목은 " 왜 우리는 꼴뚜기처럼 튼튼한 허벅지를 가질 수 없나 " 정도로 해두자.
누군가 나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우리가 남이가 _ 라며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 그러면 여기가 북이냐 ? " 이 말대꾸가 지나치게 전공투적이라면 이런 말대꾸로 전환하는 것은 어떤가. " 그러면 우리가 남이지 님이니, 니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