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모기에게 관용은 없다
내 문학적 취향을 고려하자면 :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 피츠제랄드보다는 헤밍웨이, 프루스트보다는 조이스, 스타인벡보다는 오웰, 칸트보다는 사드(혹은 라캉을 흉내 내며 칸트와 함께 사드를......), 김승옥보다는 손창섭 문학이 좋다.
약간 더 촌(村)스럽고 약간 더 광(狂)스러운, 꽃보다는 피로 쓴 문학에 더 많은 애정이 가는 것이다. 손창섭 문체가 김승옥의 도시적 감성체와 견줄 것은 못되지만 손창섭에게는 날것이 주는, 익힌 것에서 오는 안전한 전략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문학은 식중독 균을 염려하는 순간 따분해진다. 안전한 문학보다는 위험한 문학이 낫다. 비슷한 맥락에서, 귀족 출신이었던 사르트르보다는 알제리 하층민 출신이었던 카뮈'가 좋다. 마오주의자였던 사르트르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 개입을 강조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부르주아 엘리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혼잣말) 재수 없는 놈.
카뮈는 나치 부역자 숙청을 반대하는 여론에 맞서며 이런 말을 했다. "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 이명박근혜 시절, 그 부역자들이 지금에 와서 정치 보복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지난 일을 잊고 미래의 번영을 위해 서로 화합하자는 주장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문장이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다는 점은 친일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과오가 오늘에 이르러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살펴보면 그 심각성'을 찾을 수 있다.
정치에서 냉정한 숙청보다 나쁜 것은 낭만적 관용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실패한 지점이기도 하다. 루쉰의 말처럼 물에 빠진 개(구악)은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들겨패야 한다. 그것이 페어플레이 정신'이다. 사실, 산 자의 사적이고 은밀한 고통은 산 자끼리 겪는 갈등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죽은 자와 불화한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와 먼저 소통해야 한다. 나는 문재인이 덕장보다는 용장의 면모를 발휘했으면 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단편소설 << 잎 >> 에서 가을 모기는 앞으로 살 날이 얼마 없기에 불쌍하다며 모깃불을 피우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모기는 항상 " 어제의 모기 " 보다는 " 오늘의 모기 " 가 더 미운 법이다. 모기에 대한 연민은 지나가는 딱정벌레에게나 줘 ! 모기는 여름 모기이든 가을 모기이든 보는 족족 죽이는 게 상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