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한곳에서 다른 곳까지, 또는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까지의 거리나 공간을 " 사이 " 라고 한다. 그러니까 < 사이 > 라는 말 속에는 거리나 공간 같은 로컬리티 개념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사이'라고 부른다. 땔래야 땔 수 없는 젖은 땔감의 인간 버전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들은 떼래야 뗄 수 없는 인간 관계가 되어서 한여름에도 붙어다닌다. 또한 둘이 서로 친한 관계라면 " 서로 가까운(좋아하는) 사이 " 가 되고, 선배와 후배라면 선후배 사이가 되며, 친구라면 친구 사이가 된다. 한자 親(친할 친)이 가깝다와 가까이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 친구 사이 " 라는 말에는 개인이 허용할 수 있는 간격 안으로 포섭된 사이1)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또한 친구라고 하기에는 데면데면한 관계라면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하면 된다.

" - 사이 " 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관계이다. < 사이 > 는 관계의 성격과 계급의 차이에 따라 세분화된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로컬리티 topos 2)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 영화는 필연적으로 장소로써의 " 사이 " 를 다룰 수밖에 없다.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영화 << 화양연화 >> 는 < 사이 > 의 개념을 정확히 보여준다. 이 영화는 욕망( 친밀한 거리 : Intimate Distance Zone:45.7cm미만)을 숨긴 채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Zone :2m~3.8m)를 유지해야 하는 기혼 남녀의 갈등을 다룬다. 감독은 그들 내면에 숨겨진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강박적일 정도로 좁은 복도와 좁은 골목을 형상화한다.

서로 데면데면했던 그들은 좁은 복도에서 몸을 비켜세우며 지나칠 때 균열이 시작된다.  잠깐 경험하게 되는 사이(친밀한 거리)에 남녀는 매혹된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접촉을 피했지만 그럴수록 욕망은 간절하다. 하지만 끝내, 그들은 사이가 가까워져 올수록 사이가 멀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 영화가 사랑 영화로써 탁월한 지점은 바로 사랑이라는 본질이 가지고 있는 로컬리티의 속성을 훌륭하게 형상화했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주도한 아우라는 양조위와 장만옥이 아니라 좁은 복도와 골목이다. 롤랑 바르트는 << 사랑의 단상 >> 에서 "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대상은 어떤 것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아토포스 " 라고 명명했는데,

 

이 해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실패한 사랑을 다룬 영화나 문학은 모두 아토포스(的 상황)를 다룬다. 실패한 사랑의 대상은 항상 " 그 장소 " 에 없는 존재이다(그 장소는 텅 빈 부재이다). 내가 대학로 카페 도어즈에서 강냉이 안주에 맥주를 마시다가 목놓아 울었던 것처럼 영화 << 길 >> 에서 짐파노는 " 그 장소 " 에 없는 젤소미나를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그녀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재는 존재를 각인시킨다. 하여, 존재를 상기시키는 것은 부재의 힘이다 ■







​                                


1) 에드워드 홀은 인간관계의 거리를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 Zone:45.7cm미만), 개인적인 거리(Personal Distance Zone: 45.7cm~1.2m), 사회적인 거리(Social Distance Zone :2m~3.8m) 공적인 거리( Public Distance Zone:3.8m이상)등 4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2)  ‘어떤 장소에 고정되지 않은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특정 지을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다. 장소성을 뜻하는 그리스어 토포스(topos)에 부정의 접두사 a가 붙은 단어로 프랑스 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롤랑 바르트의 저서 《사랑의 단상》에 등장한 개념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소크라테스를 아토포스라 불렀다고 언급했다.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한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아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대상은 어떤 것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아토포스와 같다고 표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토포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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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9-19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첫 사랑에게 이렇게 고백했었어요

‘나는.. 나와 너 사이의 이 공간과 시간을 사랑해..‘

어린 아이의 고백치고는 좀 철학적이였죠 ㅋ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9 18:25   좋아요 1 | URL
좀 철학적이었던 게 아니라 엄청 철학적인 고백이었네요.
고백이라는 게 사실은 좀 유치해야지 제맛이죠.
고백이 너무 멋스러우면 사기꾼입니다..

2017-09-19 1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9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9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0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9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0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리와 나 




 

 

 

 

                                                                                                     가끔 영화를 보다가 " 영혼이 털리는 경험 " 을 하게 된다. 영화관을 들어갈 때는 꼴뚜기처럼 탱탱한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으나 영화관을 나설 때에는 문어 다리처럼 흐느적거리게 되는 느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거울 >> ,  왕가위의 << 아비정전 >> ,  데이비드 린의 << 아라비아의 로렌스 >> ,  팀 버튼의 << 비틀 쥬스 >> , 기타노 다케시의 << 키즈 리턴 >> ,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 밀리언 달러 베이비 >> , 차이 밍량의 << 애정만세 >> 를 보고 나면 영혼의 수분이 럭키금성 탈수기처럼 탈탈 털리는 기분이 들어서 극장 밖을 나서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바닥에 주저앉게 된다. 울지 않기 위해서, 울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남몰래 항문에 힘을 주었다. 눈구멍와 똥구멍은 하나이니까. 빔 밴더스 감독이 연출한 << 파리, 텍사스 >> 도 그런 경우'였다.

영화관을 나와서 신촌 굴다리를 걷다가 벽에 붙은,  이 영화 포스터 앞에서 나는 오래 멈췄다. 늦가을 볕에 말린 시래기 줄기처럼 생긴 배우 이름은 해리 딘 스탠튼'이었다. 감독보다 배우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온 경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해리와 나는 초면이 아니었다. 그는 << 관계의 종말 >> , << 딜린저 >> , << 대부 2 >> , << 에일리언 >> 에서 이런저런 단역으로 출연한 배우였던 것이다. 어디 이뿐이랴,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가 출연한 영화가 무려 250여 편이나 된다고 하니 관객인 우리는 기억은 못해도 오고 가다 한 번쯤은 마주쳤을 배우였다.

다만,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을 뿐이다. 주연도 아닐뿐더러 하물며 조연은커녕 주로 단역으로 출연한 배우를 기억하는 것은 낭비에 가까우니깐 말이다(그가 영화에서 줄곧 단역만 맡은 것은 아니었다 비중있는 조연을 연기한 적도 있지만 영화 자체가 그지같았다). 더군다나 그는 메소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도 아니었다. 이래저래 명배우로서 성공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배우였다. 그는 백만장자를 연기해도 거지처럼 보였고, 엘리트 과학자를 연기해도 거지처럼 보였고, 보안관을 연기해도 거지처럼 보였다........               

그런 배우를 원톱 원맨쇼에 가까운 영화의 주연으로 발탁한 영화가 << 파리, 텍사스 >> 였다. 모험에 가까운 캐스팅은 대성공이었다. 목석에 가까워서 표정이 읽히지 않는 그의 얼굴은 영화 속 주인공인 트래비스1)와 잘 어울렸다.  그 후,  나는 그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그가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를 일부러 찾아서 보았고, 그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그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곤 했다. 그것은 마치 " 히치콕 영화 " 에서 히치콕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을 발견할 때 느끼게 되는 즐거움과 비견될 만했다. 그런 그가 2017년 09월 15일, 91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나는 진심으로 백만장자를 연기해도 거지처럼 보였던 이 배우를 사랑했으며 그의 음악을 좋아했다. 눈물이 난다.

 

 

 

 

 

 

 

 

 

                              

 

 

1) 영국 롹 밴드 < 트래비스 > 는 영화 << 파리, 텍사스 >> 의 주인공 이름 트래비스에서 따왔다. 실제로 해리 딘 스탠튼은 배우이자 음악가이기도 했다. << 파리, 텍사스 >> 의 주제곡도 그가 불렀다.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삽입곡을 직접 부르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영화만큼은 예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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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7-09-18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8 16:34   좋아요 0 | URL
좋은 배우였죠. 이 배우 볼 때마다 저는 찰스 부코스키가 연상됩니다..

ICE-9 2017-09-18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분의 부고를 듣고 좀 충격을...
이로써 ‘스트레이트 스토리‘에 형제로 나왔던 분들이 다 돌아가셨군요.
그 영화에서의 해리옹도 참 좋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9 12:37   좋아요 0 | URL
그래요.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도 해리가 나왔죠. 이분은 30대나 80대나 얼굴이 똑같습니다.
한결같이 루즈핏으로 일관했던 분이셨죠.. 루저의 루즈 핏이라니.

yamoo 2017-09-19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런 분도 있었군요. 에이리언에 나왔다면 저도 분명히 봤겠지요. 3-4번 봤으니...헌데 이름과 얼굴이 도통 생각나지 않다가 사진 보니, 전혀 모르는 배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9 18:37   좋아요 0 | URL
이분의 특징이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첫반응이 대부분 이런 식이죠. 좋은 배우였어요.. 얼핏 보면 맥시코 배우 같기도 하고... ㅎㅎ
 

 


 





염치에 대하여 :

 


​1. 김성주   

mbc  오락 프로그램 << 아빠, 어디 가 >> 가 선풍기도 아니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당시에,  나는 이 프로그램이 " 아동 노동 착취 금지 협정 " 을 어겼다고 어깃장을 놓은 적이 있다. 자식을 앞세운 아비들의 앵벌이라는 격정적 표현도 사용했다. 내 글에 대한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뜯다 뜯다 헐뜯을 게 없어서 이런 걸로 시비냐, 쑥이나 뜯어 이 새캬 _ 라는 댓글이 대부분이었지만,

내가 보기에 이 프로그램은 어린이판 << 체험, 삶의 현장 속으로 >> 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고 싶은 아이가 어디 있을까 ?  오지를 돌아다니며 갯벌 체험을 하거나 한겨울에는 산속 깊은 곳에서 빙어 낚시에 동원하기도 했으며 밤 늦게 촬영이 끝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오, 맙소사 !  지저스 크라이스트.    라스베가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헐리우드 영화 공장은 아역 배우들의 노동 시간에 대해 매우 엄격하다. 촬영은 대부분 나인 - 투 - 파이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부득이 야간 촬영을 해야 하는 경우는 부모와 아역 배우의 자발적 동의 없이는 밤에 촬영이 진행될 수 없다.

만약에 이를 어기면 법적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은 헐리우드 영화 공장이 아동 노동 착취 금지 협정을 철저하게 준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린이판 << 체험, 삶의 현장 속으로 >> 는 ?!    이 오락 프로그램의 중심에는 김성주가 있었다.  내가 김성주를 콕 짚어서 말하는 이유는 다른 출연 가족과는 달리 부자 관계'가 곰살궂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부자 간 애착 형성 과정에 실패한 가족 같았다.  다른 아빠 - 들'이 아이와 함께 " 체험 " 을 하고 있었다면,  김성주는 아이와 함께 " 체험 학습 " 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카메라를 의식해서 친절한 아빠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했지만

몇몇 장면에서는 애써 화를 삭이고 있는 얼굴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그 친절함이 불편했다. 이웃들에게는 웃으면서 착한 아들이라고 소개하지만 이웃이 보이지 않으면 냅다 아들의 등짝을 후려치는 부모처럼.  최근에 주진우 기자는 김성주를 거론하면서 김장겸이나 김재철 같은 인간도 역겹지만 김성주 같은 인간도 패주고 싶다는 말을 한 모양이다(자세한 내용은 다들 아시리라 믿고 생략한다). 나는 사람들이 그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하차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지지할 생각도 전혀 없다. 그는 염치없는 사람이 맞다.



2. 최영미

종종, 술자리에서 한국인은 교양 수준이 떨어져서 순수 문학이 팔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는 작가들이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겠냐 _ 며 한숨을 내쉬고는 한다. 그가 내뱉은 한숨에는 그래도 나는 교양인이어서 순문학 졸라 많이 읽었지롱 _ 이라는 행간이 숨어 있어서 웃음이 났다.  순수 문학이 팔리지 않는 것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나 똑같다. 고진의 말처럼 근대 문학(순수 문학)은 죽었다 !   글만 써서 먹고 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인데, 프랑스 작가들은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다. 프랑스 문화 예술 지원 정책 때문이다.

프랑스 교육 문화 예술 지원 정책은 빈민가 아이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좋은 스승 밑에서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한다. 그렇기에 프랑스 예술인은 국가 지원(국가에서 제공하는 일자리)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인은 예술인을 베짱이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끼니를 굶은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다니 !     이런 식'이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대대로 돈 많은 부자의 후원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그너는 오토 베젠동크의 경제적 후원을,  니체는 마이젠부르크의 경제적 후원을,  릴케는 베르너 라인하르트라는 후원자가 있었기에 창작을 할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순수 창작만으로 밥을 먹고 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바그너에 대해, 니체에 대해, 릴케에 대해 놀고 먹는 염치없는 베짱이라고 흉보는 사람은 없다. 내 개인적 취향을 고려하자면 최영미 시인의 시와 글은 질색(특히,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한심하기는 하지만...)이지만 문화 예술 생산자로서 후원자의 지원을 바라는 마음을 염치없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순수 예술인은 창작만으로는 밥 먹고 살 수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밥 먹고 살 수 있게 지원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그를 지지한다. 그에게 전망 좋은 방이 생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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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7-09-17 0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곰곰발님께서 해주셨던 찰스 부코스키가 출판사로부터 받았던 지원(이 지원은 물론 위 글에서 나오는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는 현격히 다릅니다만)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출판사에서 죽을 때까지 매달 부코스키에게 100달러씩 주기로 하고, 부코스키는 이 지원에 힘입어 ˝여자들˝, ˝우체국˝ 같은 걸작들을 썼지요.
저도 최영미 시인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ㅡ저는 최영미 시인의 글들이 시인화된 공지영 같다는 생각이 좀 들더군요ㅡ그녀가 바라는 지원을 ‘거지 구걸‘, ‘염치없는 베짱이‘ 같은 식으로 이해하려는 세간의 인식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7 18:51   좋아요 0 | URL
저는 한국 출판사가 최승자 시인이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도록 방치하는 것을 보고 참 염치없는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승자 시인 정도라면 어느 정도 출판사의 후원은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뭐, 출판사별로 후원회의 밤이라도 개최해서 세상에 알리고 돕는.. 뭐, 그런... 정말 그런 짓도 안 하더군요.

cyrus 2017-09-17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술가가 가난해서 굶어죽거나 자살하는 소식이 들려오면 대부분 대중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예술가를 외면한 사회 탓, 예술 활동을 장려하지 않은 정부 탓합니다. 그런데 예술가가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면 속물이라고 욕합니다. 이래서 우리나라에서 예술로 밥 먹고 살기 힘들어요. 최영미 시인을 욕하는 사람들 중에 시집을 한 권이라도 사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7 20:49   좋아요 0 | URL
이율배반이로군요. 사학 재단에 들어가는 국가 세금으로 교육 예술 지원에 투자하면 양질의 문화 교육을 받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2017-09-19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9 18:55   좋아요 0 | URL
오, 바로 그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 노동의 대가를 고스란히 글로 녹여내는 것이니까요. 국가의 지원이 왜 그들에게 가야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문화 유산은 대대손손 엄청난 가치를 생산하니까요. 섹익스피어를 보십시오. 이 양반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일까요 ? 이런 국가적 경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국가는 문화 산업에 많은 투자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네 도로 아스팔트 까는 비용 줄여서 이런 데 투자해 보십시오. 문화 강국 되면 이득이 많습니다..
 







실패할수록  빛난다








 


                                                                                                        불교에서는 전생(前生)에서 쌓은 < 업보 > 에 따라 후생(後生)에서 행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한다. 후생은 죽은 뒤에 오는 생애'이니, 현생은 전생 때 쌓은 업보의 결과'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인과응보-서사'를 믿지 않는 편이다. 불행은 지난날에 저지른 악업에 따라 그에 해당되는 과보를 받는 일도 아니요, 행복 또한 선업에 따른 과보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날아가는 새를 향해 날아오는 야구공처럼( 혹은 무심코 던진 돌에 연못 속 개구리가 맞아죽듯이) 불행은 " 무의미한 충돌 " 에 불과할 것이다. 그 야구공이 새가 전생 때 쌓은 업보의 현현이 아니듯이,  불행의 원인 또한 인과의 결과가 아니다.

불행은 가능성 희박한 우연과 가능성 희박한 우연이 서로 무의미한 충돌로 인해 빚어진 혼선이다. 원인은 없고 결과만 존재하는 것이 불행이다. 그렇기에 < 불행 > 이라는 서사는 항상 예측 불가능하며, 냉정하고, 인과응보와는 별다른 연관이 없다. 만약에 어떤 불행이 예측 가능하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 운명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오이디푸스는 불행을 당한 자가 아니라 운명에 갇힌 자'다. 반대로 프란츠 카프카는 불행을 다룬다. 단편 << 변신 >> 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눈을 떴을 때 직면하게 되는 것은 " 원인 없는 결과 " 이다. 그는 자신이 왜 흉물스러운 벌레가 되었는지(- 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장편소설 << 심판 >> 의 주인공 요제프k도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설명이 불가능한) 어느 날 아침 두 명의 감시인인 뷜렘과 프란쯔에 의해 자기 하숙집에서 체포 당한다.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은 소설 << 성 >> 도 마찬가지'다. 논리의 세계가 인과 관계를 밝히는 과학적 사고에 기초한다면 카프카 문학을 관통하는 것은 비논리의 세계이다. 그것은 예측불가능하고 불확실하며 무의미하다.  카프카 문학은 기승전결에서 " 기 - 승 - 전 " 이 제거된 채 미완성으로 끝나는, 무작위로 작동하는" 결 " 만 남는 이야기의 세계다.

나는 범죄 영화가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지만 사랑 영화(로맨스 영화가 아닌)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서는 못내 아쉽다. 왜냐하면 사랑의 본질은 행복보다는 불행의 본질에 가까우니까. 사랑은 가능성 희박한 우연과 가능성 희박한 우연의 충돌이 아닐까 ?  이 조우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모두 제각각이다(happy families are alike. every unhappy familiy is unhappy in its own way - 안나 카레리나) 라는 톨스토이의 문장을 살짝 비틀자면 행복은 모두 비슷해서 설명이 가능하지만 불행은 불행한 이유가 모두 제각각이어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다룬 영화가 관객에게 많은 설명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기, 승, 전이 없는 끝만 남은 영화가 좋다. 사랑 영화의 본질은 끝이 주는 위로이다. 설명이 가능한 사랑은 신파다. 그것은 잔인할수록 아름답고 실패할수록 빛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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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9-16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곰곰발님의 말씀처럼 대부분의 사랑과 연애의 끝이 씁쓸한데, 사랑영화도 그렇게 되면 너무 다큐멘터리 같을 것 같아요. 유치해도 저는 신파도 좋네요. ㅋ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6 16:16   좋아요 1 | URL
사실.. ㅎㅎ 저도 좋아합니다. 그래도 사랑 영화의 정점은 왕가위 영화 아니겠습니까..
왕가위 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사랑 영화의 으뜸이죠..ㅎ

yamoo 2017-09-16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단락이 의미심장하네요. 마지막 단락 말씀하시려고 이 페이퍼 쓰신 거죠?~ 라고 우기고 싶게 만드는 페이펴^^

최근에 라이언 레이놀즈가 자신이 이번에 찍은 액션영화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해서 봤는데, 흠...진짜 사랑 얘기가 맞더만요.그냥 킬링타임용 뜬금없는 사랑 야그..그치만 재밌게 봤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6 16:15   좋아요 0 | URL
제 마음을 꿰뚫고 계시는군요. 마지막 문장을 쓰려고 억지로 논리를 전개시킨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치료는 잘 받으셨습니까 ?
 

 

 

 



 




바 디 체 킹




 


                                                                                                        프란시스코라는 도시를 가본 적은 없지만 이 도시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 갈매기 " 다. 심지어 부산 바닷가에서 농심 새우깡 먹고 성장한 갈매기를 봐도 " 샌프란시스코의 갈매기 " 를 생각하게 된다. 

이게 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때문이다(영화 역사상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 풍경을 가장 탁월하게 잡아낸 영화가 << 현기증 >> 이다). 샌프란시스코 보데가 만을 배경으로 한 영화 << 새 >> 는 갈매기가 주인공 멜라니의 이마에 부딪치면서 불길한 기운의 전조가 시작된다. 워낙 강렬한 인상이 남는 영화여서 내 머릿속 연관 검색어에는 샌프란시스코 하면 " 히치콕 " 이나 " 새" 따위가 제일 먼저 자동 입력되는 것이다. 여기에 덧대어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팀 샌프란시스코를 연고지로 한 SF 자이언츠 구장도 큰 몫을 차지했다. 이 야구장은 유독 갈매기가 자주 눈에 띈다. 경기 중에 필드에 내려앉은 갈매기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늘에 둥둥 떠서 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갈매기를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일종의 무전취람無錢取覽인 셈이다.  하지만...... 아, 자본주의적 응징이라고 해야 할까 ?   무전취람한 어느 갈매기는 날아오는 야구공에 맞아 즉사하기도 했다. 그 누가 알았으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치 추적이 가능한 탄도미사일처럼 자신의 궤적을 따라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는 사실. 종종,  불행은 전조도 없이 이런 식으로 대상과 충돌한다.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등장하는 불행은 대부분 " 불행의 시작 " 이 아니라 " 전부 " 에 가까워서 대상을 산산조각내기 일쑤'다.  그것은 기승전결이 없는 서사와 같아서 예측이 불가능하며 의미 없는 상징이기도 하다.

 

 

​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서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서도 참혹한 전투 속에서도, 최악의 불행 속에서도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中​

 

나는 이런 식, 그러니까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고 상징을 강요하지도 않으며 해석이 필요 없는 무의미한 불행'에게 끌린다. 그것이 어쩌면 진실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도 그렇다. 기승전결을 갖춘 영화보다는 느닷없이 끝나는 라스트 씬'이 좋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니까. 어쩌면 내 생의 끝도 그런 방식일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앞으로 가야할 목적지를 아직 정하지 않았는데 불행은 이미 내가 도착할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저 궤도와 속도라면 내 몸을 산산조각 내고도 남을 것이다. 기꺼이......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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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7-09-15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의미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어쩌면 무의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의미가 있다는 역설이 행간에 드러나는 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5 11:35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업보라는 말에 회의가 많이 듭니다. 정말 불행은 업보의 탓일까 ? 원세훈이 저지른 업보가 쌓여서 얻은 결과가 징역 4년이라면 이게 과연 업보의 댓가를 받은 것일까 ? 죄에 비해 벌은 너무나 미미한 것 아닌가..
원세훈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인데 고작 4년으로 죄의 대가를 받았다는 것은 좀 심한 비약 아닌가. 뭐, 그런 것 말이지요.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들이 사실은 의미 있는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침부터 좀 횡설수설한 느낌이 듭니다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