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수와 군함
나는 늘 괴물을 사랑했다. 어릴 때조차 고질라나 킹콩을 응원했지, 이 괴물들을 죽이려는 자들을 응원한 적은 없었다. 괴물들이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핵폭발 때문에 잠에서 깨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고질라가 괴팍한 건 내겐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킹콩도 마찬가지였다. 어여쁜 페이 레이의 매력에 사로잡힌 킹콩을 누가 비난할 수 있으랴(고릴라보다 결국 페이의 비명이 사람들을 더 못살게 만들 것이기도 했고). 입장을 바꿔놓고 본다면 괴물들이 저지른 일은 하나같이 마땅했다. 이런 영화는 교묘하게 괴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했다.
위 문단은 내가 쓴 글이 아니라 사이 몽고메리의 << 문어의 영혼 >> 에 나오는 문장을 베낀 것이다. 초록은 녹색이라고 했던가 ? 과부 설움은 홀아비가 안다고, 나는 공감의 의미로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나도 늘 괴물을 사랑했다. 어릴 때조차 고질라나 킹콩을 응원했지, 그 괴물을 죽이려는 자들을 응원한 적은 없었다. 괴물이 무해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이유로 인간이라고 해서 무해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쪽은 항상 인간이 아닐까. 어린 시절에 나는 괴물을 주로 스크린을 통해 접하다 보니 괴물은 움직임이 뚝뚝 끊기는 이미지(고질라나 킹콩을 떠올려보라)로 각인되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 이음매 없이 매끈한 연속 동작 " 을 선보이는 괴물보다는 부자연스러운 괴물에게 애정이 가는 것이다. 괴물의 본질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괴물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 희소성이 가치를 높인다. 그렇기에 1933년도에 만들어진 킹콩의 특촬(특수촬영)을 두고 자연스럽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문어라는 괴수를 처음 접했던 영화는 << 놈은 바닷속으로부터 왔다 It Came From Beneath the Sea, 1955 >> 였다(이 영화에서 특수촬영을 담당한 사람이 래이 해리하우젠이라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특촬의 신'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저 다리 한쪽 보여준 것이 전부이고 끄트머리 살짝 꼼지락거린 게 전부인데도 불구하고 놈은 관객의 모든 시선을 강탈했다. 육체파 여배우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다리 한쪽을 살짝 보여주는 것과는 차원을 달랐다. 나에게 문어 다리는 성적 대상 그 이상이었다. 압도적인 몰입이었다. 끄트머리 한쪽이 이 지경인데 몸통은 얼마나 황홀할까, 아........
영화에서 매소드 연기는 " 인간 " 에게만 주어지는 역할은 아니다. 그럭저럭 별 볼 일 없는 감독은 배우를 연출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지만, 훌륭한 감독은 " 장소 (배경) " 에게도 생명을 부여하여 실감나는 연기를 주문한다. 대표적인 감독이 이창동'이다. 영화 << 밀양 >> 에서 " 밀양 " 이라는 캐릭터는 기라성 같은 송강호나 전도연의 연기에 기죽지 않고 실감나는 밀양을 연기한다. 장소가 워낙 뛰어난 연기를 펼치다 보니 연기 경험이 없는, 정극 배우가 아닌, 그 지역 주민의 애매한 연기도 훌륭하게 보인다.
여기서 이름 없는 조연 배우들은 밀양이라는 배경 그 자체'가 되어 피아 구분 없는 몰아의 연기를 펼친다(나홍진 감독이 연출한 << 곡성 >> 도 마찬가지'다. 이쪽 분야의 대가는 로버트 알트만이다). 이처럼 연기에 있어서 인간과 장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젖은 땔감과 같은 관계이다. 그런데 인간과 장소가 서로 따로 놀게 되면 배우가 아무리 뛰어난 연기를 펼친다 한들 그 맛을 제대로 살릴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영화 << 군함도 >> 는 인간과 장소'가 서로 따로 놀고 있다는 점에서 " 지랄하고 자빠지는 중 " 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인 노동자는 조선인 노동자 같지 않다.
그것은 배우의 연기가 형편없기 때문이 아니라 군함도라는 장소(세트)의 연기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무대 연출을 뜻하는 프랑스어 " 미장센(mise-se-scene) " 은 : 연극과 영화 등에서 연출가가 무대 위의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배열하는 작업인데, 이 시각적 요소에서 중요한 것은 소품뿐만 아니라 인물도 포함된다. 훌륭한 감독은 인물을 로컬리티化하는데 탁월하지만 형편없는 감독은 인물과 장소가 서로 물과 기름처럼 겉돈다. << 군함도 >> 에 등장하는 배우는 영양실조에 걸려서 뼈만 앙상하게 남았던 조선인 노동자의 신체를 연기하기에는 지나치게 발육 상태가 좋아서 프리즌 브레이크 시리즈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인바디 결과가 훌륭한 하드바디에게 군함도 탄광 노동자 역할을 맡긴다는 것은 구로 공단 노동자 역할을 이재용 삼성 그룹 부회장에게 맡기는 꼴과 다르지 않다1). 내 개인적 취향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괴수와 군함도를 평가하자면, 괴수와 군함(도)는 물 밖으로 떠오르면 안되는 존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괴수는 흉물스럽고 군함은 혐오스럽다. 하지만 흉물과 혐오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어떤 대상이 흉물스럽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반대로 혐오의 대상은 반드시 나쁜 것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군함도는 흉물스럽다기보다는 혐오스러운 로컬리티'에 가깝다. 류승완 감독은 이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영화 속 군함도는 혐오스럽다기보다는 흉물스럽다.
덧대기 ㅣ 업계 용어로 설명하자면 타이틀은 그 영화의 야마'를 대표한다. 고로, 제목이 << 군함도 >> 라는 사실은 군함도라는 로컬리티'가 이 영화의 주제이자 다른 소재와의 교환이 대체불가능한 주재(主材)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군함도는 대체불가능한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군함도라는 역사적 장소보다는 차라리 탈역사화된 감옥'이 더 어울린다는 점에서 실패한 영화'다. 영화 소비자인 관객이 실망하는 지점은 아귀가 주재료인 아구찜을 기대하고 음식을 주문했더니 아귀 살점은 보이지 않고 콩나물만 산더미처럼 쌓인 아구찜 요리를 받았을 때의 실망감이다.
1)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몸값 비싼 " 원톱 " 배우 세 명(송준기, 황정민, 소지섭)을 한 영화에 캐스팅하는 욕심을 선보였지만 " 원톱의 쓰리톱化 " 는 재앙에 가깝다. 그렇다고 원톱 배우들의 주연 본능을 탓할 일은 아니다. 톱스타의 신체에 드리워진 형광등 100개, 그것이 원톱 배우들의 숙명이니깐 말이다. 이 영화는 마치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