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면 지치고 지치면 변절한다 :
김규항에 대하여 2
주먹 대신 입으로 싸우고 행동 대신 말로 먹고 사는 것이 정치인이라지만 정치인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진심이 없다 보니 감동이 없고 변심이 들끓다 보니 통찰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정치인의 말은 이해찬이 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 거창하면 지치고, 지치면 변절한다 ! "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가장 오른쪽이거나 가장 왼쪽에 있는 사람일수록 대의명분이 거창한 법입니다. 나보다는 우리, 우리보다는 집단, 집단보다는 국가, 국가보다는 세계에 집착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시적 담론입니다. 거시적 담론의 끝판왕은 독수리 5형제입니다. 그들은 우주의 평화를 위해 싸우죠. 세계 평화도 아니고 우주 평화라...... 후훗. 저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대만 감독 차이 밍량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인류의 먼 미래를 걱정하는 영화는 나쁜 영화이고,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다 ! "
입만 열었다 하면 자유, 국가, 미래, 평화를 남발하는 인간치고 좋은 놈 못 봤습니다. 김규항은 자신을 가장 아래 그리고 가장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지정학적 위치로 보자면 좌파 중에서도 가장 왼쪽인 셈이죠. 그는 자신이 비주류 강성 좌파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 b급 좌파'라고 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예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는 최하층 민중 노동자를 대변한다면서도 그가 쏟아낸 글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부르주아 살롱 언어였습니다. 배운 자가 아니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였죠. 그는 누구보다도 거시적 담론에 집착하는 논객이었습니다.
그를 새롭게 보기 시작한 계기는 2002년에 발생한 페미니즘 논쟁이었죠. 이 논쟁의 시작은 김규항이 < 씨네21 > 에 쓴 << 그 페미니즘 >> 이라는 글이었습니다(김규항을 둘러싼 페미니즘 논쟁은 아래 링크를 걸어두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페미니스트 최보은을 공격하면서 페미니즘을 " 중산층 인텔리 여성의 지적 놀이(터) " 로 치부했습니다. 일종의 티타임 살롱 페미니즘이라고나 할까요 ? 그는 주류 페미니즘이 하층 여성 노동자를 배제했다면서 그들의 페미니즘은 기만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최보은을 공격하면서 지적했던 중산층 인텔리의 지적 유희'라는 말은 사실일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최보은은 김규항의 글에 대한 답글을 쓰면서 자신은 농부의 아내로써 겨우 월급 60만 원 받고 육아와 살림 모두를 책임지는 가난한 여성 노동자일 뿐 아니라 매 맞는 아내였다고 김규항을 직격했습니다. 김규항이 공격한 중산층 인텔리 여성의 주류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것이죠. 그는 가족사까지 공개한 최보은에게 사과를 했을까요 ? 무엇보다도 제가 그의 글에서 주목한 것은 그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싸지른 거시적 언어들이었습니다.
한겨레 토론마당의 어느 독자는 그의 거시적 언어를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 지평, 조망, 겸손, 연대, 보편, 인간, 해방, 좋은 단어는 많이 적어놓았으나, 이 문장이 뭘 가리키는 지는 흐릿합니다 " 매우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글의 주장이 궤변일수록 추상적 단어를 남발하게 됩니다.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이 하층 여성 노동자의 권익을 배제시켰다면서 두 눈 부릅뜨고 화를 냈던 김규항은 세월이 흘러흘러흘러흘러 중앙일보에 주기적으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는 <<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 이라는 칼럼을 통해서 일본군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로서 일본군과는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고 공격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여성이야말로 가난한 기층민중를 대표하는 피해 여성 노동자인데 말입니다. 김규항 페미니즘 논란 그 후의 언행이 궁금하여 찾아보니 그는 이런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 윤석열에 대해서는 그 연배의 아재 중에서는 드문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준석의 당선은 한국 보수 세력이 70년 이상 유지해 온 반공주의가 시효를 다했음을 상징한다 ! " 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재명의 점령군(미군) 발언에 대하여 이준석은 색깔론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말하는 반공주의와의 빠이빠이인가요 ? 맨밑바닥에서 가장 왼쪽이라고 스스로를 명명했던 그가 이제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을 지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스로 강성 진보라고 자부하던 그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준석을 진보라고 말하는 그 용기가 가상합니다. 불후불흑/不厚不黑 이라고 하죠. 얼굴은 두껍고 마음은 검다. 변심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변신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문학적이어서 저는 그의 코페루니쿠스적 전환을 변태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49%의 진담과 51%의 농담을 섞어서 당신의 위안을 걱정합니다. 잘 먹고 잘 사세요, 벽에 똥칠할 때까지. 건투를 빕니다.
▷ 김규항, 페미니즘
▷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 덧대기
김규항은 중앙일보 칼럼 < 중앙시평 :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 이라는 글에서 콤플렉스 민족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 콤플렉스 민족주의는 한국 남성 특유의 가부장적 피해의식과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 역사 관련 발언이라도 나오면 다짜고짜 발끈하기부터 하는, 일본과 스포츠 경기를 ‘전쟁’(대일전)으로 규정하며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피해의식 말이다. " 여기서 그가 말하는 대표적 스포츠 경기는 축구일 겁니다. 그는 한국 대중이 콤플렉스 민족주의에 함몰되어서 정치적 / 역사적 맥락으로 스포츠를 이용한다고 비판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2002 한일 월드컵이 한창일 때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 꿈도 희망도 없는 고단한 일상에 찌들 대로 찌든 사람들이 제 나라 축구팀이 세계 16강 진출이라는 목표치를 두 번이나 경신했다고 너도나도 광장으로 뛰쳐나오는 일이야 너무나 당연하지 거기에 무슨 의식성이 있고 혁명이 있다는 겁니까(2002.07.18 씨네21) " 그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스포츠는 단순한 오락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경기 결과를 두고 스포츠를 정치적/역사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지적입니다. 정반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저는 그가 썼던 문장으로 그가 쓴 문장을 반박하도록 하겠습니다. " 이봐요, 김규항 씨 ! 그냥 한일전을 두고 거기에 무슨 의식성이 있고 혁명이 있고 콤플렉스 민족주의가 있다는 겁니까 ? 그냥 축구는 축구예요. 한갓, 오락거리를 두고 질척질척대지 좀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