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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히말라야 : 초회 한정판 (2disc)
이석훈 감독, 황정민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영화(picture)는 그림(picture)이다.
국영수'를 포기하고 도덕에 올인하면 수포자'가 된다. 반면에 도덕을 포기하고 국영수에 올인하면 우등생'이 된다. 안타깝게도 친구는 도덕에 올인한 경우였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불행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성정 고운 친구였다. 친구 아버지는 구청 소속 환경미화원이셨는데, 친구는 방학이 되면 항상 새벽에 일어나 아버지의 수레를 밀었다. 친구 또한 없는 살림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방과 후 신문을 돌리던, 불의를 보면 정의를 외치던 친구였다. 그러면 뭘하나,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 ! 친구가 사람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면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꼬라보았다. 노동은 신성하다 _ 라거나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리라 _ 따위를 믿지 않았기에 국영수는 물론이요, 도덕까지 포기했었다.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과목은 미술이었다(그렇다고 재능이 출중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린 자식이 미술에 재능을 보일라 하면 질색을 하셨다. 기름칠로 밥 벌어 먹는 것에는 관대하셨지만 뺑끼칠로 밥 벌어 먹는 것에는 부정적이셨다. 네 아버지를 보거라 ! 그래서 그랬을까 ? 나에게 배당된 크레파스, 수채화 물감, 포스터 물감은 모두 12색 세트 묶음이었다. 반면에 도덕을 포기하는 대신 국영수에 올인했던, 제일은행 연희동 지점 지점장 외아들이었던 짝꿍은 64색 세트를 자랑했다. 뚜껑을 열면...... 아, 알록달록한 크레파스가 색색이 ! 그렇지만 신은 공평한 법. 짝꿍에게는 미술적 재능이 제로'여서 완성된 그림은 항상 개 발바닥과 새 발바닥이 되곤 했다.
국영수는 물론이요, 도덕까지 포기했던 나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짝꿍에게 말하곤 했다. 너는 산수화를 그리라고 했더니 동물화를 그렸구나 ? 말머리가 길었다. 영화 << 히말라야 >> 는 64가지 수채화 물감(화려한 출연진의 목록을 보라)이라는 훌륭한 도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밋밋한 영화가 되었다. 산악 영화에서 주인공은 산의 설경인데, 감독은 64가지 수채화 물감으로 산수화나 풍경화 대신 인간 군상의 인물화를 그렸다. 인간들만 바글거리니 정작 주인공인 히말라야 산은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설경을 그리는 대신 개 발바닥과 새 발바닥만 그린 꼴이 되었다.
여기에 한국 영화 특유의 최루성 신파'가 더해지면서 구질구질한 영화가 되었다. 감독은 유화 물감과는 달리 덧대면 덧댈수록 색의 형질을 잃어버리는 수채화 물감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늘상 하는 소리지만 : 가수가 슬픈 발라드를 부를 때 객석보다 먼저 울면 안된다. 휴먼드라마도 마찬가지'다. 감성이 지나치면 질척거리게 되는 법. 영화 속 사나이들은 자꾸 우는데 관객인 나는 자꾸 욕만 나오게 된다. 좋은 영화는 대사보다는 상(象)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형편없는 영화는 상보다는 대사로 이야기를 관객에게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 히말라야 >> 는 후자'다.
착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마다 연기 실력이 형편없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황정민은 느닷없이 활동사진 변사가 되어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관객에게 줄거리를 요약해서 들려준다. 영화라는 장르는 국어 수업보다는 미술 수업에 가깝다. 대사가 (영화 속) 상황을 설명하는 순간, 그 영화는 실패한 영화가 된다. 감독이 그림(picture)을 그려야지 소설을 쓰면 안된다는 말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
덧대기 ㅣ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중요한 말을 해야 될 때 정작 침묵을 지키는 장면 - 들이다. 낸시 사보카 감독이 연출한 <<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 Dogfight, 1991 >> 가 좋은 예이다. 이 영화의 라스트씬은 간결하고 조용하며 화려하지는 않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우여곡절 끝에 두 남녀는 다시 만난다. 할 말이 얼마나 많을까, 멜로드라마의 화룡점정은 재회 장면이 아닐까 ? 눈물이 곧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감독이라면 이 눈물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겠으나, 낸시 사보카는 눈물점이 도달하기 전에 영화를 끝낸다. 눈물 없이, 말 없는 포옹으로 끝나는 장면은 쓰빽따끌하며 씨끌뻑쩍한 재회 장면보다 감동적이다. 허세 작렬하는 활동 사진 연사의 말투를 흉내 내자면 : 만약에 당신이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다면, 불행으로 점철된 당신의 생에서 한가닥 남은 유일한 행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