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빠숑의 역사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학창 시절, 내 기억에 재수 없는 꼰대'는 죄다 반팔 와이셔츠에 통 넓은 배바지 양복 바지, 그리고 똥색 슬리퍼를 신은 부류였다.
특히, 반팔 와이셔츠 안에 비치는 런닝샤쯔는 화룡점정이었다. " 클래식 " 한 수트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그만 " 아방가르드한 " 패션에 눈을 뜨게 되었다. 거리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그런 " 빠숑 " 말이다. 쪽도 처음에만 부끄럽지 자주 팔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 세기말에 맞춰서 나는 하얀 라운드티에 검은색 유성 매직으로 다음과 같은 시구를 써넣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다. 이성복 시인의 시'였다.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어르신들은 눈빛으로 손가락질을 해대기 일쑤였다. 밥은 먹고 다니냐 _ 이런 눈빛으로.

- 모주석 초상과 함께 모주석 만세라는 구호가 새겨져 있다. 당시, 나는 마오이스트였다.
한번은 모택동 초상화와 함께 모주석 만세라는 문장이 새겨진 프린팅 라운드티를 입었다가 할아버지가 지팡이로 내 머리를 때린 적도 있었다. 이해하시라, 그때는 세기말이었으니까. 쪽을 자주 팔다 보니 점점 내 빠숑의 역사는 아방가르드보다 과격한 다다(dada)의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목걸이, 귀걸이, 팔지는 물론이요, 목걸이 같은 경우는 서너 개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다.


이국적인 빠숑 때문일까 ? 칠레 사람이 나에게 한국말을 한국 사람보다 잘한다며 " 엄지척 " 을 하기도 했다. 그는 특유의 억양으로 나에게 물었다. 헤이, 아미고 ! 비결이 뭐야. 나는 말했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김치와 고추장이었노라고. 이런 된장, 풋풋풋. 하여튼 균형 감각을 잃자 나중에는 통제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손톱에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이유는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 손톱을 검은색으로 칠하니 식욕이 사라졌다. 이 전략을 대성공을 거두었다. 손톱 물어뜯기를 중지하자 손톱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동생이 진지하게 물었다. 형, 혹시...... 아니다, 아니다. 없던 걸로. 그러니까, 그게..... 혹시, 오해하지 말고 들어. 흠흠, 그러니까, 형.... 혹시 게이야 ?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가 빠숑을 알아 ?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결핍보다 무서운 것은 과잉이라는 사실을. 나이도 나이인 만큼 클래식한 세계로 진입하려고 결심할 때 이명박이 내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살다 살다 이렇게 뻔뻔하고 징그러운 인간은 처음이라. 나는 벽 대신 바지에다 대자보를 쓰고는 시위에 나섰다.


그 누가 이해하랴, 이것이야말로 다다 빠숑의 시조새였다는 사실을. 격동의 시대가 지났다. 이제 나는 정상적인 클래식한 세계에서 살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통 넓은 와이셔츠 안에 입은 런닝샤쯔 패션만은 사양하고 싶다. 화이트 드레스 셔츠(일본 사람들은 화이트 드레스 셔츠를 와이셔츠'라고 부른다)는 속옷'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통 넓은 와이셔츠 안에 하얀 내의를 입는 것은 내의 안에 내의를 입는 꼴이란다. 또한 반팔 와이셔츠도 복식 문화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고. 덥다고 한복 팔을 잘라내지는 않으니깐 말이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의자는 불편하다고 한다.
복식 문화도 마찬가지다. 격식을 차린 옷은 불편하다. 미학이란 어느 정도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 사람 중심 " 이라거나 " 인체공학적 설계 " 라는 언어의 온도'가 따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촌스럽게 느껴진다. 아름다운 의자나 보기 좋은 옷은 사람 중심적이지 않을 뿐더러 인체공학적이지도 않다. 어쩌면 그때 그 시절, 내 빠쑝도 미학 비스무리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렁주렁 매달린 목걸이의 무게 때문에 허리가 휠 정도였으니까. 내 빠숑은 실패했다. 인정한다. 하지만 이해하시라, 그때는 세기말이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