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의 딜레마




                                                                                                         옷장의 딜레마라는 사회심리학 용어가 있다. 생경한 용어여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전을 찾을 필요는 없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갓 지어낸 신조어이니 말이다.

옷장을 열었을 때 옷이 많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입을 옷이 없다는 반증이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자니 맵시가 나지 않아 입지 않게 되고, 버리자니 새옷이라 아까워서 보관하게 된다. 옷을 보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방치이자 학대이다. 옷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패턴이 지속되면 새옷 같은 헌옷이 쌓이게 되어 옷장은 포화상태가 된다. 그것이 바로 옷장의 딜레마'다. 그럴 듯하쥬 ?   오히려 옷을 잘 입는 사람의 옷장을 열어 보면 생각보다 심플하다는 데 깜짝 놀라게 된다. 즐겨 입고 자주 입다 보니 낡은 옷이 되니 헌옷은 버리고 그 자리를 새옷이 채우는 순환 방식 덕이다.

옷이 옷장에 쌓일 일이 없는 것이다. 냉장고도 옷장과 비슷하다. 요리에 흥미가 없고 실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냉장고는 포화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울리지 않는 옷과 맛이 없는 음식은 동일어'다. 최소주의적 삶은 최대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각성이다. 이것저것 버리기 시작했다. 최소주의적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나서 처음 실행한 버리기는 하루 세 끼에서 두 끼를 버리는 것이었다. 음식을 버리는 쪽보다는 먹지 않는 쪽을 선택했고, 허기와 싸우기보다는 맛에 대한 욕심을 비웠다. 미식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신에게 감사할 뿐이다. 감량 효과와 함께 고혈압,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졌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 여유도 생겼다.

다음은 옷이었다. 입던 옷의 2/3는 재활용 보관함에 넣었다. 이제는 보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학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책장의 책도 절반을 줄였다. 부피가 줄어드니 공간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 앞으로는 적게 벌고, 적게 소비할 생각이다. 자기 연민도 절반으로 줄이겠다. 인간 관계도 한두 명이면 족하다. 아따, 조낸 시바...... 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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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6-13 10: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옷장의 딜레마‘, 내가 지은 네이밍인데 꽤 훌륭한 것 같다. 여러분, 좀 밀어주십셔.. 많은 애용 부탁드립니다..

마립간 2017-06-13 10:44   좋아요 0 | URL
안해에게 수시로 듣는 것(상황)인데, 그 상황이 좋은 이름을 얻었네요.^^

마립간 2017-06-13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감독의 가훈이 ‘아님 말고‘랍니다. 의미심장하지만, 이 가훈은 있는자의 위치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비평이 있는데, 제가 주장하는 ‘자발적 가난‘ 역시 있는자의 가치관이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6-13 12:24   좋아요 1 | URL
아님 말고가 있는 자의 위치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면
말고 아님으로 도치시키면 될 것 같습니다.. ㅎㅎ.

cyrus 2017-06-13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정말 버리기 힘듭니다. 팔면 또 사고, 팔면 또 사고, 팔면 또 사고... 빈 공간에 다른 책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6-13 12:23   좋아요 0 | URL
책은 버리지 않고 모임 나갈 때마다 책 잔득 들고 나가서 나눠줬습니다.나머지는 기증하고..
처음에 저도 그게 몹시 힘들었는데 기준을 정하고 나니 오히려 쉽더군요. 비소설만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yamoo 2017-06-13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장의 딜레마...ㅎㅎ 이런 표현은 여성들의 옷장을 다룬 글에서 심심찮게 보였던 표현같아요. 여성 잡지나 스타일과 관계된 책들에 보면 여성들이 옷장에 옷이 많으면서도 매 시즌 입을 게 없다고 투정부리는 것을 은근슬적 비판할 때 자주 썼던 표현으로 기억합니다.ㅎ <옷장 심리학>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ㅎ

곰발 님의 이 페이퍼를 보니, 저도 옷장에 대한 페이퍼를 써야겠습니다요~ㅎㅎ

그나저나 옷은 많이 버렸습니다만...책은 좀처럼 버리기가 힘드네요..ㅜㅜ

곰곰생각하는발 2017-06-14 09:24   좋아요 0 | URL
입을 게 없다고 생각되면 버려야 합니다. 입을 게 없다고 생각된 옷들이 나중에는 입고 싶은 옷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니 말이죠. 저도 청바지 좀 여러 개 있었는데.. 언젠가 입겠지 했으나 일 년 내내 안 입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한 번 인 입는 옷은 나중에도 안 입는다는 사실을 말이죠...


ㅎㅎㅎ
 


 

 

 

 

 

 


 




향숙이는 예쁘다



 

                                                                                                        벡델 테스트'라는 것이 있다. 영화판이 남성 캐릭터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 고안된 테스트이다. 세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첫째, 주연과 조연을 통틀어서 이름을 가진 여자가 2명 이상 나올 것. 둘째, 주연과 조연을 통틀어서 이름을 가진 여자 2명 이상이 서로 대화할 것. 셋째, 주연과 조연을 통틀어서 이름을 가진 여자 2명 이상이 서로 대화를 나눌 때 대화 내용이 남성과 관련된 주제가 아닌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 벡델 테스트가 제시하는 요구 조건에 대해서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각양각색, 다종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치고 빠지는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자 2명이 대화를 나눌 때 남성과 관련된 주제가 아닌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작년에 1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한국 영화 23편 가운데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고작 6편에 불과했다. 생각해 보면 대중 영화 속 여성은 남성 욕망을 완성시키는 오브제로 활용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휠라 입고 촌티나게 싸우는 조폭 영화와는 달리 아르마니 수트 입고 간지나게 싸우는 느와르 영화 << 달콤한 인생 >> 에서 두 남자는 희수(신민아 분)를 사이에 두고 의리 없는 혈투를 벌이지만 막상 관객은 원인 제공자인 희수가 누구인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친한 친구는 누구이고,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모른다. 그녀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르마니 수트 입고 싸우는 두 남자의 서사를 위해 소비되는 환영이요, 맥거핀에 불과하다. << 살인의 추억 >> 에 나오는 향숙이도 마찬가지다. 관객이 알고 있는 향숙이에 대한 정보는 향숙이 예쁘다 _ 가 전부다. 백광호(박노식 분) 입을 빌려 발설하자면 희수는 " 희수는 예쁘다 " 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납작한 여성의 전형이다. 이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마치 3D 영화에서 2D로 활용되는 백그라운드로 활용된다. 김훈은 << 남한산성 >> 100쇄 기념 기자 회견장에서 여성에 대해 무지하다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나오면 쓸 수가 없어요. 너무 어려워요. 여자를 생명체로 묘사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어떤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나는 매우 서툴러요. (…) 여자에 대한 편견이나 악의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이 고백은 프로이트가 말년에 여성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대목과 겹친다. 분명한 것은 잰더 차이에서 오는 태생적 무지의 한계'이다. 한국 영화 혹은 한국 문학에서 남성 작가들이 여성을 묘사할 때 밋밋한 " 2D스러움 " 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잰더 차이에서 오는 태생적 무지의 한계에 덧대어 여성을 알려는 노력조차 시도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김훈은 자신의 무지를 잰더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여성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다. 작가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 것처럼 그 나라 문화는 그 나라 관객(독자) 수준에 맞는 작가를 갖는다. 여성을 단순하게 성적인 젖으로 인식한다면 남성 또한 단순한 의미에서 성적인 좆에 불과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벡델 테스트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 여성불평등 " 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스웨덴은 2013년부터 세계 최초로 벡델테스트를 영화 산업에 도입하여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에는 A 라는 인증마크를 부여한다고 한다. 일종의 KS 마크인 것이다. 강제 규제가 아닌 권고 사항이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자기

검열 기준 사항으로 참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범적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깐깐한 간섭이 결국에는 통섭을 만든다. 향숙이는 예쁘다. 물론 나도 그 사실은 알고 있다. 내가 궁금한 것은 향숙이의 프롤로그가 아니라 에필로그'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고 싶다. 향숙아, 밥은.... 먹고 다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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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어당과 루쉰


 

 

                                                                                                         발목불인견'이란 말이 있다. 목불인견이 눈앞에 벌어진 상황 따위를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어서 뒷목 잡는 상황이라면, 남 잘되는 꼴을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어서 사사건건 상대방 발목을 잡는 경우를 발목불인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 경우를 씨발목불인견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요즘 잘한당(자유한국당 약칭)이 하는 짓을 보면 목불인견을 넘어, 발목불인견을 뛰어넘어, 씨발목불인견 수준이라 할 만하다. 어찌나 씨발-스러운지 감탄할 정도이다. 그동안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경상도 대구 유권자들이 어린 손주 재롱을 보고 싶다며 잘한당, 잘한당, 잘한당 _ 하며 어르고 달랬더니 버릇만 나빠졌다. 도리질할 때마다 박장대소하며 은총을 내리시니 깃발만 꽂으면 당선이 되는 표밭이라. 하여 배운 게 도리질이라. 문재인 정부 인사 청문회 내내 도리질'이다. 도리 도리 잼잼 ~  어이쿠, 내 새끼 !  잘한당, 잘한당, 잘한당 ~ 

한 살 남짓한 아이가 도리질해야 예쁘지 예순이 넘은 노인들이 도리질하니 징그럽기 거지없다. 도지사 시절에 유흥업소 종사자의 털을 술잔 위에 띄워 마시고, 입고 있던 빤스를 벗어 술에 담근 후에 술에 쩔은 빤스를 짜서 여러 사람과 돌려 마셨다 하여 이름 붙여진 음모주와 충성주를 제조하신 분이 연일 후보자의 도덕성 운운하니 난감하다. 문재인 정부의 도덕성을 탈탈 털겠다고 단단히 벼르시던데 털털한 분으로 악명 높은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털로 흥한 자는 털로 망할 것이라 믿는다. 또한 자유한국당이 오일팔 정신 운운하며 김이수 헌법재판관 후보를 비토하고 있으니 후(厚)의 두터움과 흑(黑)의 두려움 앞에서 할 말을 잊게 만든다.

그들은 문재인 정부를 향해 불통, 쇼통, 먹통, 호통이라며 라임을 살린 스웩을 선보였지만 술통과 간통 그리고 사통의 달인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어설픈 라임은 갱스터 랩의 질을 떨어트린다. 지금부터 스웩의 정수를 선보이겠습니다. 우웩 !                   이 모든 저질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역설적이지만 "  후(厚)의 두터움과 흑(黑)의 두려움 " 이다. 정치인에게 있어서 " 두꺼운 낯짝 " 은 때에 따라 필요한 가면이고, " 하드보일드 " 는 정의를 실행하는 가장 빠른 수단이기도 하다. 루신의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 라는 산문은

<< 생활의 발견 >> 이라는 산문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린위탕(임어당)이 중국에는 페어플레이 정신이 희박하기 때문에 적극 권장해야 된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린위탕이 페어플레이란 물에 빠진 개는 때리지 않는 태도'라고 정의하자 루쉰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무리들은 먼저 물 속에 빠뜨리고 이어서 때려주어야 한다. 만일 스스로 물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뒤쫓아가 두들겨 패줘도 무방하다. 그들은 권세에 몹시 아첨하지만 아직도 늑대에 가까울 만큼 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일부 공리론자들은 `보복하지 말라`,`자비로워라`,`악으로써 악에 대항하지 말라`라는 말들을 외쳐댄다. 그 때문에 악인은 구제된다. 그러나 구제된 뒤에도 감쪽같이 속였다고 생각할 뿐 회개 따위는 하지 않는다. 토끼처럼 굴을 파놓고 남에게 아첨도 잘하므로 얼마 안가 세력을 되찾아 전과 마찬가지로 나쁜 짓을 시작한다(루신전집1,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中). 


요약하자면          :         페어플레이는 상대방이 " 페어 " 할 때 가능한 애티튜드이지 " 언페어 " 한 상황에서는 상대에게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주장이다. 루쉰은 “만약 앞으로도 광명이 암흑과 철저하게 싸우지 않고 순직한 사람이 악을 용서하는 것을 관용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고식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오늘날과 같은 혼돈 상태는 영구히 이어질 것이다” 라고 경고한다. 루쉰의 충고는 노무현 정권이 왜 실패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페어 > 가 < 언페어 > 를 개과천선하게 만들 수 있다는 노무현의 환대(혹은 선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페어한 상황에서 협치는 정치의 주요 덕목이지만 언페어한 상황에서는 투창와 비수의 정신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정의는 사랑보다는 복수, 용서보다는 청산에 의해 성장하고 완성되었다.  개선될 여지가 없는 족속에게는 몽둥이가 가장 좋다. 정치는 < - 學 > 보다는 < - 術 > 의 영역에 가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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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1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11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12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6-12 19:33   좋아요 0 | URL
그럼요. 저는 아임파인생큐 앤드 유입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집



 


                                                                                                         오래 전, 바람이 잘 통하는 < 집 > 에 산 적이 있다. 언덕 위에 지어진, 낡고 볼품없는 이층집이었다. 무엇보다도 마을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지어진 집인데다가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과 앞뒤로 뚫려 있는 넓은 문과 창이 바람이 지나가는 방향과 일치해서 고열로 펄펄 끓는 삼복 더위에도 늦은 봄 날씨와 같았다.

어렸던 내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풍경 하나는 생생 돌아가는 선풍기 전원을 뽑으려고 했더니 이미 전원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여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다. 그러니까 오로지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힘으로 선풍기 프로펠러를 돌아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문과 창을 활짝 연 다음에 선풍기 위치와 방향을 바람이 지나가는 방향과 일치시키야 했다.  그래서 선풍기를 특정한 자리에 놓고 선풍기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서 바람이 지나가는 길과 일치시키면 프로펠러는 서서히 돌아가다가 탄력을 받으면 신나게 돌아갔다.

자랑할 만한 살림살이가 없었던 가족에게 그 바람은 유일한 구경거리이자 자랑거리였다. 브라보, 바람이 지나가는 길에 영광 있으라 !                                   손님이 집에 오면 가족은 보란 듯이 문과 창문을 활짝 열고 놓고 손님에게 바람을 구경시켰다. 무엇보다도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선풍기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바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선풍기 바람이 기분 나쁜 촉감을 전달한다면 우리집을 내통하는 바람은 5월 볕 좋은 날에 말린, 바짝 마른 순면 재질의 옷을 입을 때 느끼게 되는 기분 좋은 촉감을 주었다. 이래저래 바람은 자랑할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누대의 최대 자랑거리였다.

그 이후, 이보다 좋은 바람을 만난 적이 없다. 서울은 주거 환경이 과밀되어서 바람길은 전부 막히고 아스팔트 열기와 에어컨 실외기에서 뿜어내는 열기는 대기열을 높일 뿐이다. 서울에서 그 아무리 땅값 비싼 자리에 지어진 집이라 해도 좋은 바람을 구경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적어도 서울이라는 곳에서는. 지난밤에 꿈을 꿨다. 사위가 어두운 밤이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후덥지근한 날씨로 보아 여름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고 나서야 꿈속의 내가 있는 곳이 그 옛날 살던 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렸을 때 허락 없이 내통했던 그 바람이었다.

그 바람의 세기와 냄새와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과 뭉클한 마음이 겹쳤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았다. 창문 하나 없는 타워팰리스와 그 옛날 살던 집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람과 내통하던 그 낡은 집을 선택할 것이다. 사는 데 있어서 많은 친구는 필요 없다. 좋은 바람은 좋은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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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8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08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09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10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08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08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06-08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창문도 자기 마음대로 열 수 없는 통유리로 만들어진 타워팰리스보다는 마음껏 환기시킬 수 있는 지금 집이 좋습니다^^: 바람이 부는 곳에 생기가 들어오는 것 같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6-08 17:46   좋아요 1 | URL
바람 잘 들면 환풍기 필요없죠. 좋은 바람이 좋은 냄새를 만들고 웰빙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통유리로 다 막은, 창문 하나 없는 타워팰리스에서 왜 사나 모르겠어요. 바람을 기계로 돌려서 공급한다는 얘기인데.. 좀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7-06-0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물을 부실하게 지으면 여름에 빗물이 새고, 겨울에 찬바람이 새어 나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이 그렇습니다. 이거 때문에 스트레스 받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6-08 17:51   좋아요 0 | URL
여름에 빗물 새고
겨울에 바람 새고 .. 최악이네요.. ㅎㅎ

나와같다면 2017-06-09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론 바람으로, 냄새로, 음악으로..
잊고 있던 옛 기억이 훅 올라올때가 있죠.
나도 잊고 있었던, 그러나 몸이 기억하고 있던 추억..

곰곰생각하는발 2017-06-10 14:22   좋아요 0 | URL
좋은 꿈에 자주 나타나는 집인 걸로 보아서는 아마도 이곳에 대한 추억이 많은 것 같다가도
사실.. 이 집에 살 때 딱히 좋은 기억은 별로 없거든요. 아마도 다 좋은 바람 탓일 듯합니다..
 

 

 

 

 

 

 

 

 

 

 

 

 

 

 

 

                                       

 

한 국 인 의   소 울   푸 드   :






한국 문단에게 : 삼계탕 드실라우 ?

 

 

 

 

 

 

 

 

                                                                                                        

 

대한민국은 대대로 농경 사회이다 보니 노동자에게 삼복 더위만큼 " 개 같은 날의 오후 " 는 없을 것이다. 그늘 없는 논밭에서 일하다가 살인 더위에 쓰러지는 사람 많았으니 복날은 흉일이라 여겨 씨 뿌리기, 여행, 혼인, 병 치료 등을 삼가는 풍습이 있었다.

 

복날에는 그늘에서 쉬면서 계삼탕으로 몸보신을 하며 기운을 차렸으니 몸이 편한 날이라.  일종의 폭염주의보에 따른 임시 공휴일인 셈이다. 그때 먹던 계삼탕이 지금의 삼계탕이다(옛날에는 귀하디 귀한 삼보다 계가 앞섰는데 지금은 계보다 삼이 앞섰으니 영양가는 그때보다 높을 것이다). 이 풍습은 지금까지도 유지되어 복날이 되면 삼계탕을 먹는다.  삼계탕 한 그릇에 대략 1000칼로리'라고 하니 대표적인 고열량 음식이다. 여기에 더해서 특식으로 몸보신한다고 전복에 각종 해산물을 넣은 용궁삼계탕 한 그릇이면 한 끼 칼로리가 아닌 하루 칼로리를 섭취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삼복 더위에 삼계탕 특식으로 원기를 회복하려 했던 옛 조상의 지혜에  무릎 탁 치고 아 _ 하게 된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서 영양 과잉 사회에서 삼계탕으로 몸보신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식생활 습속'인지는 다시 한 번 재고할 문제이다. 현대인이 기운이 없다 _ 라고 말하는 것은 하루 끼니를 걱정하던 시대의 농민이 삼복 더위에 기운이 없다 _ 라고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이다. 현대인의 만성 피로를 영양학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영양 결핍보다는 영양 과잉의 결과'이다.  그렇기에 만성 피로를 고열량 음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된 치료이다.

한국 문학에서 남성 작가들이 범하는 오류도 이와 비슷하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만성 피로의 원인을 잘못된 생활 습관(영양 과잉 식생활)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영양 결핍에서 찾는다. 그때부터 기이한 식도락 여행이 펼쳐지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윤대녕 소설이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는 잘못된 생활 습관으로 인한 의욕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식도락 여행을 떠난다. 그에게 " 묘령의 여인 " 캐릭터는 삼복 더위에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먹는 삼계탕이나 영계백숙으로 소비된다. 묘령이라는 단어가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여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계백숙에 가까울 터다.  초면에 실례합니다만, 우리....... 섹스할까요 ?                                

섹스와 삼계탕의 공통점은 버, 벌거숭이라는 점과 뜨, 뜨거워서 땀 흘리며 먹는다는 점이다.  으라차차, 먹고 나니 기운이 불끈 !   젊은 여성을 " 몸보신을 위한 삼계탕 " 으로 취급하는 문학적 애티튜드는 박범신의 << 은교 >> 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진단 결과가 잘못되었으니 치료 방법이 엉터리일 수밖에 없다. 작년에 한국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 문단 내 성폭력 " 사건은 한국 문단을 자지우지하는 남성 문단 권력을 여성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싶다. 한국 남성 작가가 쓴 소설을 읽고 영혼이 털리는, 구멍 난 가슴을 치유하는 기적을 경험했던 이가 몇이나 될까 ? 

삼계탕이 소울 푸드였던 시대는 끝났다. 몇 가지 당부드린다. 밥이 보약이라는 하나 마나 한 소리 그만하고, 기운 없다는  신소리도 그만하시라. 또한 땀 뻘뻘 흘리며 삼계탕 먹는 풍경을 현대인의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시원적 여행 따위로 포장하지는 말자. 그냥, 솔직하게 삼계탕이 먹고 싶다고 말하라. 뒤로 호박씨 가는 당신보다는 당당한 찰스 부코스키가 좋다. 한국 남성 작가가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이 꽤나 촌스럽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만사가 귀찮고 피곤하며 매사에 짜증을 자주 내고 기운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한국 남성 작가에게 상계동 영희네 영계백숙 대신 크누트 함순의 << 굶주림 >> 을 추천한다. 이 소설, 끝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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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7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07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다맨 2017-06-0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남성 작가들뿐만 아니라 신경숙 같은 여성 작가들이 남성들의 로망에 긴밀히 부응하는 소설을 쓰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풍금이 있던 자리‘나 ˝엄마를 부탁해˝ 같은 소설에서 여성은 남성(또는 가족)의 호명을 받기를 바라거나, 호명(아내 OR 엄마)을 받은 뒤에는 가족(남편)의 버팀목이자 종속 대상으로서만 기능을 하지요.
박범신/윤대녕의 일부 소설에서 여성을 남성의 보충적/하위적 존재로 격하하는 경향도 문제가 있지만, 신경숙 소설처럼 여성이 가족/가장에 종속됨으로써 그들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은밀히 용인하고 가부장제 질서에 순응하고 자족하는 경향에도 비판적 메스를 마땅히 들이대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보기에는 박범신 소설과 신경숙 소설은 서로 짝패이자, 서로의 욕구를 채워주는 보충적 대상으로서 기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6-08 17:3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밤범신이 때리는 시어머니라면 신경숙은 시누이 같다고나 할까요 ?
문단 권력인 남성 작가 혹은 그 이데올리기에 봉사하면서 떡고물 챙기는,
문학을 빙자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사쿠라 문학이야말로 적패죠..

yamoo 2017-06-08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계탕을 한국문단의 문제와 연결시키다뉘!! 역시 곰발님!!!

곰곰생각하는발 2017-06-10 14: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김치찌개에 비유해야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