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숙이는 예쁘다
벡델 테스트'라는 것이 있다. 영화판이 남성 캐릭터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 고안된 테스트이다. 세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첫째, 주연과 조연을 통틀어서 이름을 가진 여자가 2명 이상 나올 것. 둘째, 주연과 조연을 통틀어서 이름을 가진 여자 2명 이상이 서로 대화할 것. 셋째, 주연과 조연을 통틀어서 이름을 가진 여자 2명 이상이 서로 대화를 나눌 때 대화 내용이 남성과 관련된 주제가 아닌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 벡델 테스트가 제시하는 요구 조건에 대해서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각양각색, 다종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치고 빠지는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자 2명이 대화를 나눌 때 남성과 관련된 주제가 아닌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작년에 1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한국 영화 23편 가운데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고작 6편에 불과했다. 생각해 보면 대중 영화 속 여성은 남성 욕망을 완성시키는 오브제로 활용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휠라 입고 촌티나게 싸우는 조폭 영화와는 달리 아르마니 수트 입고 간지나게 싸우는 느와르 영화 << 달콤한 인생 >> 에서 두 남자는 희수(신민아 분)를 사이에 두고 의리 없는 혈투를 벌이지만 막상 관객은 원인 제공자인 희수가 누구인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친한 친구는 누구이고,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모른다. 그녀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르마니 수트 입고 싸우는 두 남자의 서사를 위해 소비되는 환영이요, 맥거핀에 불과하다. << 살인의 추억 >> 에 나오는 향숙이도 마찬가지다. 관객이 알고 있는 향숙이에 대한 정보는 향숙이 예쁘다 _ 가 전부다. 백광호(박노식 분) 입을 빌려 발설하자면 희수는 " 희수는 예쁘다 " 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납작한 여성의 전형이다. 이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마치 3D 영화에서 2D로 활용되는 백그라운드로 활용된다. 김훈은 << 남한산성 >> 100쇄 기념 기자 회견장에서 여성에 대해 무지하다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나오면 쓸 수가 없어요. 너무 어려워요. 여자를 생명체로 묘사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어떤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나는 매우 서툴러요. (…) 여자에 대한 편견이나 악의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이 고백은 프로이트가 말년에 여성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대목과 겹친다. 분명한 것은 잰더 차이에서 오는 태생적 무지의 한계'이다. 한국 영화 혹은 한국 문학에서 남성 작가들이 여성을 묘사할 때 밋밋한 " 2D스러움 " 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잰더 차이에서 오는 태생적 무지의 한계에 덧대어 여성을 알려는 노력조차 시도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김훈은 자신의 무지를 잰더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여성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다. 작가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 것처럼 그 나라 문화는 그 나라 관객(독자) 수준에 맞는 작가를 갖는다. 여성을 단순하게 성적인 젖으로 인식한다면 남성 또한 단순한 의미에서 성적인 좆에 불과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벡델 테스트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 여성불평등 " 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스웨덴은 2013년부터 세계 최초로 벡델테스트를 영화 산업에 도입하여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에는 A 라는 인증마크를 부여한다고 한다. 일종의 KS 마크인 것이다. 강제 규제가 아닌 권고 사항이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자기
검열 기준 사항으로 참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범적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깐깐한 간섭이 결국에는 통섭을 만든다. 향숙이는 예쁘다. 물론 나도 그 사실은 알고 있다. 내가 궁금한 것은 향숙이의 프롤로그가 아니라 에필로그'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고 싶다. 향숙아, 밥은.... 먹고 다니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