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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2disc) - 컬러 & 스페셜 블랙 버전 본편 수록
임권택 감독, 안성기 외 출연 / 스튜디오 A(STUDIO A) / 2016년 1월
평점 :
영화 << 화장 >>,
철들지 않는 남자의 나이듦을 논할 때
감독은 정색을 하고 만들었지만 내가 보기엔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 천년학 >> 이후, 임권택 영화 세계에 " 학을 뗀 " 나는 더 이상 임권택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다.
<< 달빛 길어올리기 >> 라는 영화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본 영화이지만 강우석의 << 한반도 >> 와 더불어 최악에 가까운 망작'이어서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임권택을 여전히 살아 있는 전설로 떠받드는 정성일 평론가에게 임권택이라는 거장의 신화는 여전히 살아 있는가 _ 라고 묻고 싶다. 의리입니까, 기린입니까 ? 이런 마가린 ! 영화계와 평단이 팔순 노장 감독에 대한 리스펙(트)를 날리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가끔 그들의 과도한 존경을 볼 때마다 지나친 경로 우대 사상이 낳은 불상사가 아닌가 _ 라는 의문이 든다. 나는 임권택 감독이 장인이라는 평가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거장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굳은 맹서를 깨고, 오늘 영화 << 화장 >> 을 다시 본 이유는 B가 링크를 걸어 둔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제목은 <<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나이듦을 논할 때 >> 다. 영화 << 화장 >> 은 임권택 영화는 모두 다 고만고만한 영화여서 앞으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_ 라는 나의 " 자기 이행적 예언 " 이 단순한 확증 편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임권택과 안성기의 공통점은 60년 동안 한 우물만 팠는데 실력은 고만고만하다는 점과 국민감독이나 국민배우라는 월계관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로봇 연기의 원조는 장수원이 아니라 안성기다).
김훈의 단편소설 << 화장 >> 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요강처럼 가운데가 뚫린 의자 위에 앉혔습니다. 의자 위에서 아내는 사지를 늘어뜨렸습니다. 아내의 두 다리는 해부할 교실에 걸린 뼈처럼, 그야말로 뼈뿐이었습니다. 늘어진 피부에 검버섯이 피어 있었습니다. 죽음은 가까이 있었지만, 얼마나 가까워야 가까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의자 밑으로 넣어서 비누를 닦아냈습니다. 닦기를 마치고 나자 아내가 똥물을 흘렸습니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악취가 찌를 듯이 달려들었습니다. ( 44쪽 )
임권택은 김훈의 문자화된 언어를 시각적 언어로 번역하여 재현한다. 문제는 " 재현의 윤리성 " 에 있다. 예를 들어 끔찍한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답시고 감독이 재현해 놓은 강간 장면은 윤리적인가, 비윤리적인가 ? 영화 << 화장 >> 에서 감독은 병들고 헐거워진 여성 성기를 리얼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여배우의 성기 노출을 그대로 보여준다1). 내가 보기에 이 장면은, 팔순 노장 감독에게는 정말 미안한 소리이지만,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 어그로 " 에 지나지 않는다. 재현에는 윤리적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임권택은 애써 외면한다.
김영옥은 <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나이듦을 논할 때 > 라는 글에서 감독의 폭력성을 신랄한 어조로 비판한다.
김호정은 현실의 장면에서 그리고 김규리는 오상무의 상상 속 장면에서 이렇게 저렇게 ‘벗은 몸’으로 등장한다. 특히 통상 금기로 되어있는 성기 노출을 감행한 김호정의 여배우로서의 결단은 ‘쉽지 않은 용기’로 여러 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대본에 없던 구성인데, 촬영 도중에 감독이 ‘이래서는 느낌이 살지 않는다’고 판단하면서 성기 노출 쪽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어떤 주제를 구현하(고자 했)는가와 무관하게 영화 <화장>은 여성뿐만 아니라 몸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환자들이나 노년들의 인격을 무례하게 모독한다. 실제로 두 번이나 발병한 암 때문에 뇌수술을 받고 통증 때문에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용변을 통제 못하는 환자를 ‘리얼’하게 즉 실제로 돌봤거나 포괄적으로 경험해봤다면 여자배우의 아랫도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러한 존재 상태의 ‘리얼한 감’을 얻는다고 주장하기는 힘들 것이다. 통제 안 된 용변으로 더러워진 환자의 몸을 닦아주는 손놀림 몸놀림은 영화에서 저 남편이 보여준 것과는 매우 다르다. 세부사항 하나하나에서 치밀하게 ‘리얼’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그저 여자/배우/환자의 성기가 보여야 리얼하다고 느끼는 그 ‘감정의 구조’는 얼마나 허구적이며 헛방인가. ( 『 철들지 않는 남자들이 나이듦을 논할 때, 』 중에서 김영옥 www.ildaro.com )
영화와는 달리 원작 소설에서 늙고 비루한 육체에 대한 집요한 묘사는 아내의 몫만은 아니다. 남편 또한 전립선비대증으로 오줌주머니를 차고 다닌다. 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간호사는 고무장갑 낀 손으로 애무를 해주듯 손을 움직여 내 성기를 키웠다. 고무장갑 낀 간호사의 손 안에서 내 성기는 부풀었다. 성기는 내 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지만, 내 몸이 아닌 내 성기가 나는 참담하게도 수치스러웠다. 간호사가 그 구멍 안으로 긴 도뇨관을 밀어 넣었다. 도뇨관은 한없이 몸 안으로 들어갔다. 요도가 쓰라렸고 방광 안에 갇혀 있던 오줌이 아우성을 쳤다.
적어도 김훈은 늙고 병든 몸뚱아리를 남녀 구별 없이 공정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정직하다 할 수 있지만, 임권택은 여자 배우의 아랫도리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폭로하면서 남자 배우의 아랫도리는 하얀 시트로 가려주는 검열을 통해서 늙고 추레한 남성을 배려한다는 점에서 꽤나 비열한 측면이 있다. 감독은 여성 육체는 벗겨 놓아야 만족을 하고 남성 육체는 덮어 놓아야 안심을 한다. 재현에서 중요한 것은 서사의 핍진성이지 사물의 전시성'이 아니다. 내가 이 영화에서 임권택 감독에게 재현의 윤리적 책임을 묻는 이유이다.
1) 배우는 대본을 보고 계약을 체결한다. 여성인 경우는 노출 문제에 민감하기 때문에 수위 조절도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임권택은 영화 << 화장 >> 에서 여배우에게 대본에도 없는, 전라 노출 수위를 뛰어넘는 성기 노출을 감행한다. 만약에 감독이 배우에게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노출 순위가 성기 노출이라는 점을 명시했다면, 배우는 쉽게 이 영화에 동참할 수 있었을까 ? 이토록 중요한 문제를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감독의 폭력성과 " 여배우의 쉽지 않는 용기 " 따위로 퉁치는 영화계의 인권 감수성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