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쓰뜨랄한 범위에 근접하게 되는 쓰빽따끌의 향연 :
한국이 지겹다1)
중앙일보기자 전수진의 칼럼 < 한국은 지겹다 > 는 제목과는 달리 재밌다(칼럼 전문은 아래 미주를 확인). 인사 발령이 난 모양이다.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기자실에서 상주하며 파견 근무를 했던 기자는 임무를 마치고 짐을 싸서 본사 가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일 욕심이 많아서 짐 가방이 모두 다섯 개'라는 은근한 자기 PR도 곁들인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가녀린 여자가 혼자서 낑낑대며 짐 가방 다섯 개를 옮기는데 도와주는 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시바.
이 상황에서 기자는 한국 시민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며 " 한국 밖에선 안 그랬다. " 고 회상한다. 이 문장은 일종의 " 플래시백 " 이다.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 밖에선 안 그랬다. 지난 2012년 런던 여름올림픽에선 “제가 도와 드려도 되겠습니까”라는 현지 신사가, 지난 2015년 뉴욕 JFK 공항에선 “지금 도움이 필요하죠?” 라는 현지 여성이, 지난달 교토에선 “혹시 지금 곤란하신 상황이라면 도움을 드려도 괜찮으시겠어요?” 라는 현지 (심지어) 할머니가 있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선의가 살아 있었다. 대영박물관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보다, 교토의 흐드러진 벚꽃보다 이런 보통 사람들의 선의가 격하게 부러웠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기자는 성급한 일반화(hasty generalization)에 빠지게 된다. " 국민의 수준 " 을 운운하며 " 대한민국 5000만 국민 모두가 다 이 사회를 이렇게 후지게 만들었다 " 고 저주를 내린다. 그깟, 가방 하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말이다. 이 정도면 아쓰뜨랄한 범위에 근접하게 되는 쓰빽따끌한 hasty generalization 이다. 그는 가방 하나 때문에 화가 났던 것일까 ? 그는 칼럼을 다음과 같이 매조지한다. " 지난해 10월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한국인으로 사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이젠 달라야 한다. 잃어버린 매력을 되찾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떠날 수 없는, 우리나라니까. 매력 없는 한국은 너무 지겹다. "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이다. " 2016년 10월부터 이 기사를 입력한 2017년 4월 7일 " 까지의 기간은 한국 현대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격동에 해당되는데, 기자는 이 기간을 매력 없는 한국이라고 단정한 후 너무 지겹다고 토로한다. 의아하다. 이 기간 동안의 정보 생산량과 뉴스를 소비하는 흡입력이 블랙홀에 가까웠던 적이 있었던가 ? 더군다나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였다면 지겹다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리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자 비로소 기자가 야마 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기사는 짐 가방 다섯 개를 든 여자를 외면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지만 사실 이 기사의 진짜 야마'는 촛불에 대한 경멸과 비하에 있다.
대놓고 촛불을 비하할 수 없으니 짐 가방 타령이나 하는 것이다. 골때리는 화풀이 기사'다. 이 칼럼을 작성한 전수진 기자가 도마 위로 오른 것은 중앙일보 칼럼 < 문빠들의 거침없는 질주2) > 에 전수진 기자가 댓글을 달면서 시작되었다.
영어신문 시절 노사모 기사 썼다가 " 왜 우리를 (이화)창사랑 따위와 같이 썼느냐, 고소하겠다 " 고, 굉장히 못생기신 남자분이 전화했던 기억이 나네요. ㅎ
< 한국이 지겹다 > 라는 칼럼에서 " 피부색을 갖고 다른 이를 재단하다니, 후지고 천박하다 " 는 삼박한 문장을 뽑아냈던 기자는 어느 독자를 향해 " 굉장히 못생기신 남자분 " 이라는, 후지고 처처처처 천박한 인권 감수성을 드러낸다. 이쯤 되면 개그콘서트풍으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 이 분, 왜 이러는 걸까요 ? " 자기 가방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 국민의 수준...... " 운운하는 모습에서 기자라는 신분이 가지고 있는 " 독고다이 엘리트의 스웨그 " 를 엿볼 수 있다. 조중동은 물론이고 한경오마저 문빠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는 이유는 지식 / 언론 사회의 절대적 권위를 누렸던 자의 위기감 때문이다.
기자들은 문빠들이 좀비처럼 막무가내로 언론을 비난한다고 고백하지만, 사실 그들이 불편해하는 지점은 막무가내로 따지는 행위가 아니라 팩트를 가지고 조지는 행위에 대한 불편함이다. 내 글만 해도 그렇다. 나는 지금 전수진 기자를 막무가내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 피부색을 갖고 다른 이를 재단 - " 하는 " 후지고 천박한 " 인권 감수성을 비판하던 이가 어떻게 " 굉장히 못생기신 남자분이 전화했던 기억 " 을 떠올리며 낄낄거리냐고 팩트로 조지는 것이다. 피부색 갖고 다른 이를 재단하는 것과 외모 가지고 다른 이를 재단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요 ?
솔직히 말해서 기자들은 앞뒤 안 가리고 막무가내로 욕하는 독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쓴 기사를 독자들이 팩트 체크하는 상황이다.
■ 덧대기
1. 가방을 들어주지 않는 사회를 비판하기에 앞서 자존심 때문에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기자의 태도도 그닥 좋은 태도는 아니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외면했다면 기자의 서운함을 이해할 구석이라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무작정 남 탓부터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 글의 야마를 다섯 글자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너나잘하셈.
2. 중앙일보 칼럼 < 문빠의 거침없는 질주 > 에서 최민우 기자는 문빠를 " 문빠’에겐 더는 ‘조중동’이냐 ‘한경오’냐가 중요하지 않다. 보수든 진보든 여전히 한 수 가르치려 드는 듯한 ‘꼰대’가 꼴보기 싫을 뿐이다. 막무가내로 칼춤만 췄다면 ‘문빠’가 현재의 영향력을 가졌을까. 엘리트주의에 찌든 ‘기레기’와 금배지’ 등을 상대로 정밀 타격을 가하는 모습에서 대중은 통쾌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 라고 지적한다. 나는 이 칼럼의 논조에 동의한다. 기자가 문빠를 향해 눈치를 살펴야 할 권력이 되었다고 지적한 것은 " 막무가내 " 가 아니라 " 정밀타격 " 이 가능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나노 기술에 가까운 문빠의 핀포인트(PIN - POINT) 제구력은 문빠라는 시민 권력이 그동안 언론 권력만이 누렸던 정보접근성, 정보장악력, 팩트파인딩 및 체크 능력에 근접했기에 가능했다. 문빠가 조중동은 물론이고 한경오까지 비판하는 태도와 조중동은 물론이고 한경오가 문빠를 공격하는 태도는 언론 권력과 시민 권력이 헤게모니를 놓고 다툼을 하기 때문이다. 정보에 대한 접근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사회일수록 언론자유지수(낮을수록 좋다)가 좋은 사회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조중동은 국가가 언론을 장악하려고 시도한다면서 발악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의 언론자유지수가 가잫 좋았던 때는 노무현 정부로 언론자유지수 31위였다. 지금은 61위이다.
3. 이언주 의원이 제기한 문자폭탄이라는 프레임도 웃기긴 마찬가지'다. 국회의원은 선거철만 되면 유권자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여론조사 1회 비용으로 억 단위 이상의 비용을 쓴다. 문자폭탄 사용자는 여론 조사 기관이 해야 될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언주는 그들에게 비용을 내야 한다.
1) 칼럼 < 한국이 지겹다 > 전문 : 욕심이 과하긴 했다. 인사 발령이 난 뒤 지난 3일 아침, 정든 기자실을 떠나는 내 손에 들린 가방은 캐리어를 포함해 모두 다섯 개.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6층 기자실에서 검색대를 두 번 통과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모두 미련한 내 탓이지만 낑낑대면서 조금, 아니 많이 야속했다. 지나가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점이. 내가 JTBC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에 가깝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래도, 헉헉대는 동료 시민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이가 ‘0’이라는 건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한국 밖에선 안 그랬다. 지난 2012년 런던 여름올림픽에선 “제가 도와 드려도 되겠습니까”라는 현지 신사가, 지난 2015년 뉴욕 JFK 공항에선 “지금 도움이 필요하죠?”라는 현지 여성이, 지난달 교토에선 “혹시 지금 곤란하신 상황이라면 도움을 드려도 괜찮으시겠어요?”라는 현지 (심지어) 할머니가 있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선의가 살아 있었다. 대영박물관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보다, 교토의 흐드러진 벚꽃보다 이런 보통 사람들의 선의가 격하게 부러웠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랬을 거라고? 백번 양보해 그렇다고 치자. 한국은 (영어를 구사하는 백인이 아닌) 외국인에게도 팍팍하다. 지난 3일, 낑낑대며 새로 옮긴 곳에 짐을 푼 뒤 모바일 뉴스앱을 켜자 “한국에선 남 돕지 말라”는 외국인 부부의 사연이 떠 있었다. 이들 부부는 대형마트 주차장에서 뛰어노는 아이에게 차량이 돌진하는 것을 발견하자 소리를 지르며 피하게 했다. 문제는 그 다음. 아이의 조부모가 “왜 내 손자에게 고함을 지르느냐”며 인종차별적 욕설을 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중재는커녕 “한국에서는 자연스러운 발언”이라고 했단다.
이 뉴스를 접한 외국인 친구들은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영국인 친구는 “난 백인이라 다행”이라고 했다. 피부색 갖고 다른 이를 재단하다니, 후지고 천박하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향해 간다면서 국민의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인지. 타인은 무조건 경계하고 의심해야 하는 사회, 팍팍하고 남에게 사납게 굴어야 손해 안 본다고 생각하는 사회,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 정치 탓도 있지만 대한민국 5000만 국민 모두가 다 이 사회를 이렇게 후지게 만들었다. 남 탓 말고 내 탓을 하자. 지난해 10월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한국인으로 사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이젠 달라야 한다. 잃어버린 매력을 되찾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떠날 수 없는, 우리나라니까. 매력 없는 한국은 너무 지겹다.
분수대 칼럼 < 한국이 지겹다 > 전수진 기자
2) http://news.joins.com/article/21609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