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당과 중간이 없는 집구석  :










빵꾸똥꾸 해리를 위한 변명






일일 시트콤 드라마 << 지붕 뚫고 하이킥 >> 에서 버릇 없는 악동으로 등장하는 해리 때문에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나이와 서열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빵꾸똥꾸라고 독설을 날리다 보니 듣는 이 민망하다나 ?  해리 나이가 아홉 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으로부터 모욕을 당하니 배리올드ㅡ맨이 참다 참다 결국에는 참치가 될 것 같아서 그만 방송에서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최고 구식 사고를 해서 이름조차 구식인 한나라당 최구식 국회으원 나리 님께서 이 시트콤의 존망을 논해야 한다며 해리는 정신분열증에 걸린 아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최고 구식 으원은 “ 욕설로 일관되고 비정상적인 아이를 가지고 하는 것이 어떻게 방송을 완성시킨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어린 놈이 싸가지가 없다는 말. 시트콤을 다큐로 받아치시며 존망을 논하는 어르신 나리의 잔망에 모두 다 경악했지만 결국 이 명랑 시트콤 드라마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빵꾸똥꾸를 자제하라는 해리 함구령이 떨어졌다(권고 조치). 최고 구식인 으원님이 " 욕설로 일관되고 비정상적인 ㅡ "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내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떠오른 인물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이명박이었다. 그가 누구인가 ?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로부터 " 처먹어, 이눔의 새꺄 ! " 라는 욕을 처먹고 대통령이 된 인물이 아니었던가.  내돈내산 국밥인데 욕을 먹고도 좋다고 해맑게 웃으니 쥐새끼 눈깔이 더욱 사악해 보인다.  그래도 땀 뻘뻘 흘리며 처드시는 대통령. 얼씨구, 좋단다.  최고 구식 으원 나리 말 대로라면 욕 처먹고 대통령이 된 인물이 어떻게 바른 정치를 완성시킨다는 것일까(국밥을 말아먹었던 그는 결국 나라를 말아먹은 전과 14범이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국회의원이 연극한다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육시헐 놈, 개잡놈, 불알 값 운운한 정당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빵꾸똥꾸 때문에 피를 본 어른은 또 있다. 뉴스에서 남자 앵커가 빵꾸똥꾸로 방심위로부터 권고 조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가 웃음이 터져서 방송 사고가 난 적이 있다. 웃음이란 참다 참다 참다 참치 못하면 결국에는 울먹이게 되는 법.  옆에 있던 여자 앵커도 웃음을 참다가 결국에는 울먹이는 소리로 변했다. 참고 참고 또 참치 울긴 왜 울어라는 만화 노랫말이 설득력을 가지는 순간이었다. 아, 이 모든 것이 해리의 빵꾸똥꾸 발언 탓인 것이다. 시대마다 유행어가 발생하지만 이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대사'는 찾기 어렵다.  한마디로 명대사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빵꾸똥꾸 해리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하려 한다.  독자여, 웃지 마시라. 나..... 진지하다 !  우선 빵꾸똥꾸에 대한 정의부터 내리자. " 빵꾸 ㅡ " 는 "puncture " 의 일본식 발음으로 " 구멍 " 이라는 뜻이지만 일이 잘못되거나 낙제에 해당하는 학점을 받아 유급되는 상황을 뜻하기도 한다 : 빵꾸를 방구로 해석하는 이도 있으나 그것을 경음화 현상(된소리 되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여기에 똥구멍을 뜻하는 " ㅡ 똥꾸 " 가 결합된 구조로,  똥구멍을 프로이트 언어로 해석하면 항문기를 뜻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대한 지식이 쌀 한 톨만큼이라도 있다면 < 빵꾸똥꾸 > 는 " 항문기에서 남근기로 성장하지 못하고 유급된 상태 " 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해리가 어른을 향해 " 야, 이 빵꾸똥꾸야 ! " 라고 큰소리를 치는 것은 " 어른인 척하지만 알고 보면 항문기 고착 상태인 얼라 " 라는 의미이다. 사실, 해리가 네 가지가 없는 이유는 이 집구석이 크게 두 가지가 없다는 데 있다. 하나는 " 적당히 ㅡ " 가 없고 또 다른 하나는 " 중간이 ㅡ "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서로 각자도생하는 미성숙한 어른이'일 뿐이다.


최고 구식 으원 나리가 빵꾸똥꾸에 대한 내 해석을 읽는다면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하다. 어른에게 얼라'라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해리는 왜 어른을 향해 빵꾸똥꾸라고 하는 것일까 ?  항문기 고착 상태인 어른의 성격을 보면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는 항문기 고착 상태인 성인의 공통된 성격으로 고집불통, 구두쇠, 수집벽을 뽑았다. 그렇다면 항문기 고착의 대표적인 인물은 누가 있을까 ?  빙고. 그래요. 이명박과 박근혜. 두 어르신 모두 불통의 아이콘이자 구두쇠요, 돈에 대한 집요한 집착(수집벽)으로 깜빵 가셨던 분이 아니었던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빵꾸똥꾸를 외쳤던 해리는 이명박과 박근혜에게도 빵꾸똥꾸를 외쳤을 것이다. " 야, 이명박과 박근혜. 이 빵꾸똥꾸야 !!! " 내가 빵꾸똥꾸를 항문기 고착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해리의 캐릭터를 삼파장 발광 다이오드 현미경으로 초정밀 분석한 후 내린 결론이라는 데 있다.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하는 해리에게는 큰 곤경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변비다. 해리는 항상 변기 앞에서 똥과 씨름한다(몇 편의 에피소드에서 해리는 변비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화장실에서 엄마가 해리에게 배변 훈련(toilet training)을 가르치는 에피소드는 꽤 많이 등장한다. 


항문기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정의가 부모의 배변 훈련이 필요한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해리는 항문기 캐릭터다. 해리는 인간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친구이고 나머지는 모두 다 빵꾸똥꾸다. 해리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 해리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괴랄한 3단계 과정을 거쳐야 한다. < 1단계 > 도전자는 해리가 자신의 빠진 이빨을 친구 손에 쥐여 주었을 때 인상을 쓰면 안된다. 인상을 쓰면 탈락. 응, 바로 빵꾸똥꾸 ! < 2단계 > 는 해리가 싼 똥을 보며 인상을 찡그려도 응, 바로 빵꾸똥꾸. 


3단계 > 는 해리가 초코아몬드을 입에 넣고 초콜릿만 살살 녹여 먹고 나서 아몬드 알맹이만 친구에게 주었을 때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이마 주름을 三자로 만드느냐 川자로 만드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그럴 용기 있는가 ?  해리에게 친구란 빠진 이빨과 싼 똥과 아밀라아제를 공유할 수 있는 사이'다. 허무맹랑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해리의 3단계는 심오하다. 이 에피소드를 접했을 때 나는 감동의 도가니가 되어서 삼삼칠 박수를 쳤다. " 빠진 이빨 " 과 " 싼 똥 " 에 대한 집착은 해리가 구강기를 벗어나서 항문기에 진입한 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항문기인 해리는 항문기 고착인 어르신보다 고상하다. 해리의 막무가내는 지위 고하를 막론한다. 그러니까 해리의 막무가내는 특정한 세대나 권력 서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별 없는 아이이자 공평한 아이인 셈이다. 적어도 막무가내 해리는 어르신처럼 강자에게는 약하지만 약자에게만 막가는 인물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 막가내 " 보다 " 막무가내 " 인 해리를 좋아한다. 이런 막무가내라면 기꺼이 응원하련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해리가 집을 떠나는 신애를 껴안고 목놓아 울었을 때, 나는 관악산 소쩍새처럼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 해리야, 행복하렴.... 흙흙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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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은 잡혔다. 형사는 묻는다. 왜 죽였어?  살인자는 why 라는 의문문에 대하여 because가 포함된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이 진술을 토대로 기자는 기사를 작성한다. 강력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언론 기사는 대부분 가해자의 진술에 의존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언론에 공개된 서사는 대부분 가해자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과연 이 서사는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 


죽은 자는 진실을 말할 수 없고 산 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변명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다면  :  언론에 유포된 가해자 중심의 서사는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악한 영혼을 가진 범죄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강간 살해)라고 진술하거나, 아내가 시부모 욕을 해서 욱해서 살인을 저질렀다(가정폭력 살해)고 진술하거나,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피해자가 반항을 해서 죽였다(강도 살해)는 진술은 믿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모든 진술은 감형을 염두에 둔 변명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에게 덧씌워진 서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대부분 어릴 적에 강간을 당한 경험이 있고 어렸을 때 성질이 사나운 엄마와 아빠의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고 고백하지만 이 연쇄살인범들의 고백 또한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변명처럼 들린다. 강간을 당한 피해자였기에 나중에 강간 살해를 했고, 어릴 때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범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자기 내부의 사악한 본성보다는 외부의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범죄자의 고백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 고백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고 싶다.  정말 그럴까 ? 


영화 << 케빈에 대하여,2012 >> 는 가해자 케빈이 진술한 드라마를 재현하지 않고 철저하게 피해자(케빈의 어머니)의 시선으로 재현한 드라마'다. 영화는 관객에게 이제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라고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에바에 대한 이야기다.  집단 학살 가해자의 어머니이기에 겪어야 하는 수난극은 성서의 욥 이야기를 닮았다.  신이 욥에게 내리는 "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불행 " 에는 이유가 없다.  케빈은 신의 명령으로 욥에게 온갖 종류의 고통을 주는 사탄을 닮았다.  이 사탄은 신의 대리자라는 점에서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케빈도 그렇다. 그는 에바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신의 대리자'이다. 관객은 끊임없이 케빈이 대량 학살을 저지는 이유를 밝히려고 노력한다. 한쪽은 케빈의 본성 탓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은 에바의 잘못된 양육 탓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관객의 포지션이다. 케빈이 신의 대리자(사탄)이고 에바가 욥이라면 관객은 욥의 세 친구 역할을 한다.  빌닷, 엘리바스, 소발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욥의 고통은 커진다.  결국 세 친구가 내린 결론은 이 고통은 그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  신이 내린 형벌에는 나름의 논리와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럴수록 욥은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 "  이때 신이 나타난다. 욥은 신에게 자신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묻지만 신은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에바는 교도소에 수감 중인 케빈에게 찾아가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왜, 그랬니 ?  이제는 말할 수 있잖아(" I want you to tell me, why? ") ? " 하지만 케빈은 끝끝내 그 의문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I used to think I knew, but now I’m not so sure ")


케빈은 신의 대리자일 뿐이고 에바는 신에 의해 선택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케빈의 본성 탓도 아니고 에바의 양육 탓도 아니다. 누군가가 겪는 고통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고 믿는 관객은 진짜 가해자를 찾기 위해 설왕설래하지만 어쩌면 에바를 정말 힘들게 하는 가해자는 관객일지도 모른다. 고통의 책임 사유를 욥에게 전가하는 세 친구에게 신은 이 우주가 얼마나 경이롭고 복잡하냐고 꾸짖는다. 이와 똑같은 대답을 나도 관객들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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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3-26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동안 정말 멍~ 해지는 영화입니다.
계속 생각나는 불편한 영화, 그래서 잘 만든 영화라고 기억됩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21-04-02 19:27   좋아요 0 | URL
불편한 영화가 좋은 영화죠...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증거이니 말입니다.
 

















                                


너 를   기 다 리 는   동 안  :












수고대하던 날1)



                                                                                                                                                                                                         영화에서 장소 선정은 중요하다. 특히 멜로 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와 같이 " 사랑 " 이 주제인 경우는 장소 선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화양연화 >> 라는 영화도 보고 나면 남는 것은 비좁은 골목길이거나 비좁은 건물 복도 이미지'이다. 이 공간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충분한 넓이가 아니어서 가는 길과 오는 길의 교차점에서는 서로 어깨를 사선으로 틀어야 부딪히지 않을 수 있다.  닿을 듯 말 듯,  카메라는 이 미묘한 어긋남을 느린 화면으로 잡는다. 이 영화에서 " 좁은 골목, 좁은 복도, 좁은 자리, 좁은 틈 " 은 두 여남의 사회적 거리를 강제로(운명적으로) 개인적 거리로 만든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이자 멜로 드라마의 클리셰이기도 하다. 

사랑은 곧 장소애( TOPOPHILLIA ) 이다. 멜로 영화가 만날 듯 만날 듯 하다가 어긋나는 관계 설정이 주를 이룬다면 로맨틱 영화에서 남자와 여자는 주로 우연히 혹은 어쩌다 자주 마주친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걸작 <<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 에서 앙숙인 두 사람은 우연히, 어쩌다, 자주 마주치게 된다.  세상 참..... 좁다 _ 란 말이 나올 만하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티격태격 싸우지만 결국에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런 점에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선호하는 로케이션은 텔레토비 마을이다. 우연한 만남을 관객에게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텔레토비 마을은 동네가 워낙 작아서 오고가다 다 만난다. 지금껏 보라돌이, 나나, 뚜비, 뽀가 서로 약속을 정하고서 약속 장소에서 상대방을 기다린다는 상황극을 본 적이 없다. 꼬꼬마 들은 항상 우연히 만나거나 어쩌다 마주친다. 텔레토비 동산은 약속이 필요 없는 곳이다.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 만들어야 하는 감독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좋은 로케이션은 없다. 꼬꼬마-들이 다 큰 성인이 된다면 꽤 밝고 명랑한 로맨틱 코미디 걸작을 생산했을 것이다. 이처럼 로맨틱은 오고다가 다 만나는 서사가 핵심이다. 반면에 멜로는 어긋남의 서사이다. 


김영하는 이렇게 말한다 : " 멜로는 엇갈림의 서사다. 엇갈리지 않고 오다가다 다 만나면 그건 텔레토비지 멜로가 아니다. 멜로는 시간, 공간, 벡터,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물리적으로 달라야만 성립한다......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만날 듯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빠르거나 느리다. "     많은 사람들이 멜로에 대한 정의를 내렸지만 김영하보다 명쾌한 해답을 내놓은 이는 없다. 그렇다. 그렇다 !  멜로란 시간, 공간, 벡터가 서로 물리적으로 달라야만 성립한다. 또한 멜로의 격정은 시간과 공간과 벡터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애절하다. 


이와지 순지 감독이 연출한 << 러브 레터 >> 가 멜로의 걸작인 이유는 하늘에 있는 그 남자와 땅 위에 선 그 여자의, 가닿을 수 없는 멀고 먼 거리감 때문이다. 이승과 저승의 간극보다 먼 거리가 또 있을까 ? 종로 3가에 사는 그 여자가 을지로 3가에 사는 그 남자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는 될 수 있어도 멜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채플린의 그 유명한 명언을 빌리자면 로맨틱 코미디는 클로즈업이고 멜로 드라마는 익스트림 롱쇼트'이다.  황지우의 시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은 사랑에 대한 감각이 거리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시집 『게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시인은 말한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공간),  너는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나에게 온다(시간)고. 너에게 가기 위해 기다린다고. < 아주 먼 데 ㅡ > 라는 공간의 벡터 x좌표와 < 아주 오랜 세월 ㅡ > 이라는 시간의 벡터 y좌표는 어느 세월에 만날까. 살아생전에 어느 한 지점에서 랑데뷰할 수 있을까 ?  시인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간극을 최대한 확장함으로써 애끓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다. 날마다 살 부대끼고 살면 때론 환멸을 느끼지만 멀리 떨어지면 환상이 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동명항 방파제 포장마차에서 한 여자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 적이 있다. 약속을 정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녀가 올 리 만무했지만 나는 그녀가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낙담을 했고 술에 취했다. 그해. 노무현이 죽던 날에 애인은 내 기억에서 자신을 지워달라고 애원했다. 그녀가 기억에서 나를 지워갈 수록 내 생은 지옥같았다. 나는 눈이 내리지 않는 따스한 봄밤의 방파제에 앉아서 하염없이 울었다. 찰싹 찰싹, 따스하고 부드러운 파도가 내 뺨을 때렸다. 




​                   

1) 백현진 ㅣ 학수고대하던 날   막창 2인분에 병맥주 13병 대신 봉골레 파스타에 와인이라고 했으면 이 맛이 안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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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21-03-16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텔레토비. 역시 김영하다운 발상이네요. 김영하의 창의성은 정말 감탄하게 돼요. 김영하의 번뜩이는 기발함이란.

곰곰생각하는발 2021-03-17 12:44   좋아요 0 | URL
김영하가 정말 글은 잘 쓰죠. 인정인정 ~
 














                              


심 신 이    미 약 하 여    :










나도 모르게 저지른 잘못









                                                                                                조두순이 경악할 만한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법정에서 했던 변명은 심신미약이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모르게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피해자와 피해자 유가족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  평생 반성하며 살겠다.  이 뻔뻔한 변명은 놀랍게도 법정에서 정상 참작( : 법률적으로 특별한 사유가 없더라도 법원이 그 형을 줄이거나 가볍게 하는 것)의 사유로 적용된다.  술을 마셔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 형벌의 봄맞이 大바겐세일 " 이 가능하니 범죄자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내뱉는 레퍼토리이다.  이 변명에 덧대어 반성문 몇 장을 법원에 제출하면 판사는 " 반성의 기미 " 가 엿보인다는 이유는 죄를 경감한다. 닝기미, 반성문 쓴다고 반성이 되면 반기문 쓰면 반기문 되냐 ? 


심신미약 주장과 반성문 제출은 범죄자들에게는 약방의 감초인 셈이다(바람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남편을 살해한 고유정과 입양아를 살해한 양모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반성문을 제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범죄자들은 사후에 잡힐 것에 대비해서 사전에 미리 음주가무의 알리바이를 만들고 나서 범죄를 저지르는 놈도 있다. 판사님, 사실 내가 너무 술을 많이 마셔 기억이 안 납니다. 미안합니다, 정말1).  신경숙이 << 아버지에게 갔었어 >> 라는 신간 소설로 복귀하면서 기자 간담회에서 했던 변명은 나를 열받게 만들었다. 신경숙은 옹알과 웅얼 사이에서 이렇게 중얼거리시었다. " 젊은 날 저도 모르게 저지른 잘못에 사과드립니다아. " 


두 눈을 의심했다. 나도 모르게 저지른 잘못이라니 ??  쉽게 말해서 : 신경숙은 심신미약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나도 모르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독자에게 사과드린다는 애티튜드는 범죄자들이 법정에서 내뱉는 전형적인 변명이라는 점에서 " 격렬비열도의 추자도에서 잡히는 꼴뚜기 " 같다. 추잡스럽다는 뜻이다. 심신미약은 형법적 개념으로 시비是非를 변별하는 능력이 상당히 감퇴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소설가가 시비를 변별할 능력마저 상실했다면 그것은 소설가로서의 자질 문제를 떠나서 자격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다. 


문장 실력은 둘째치고라도 적어도 똥인지 된장인지는 구별할 수 있는 사리 판단은 해야 하지 않을까 ? 신경숙은 변명과 사과의 차이를 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진정한 사과란 변명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서 상대에게 용서를 바라는 것이지 변명의 여지를 남겨두고서는 하는 사과는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사과문은 and 보다 but를 남발하게 되면 더 이상 사과문이 아니다. " 나도 모르게 저지른 잘못 " 이라는 표현은 누가 봐도 " 빠져나갈 구멍 " 이자 but으로 시작되는 구질구질한 문장의 시작점으로 보인다. 이 정도 수준의 인성을 가진 사람이 쓴 소설에 대하여 작품성을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소설에 대한 남진우의 평론이 궁금하기는 하다. 자못, 아니 매우 궁금하다. 





​                          

1)  수고대하던 날 / 백현진   :   아, 참말로 나는 왜 이런 노래를 좋아하는 것일까 ?  내 문학적 취향을 반영한다면 "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ㅡ " 는 상투적 표현과 엄살을 싫어할 법하지만 이상하게도 백현진이 부르면 간절해진다. 그래. 나도 동명항 방파제 선술집에서 막창 2인분에 맥주 13병 마신 적이 있어. 이 노래를 듣다 보면 황지우의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이라는, 징글징글한 사랑 시가 생각난다. 텔레토비처럼 동산에서 오고가다 다 만나면 그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종로 3가에 사는 남자가 을지로3가에 사는 여자와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는 될 수 있어도 멜로는 될 수 없다. 러브 스토리는 거리가 멀면 멀수록 훌륭한 서사가 된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려도 오지 않을 때, 사랑은 애절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다린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너는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오고 있다고. 나와 너가 만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영겁의 세월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럴수록 애절해지는 것.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시집 『게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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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1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1-03-12 14:58   좋아요 1 | URL
저는 한국의 형법 기준이 이해가 안 갑니다. 어린아이 11명을 성폭행한 놈이 15년 형 선고 받았어요. 똑같이 11명을 성폭행한 영국 놈은 몇 년 받았는지 아십니까 ? 최소 100년 이상이더군요. 15년 형 선고 받은 이유가 감형인데
반성문 썼다고 반성하고, 공개수배해서 할 수 없이 자수했는데 자수했다고 감형. 수사 협조에 순순히 협조했다고 또 감형... 이거 미친 거 아닙니까 ? 하, 이해가 안 가요. 이해가......

2021-03-14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1-03-17 12:46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이해가 안가요. 이해가.....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 형법은 이해가 안 갑니다. 반성문 쓰면 반성했다나 ? 과연 반성문 써서 반성하는 인간이 있긴 있을까요 ?
 
















​                             


받침 위에 찻잔을 얹는 일  :








이마에 손을 얹는 일









한쪽 어깨가 주저앉았다는 사실은 인천의 어느 양복점에서 알게 되었다.  동생 결혼식 때 입을 양복이 없어서 맞춤양복을 전문으로 하는 양복점에 갔는데 몸 치수를 재던 재단사'가 그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재단사의 지적을 받고 나서 거울 앞에서 내 몸을 관찰하니 아닌 게 아니라 왼쪽 어깨는 콧대가 주저앉은 권투선수의 코처럼 푹 꺼져 있었다.  오른쪽 어깨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아래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데 반해 왼쪽 어깨는 완만한 곡선으로 미끌어지다가 어깨 끝에 다다라서는 산사태로 유실된 벼랑처럼 아래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평생 내 알 몸을 봤지만 사실은 모르는 몸이었던 것이다(이 문장에서 유머를 발견한 사람은 내 언어유희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 옛날, 싸우다가 왼쪽 어깨가 부러졌던 그날이 생각났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뜨니 어마어마한 통증이 몰려왔다.  다행히도 바로 옆 건물에 일반 가정 내과 병원이 있어서 무작정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몇몇 사람들이 대기표를 받고서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 직원에게 내 속사정을 말하니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사무적인 말투로 대기 손님이 여럿 있으니 기다려야 된다는 말을 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 감기에 걸린 사람과 어깨가 부러져서 죽을 것 같은 사람 중에서 누가 먼저 치료를 받아야 합니까, 네에 ? " 


난동 아닌 난동을 부리자 진찰실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나와서 내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는 먼저 치료를 받도록 조치를 내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매우 부끄러운 짓이었으나 그 당시에는 너무 아파서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물며 생사를 오가는 응급실 상황은 어떨까 ?  아마도 전쟁터를 방불케 할 것이다.  환자는 많고 의사가 부족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응급실은 오는 순서대로 진료를 받지 않는다.  팔이 부러진 사람보다는 칼에 복부를 찔린 사람이 먼저 치료를 받아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응급실에서는 기다리다가 지친 환자와 격무에 시달리는 응급실 의사 사이에 고성이 오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성마른 환자를 탓할 일도 아니다.  제시간에 치료를 받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을 것이란 막연한 공포는 체면 따위를 생각할 여유를 지운다. 그럴 때마다, 어느 응급실 전문의는 손으로 환자의 이마를 짚으며 열을 체크한다고 한다. 손으로 열을 체크하기보다는 온도계로 열을 체크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일부러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자신을 적대하던 환자들이 그 순간만큼은 순한 양이 된다고 한다. 의사의 환대에 환자의 적대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 마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 보았다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난한 나의 이마가 부끄러워
뺨 대신 이마를 가리고 웃곤 했는데

세밑의 흰 밤이었다
어둡게 앓다가 문득 일어나
벙어리처럼 울었다

내가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자세 때문이었다

ㅡ 허은실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2017


허은실 시인이 < 이마 > 라는 시에서 "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 ㅡ  " 다고 고백하는 대목에서 아플 때마다 내 이마에 손을 얹었던, 젊었던 어머니의 옛 모습을 떠올렸다. 죄 지은 자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만으로도 그 죄를 사(赦)할 수 있는 것처럼 손은 갱생과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배가 아플 때 할머니가 손주의 배를 쓰다듬으며 내 손이 약손이다 _ 라고 주문을 할 때마다 신기하게도 치유가 되는 경험을 가진 이라면 모두 다 동의할 것이다. 


무늬가 같은 받침 위에 찻잔을 올려놓는 것이 게스트을 환영한다는 호스트의 예의라면1),  아픈 이의 이마에 손을 얹는 일 또한 아픈 이에 대한 조건 없는 환대'일 것이다. 펄펄 끓는 이마 위에 손을 얹는 일은 받침 위에 찻잔을 얹어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일과 같다. 





​                          


1)   아무리 비싼 찻잔이라 해도 차받침이 없으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고 한다. 단순한 용도로만 보면 받침은 실용보다는 장식에 가까워서 찻잔의 부속에 불과하지만 받침이 없는 찻잔은 빛을 내지 못한다. 냄비도 마찬가지다. 냄비뚜껑이 없는 냄비와 냄비뚜껑이 있는 냄비 중 가격을 후하게 받는 쪽은 후자'라고 한다. 그러니까 찻잔과 차받침(혹은 냄비와 냄비뚜껑)은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한몸인 셈이다. 허은실의 시 < 이마 > 를 읽다가 깨닫게 된다. 이마와 손바닥의 관계는 찻잔과 차받침의 관계와 같다는 사실. 시인이 " 이마의 크기가 /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고 고백할 때 나는 냄비의 둘레에 이가 잘 맞은 냄비뚜껑을 덮는 장면을 떠올렸다. 펄펄 끓는 이마 위에 손을 얹는 것은 펄펄 끓는 냄비 위에 뚜껑을 닫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생김새와 쓰임새만 놓고 보면 이마와 손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지만 시인이 "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 라고 고백하는 순간, 이마의 유사어는 손이 된다. 그것이 바로 시적 마술이다. 이마의 유사어는 손바닥이다. 


2)   왠지 이 글에는 버둥의 < 이유 > 라는 노래가 어울릴 것 같아 첨부한다. 한 번 듣고 홀딱 반했던 노래다. 버둥의 데뷔 앨범 << 조용한 폭력 속에서, 2018 >> 은 가장 주목할 만한 시선 중 하나이다. 가사의 깊이가 탁월하고 연출도 드라마틱하다.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버둥은 겉멋을 부리기 위해서 가사를 쓰기 보다는 소리와 주장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가사를 쓰는 싱어송라이터'다. 버둥, 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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