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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마당 Vol.9 하자보수 - 2017
언니네 마당 편집부 엮음 / 언니네마당 / 2017년 2월
평점 :
옷에 맞는 몸


외딴 골목 초입에 " 희망 수선집 " 이라는 아담한 가게가 있다. 옷을 수선하는 곳이다. 희망 수선이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수선해서 쓰겠다는 다짐일까 ? 수선이라는 순한 어감과 희망이라는 밝은 느낌이 어우러져 그 가게 간판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주인은 정장 차림을 한 남성이다. 왕년에 시내 중심가에서 양복점 재단사로 이름을 날렸다는 그는 일을 할 때에도 잘 닦은 구두에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화려한 넥타이를 고집한다. 그가 정장 차림을 고집하는 태도에는 양복점 재단사로 일했던 왕년에 대한 자긍심처럼 느껴져서 믿음이 간다. 아닌 게 아니라 일처리도 꼼꼼해서 일감이 많은 모양이다. 그는 늘 바쁘다.
내가 희망수선집을 자주 찾는 이유는 공장에서 일정한 치수에 따라 찍어낸 기성복이 내 체형에는 맞지 않다는 데 있다. 기성복을 살 때 어깨 넓이에 맞추면 팔 기장이 긴 편이고 팔 길이에 옷을 맞추면 어깨 부위가 좁은 경우다. 또한 셔츠를 살 때에도 목둘레가 맞으면 어깨가 좁고 어깨에 맞추면 목둘레가 좁다. 표준 체형에서 벗어나다 보니 옷을 살 때마다 하자(瑕疵)가 많은 내 몸을 보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럴수록 내 몸에 대한 불만은 쌓이고 다음 생은 마네킹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만약에 체형을 수선하는 재단사가 있다면 이렇게 주문하고 싶다. " 팔 길이는 늘리고 어깨는 깎아주세요. 얼마면 됩니까, 네에 ? "
어느 날이었다. 수선집에 맡긴 양복 상의를 찾으러 갔더니 마침 내 옷을 수선 중이어서 왕년에 잘나갔다는 재단사의 솜씨도 볼 겸 가게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수선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바닥에는 내 양복 상의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분명한 소맷부리 조각이 보였다. 그 천 조각을 보자 내 팔이 잘린 것 같은 환상통이 느껴져서 기분이 묘했다.
표준과 평균을 강조하는 규격화된 세계에서 보자면 내 팔은 표준 미달인 셈이다. 기성복을 수선해서 입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잘려진 길이만큼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된다. 몸매, 처신(몸가짐), 화장, 피부, 제모 관리 따위를 평가하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나 같은 남성도 내 몸에 대한 사회적 평가에 신경이 쓰이는데 여성이 받아들이게 되는 억압과 상실의 강도는 어느 정도일까 ?
표준이란 일반적인 것이거나 평균적인 것이어서 보편성과 합리성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폭력성과 획일성을 전제로 한다. 표준은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표준에 대한 사회적 압력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높다.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여자다운 처신을 강조하는 것도 표준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다. 서울 표준어가 지방 사투리를 차별한 결과라면, 한국 사회가 여성 육체에게 강요하는, 표준화된 “ 보통의 상식 ”은 남성이 여성을 차별한 결과다. 가부장 사회에서 강요된 여성의 몸에 반기를 든 페미니스트 샌드라 리 바트키는 여자들은 스스로를 작고 좁게, 그리고 무해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지적했다.
“ 훈육적 관행들은 훈련되고 종속된 몸. 즉 열등한 지위가 새겨진 몸을 만들어낸다. 여자의 얼굴은 화장되어야, 말하자면 변경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의 몸도 마찬가지다. 화장의 기술은 변장의 기술인데, 이는 여자의 얼굴이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성성이라는 훈육 기획은 일종의 ‘짜고 하는 게임’이다. 그것은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몸의 변형을 요구하기 때문에 거기에 빠져든 모든 여자는 사실상 어느 정도 실패할 운명에 처한다.”
44,55,66 등으로 불리는 여성복 치수의 유래가 1981년 대한민국 20대 여성의 평균 키인 1m55cm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 여성에게 44사이즈(신장 1m50cm, 가슴둘레 82cm 이하)는 대부분 작은 옷에 해당되겠지만, 언제부터인가 한국 여성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옷은 44사이즈가 되었다. 바트키가 지적한 것처럼 대한민국 여성은 “ 스스로를 작고 좁게, 그리고 무해하도록 만들려고 노력 ” 한다.
다양한 몸은 배제한 채 오로지 표준화된 몸에 대해서만 찬양하는 사회이다 보니 현대 여성은 허리띠 졸라매고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몸에 맞는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옷에 맞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wag the dog, 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이제 몸은 허기와 싸우는 전쟁터가 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44사이즈는 여성 몸을 옥죄는 코르셋이요, 전족(纏足)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44사이즈에 대한 욕망의 주체는 여성일까 아니면 남성일까, 누구의 욕망이 투사된 결과일까 ? 코르셋과 전족이 남성 욕망을 채우기 위한 오브제라는 점을 감안하면 44사이즈는 남성이 만든 족쇄다. 이렇듯 여성 몸은 훈육이라는 방식으로 남성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된다. 남성은 여성의 몸을 체(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식(食)과 색(色)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유감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표준화된 보통의 상식은 여성 몸을 지배하고 관리하며 통제하고 간섭한 결과이다. 최근에 보건복지부가 <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개정령안 > 을 공개하며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의료 행위로 규정한 후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도 국가가 여성의 자궁을 관리하겠다는 꿍꿍이로 읽힌다. 자궁은 공공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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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육체는 전쟁터다. " 이 문장은 페미니즘 아티스트 바바라 크루거가 포토몽타주 기법을 동원하여 만든 작품 제목이다.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미소지니(misogyny,女性嫌惡) 논란, 낙태법 강화, 문단 내 성폭력 고발 그리고 백남기 농민 부검 논란을 접하면서 다시 되뇌게 되는 문장이다. 자고이래로 여성은 몸의 주체로서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했고, 이 비극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국가는 자궁을 통제 관리하려 들고, 남성들은 여성의 몸을 강탈하기 위해 서로 다툰다. 그러다 보니 여성 몸은 항상 전쟁터'다. 여성 몸은 당신을 위한 추파춥스가 아니지만 남성들은 물컹물컹한 가래처럼 히마리 없는 혓바닥으로 여성 몸을 핥느라 정신이 없다.
수선집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내린 결론은 내 팔은 짧은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어깨가 넓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불량이 아니듯이 옷에 맞지 않는 몸도 신체적 결함이 아니다. 표준의 기준은 항상 내 몸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표준화된 몸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몸은 모두 제각각이고, 또 제각각이어야 정상인 것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2016년 6월 12일, 병자와 장애우들을 위한 자비의 특별희년 미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월한 신체를 가진 것이 대중의 신화가 되고 거대 사업이 되어버린 시대에서 불완전한 것은 감춰야만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의미하는 바가 크다.
몸의 다양성을 배제한 채 규격화된 몸을 강요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여성에게 규격화된 몸을 강요한다.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고 말했다. 생명종이 많을수록 건강한 생태계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한국 사회는 지금 퇴화하고 있는 중이다 ■
- 이 글은 여성 독립 잡지 << 언니네 마당 >> 에도 실렸습니다. 재미는 " 당근 " 보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