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소에 갔다




                                                          

                                    

 

 

 

                                                                                          심심하면 저가형 생활 잡화점인 " 다이소 " 에 간다. 딱히 목적이 있어서 가는 것은 아니다. 설렁설렁 걸으면서 잡화 상품을 구경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훌륭한 틈새 상품 앞에서 아, 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 드라이 장갑 " 이다. 흡수력이 뛰어난 파자마 타올 재질로 만든 장갑인데,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릴 때 맨손으로 물기 있는 머리를 터는 것보다는 < 드라이 장갑 > 을 사용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제품이다. 그러니까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 동시에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아, 재기발랄한 코미디 영화를 보는 맛. 이 맛에 다이소에 간다. " 너의 재미있는 서사를 돈 주고 사마 ! "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한 후 드라이 장갑을 끼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더니 정말 효과가 있는 것 같은 " 느낌적 느낌 " 이 직관적으로 몰려왔다. 와 ~  적어도 머리 말리는 데 허투루 낭비되는 시간을 조금은 절약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금이라 했는데 이 시간의 티끌을 모으다 보면 금이 되리라. 다음날에도 다이소에 갔다. 이번에는 구멍 난 방충망에 붙이는 방충망 보수 테이프를 발견했다. 상처가 나면 반창고를 붙이듯이 방충망이 뚫리면 방충망 테이프를 붙이면 된다. 이 얼마나 뛰어난 서사인가 ! 감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방충망 보수 테이프가 놓여 있는 자리 옆에는 샷시 물받이 구멍을 떼울 수 있는 테이프도 있었다. 방충망이 촘촘해도 모기들은 샷시 물받이 구멍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온다는 소리를 들은 터라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맛에 다이소를 관람한다. 일상에서의 수많은 불편을 단돈 몇 천 원이면 해결이 가능하다니 놀라운 세상이로구나. 그날도 삶이 무료하고 심심하여 다이소에 갔다. 오늘은 어떤 잡화 상품이 나를 기쁘게 만들까 ? 주변 매대를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공교롭게도 그곳에서 헤어진 옛 애인과 마주친 것이다. 그녀도 당황했는지 동작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는 다가가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다. " 그동안... 잘 지냈니 ? 음... 나는 아임 파인 탱큐 앤드 유'야. " 내 농담에 화가 났던 것일까 ? 그녀는 아무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를 피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여전히 내 심장은 호박 나이트 클럽 JBL 스피커처럼 쿵쿵 울렸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그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깜짝 놀랐다. 그녀는 내가 마주쳤던 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마네킹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마네킹이 아니라 그녀의 모습을 한 조각상이었다. 그녀가 왜 다이소에 있는 것일까 ? 점원에게 물어보니 인테리어 소품이 아니라 상품이란다. 점원이 내게 말했다. " 혹시.... 곰곰생각하는발 씨세요 ? 아... 드디어 만나게 되네요. 저분은 다이소 창업주의 딸이십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헤어진 옛 애인이시죠. 얼마 전에 그만...... 먼 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죽기 전 유언을 남기셨더군요. 내 모습을 조각해서 상품으로 내놓으라고 말이죠. 언젠가 빈털털이 남자가 찾아와서 나를 닮은 조각상을 사갈 것이라고 말이죠.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칼에 손이 베인 사람에게는 반창고가 필요하듯이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다면서...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이 많이 아프게 했으니, 구멍난 가슴을 메울 상품이 필요하다고....          " 점원은 끝내 마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다가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 그런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가슴 아픈 창업주 따님의 러브스토리여서  온 직원이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  다이소에는 없는 것이 없다. 다 있다. 지금 라디오에서는 백지영의 << 총 맞은 것처럼 >> 이 흐른다. 너를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멎은 것 같은 고통이 몰려온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저 조각상은 혼자 남겨질 나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복수라는 사실을.   아, 너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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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0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구멍을 땜방하는 망까지..다있오,,,라고 하는 다이소!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다이소 다운 유언록이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2:52   좋아요 1 | URL
이 세상에는 재질이 무엇이든지 다 구멍난 곳을 메우는 테이프가 있으니
구멍난 가슴을 메울 실연자 보수용 테이프도 있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했습니다..

samadhi(眞我) 2017-03-0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곰발님식 코미디. 다이소는 신비한 마력이 있는 공간이지요. 그냥 구경하러 간 건데 빈 손으로 나오는 법이 없지요. 한국에 다이소가 처음 생겼을 때 ˝다 있소˝ 를 조금 부드럽게 풀어 쓴 건 줄 알았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3:09   좋아요 0 | URL
신비한 곳이죠.. 살 맘 없이 들어갔다가도 뭔가 한두개 사가지고 나옵니다..

다이소 다 있어에서 따온거 아닌가요.. 아니구나.. 생ㄱ가해 보니 일본 이름이 다이소였지..

cyrus 2017-03-07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 이름처럼 다이소 창업주의 딸이 죽었군요. 다이(Die)소. 그녀는 죽었소.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6:30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ㅎㅎㅎ 사이러스 님 점점 말장난의 묘미를 알아가는 중이신듯..
중독되면 저처럼 바보됩니다..ㅎㅎ

cyrus 2017-03-07 21:22   좋아요 0 | URL
곰발님의 글을 읽으면서 곰발님의 언어 유희를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곰발님의 유우머 실력에 이르려면 한참 멀었어요. ㅎㅎㅎ

2017-03-07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07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7-03-07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실망시키지 않는 곰발님 글발.
이 유쾌한 재능은 태어난 것이기도 하겠지만, 재바른 독서력과 지치지 않는 글쓰기 활동에서도 찾아야 할듯.
고맙습니다, 독자를 즐겁게 해주셔서.
우리 동네에도 다이소 있어서 가끔 가는데, 별천지 맞아요. 눈썰미를 키워 다이소의 특이한 물건들을 죄다 스캔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가장 유용한 것은 요일별로 약 넣는 약통. 비염 천식이 있어 약 힘으로 사는데 요일별로 체크가 되니까 엄청 편리하더라구요. 다들 아실 듯~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6:30   좋아요 0 | URL
뭐 제가 늘 다크님의 칭찬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콩나물이죠..
작가님께서 직접 글발을 말씀 하시니 기분이 업됩니다

다이소, 정말 신기한 게 많아서 기분 전환용으로 그냥 들어가서 구경하는데

참. 신기한 게 몇 개 사들고 나오게 된다는겁니다..ㅎㅎ. 드라이 장갑 함 써보세요.
굿 아이디어 상품입니다....

2017-03-08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08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마어마한 꿈을 꿨다



 

 


 

                                                                                                      꿈을 꿨다. 유토피아도 아니고 디스토피아도 아닌 무대. 국무장관이 나와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그녀는 헌혈을 장려하는 캠페인의 주인공이었다. 

티븨에서도, 담벼락에 붙은 프로파간다 포스터에도 온통 헌혈을 장려하는 새빨간 이미지로 채워졌다. " 당신의 피 한 방울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 " , " 대한민국은 역사 이래로 외부와 섞이지 않은, 순혈한 피를 자랑하는 민족입니다. 피를 나누어 꽃을 피웁시다 ! " , " 피가 필요한 분에게 소중한 생명을 ! " 티븨에서는 헌혈을 하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백성을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어디서 많이 본 기시감,  꿈속의 나는 IMF 때 집에 있던 금가락지를 자발적으로 내놓았던 < 금모으기 운동 > 이 생각나서 친구에게 노예 근성 운운하며 < 피모으기 운동 > 이냐며 비아냥거렸다. 순간 친구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기 시작했다( F.O

눈을 뜨니 여기는 지하 고문실. 60촉 알전구 하나가 전등갓 아래 마름모꼴 빛을 쏟아내고 있다. 스르륵, 여기저기서 숨을 죽이며 살포시 걷는 발자국 소리-들. 설핏 조명 안으로 다리 하나가 들어온다.  스펙스 ???!  80년대 유행했던 스펙스 신발을 신은 사내.  마름모꼴 조명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 아니 이런 신발,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스펙스 신발이냐 ? " 스펙스 신발을 신은 사내를 보자 << 살인의 추억 >> 에 나오는 송강호가 떠오른다. 스펙스 신발을 신은 사내는 구수한 사투리를 쓰며 내게 말하리라. " 짱똘로 주둥이를 조사부리기 전에 배후가 누군지 불어라잉 ~ "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스펙스 신발을 신은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is it safe ? " 1) 나는 당황한다, 뜬금없는 " 외래어 " 에 " 얘,뭐래 ? "  스몰한 업타운 상상했는데 글로벌한 다운타운이 무대여서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를 어쩐담. 나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데......  아임 빠인 땡뀨, 앤드 유 ?                       꿈이란 게 그렇다. 하드보일드 서사에서는 서사가 막힌다 싶으면 총이 등장하면 되지만 꿈에서는 서사가 얽혀서 진행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무작정 장면을 전환하면 되니까. 다음 장면에서 나는 헌혈을 장려했던 여성 국무장관과 싸우고 있었다. 우렁도 아니면서 우렁차게 외쳤다. " 나와라, 시밤바.  시베리아 오호츠크 2년생 멸치 같은 새끼야 ! "

전후맥락이 생략된 채 점프 컷으로 진행된 일이지만 꿈이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 느낌적 느낌 " 이라고나 할까. 알고 보니 국무장관은 흡혈귀 마녀였던 것이다. 그녀가 입을 열자 두 쪽으로 갈라진 뱀의 혓바닥이 꿈틀거리며 튀어나오더니 내 뺨을 세게 친다. 장관이 채찍처럼 휘두른 혓바닥이 내 뺨을 스치자 이내 붉게 물든다. 아따, 시바. 장관이네, 장관 !  조낸 무섭다야.                 불꽃이 튀기고. 어마어마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전투의 쓰빽따끌한 장관을 말과 글로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할 뿐이다. 여러분은 지레짐작으로 이 놀라운 쓰빽따끌을 염두에 두시라. 끝내주는 오르가슴이었으니까.

나는 우여곡절 끝에 승리를 거뒀고 꿈은 이것으로 끝났다.   꿈에서 깼을 때, 나는 비로소 어디서 많이 본 그 얼굴이 누구인가를 알아챘다. 그 사람은 박근혜였다. 그 표독스러운 눈깔과 풍성한 후까시와 빛나는 아우라가 그네를 닮았다. 뱀처럼 날름거리며 채찍처럼 휘두르던 검은 혓바닥 !  우리가 그녀에게 빼앗긴 것은 피가 아니라 세금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20차 촛불 집회는 박근혜 탄핵을 염원하는 집회가 아니라 박근혜 탄핵이 인용되어 그것을 기념하는 불꽃놀이 축제'가 되기를 소망한다 









​                                               

※ F.O ( fade-out ) : 시나리오 방송 용어, 영상과 음향이 점점 사라지는 효과 

1) http://myperu.blog.me/20175242960 : 마라톤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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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3-05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이번 주 내에 고대하던 소식이 나오면 좋겠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5 14:30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이 고대하는 소식을 기대하며 이번 주도 악의 무리를 숙대밭으로. 우리 모두 연대를 ! 이대 모두 술잔을 높이 들고 성대하게 ˝ 건대 ! ˝

samadhi(眞我) 2017-03-0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손가락을 데었는데 아파서 츠으으 크으으 하다가 욕 나오는데 저도 모르게 오호츠크가 튀어나오잖아요. 곰발님 글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07:21   좋아요 0 | URL
오호 !!!!!!!!!!!!!!!!!!
 
쓰리, 몬스터(2disc)
프루트 챈 외 감독, 이병헌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                           


쓰 리 ,    몬 스 터  :




 



이제는 부자가 착하기까지 하다




 



Q : 이 영화(쓰리 몬스터, 2004)는 프로렐타리아의  피 빠는 부르조아의 이야기인가? 선과 악의 문제를 다룬 것인가?

A : 이 스토리를 만들때 제일 처음 떠올랐던 경험이 있는데 << JSA >> 가 흥행한 직후 여기 저기서 초청이 많았다. 그중에 거절할 수 없었던 조찬모임이 있었는데 ' 21세기를 준비하는 어쩌구 모임 ' 이었다. 재벌 2세나 교수, 의사 등 나이가 나보다는 조금 어린 친구들이 모여 있는 모임이라 가긴 가면서도 밥맛이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다들 매너좋고 겸손하고 지적이고 ...... 선입견이 완전히 무너졌다. 사람이 삐딱하다 보니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텐데 좋은 사람이라는 호감보다는 다 가진 놈들이 착하기까지 하구나 싶어 화가 나고 슬펐다. 이 사람들은 맨손으로 뭘 한게 아니라 이미 다 부자들이고 부를 세습한 이들이라 뭐 하나 부족함이 없어서 성격이 나빠질 일이 뭐있냐, 이전엔 천민자본주의가 있었지만 그들의 2,3세는 상류사회 환경 속에서 성장해서 나쁜 것을 할 필요가 없다. 그와 반대로 가난뱅이들은 욕망이 많은데 채워지지 않으니 삐뚤어질 수 밖에 없다. 미덕이 세습된다는 것. 그런 식으로 계급이 정착되고 벗어나기 어려워 지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나듯이 그래봐야 상류사회의 매너나 교양을 얻을 수는 없다.  그건 나중에 다뤄봐야 겠다, ' 너무 착해 미움받는 사람 '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박찬욱 감독).


- 박찬욱 감독 인터뷰 중

 




                                                                                                박찬욱은 오래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 다 가진 놈이 이제는 착하기까지 해서 화가 나고 슬펐다 " 고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접했던 재벌 회장님과 그 종간나의 애새끼들만 생각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어, 어어. 뭐지, 이 스마트하고 분홍분홍한 느낌은 ?!  

그의 한탄을 듣고 있자니 기똥차게 재미있게 읽었던 고전 소설 한 편이 생각났다. 부유한 부르주아의 딸인 루시와 사촌 살롯은 이탈리아 피렌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자신들이 머무를 팬션 방이 전망이 좋지 않자 크게 실망하게 된다. 이때 자신들이 머물고 있던 전망 좋은 방과 바꿔주겠다고 선의를 보이는 부자(父子)를 만나게 된다. 여자에게 있어서 여행의 주된 목적은 아름다운 전망이지만 남자에게  있어서 여행의 주된 목적은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는 것이니까. 선의를 주면 호의로 되돌아오리라.  루시와 살롯은 낯선 남자의 선의에 대해 의심을 품은 채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전망 좋은 방으로 옮긴 루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창문을 열어젖히는 것이었다. 창문이 열리자 그림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와 ~   E.M 포스터 소설 << 전망 좋은 방 >> 의 도입부'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부유한 부르주아는 가난한 쁘롤레딸리아보다 더 많은 (그림같은) 풍경을 선점한다 ! "  어디 전망 좋은 풍경뿐이랴, 프롤레타리아는 그럭저럭 그런저런 음식을 먹지만 부르주아는 미식을 향유하며 프롤레타리아는 기술을 제공하지만 부르주아는 미술품을 수집하거나 감상한다. 상류 사회는 < 美 - > 를 독점한다. 박찬욱 감독은 < 미래를 준비하는 어쩌구 모임 > 에서 다들 매너 좋고 겸손하며 지적이고 착한 재벌 3,4세들을 보고 충격을 먹었다고 고백하지만 

사실 그들은 같은 계급(이너써클) 내에서만 착할 뿐이다. 재벌 3,4세들이 획득한 근사한 외모와 훌륭한 에티켓 그리고 교양은 몇 세대에 걸친 가계 개량의 승리이자 품종 계량의 승리'이다. 발에 똥 밟고 손에 피 묻히는 일은 이 아비의 몫이니 너희들은 좋은 것만 보고 먹고 자라라. 정략적 결혼을 통해 좀 더 우량한 아이를 만들어내고 기부 입학으로  학력을 높이고 상류계급의 에티켓을 습득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재벌 1세의 자식 농사'이다. 문제는 " 착함의 한계 " 에 있다. 그들이 타자에게 보이는 선의와 예의는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회원이 될 수밖에 없는 지위를 획득한 계급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이 아닌, 열외 계급을 마주하게 될 때 표독스럽게 변하게 된다. 근사한 인테리어의 힘은 결국 수납의 힘이다. 잡동사니를 감출 때 실내 인테리어는 빛이 난다. 전망 좋은 풍경도 마찬가지'다. 회장님의 근사한 뷰'를 위해 노동자는 투명인간이 되어 제거된다. 이렇게 조작된, 전망 좋은 뷰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청소노동자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선의가 만민을 향하지 않고 특정 소수 계급에게만 적용된다면 그것은 착함이 아니다. 박찬욱은 그 사실을 놓쳤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 있고, 부유하고, 착하기까지 한 남부러울 것 없는 인기 영화감독이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당하는 단편 영화 << 컷(옴니버스 영화 쓰리 몬스터 중 한 편) >> 이 형편없는 까닭이다. 긴 말 하지 않으련다. 단편 세 개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 << 쓰리 몬스터 >> 가운데 가장 후진 작품은 박찬욱이 감독한 << 컷 >>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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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7-03-05 0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에게 느끼는 불편함이 그 인터뷰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네요. 박찬욱 영화는 ˝고급˝, ˝있어보임˝을 지향하는 듯해요. ‘올드 보이‘(이 영화에도 고급 지향이 엿보이긴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 좋았으니 빼고 ㅋㅋ) 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느꼈던 날 것의 신선함이 그 뒤 영화에서 사라져 실망이 컸어요. 근데 그냥 그런 사람이었던 것을 그 두 영화를 보고 기대를 키웠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전 아가씨는 되게 좋았어요, 원작보다도.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5 13:06   좋아요 1 | URL
저도 찬욱 씨의 최고 걸작은 복순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날것의 쾌감이 있는 영화였죠..
그 다음부터는 좀.. 조미료를 과하게 뿌리는 느낌이랄까요 ?
그래도 아가씨는 좋더군요. 만족스러운 결과였습니다..
 

 

 

 

 

 

 

 

 

 

 

 

 

 

 

 

 

 

                                                     

 

이거  저거  분리  안  시키면  다  죽어 :

 

 

 

 

 

 

 

 

 

 

 

사자를 풀보다 먼저 눕게 만드는 방법

 

 



 

                                                                                                      뉴라이트 집단이 국부로 모시는 " 튀어 이승만 선생 " 은 백성을 향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선언했다, 정작 본인은 한강 다리를 끊고 남쪽으로 튀어 _ 라고 말했지만 ! 

몸이 작은 물고기는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떼를 지어 다니는 전략을 사용한다. 몸집이 커지면 노출 위험도가 커져서 오히려 불리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유리하다. 한때 나는 불광동 휘발유라는 별명으로 불광천 뚝방을 접수한 적이 있다. 휙휙 ~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내는 소리. 이거슨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여. 나는 16대1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거두고는 했다. 비결은 하나다. 싸우기 전 그들에게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 똑바로 들어라, 나는 한놈만 팬다 ! "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고 선포하는 행위와 그 대상을 향한 집중과 몰입은 상대방을 쫄게 만든다.

" 제일 먼저 나에게 주먹을 휘두를 놈 누구'냐. 나와라, 이 오호츠크 시밤바 멸치 새끼들아 !!! "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에 힘을 주던 놈들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선봉에 서면 한놈만 팬다는 저 새끼에게 표적이 된다는 위화감에 선뜻 나서는 놈은 없다. 그럴수록 나는 괄약근에 힘을 주게 된다. 이두박근보다 괄약근이 쎈 놈이 이긴다. 싸움의 기술은 사냥의 기술과 동일하다. 포식자는 사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미리 목표를 설정하고 하나의 목표물에 집중한다.  내 눈에 너밖에 안 보여 ~                " 밀림의왕 " 인 사자가 이놈의 들소 뒤꽁무니 쫓다, 저놈의 뒤꽁무니 쫓다 하다가는 초식동물도 아니면서 제풀에 지쳐서 사냥을 포기하게 되는 " 우왕좌왕 " 을 보게 된다.

야생 동물들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이유는 포식자의 시선을 분산시켜서 집중과 몰입을 방해하기 위해서이다.   물고기들이 떼를 이루면 포식자(어류는 시력이 매우 나쁜 편이다)는 누진 다초첨 렌즈를 착용하지 않고서는 사냥해야 할 표적에게 초점을 맞추기가 어렵다.  이놈 저놈 뒤꽁무니 쫓다 결국에는 풀도 아니면서 제풀에 지쳐서 드러누운 맹금류처럼 포식자도 이놈 저놈 쫓다가 제풀에 지쳐서 풀보다 먼저 눕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몸집이 작은 물고기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참치가 치어일 때 떼를 지어 다니다가 성어가 되면 독립하는 이유이다.

포식자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몸집이 작은 것들이 서로 뭉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김규항은 << B급 좌파, 세 번째 이야기 >> 이라는 책의 한 꼭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한 사회를 끝장내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무엇일까. 역사 속에서 실행된 적극적인 방법은 학살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학살만으로 한 사회를 끝장낼수 없음을 보여준다... ( 중략 ) 한 사회를 끝장내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바로 그 사회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파과하는 것, 즉 모든 사람을 오로지 나만 아는 인간으로 만들어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회로 만드는 것이다... (중략) 광장에서 이명박이 우리 아이들을 다 죽인다고 외치던 사람들도 자정이 되면 눈동자가 풀려 휴대전화로 아이가 학원에 다녀왔는지 확인한다. ( B급 좌파, 245 )


인간사'라고 해서 다를 것 없다. 튀어 선생과 같은 인간 포식자-류'는 몸집이 작은 무리들이 서로 뭉치지 못하게 만든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 발등에 불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생각하는 힘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육체를 혹사시키는 것이다. 아내는 집안일과 육아 노동에 지치게 만들고 남편은 저임금 고노동 일터의 노동자로 만든다. 그리고 아이들은 밤 12시까지 학원가를 떠도는 유령으로 만든다. 육체가 힘들다 보니 타자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다. 혹사된 신체에서 건강한 감정이 생성될 리 없다. 결국 그들은 각자도생을 결의하게 된다. 인생은 고해야, 몰랐어 ? 우리는 하나둘 무리에서 분리된다.

분산되는 순간, 저 멀리서 당신을 노리던 상어의 눈에 들어온다. 목표는 선명하다. 표적에 초점을 맞춘 상어는 힘차게 당신을 향해 헤엄친다. 기둘려라, 내가 간다잉 ~         " 삼성미래전략실 " 을 해체한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토하는 이'가 있다. 미래전략실 부서 하나를 해체한다고 재벌 해체라고 주장하던 그는 이제 곧 재앙이 도래할 것이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그깟, 부서 하나가 사라진다고 재벌이 해체된다면 그런 부실한 재벌 기업은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백 번 양보해서 미래전략실을 해체한 결과 삼성 재벌이 망했다고 치자. 경제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당신 같은 무지랭이도 알고 있는 사실을 이재용만 모른 채 해체를 결정했다면 그 또한 무능의 극치이니 그는 경영자로서 자격이 없는 셈이다.       

같은 이유로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차라리 그런 나라는 망하는 게 맞다. 1950년대 포츈지는 50년 후에도 생존할 가능성이 높은 대기업 100를 선정한 적이 있다. 잡지는 이들 기업을 열거하며 미국 사회를 부국강병으로 이끌 기둥뿌리 같은 기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50년 후, 살아남은 기업은 얼마나 될까 ?  정답은 대부분 망했다, 이다.  포식자와 먹잇감의 전략은 다를 수밖에 없다. 먹잇감은 뭉쳐야 생존 확률이 높이지고 포식자는 뭉친 먹잇감을 분리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그 유명한 죽어 최순실 선생은 " 이거 저거 분리 안 시키면 다 죽어 ! " 라고 말한 바 있다.

분리 안 시키면 포식자인 우리는 다 죽는다는 소리이니 뛰어난 인문학적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튀어 이승만 선생과 죽어 최순실 선생은 서로 다른 시선으로 민중을 이해한 것이다. 포식자를 풀보다 먼저 제풀에 지쳐 눕게 만드는 방법은 하나다. 서울대와 고대 그리고 기타 대학에게는 미안한 소리이지만 연대만이 살 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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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7-03-03 1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곰발님은 연대만 사랑하시는군요. ㅋㅋㅋ
우리끼리라도 손잡자고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4 13:08   좋아요 0 | URL
일단 연대의 승리를 확인한 후.... 우리끼리 손잡겠습니다..

시이소오 2017-03-03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 보아도 명문입니다. 그려~~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4 13:08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포스트잇 2017-03-04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세상이 포식자들 맘대로 안되는게 또 기가막힌 일이거든요. .. 지 발등만 보고 있을 것 같은 작은 것들이, 뭐 자주는 아니지만 한번씩 연대 가거든요 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4 13:07   좋아요 1 | URL
연대가 성대하게 승리하기를 고대합니다. 승리를 위해 술잔을 높이 들고 ˝ 건대 ! ˝
 
언니네 마당 Vol.9 하자보수 - 2017
언니네 마당 편집부 엮음 / 언니네마당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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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에 맞는 몸

 

 

 

 

 

외딴 골목 초입에 " 희망 수선집 " 이라는 아담한 가게가 있다. 옷을 수선하는 곳이다. 희망 수선이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수선해서 쓰겠다는 다짐일까 ? 수선이라는 순한 어감과 희망이라는 밝은 느낌이 어우러져 그 가게 간판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주인은 정장 차림을 한 남성이다. 왕년에 시내 중심가에서 양복점 재단사로 이름을 날렸다는 그는 일을 할 때에도 잘 닦은 구두에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화려한 넥타이를 고집한다. 그가 정장 차림을 고집하는 태도에는 양복점 재단사로 일했던 왕년에 대한 자긍심처럼 느껴져서 믿음이 간다. 아닌 게 아니라 일처리도 꼼꼼해서 일감이 많은 모양이다. 그는 늘 바쁘다.

 

내가 희망수선집을 자주 찾는 이유는 공장에서 일정한 치수에 따라 찍어낸 기성복이 내 체형에는 맞지 않다는 데 있다. 기성복을 살 때 어깨 넓이에 맞추면 팔 기장이 긴 편이고 팔 길이에 옷을 맞추면 어깨 부위가 좁은 경우다. 또한 셔츠를 살 때에도 목둘레가 맞으면 어깨가 좁고 어깨에 맞추면 목둘레가 좁다. 표준 체형에서 벗어나다 보니 옷을 살 때마다 하자(瑕疵)가 많은 내 몸을 보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럴수록 내 몸에 대한 불만은 쌓이고 다음 생은 마네킹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만약에 체형을 수선하는 재단사가 있다면 이렇게 주문하고 싶다. " 팔 길이는 늘리고 어깨는 깎아주세요. 얼마면 됩니까, 네에 ? "

 

어느 날이었다. 수선집에 맡긴 양복 상의를 찾으러 갔더니 마침 내 옷을 수선 중이어서 왕년에 잘나갔다는 재단사의 솜씨도 볼 겸 가게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수선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바닥에는 내 양복 상의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분명한 소맷부리 조각이 보였다. 그 천 조각을 보자 내 팔이 잘린 것 같은 환상통이 느껴져서 기분이 묘했다.

 

표준과 평균을 강조하는 규격화된 세계에서 보자면 내 팔은 표준 미달인 셈이다. 기성복을 수선해서 입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잘려진 길이만큼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된다. 몸매, 처신(몸가짐), 화장, 피부, 제모 관리 따위를 평가하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나 같은 남성도 내 몸에 대한 사회적 평가에 신경이 쓰이는데 여성이 받아들이게 되는 억압과 상실의 강도는 어느 정도일까 ?

표준이란 일반적인 것이거나 평균적인 것이어서 보편성과 합리성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폭력성과 획일성을 전제로 한다. 표준은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표준에 대한 사회적 압력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높다.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여자다운 처신을 강조하는 것도 표준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다. 서울 표준어가 지방 사투리를 차별한 결과라면, 한국 사회가 여성 육체에게 강요하는, 표준화된 보통의 상식 은 남성이 여성을 차별한 결과다. 가부장 사회에서 강요된 여성의 몸에 반기를 든 페미니스트 샌드라 리 바트키는 여자들은 스스로를 작고 좁게, 그리고 무해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지적했다.

훈육적 관행들은 훈련되고 종속된 몸. 즉 열등한 지위가 새겨진 몸을 만들어낸다. 여자의 얼굴은 화장되어야, 말하자면 변경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의 몸도 마찬가지다. 화장의 기술은 변장의 기술인데, 이는 여자의 얼굴이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성성이라는 훈육 기획은 일종의 짜고 하는 게임이다. 그것은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몸의 변형을 요구하기 때문에 거기에 빠져든 모든 여자는 사실상 어느 정도 실패할 운명에 처한다.”

44,55,66 등으로 불리는 여성복 치수의 유래가 1981년 대한민국 20대 여성의 평균 키인 1m55cm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 여성에게 44사이즈(신장 1m50cm, 가슴둘레 82cm 이하)는 대부분 작은 옷에 해당되겠지만, 언제부터인가 한국 여성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옷은 44사이즈가 되었다. 바트키가 지적한 것처럼 대한민국 여성은 스스로를 작고 좁게, 그리고 무해하도록 만들려고 노력 한다.

다양한 몸은 배제한 채 오로지 표준화된 몸에 대해서만 찬양하는 사회이다 보니 현대 여성은 허리띠 졸라매고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몸에 맞는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옷에 맞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wag the dog, 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이제 몸은 허기와 싸우는 전쟁터가 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44사이즈는 여성 몸을 옥죄는 코르셋이요, 전족(纏足)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44사이즈에 대한 욕망의 주체는 여성일까 아니면 남성일까, 누구의 욕망이 투사된 결과일까 ? 코르셋과 전족이 남성 욕망을 채우기 위한 오브제라는 점을 감안하면 44사이즈는 남성이 만든 족쇄다. 이렇듯 여성 몸은 훈육이라는 방식으로 남성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된다. 남성은 여성의 몸을 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식()과 색()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유감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표준화된 보통의 상식은 여성 몸을 지배하고 관리하며 통제하고 간섭한 결과이다. 최근에 보건복지부가 <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개정령안 > 을 공개하며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의료 행위로 규정한 후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도 국가가 여성의 자궁을 관리하겠다는 꿍꿍이로 읽힌다. 자궁은 공공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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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육체는 전쟁터다. " 이 문장은 페미니즘 아티스트 바바라 크루거가 포토몽타주 기법을 동원하여 만든 작품 제목이다.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미소지니(misogyny,女性嫌惡) 논란, 낙태법 강화, 문단 내 성폭력 고발 그리고 백남기 농민 부검 논란을 접하면서 다시 되뇌게 되는 문장이다. 자고이래로 여성은 몸의 주체로서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했고, 이 비극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국가는 자궁을 통제 관리하려 들고, 남성들은 여성의 몸을 강탈하기 위해 서로 다툰다. 그러다 보니 여성 몸은 항상 전쟁터'. 여성 몸은 당신을 위한 추파춥스가 아니지만 남성들은 물컹물컹한 가래처럼 히마리 없는 혓바닥으로 여성 몸을 핥느라 정신이 없다.

수선집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내린 결론은 내 팔은 짧은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어깨가 넓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불량이 아니듯이 옷에 맞지 않는 몸도 신체적 결함이 아니다. 표준의 기준은 항상 내 몸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표준화된 몸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몸은 모두 제각각이고, 또 제각각이어야 정상인 것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2016612, 병자와 장애우들을 위한 자비의 특별희년 미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월한 신체를 가진 것이 대중의 신화가 되고 거대 사업이 되어버린 시대에서 불완전한 것은 감춰야만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의미하는 바가 크다.

 

몸의 다양성을 배제한 채 규격화된 몸을 강요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여성에게 규격화된 몸을 강요한다.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고 말했다. 생명종이 많을수록 건강한 생태계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한국 사회는 지금 퇴화하고 있는 중이다

 

- 이 글은 여성 독립 잡지 << 언니네 마당 >> 에도 실렸습니다. 재미는 " 당근 " 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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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7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2-28 10:11   좋아요 1 | URL
붕어빵에 붕어 없고, 애국, 애국 입만 열만 애국 말하는 놈치고 애국하는 놈 없고, 우리가 친구 아이가, 라고 말하는 놈이 항상 친구 등을 찌리고,, 박근혜도 그논리겠죠. 창조경제에 창조는 없고 창조범죄만 있고...

corcovado 2017-02-27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따라 사유를 한 바퀴 잘 구경했습니다. 너무 좋은 글이네요~잡지도 찾아봐야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2-28 10:1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 잡지 읽을거리가 풍부합니다.. 광고가 팔 할인 일반 잡지보다는 이런 잡지가 알차죠..ㅎㅎ

samadhi(眞我) 2017-02-28 13: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인도식당에서 알바를 했어요. 첫 날 매니저가 제게, 화장을 한 거냐?(화장을 할 줄 모르기도 하고 화장을 한거랑 안 한 거랑 차이가 안 나서 ㅋㅋ) 머리를 더 높이 묶어라... 얘기를 하는데 첫 날이라 참았어요. 그렇지, 서비스직이 이랬지 하면서. 아주 오래 전에 호텔레스토랑에서 일할 때도 그랬던 기억이 났죠.

그런데 다음날에도 여자는 남자와 달리 더 고개를 많이 숙여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한 바탕 했죠.
결국 체력이 딸려서 닷새만에 알바를 끝냈지만(몸이 20대랑 다르더라구요. ㅠㅠ) 보통 직장 내에도 그런 일들이 많지만 서비스직은 특히 여성을 더 억압하는 경향이 더 강한 듯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2-28 14:23   좋아요 0 | URL
남자들의 여성 외모 간섭을 떠나 미용 간섭까지... 징글징글하죠.
제가 여자였으면 화딱지나서 못살았을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사회라는 생각만 듭니다.
아니 왜 타인의 얼굴과 미용까지 일일이 간섭하며 이래라저래라하는 지
아무리 생각해도 전 이해불가...

cyrus 2017-02-28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한 번 언급하신, 글을 기고한다는 잡지가 <언니네 마당>이었군요. ‘규격화’하면 프로크루스테스죠. 우리나라에 프로크루스테스가 엄청 많아요. 김모 씨, 박모 씨, 박모 씨 추종자들...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3 13:34   좋아요 0 | URL
기고까지야... 그냥.. ㅎㅎ

표맥(漂麥) 2017-03-02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제된 글... 상당한 내공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3 13:34   좋아요 0 | URL
아이고, 아닙니다. 제 글 같지가 않아요. 저의 개성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좀 낯설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