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선의보다는 정의가 먼저 :
안희정의 선의
내가 오락실 주인이거나 만화가게 주인이 꿈이었을 나이에 안희정은 혁명을 꿈1)꿨다고 한다. 될 놈은 떡잎부터 다르다는데 난놈은 난놈이구나 _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광야에서 말 달리는 선구자 같은, 중2병적 허세'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안희정은 선의 논란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통섭을 거론하며 비판/분석/의심을 20세기 구-지성으로 규정하고 선의/통섭을 21세기 신-지성으로 분류했을 때, 나는 그가 철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아,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데카르트는 " 의심한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 고 말했다. < 나는 생각한다 > 는 주체가 곧 < 나는 의심한다 > 라는 진술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는 의심을 생각의 중심으로 보았다.
또한 프로이트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성찰』에 나오는 "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 를 빗대어서 이렇게 고백한다. "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의심한다. "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 의심 " 은 확실성의 근거'이다. 안희정이 말하는 것처럼 비판적 사고는 지성의 한 분파이거나 한때 유행하던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이며 본질이다. 비판적 사고를 20세기 구닥다리 지성으로 치부하는 자세가 놀랍다. 무엇보다도 모두 다 사랑하리 _ 라고 노래부르는 태도에서 메시아 코스프레를 엿보게 된다. 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 없는 자, 이 여인(박근혜)에게 돌을 던져라 !
안희정은 21세기 신 지식인답게 박근혜의 선의를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이씹쌔기 구닥따리 좌파인 나는 안희정의 선의 따위는 믿지 않으며 안희정 따위의 선의도 믿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 도마는 유독 의심이 많은 제자'였다고 한다. 사흘 후 부활한 예수 앞에서 다른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할 때에도 도마는 예수의 상흔을 일일이 확인하고 손가락으로 찔러보기도 한다. 그는 다른 제자와는 달리 조건 없는 믿음보다는 합리적 의심이 먼저였다. 내가 주목한 것은 도마가 아니라 예수'였다. 예수를 아름다운 사내'라며 감탄하는 이유는 의심하는 도마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 있다. 예수는 의심하는 도마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흔쾌히 상흔을 도마에게 보여준다.
의심 없는 믿음(맹신)과 무비판적 자세(맹목)가 결국에는 우상을 섬기기에 차라리 합리적 의심에 따른 사고'가 낫다는 사실을 예수는 알고 있었다. 사기꾼은 사기를 칠 때 " 사기 " 보다는 " 선의 " 를 가장한 몸짓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고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안희정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 그의 선의, 거짓을 포장하기 위한 몸짓처럼 보인다. 안희정의 선의 ?! 아니, 선의보다는 정의가 먼저 ■
1) 안희정과 이광재(노무현의동업자들 운명에서 희망으로), 박신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