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티타임
고열을 동반한 감기에 걸린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나흘을 앓았다. 혼자 끙끙 앓다가 독거사로 죽는, 그런 사회면 기사가 떠올라 서글펐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감기 따위로 죽지 않을 자신감과 감기 따위로 죽어도 아깝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는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왔으니까. 그냥...... 끙끙 앓았다. 무료했던, 어느 삼경 즈음. 라디오에서 심야 방송 디제이가 시청자가 보낸 사연을 소개했는데 이민자의 악전고투를 담은 내용이었다. 그녀도 나처럼 머나먼 타관(라디오 속 사연의 주인공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고 있었다)살이에 지쳐 있었다고. 결혼은 실패하고 사업도 망했으니 부모 볼 면목이 없던 그녀. 빈 방에서 심한 감기로 누워 있었는데...... 죽기로 결심했던 터라 병원에 갈 생각은 없었고 그저 우주보다 캄캄한 방에서 온갖 상념에 사로잡혔다고.
그때였다고 한다, 캄캄한 천장이 스크린이 되어 한국에서 즐겨 먹던 순댓국이 북위 37도 전갈자리 전방 19도에 위치한 sk인공위성 불빛처럼 선연하게 떠올랐던 순간. 죽기로 결심했던 여자는 눅눅한 비린내에 말캉거리는 비계를 떠올리니 침이 고이는 소리가 들렸다고.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음날, 그녀는 아픈 몸을 추스리고 통장에 남아 있는 잔고를 금성 탈수기처럼 탈탈 털어서 택시를 타고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향했다고. 그리고 따순 국밥 위에 씨뻘건 김치를 얹어 입에 넣는 순간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녀에게 인생 음식은 순댓국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그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몸을 추스리면 순댓국을 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다1). 오소리감투 듬뿍 넣어 달라고 해야지.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그녀처럼 누에고치처럼 둘둘 말던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순댓국을 먹었다. 감기따위로 죽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때 비로소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허기'가 아니라 차갑고 텅빈 마음을 따스하게 녹일, 단순한 온기'였다는 사실을. 그날 이후로 그녀처럼 나 또한 몸이 아프면 순댓국 생각이 난다. 시베리아 허허벌판 같은 내 마음에는 연탄처럼 훈훈한 네가 필요하구나. 아..... 마디꾸나. 눈물이, 앞... 을 가린다. 이번 설연휴도 마찬가지였다. 으슬으슬 춥다 했는데 덜컹 독감에 걸린 것이다. 명절이라 온갖 기름진 음식이 널렸으나 막상 내가 먹고 싶었던 것은 따순 순댓국이 전부였다.
히말라야 정상에서도 얼어죽지 않을 만큼의 옷을 껴입고 단골 순댓국 가게를 찾았다. 모 신문 기자가 최고의 순대국 식당'으로 선정했을 만큼 유명한 곳이라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이런 곳에서는 혼자 가게 되면 눈치를 보기 때문에 합석은 당연한 것. 결국 양해를 구하고 합석을 했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은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였다. 팔순 노인처럼 보였다. 젓가락을 집는 손이 서툰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합석을 했을 때에, 이미 할머니는 순댓국을 3/4정도 비운 상태였다. 멀뚱멀뚱 앉아 있기 뭐해서 할머니의 빈 반찬 그릇에 깍두기도 담아 드리고 김치도 담아서 잘라드렸다. 고맙습니다. 할머니가 내게 말을 건냈다. 의외였다. 할머니의 말투가 무척 공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말 없는 목례로 대신했다.
때마침 주문한 순댓국이 나와서 나는 땀을 흘리며 따순 국밥을 먹었다. 진로 소주와 함께 말이다. 따순 국밥 때문이었으리라. 밖을 나오니 춥지가 않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걷다가 얼음처럼 멈춰다.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당황스러웠다. 뭐지 ? 나는 내가 왜 울어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해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원인을 찾아야 했다. 아, 할머니 ! 나는 맛집을 선호하지 않는다. 후딱 먹고 후딱 일어아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맛집'에서는 음식의 맛을 음미한다는 게 사치처럼 느껴지고는 했으니까. 더군다나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 강박 때문일까 ?
나는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마자 서둘러 뜨거운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반면, 할머니는 노년으로 인해 소화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식사 속도는 무척 느렸다. 내가 합석을 했을 때 이미 그릇을 거의 다 비운 상태였는데도 할머니는 여전히 분주히 움직이셨다. 병약함에서 오는 느림이 아니라 건강함에서 오는 느림이라 그 여유가 좋아보였다. 내가 반주와 함께 국밥을 먹는지라 속도를 늦추자(1/3정도 먹었을 때) 할머니는 비로소 순댓국을 깨끗이 비우셨다. 할머니는 그릇을 비우자마자 서둘러 일어나셨다. 할머니마저 서두르게 만드는 힘. 그게 바로 맛집의 위엄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다시 자리에 앉으셨다. 손에는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가 들려있었다. 아, 할머니는 티타임을 즐기기 위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오신 것이다. 할머니의 위엄이라고나 할까 ?
밖에는 손님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할머니는 식당 안에서 식사를 끝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그들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속으로 웃었다. 할머니의 티타임으로 인해 나와 할머니는 동시에 식당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할머니의 티타임이 사실은 나를 위한 배려였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식당에서 함께 동석한 사람을 두고 먼저 일어날 수는 없다는, 사람에 대한 예의.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티타임이었던 것이다.
1) 이 이야기에 대한 사연은 언젠가 글로 쓴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연말만 되면 아팠는데 사실은 감기가 아니라 죄다 술병이 난 거였다. 술병을 비우면 술병을 얻는다. 이토록 간결하고 선명한 교환 방식'이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