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쿠  라  와       단  풍    :




 




200달러를 내고 20달러를 사다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경매에 붙여보자. 최저 입찰가는 천 원으로 시작해서 오백 원씩 오른다. 경매 입찰자 A가 1000원을 부르면 B는 1500원을 불러야 한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다. 최고 입찰가를 부른 사람에게는 최고 입찰가를 내고 오만 원짜리 지폐를 획득할 수 있지만 차점자는 자신이 제시한 입찰가를 경매를 진행한 사람에게 상납해야 한다.

복잡한가 ?  A의 최종 입찰가'가 25,000원이고 B의 최종  입찰가는 24,500원이라고 했을 때, A는 25,000원을 내고 경매물인 오만 원짜리 지폐를 획득함으로써 25,000원의 이득을 얻을 수 있지만 차점자인 B는 24,500원을 손해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경매를 주선한 이는 총 500원의 손실을 입는다. 이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은 입찰가가 오를수록 이익은 줄어들고 입찰가가 경매물 가치보다 높을수록 경매에 참여한 사람 모두 손해를 보게 된다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다.  자, 이제 경매를 시작하자. 시작은 1,500원부터다.  1500, 1500, 1500.... 2000, 네에, 2500 ! 3000 없습니까 ? 네에, 3000 ! 3000, 3000, 3500......                        입찰가는 순식간에 오른다.

40,000원, 40,500원, 41,000원......                  폭주는 멈추지 않는다. 차점자는 최고 입찰자가 되기 위해  50,500원을 부른다. 바로 이 지점이 경매 게임의 변곡점이다. 50,500원이 최고 입찰가로 끝이 난다면 결국에는 최고 입찰자는 500원을 손해보게 되고, 차점자는 50,000원을 잃게 된다. 둘 다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반면, 하우스를 개설한 경매 주선자는 총 50,500원의 이익을 얻는다. 만약에 이 상황에서 당신이 차점자에 속한다면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 GO " 를 외칠 것인가, 아니면 " STOP " 을 외칠 것인가 ?  백이면 백, 당신은 경매 푯말을 힘차게 올린 후 외칠 것이다. " 51,000 원 !!!!! " 어랏, 이것 봐라 ?!

눈 깜짝할 사이에 최고 입찰자에서 차점자가 된 사람은 다시 한번 괄약근에 힘을 주며 의지를 다진다. 손해를 보더라도 적게 손해를 보는 쪽이 마음 편하니까. 숫자는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51500, 52000, 52500, 53000,53500,.......           235,000원 !                        결국에는 경매에 참여한 사람 모두 손해를 입게 된다. 그렇다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  경매 제안자'이다. 경제학자 마틴 슈빅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20달러 지폐를 경매 물건으로 내놓고 경매 놀이를 진행했는데 단 한푼도 손해를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17,000달러를 벌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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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인은 참가자들에게 최고의 가격을 부른 입찰자에게 20달러를 준다. 첫 입찰자가 값을 부르면, 그 다음에 값을 부를 입찰자는 앞선 입찰자의 가격을 일정 액수(예를 들면, 50센트) 초과한 가격을 제시해야 한다. 입찰이 끝나면 최고가격을 부른 입찰자뿐 아니라 두 번째 가격을 부른 입찰자도 자신이 부른 금액을 경매인에게 지불해야 한다. 악마의 트위스트가 깃들어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고가를 부른 입찰자는 20달러를 받게 되지만, 차점자는 한푼도 받지 못한다.  이 게임을 해보면, 회사중역이든, 대학생이든 누구나 예외없이 악마의 트위스트에 걸려든다. 입찰이 시작되면 입찰가는 경매인이 제안한 금액의 절반인 10달러까지 순식간에 올라간다.

 

여기서 입찰자들은 잠깐 주춤한다. 더 이상 입찰가가 높아지면 상위 두 사람의 입찰가가 경매인이 제안한 20달러를 넘어서기 떄문이다. 이 고비를 넘기면 경매인은 손해 볼 일이 없다. 이때 9.5달러를 제안한 차점자는 결국 10.5달러를 부르게 된다. 9.5달러를 그냥 날리느니, 참가해 이겨 9.5달러를 버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대개 이때부터 나머지 사람들은 손을 떼고 상위 두 사람만이 남아 입찰가를 경쟁적으로 올리게 된다. 입찰가가 20달러에 가까워지면 입찰자들은 두 번째로 주춤거린다. 이때 최고가를 부른 입찰자는 경매에서 이기더라도 더 이상 이득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볼 것이다. 현재 19.5달러를 부른 차점자 또한 20.5달러를 부를지 말지 주저하는 게 당연하다.

 

그는 이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 여기서 그만두면 19.5달러를 고스란히 잃는다. 그러나 20.5달러를 불러서 이간다면 0.5달러만 손해 보면 된다. 여기서 그는 상대방이 포기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경매를 계속 진행한다. 20달러대를 벗어나면 경매는 다시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이제는 두 사람의 신경전으로 변한다. 50달러까지 가야 한 사람이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일정한 지적 수준을 갖춘다면 이런 무모한 경매게임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게임이론과 전략적 상호작용이론 등 경영학 훈련을 받은 전문경영인들조차 이 게임에 쉽게 빠져든다.

 

예를 들면, 심리학자 맥스 베이저먼은 켈로그경영대학원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난 10년간 이 게임을 벌여 모두 17,000달러를 벌었다고 한다.

 

 

ㅡ 승자독식사회,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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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는 20달러 지폐를 놓고 204달러 콜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최고 입찰가로 선정된 사람은 204달러를 내고 20달러를 가져갔다(차점자인 경우는 최고 입찰자의 손해보다 더 큰 손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굳이 밝힐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마틴 슈빅의 20달러 경매 놀이는 인간의 " 손실 회피 편향 " 심리를 이용한 도박이다. 인간은 1만 원을 얻었을 때 느끼게 되는 행복감보다는 1만 원을 잃었을 때 느끼게 되는 상실감이 정서적으로 두 배나 크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잡은 고기보다 놓친 고기가 커보이는 심리와 같은 것이다.

뭐, 당연한 소리 아니냐 _ 라고 반문하면 할 말은 없지만 손실 회피 편향은 인간이 왜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는가 라는 단서를 제공한다. 위험 부담이 크면 클수록 포기도 빨라야 하지만, 오히려 위험 부담이 크면 클수록 더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된다.  한국 사회는 20달러 경매 놀이 사회'이다. 기득권은 선심 쓰듯 툭, 20달러를 경매 물품으로 내놓는다. 경매를 통해 1달러로 20달러를 가져갈 수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                             5000년 유사 이래 가장 많이 배운 세대라는 명성답게 놀이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 놀이가 함정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심리학을 전공한 이라면 인간의 손실 회피 성향을 노린 야바위'란 사실도. 이런 야비한......                   하지만 이론이 현실이 되면 헛똑똑이가 된다. 1달러로 시작된 경매가는 어느새 204달러를 향한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  침묵은 잠시. 누군가 204달러 50센트를 외친다. 이 정도면 막가자는 거지요 ?                             이쯤되면 이성을 잃을 시기. 상대방이 외친다. " 그래, 시발놈아 !  막가자는 얘기다. "  이 지점부터는 물귀신 작전이 시작된다. 웃는 사람은 20달러를 경매물로 내놓은 사람뿐이다.

그런데 마틴 슈빅이 고안한 이 놀이의 정식 명칭은 " 20달러 경매 놀이 " 가 아니라 " 함정게임(Entrapment Game) " 이다. 내 장르적 취향을 고려하자면 올가미 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 그러니까 하우스 개설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죽는 구조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20달러 경매 놀이의 결과인 셈이다. 사쿠라 두 짝을 내보이며 두 팔로 판돈을 긁어갈 때 누군가가 조용히 외칠 것이다.  " 잠깐 !!!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  사쿠라는 단풍을 이길 수 없제 ~  "  얼핏 보기에 올가미 놀이에서 최종 승자는 전교 1등처럼 보이지만 등 뒤에는 전국 1등이 도사리고 있다. 

관객들은 최후의 반전이라며 객석에서 일어날 즈음, 누군가가 이렇게 외친다. " 단풍이 그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달밤에 송학이 날아오르니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을쏘냐. "   전국 1등은 우병우나 김기춘(같은 캐릭터)에게 밀린다. 그렇다면 최종 승자는 김기춘인가 ?  아직은 섣부른 판단이다. 김기춘이 20달러 경매 놀이를 제안한 하우스 개설자'인지,  아니면 경매 놀이에 참여한 참가자인지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한다. 당신이 촛불을 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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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요하네의 우산
김살로메 지음 / 문학의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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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전깃불이 얼마나

       큰 어둠을 감추고 있는지




                                                                                                                                                                                                                  소설이 무엇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확실한 건 좋은 소설을 만나면 내가 쓰는 게 소설이 되려면 멀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인다는 것. 좋은 소설이란 이야기 안에 서늘한 진실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나쁜 소설이란 ? 이야기 안에 작가의 자기합리화가 들어간다. 그래서일까. 나는 일인칭 시점 소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삼인칭 소설을 표방하지만 작가의 자의식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무늬만 삼인칭인 소설 역시 그다지 믿지 않는다. 그렇다. 그것들은 자기연민이며 자기방어의 소산물이다. 중립을 가장한 채 자기연민에는 당위성을 끌어다 붙이고, 타자를 향한 시선에는 근거 없이 객관적인 척하는...... 1).



김살로메 소설집 << 라요하네의 우산 >> 에 실린 단편 < 누가 빈지를 잠갔나 > 의 첫 문단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웃들은 윗 문장을 내가 쓴 것으로 오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내가 술잔을 기울이며 부어라, 마셔라 _ 할 때 십팔 번처럼 내뱉는 레퍼토리이기 때문이다. 순문학 중심으로 돌아가는 문단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자기방어를 위한 " 과잉의 자기연민 " 이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형이하학을 감추기 위해서 마치 형이상학인 것처럼 꾸미는 태도를 엿볼 때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문학적 수사를 사용했을 뿐이지 저잣거리에서 흔히 유통되는 뾰족한 말풍선으로 다시 번역하자면 " 씨발것들, 좆도 징징거리네...... " 였다.

혈통에 대한 가부장적 집착은 순혈주의로 나타나는데,  순문학은 그것이 문학적으로 변형된 예이다.  순문학이냐 아니냐는 이분법은 문학의 형식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 태도의 문제여서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다. 아(我)에 대한 집착이 결국에는 타(他)에 대한 배제라는 사실은 이미 파시즘이 증명한다. 작가가 서사의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내세우는 흔한 수작이 미문이다. 그것은 화장이 진할수록 가면이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서정주가 대표적이다. 소설가는 거짓말에 능할수록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지만 시인은 거짓말을 하는 순간 형편없는 시로 추락하게 된다.  서정주의 화장이 너무 화려하다. 가라타니 고진이 " 순문학의 죽음 " 을 선언했을 때,  

지나치게 명료해서 선정적이기기도 한 이 정언 명령은 이제는 순문학으로 먹고사는 시대는 끝났다 _ 는 행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      몇몇 대형 작가(예를 들어 신경숙 같은)의 성공 사례를 들어 반론을 제기한다면 이런 반론은 어떨까 ?  신경숙 문학은 순문학이 아니라 통속 대중 소설2)입니다요. 김살로메의 소설집 << 라요하네의 우산 >> 은 곳곳에서 장르문학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쾌락을 선사한다.  섬세하지 못한 면은 있으나 오히려 굵은 선으로 일필휘지할 때 느끼는 쾌감은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장르적 취향은 단편 < 아빠는 시인이다 > 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문학인들이 술판에서 보여주는 별 추잡한 짓거리3)는 3류에 지나지 않는다. 삼류가 일류를 지향하니 뱁새 가랑이가 찢어질 판이다. 속담으로 시작했으나 잡담으로 끝낼까 ? 지난해 문단 _ 내 _ 성폭력 해시테그로 밝혀졌던 시단 풍경을 보니 지랄이 풍년이더라. 그런가 하면,  단편 < 누가 빈지를 잠갔나 > 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 에서 제기한 문제를 연상케 한다.  < 누가 빈지를 잠갔나 > 에서 극중 화자인 나는 일인칭 시점 소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공교롭게도 소설은 일인칭 시점 소설'이다. 그렇다면 화자인 ' 나' 가 재현하는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인가 ? 

< 누가 빈지를 잠갔나 > 가 아가사 크리스티'를 떠올리게 만든다면, < 피의 일요일 > 은 기리노 나쓰오를 떠올리게 만든다. 임산부인 나는 시아버지가 욕실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덜컹 !  나는 " 당신이 내 손에 죽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 고 독자에게 고백하지만 쉽게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다. 현장 부재 증명(알리바이)를 위해서는 타소 존재 증명을 해야 하는데 이 사실이 불분명하다. 억울하게 누명을 쓸 수도 있다는 두려움. 이 두려움의 근원은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느끼는 공포다. 그러니까 시아버지에 대한 마음 속 증오가 실현되었을 때 느끼는 공포'다. 

나는 딜레마에 빠진다.  죄와 벌, 지은 죄는 없으나 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함정에 빠진 듯한 느낌.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 이 딜레마는 기리노 나쓰오의 << 아웃 >> 을 떠올리게 만든다. 흥미진진한 단편이다. 흥미롭기는 < 암흑식당 > 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암흑식당에서 손님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에서 진실을 알려면 어둠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대체로 진실했다. 음식을 빨리 먹는 사람, 특정 음식을 탐하는 사람, 아예 식사에는 관심이 없고 동행인의 몸에만 관심 있는 사람도 있었다. 동행인의 허벅지를 더듬다말고 바투 허겁지겁 섹스에 몰입하는 치들도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너무 빨리 허위의 가면을 벗어던졌다. 바꾸어 말하면 빛의 세계는 인간에게 다양한 가면을 쓰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 암흑식당, 39

 

어둠에서 진실을 읽는 방식은 이연주 시인이 밝은 빛을 통해서 거짓을 읽는 자세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 제발 잊지 말아, 저 전깃불이 얼마나 큰 어둠을 감추고 있는지(이연주, 「신생아실 노트」, 부분 ) "  이처럼 김살로메가 다가가는 지점은 느와르와 다크 쪽이다. 겨울에는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짜인 옷보다는 종종 굵은 실로 듬성듬성 얽힌 스웨터가 제격이듯이 이 소설집은 미문에 집착하는, 뻔한 수작 없이 일필휘지한다는 점에서 높은 주고 싶다. 다크한 맛이 일품이다. 가시는 길에 영광 있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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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라요하네의 우산 >> 누가 빈지를 잠갔나, 186

2) 신경숙 문학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신경숙 소설은 통속일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순문학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형편없는 소설이 된다.

3) 아빠는 시인이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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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14: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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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6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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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14: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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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15: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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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15: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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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1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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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1-16 15:50   좋아요 0 | URL
쓴다면 순문학이 아닌 장르문학을 쓰고 싶고..
단편보다는 장편을 쓰고 싶고
문학적 가치는 개나 주고 그저 성문기본영어 같은,
많이 팔려서 먹고사는데 고민이 해결되었으면......

좋은 이야기 있으면 귀뜸을 좀 해주시시오..

북깨비 2017-01-16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천마법사에서 보긴 했는데 저는 처음 보는 작가분이고 해서 그냥 지나쳤어요. 곰곰님 리뷰 읽고 나니 막 지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려요. 미리보기도 없는데 앞부분 맛보기로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6 15:29   좋아요 1 | URL
고상한 소설에 질렸다면 b급 취향의 소설도 좋습니다. 제가 워낙 좀 다크하고 b급적 서정을 좋아하는지라...ㅎㅎㅎ

2017-01-16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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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7-01-16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소설보다 해설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7 10:17   좋아요 0 | URL
해설보다는 소설이죠..ㅎㅎㅎ

samadhi(眞我) 2017-01-17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취향이네요. ㅎㅎ 마구마구 땡기는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7 10:18   좋아요 0 | URL
땡기면 읽어야죠, 뭐 ! ㅎㅎㅎ 안방 뜨끈뜨끈하게 몸 지지면서 엎드려 읽으면 제격입니다.

수다맨 2017-01-17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발님께서 한국 소설을 격찬하는 경우는 보기 드문데 이 작품집은 굉장한 역량과 매력을 품고 있나 봅니다.
사실 아에 대한 집착은 요즘은 소설보다 시가 더 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야 사실은 독백의 산물이니만큼 타보다 아로 가는 경향이 더 짙을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자아에 집착하면 할수록 의미 해독이 쉽지 않은 난해한 시들이 많아지는 듯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과거 미래파의 불행한 유산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7 10:20   좋아요 0 | URL
전... 무슨 교양 뽐내는 듯한 자뻑 소설에 아주 질린 상태였습니다.
어찌나 고상하신지 전부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는 소설뿐이어서용....

시집도 마찬가지고. 형이하학을 거들떠도 안보고 모두 다 형이상학을 이야기한다 말이죠..
사실은 수준과 그 교양은 형이하학이면서 말입니다. 그게 보기 싫다는 말입니다..
 
아파트 한국사회 - 단지 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
박인석 지음 / 현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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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불쌍한 내 비둘기 ! 고래 뱃속에 갇혔네 :
 


 

 

 


 


 네 개의 의자, 세 개의 룸,

          두 개의 화장실 그리고 단일 가족





 

                                                                                             " 네 개의 의자, 세 개의 룸, 두 개의 화장실, 단일 가족 " 한 가지 공통된 욕망을 소유하고 있다. 4인 가구로 구성된 가족이 꿈꾸는 이상적 주거 공간이라는 점이다(네 개의 의자는 4인용 식탁을 의미한다).

건설업자는 그동안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로 구성된 4인 주거 환경에 맞춰 방 3개짜리 아파트를 대량 건설했다.  숫자 4는 보통 시민이 꿈꾸는 욕망이다. 그렇다면 도발적 질문을 던져보자. 4인 가족 구성이 보편적이기에 아파트 주거 형태가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아파트가 건설된 것일까, 아니면 4인 주거 형태의 아파트에 맞춰 주거 소비자가 무의식적으로 가족 계획을 4인으로 구성한 것일까 ?  후자인 경우는 황당한 모순처럼 들리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 는 60년대 표어는 아파트 건설 붐이 일었던 70년대 들어서면서 "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 라는 계획으로 수정되었는데,

지금의 4인 가족 형태는 4인 주거 공간의 결과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아파트 공화국은 국가의 통제 아래 이루어진 결과'다. 사실 서구 사회에서 아파트'는 실패한 도시 행정의 표본이었다. 어느 유명한 프랑스 사회학자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강남 아파트 단지를 보며 던진 " 여기가 한국의 할렘가입니까 ? " 라는 질문은 서구 사회에서 아파트라는 집단 주거 형태가 실패한 주거 공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근대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가 1952년에 건설한 " 유니테 다비타시옹 Unité d'Habitation1) " 는 현대 아파트의 효시라 할 수 있는데 

수직 도시'라는 미학적 상상력은 당시에는 파격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아파트는 17층 높이에 총 337채.  길이는 137미터였고 너비는 20미티 그리고 높이는 61미터나 됐다(한지붕 아래 수용할 수 있는 주거민은 1600명이었다). 5층 내부에는 각종 상점과 호텔이 있었고 옥상은 하늘 정원 광장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놀이터, 벤치, 수영장 따위의 체육 시설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칸딘스키와 호앙 미로를 연상케 하는 아파트는 미학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처럼 보이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완공된 이후에도 미분양 상태로 남았다.

사람들은 그곳을 살기 좋은 집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기념 건축물 정도로만 인식한 것이다. 아파트가 부의 상징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납득이-들'은 모든 편의시설을 갖췄고 미학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이 건물이 실패한 주거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에 납득이 안된다고, 납득이 안된다고, 납득이 안된다고 궁시렁거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미학적 측면이나 건축학적 측면에서 보면 걸작에 가까운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왜 주거 공간으로써는 낙제 점수를 받았던 것일까 ?  르 코리뷔지에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한지붕 아래 337채가 아니라 한지붕 아래 마을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건물 안에 동네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삽입해서 건물 내 마을을 건설하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입주민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 옥상에 놀이터가 있으니 놀 때는 옥상에 가서 놀고, 세탁소는 7층에 있으니 7층으로 가시기 바랍니다아 ~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아......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상 행위를 일상 생활 동선 안에서 해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퇴근길에 마을 초입에 있는 빵집에 들려 빵을 사기를 원했고, 빵을 사고 오는 골목길에 위치한 세탁소에서 세탁한 옷을 찾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아파트 내 근린 생활 시설을 이용하는 것이 마을 곳곳에 산재한 상점을 이용하는 것보다 속도, 편리성, 효율성 면에서 상대적으로 높다 해도 편리보다는 차라리 불편의 일상적 습속을 원했다. 다시 말해서 옛날 도시(마을)이 가지고 있는 느린 정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실패는 근대주의에 대한 반성인 셈이다.



 

 


이 집단 주거 공간은 서구 주류 사회에 안착하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성공한 주거형 궤짝'으로 성장한다. 미래 라이프를 꿈 꾸십니까 ?  그렇다면 여기 코리안 스타일 주거형 궤짝으로 입주하십시오 !  똥은 이 자리에서 싸셔야 합니다. 이 아파트의 규칙이거든요 ~                          그렇다면 실패한 주거형 궤짝이 대한민국에서는 부를 상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 그 이유는 한국인 특유의 특성이라고 일컫는 " 고립 불안 " 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잣거리 입말로 쉽게 풀자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불안 심리요, 군집 본능이다. < 집단 ㅡ 속 > 이 가장 안전한 < 집 ㅡ 단속 > 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는 단지 내 주민들에게는 공동체이자 결사체'이다. 이처럼 아파트 공화국은 가족주의의 주거적 변형인 셈이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아파트 단지가 건설하는 것은 비단 아파트만은 아니다. 아파트 단지는 저마다 완벽한 마을을 단지 안에 갖춰놓고 경쟁하고 있다. 단지 안에는 놀이터, 공원, 녹지, 휴게 공간, 운동 시설은 물론이고 육아시설까지 갖춰진 형태로 고급화를 선언하며 성장하고 있다. 당연히 마을의 요소-들'을 단지 안에 많이 만들수록 가격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아파트를 구매하는 소비자는 아파트와 함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마을 이용권(회원권)도 구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마을을 이용할 수 있는 회원권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사기에 가깝다.

실 놀이터, 공원, 녹지, 휴게 공간, 운동 시설 따위는 국가가 제공해야 할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유니테 타비타시옹이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 파리는 전체 면적 중 1/4이 녹지이며 공원이고, 각종 근린 생활 공간도 무상으로 제공된다. 굳이 돈을 주고 마을 시설 이용권을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파트는 토종 마을을 파괴하는 외래어종'이다. 중요한 것은 살 만한 내 집이 아니라 살 만한 동네'이다. 그러니까  33평 아파트, 네 개의 의자, 세 개의 룸, 두 개의 화장실, 단일 가족에 해당되는 당신은 고래 뱃속에서 살아가는 요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말하노라. 아, 불쌍한 내 비둘기2) ! 캄캄한 고래 뱃속에 갇혔네 ■









​                                        


1) Unité d'Habitation는 프랑스어로 " 주택 집합 " 이라는 뜻이다

2) 요나는 히브리어로 비둘기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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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1-16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금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겠는데,
교사를 하는 후배 한 애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금정에 사는 사람은 범계와 인접해서 범계 사는 사람 흉내를 내고,
범계 사는 사람은 평촌 사는 사람 흉내를 내며,
평촌 사는 사람은 과천 사는 사람 흉내를 내고,
과천 사는 사람은 강남 사는 흉내를 내며 사는 것 같다며
학부모들 꼴 같지 않다고 혀를 내두르더군요.
저 순서를 거꾸로 해 보면
사람의 욕망과 박탈감이란 게 참 무서운 거란 생각을 해요.
그래서 서울 공화국, 강남 공화국하는구나 싶고.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대선 공략에 지역타파 공약있겠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5 17:05   좋아요 1 | URL
무척 재미있는 사례네요. 요거 제 글에 좀 포함해야 될 것 같습니다.

내 집만 살 만한 집‘보다는 살 만한 동네‘가 더 중요한데 아쉽습니다.

동네라는 개념 자체가 이제는 사라졌습니다..

yureka01 2017-01-15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의 파편화 ..마을이란 공동체가 사라진 곳에는 독고다이만 남았더군요..한국식 아파는트....인간이 닭처럼 갖힌 ..닭장같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5 18:50   좋아요 1 | URL
바보죠. 살 만한 내 집‘보다는 살 만한 동네‘를 만드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죠. 살 만한 내집은 결국 살 만한 동네가 아닐 때가 되면 결국은 치안이 불안한 내 집이 될 터이니 말이죠. 비록 살 만한 내 집은 아니더라도 살 만한 동네에 살면 그게 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표맥(漂麥) 2017-01-16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불쌍한 비둘기 ! 고래 뱃속에 갇혔네. 네 개의 의자, 세 개의 룸, 두 개의 화장실 그리고 단일 가족... 마치 오마르 카이얌의 사행시를 읽는 듯한...^^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6 14:07   좋아요 0 | URL
기형도 시인의 빈집과 푸르베르의 알레깐떼라는 시를 살짝 비툴었씁니다..

samadhi(眞我) 2017-01-16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가 둘 있는 친구가 가까이 사는 애엄마들끼리 아파트 평수를 가지고 지들끼리 계층을 나눈다는 얘기를 듣고 허걱했습니다. 24평 사는 사람 30몇 평 사는 사람, 그리고 브랜드아파트인가 아닌가.

얘네들이 나이를 거꾸로 처먹는건가. 미친건가. 어디서 그런 한심하고 유치한, 치졸한 생각을 가져와 품게 된건지. 정말 그런 것들이 사람이랍시고 자식들을 낳아 기른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그 자식들이 어른이 되면 또 골빈 꼴통들이 되지 않을까...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6 14:06   좋아요 0 | URL
비교 평가하기 좋다는 거죠... 푸르지오 아파트냐 타워펠리스냐에 따라서 다르고
20평이냐 30평이냐에 따라 다르고
임대냐 아니냐도 차이가 나고...
미친거란 생각밖에는 ...

2017-01-16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6 14:05   좋아요 0 | URL
아, 휴먼시아가 임대 아파트 브랜드인가 보죠 ? 처음 듣습니다.
제가 아는 분도 임대 아파트 사시는데
주민들이 단지 내 정문 통과를 막아서 뒷산 철조망 개구멍으로 들고나가라고 했다고...
이건 들은 얘기가 아니라 직접 경험했습니다 아는 형님이 정문 놔두고 돌아서 들어가길래 왜 그러냐고했더니 그말을 해서... 정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2017-01-16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6 15:29   좋아요 0 | URL
헉.. 그렇군요. 얼른 고쳐야지요..
 

 

 

 

 

 

 

 

 

 

 

 

 

 

 

 

 

                                       

 

너에게 명한다, 哭을 금하라 :


여 인 천 하

                                                                                                        정희진은 어느 강연에서 "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 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책 날개에 자신을 평화학 연구자라고 소개한다.

대한민국 1세대 페미니스트라는 유명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알쏭달쏭한 포지션이다. 의중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페미니스트란 테두리에 자신을 한정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는 눈치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전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여성학보다는 평화학이 두루두루 확장성이 높기 때문이 아닐까 ? 한국 사회에서 여성학은 비단 여성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던지는 화두이다. 여성에 대한 정당한 대우 없이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여성학, 평화학, 경제학, 정치학 영역에서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약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모색이다.

학문이 강자 중심의 서사가 될 때 여성학은 이대 나온 여자의 사치스러운 교양에 머물 것이고, 평화학은 제국주의에 대한 변명이 될 것이며, 경제학은 신자유주의를, 정치학은 처세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술(術)이지 -학(學)이 아니다. 연예 오락 방송 프로그램에서 남성 패널들이 못생긴 여자에게는 실망하는 표정을 보이면서 아름다운 여자에 대한 지나친 환대를 보일 때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남성이 행복한 국가보다는 여성이 행복한 국가가 더 나은 세상이고, 비장애인이 편리한 시설보다는 장애인이 편리한 시설이 더 나은 세상이다.

같은 이유로 짐승의 생명을 천시하는 사회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이다. 개를 끌고 거리를 산책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도시 거리를 인간의 전유물로 생각하며 눈 훌긔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점찮게 이렇게 말한다. " 개똥에 쌈 싸 드셔 ~ " 끝으로 박근혜를 볼 때마다 강자를 위한 여성학이, 경제학이, 정치학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했던 말 또 하게 되지만 약자를 배제한 강자 중심 서사는 學이 아니라 術이다. 박근혜는 정치인이 아니라 기술자'다. 정치와 권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보이지만 곰곰이 따지고 들어가면 떼려야 뗄 수 있는 관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정치를 이해한다는 것과 권력에 집착한다는 것은 다르다. 노무현은 바른 정치를 위해서라면 권력 의지를 포기할 의도가 있었던 정치인이었지만 박근혜는 정치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반면 권력에 대한 욕망만 " 우주적 " 이었다. 비극은 바로 이 엇박자에 있다. 혹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빗대어 여인천하'라거나 강남 아줌마 게이트라고 조롱하며 여자는 집에서 밥이나 해야 된다고 주장한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미러렁으로 되돌려줄 수도 있다. 그동안 한국 정치는 남인천하였으니 말이다, 한국 남성이여, 징징거리지 말자. 연민이 타자를 향하지 않고 자신에게 향할 때 그보다 꼴보기 싫은 신파는 없다. 그리하여.....  나는 너에게 명한다. 곡(哭)을 금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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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논의가 활발한 서구에서는 다양한 페미니즘 담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페미니스트인지 밝힙니다. 가령, 자신을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인지, 아니면 마르크시즘 페미니스트, 급진적 페미니스트라고 말합니다. 백인 위주의 페미니스트에 반감을 가진 (흑인) 페미니스트는 자신들을 제3세계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개방적이고 다각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지 못했어요.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다른 진영의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많아지면, 페미니즘 운동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4 11:18   좋아요 1 | URL
한국 사회는 남성성이 과잉된 사회죠. 맞벌이부부라고 해도 아침밥을 차려줘야 현모양처가 되고, 모성애도그냥 모성애가 아니라 자기 희생적 모성애가 진짜 모성애라 생각하고, 남자가 설겆이하면 불알 떨어진다고 여기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무슨 정치, 경제를 이야기합니까. 남성 권위가 사실은 여성 억압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반성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7-01-14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4 11:28   좋아요 2 | URL
캬, 좋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다른 것 없습니다. 노동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지 않을까 싶습니다..

samadhi(眞我) 2017-01-14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필 멍청하고 욕심많은 그 사람들이 여자라는 성을 가졌을 뿐, 남성인 명박이도 그 여자들 못지 않으니까요. 본질은 성이 아니라 인간인가 아닌가 겠지요.
이젠 사람이 지도자인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5 13:25   좋아요 0 | URL
진아 님 말씀이 정답이군요. 남성 정치인의 밀실 정치나 여성 정치인의 내실 정치나 다 피장파장이니깐 말이죠.
 

 

 

 

 

 

 

 

 

 

 

 

 

 

                                      

 

부 유 하 는   자 의   슬 픔  :

 

 

 

 

 

 


맞지 않은 아이

  

                                                                                                          아라비아 숫자 < 4 > 는 동양에서는 불길한 수(數)이지만 가족 구성만 놓고 보면 " 4人 가정(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로 구성된) " 가장 이상적인 수'이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구성이니까 !   그렇기에 < 4인용 식탁 > 이 식탁의 디폴트 값'인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 성비가 균형을 완벽하게 이룬 이상적인 4인 가족이 있다. 하지만 " 한집안 온 가족 " 이 모여 저녁 식탁'에 모인 적은 없었다. 이 가족에게 저녁이 있는 풍경은,   없었다. 그러니까 4인 가족이었지만 4인용 식탁은 사치에 불과했다.  2인용 식탁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아버지는 가정 폭력의 가해자'였고 어머니와 아들은 피해자'였다. 딸은 예외였다. 아버지는 유독 딸을 좋아했기에 딸에게 손지검을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가정 폭력에 시달렸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으레 그렇듯이, 성인이 된 딸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한다. 행복한 결혼을 꿈꿨지만 1년만에 이혼으로 끝난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                           딸은 억울하다, 억울하다, 억울하다. 그녀가 자신을 불행으로 이끈 가해자로 지목한 사람은 때리는 아버지가 아니라 매 맞는 어머니와 매 맞는 남동생'이었다.  도대체 모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 딸 > 은 직접적인 폭력의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폭력 가정에서 아버지의 보호 아래 유일하게 매를 맞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매 맞는 가족에 대한 부채 의식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어머니와 아들은 매 맞지 않은 딸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너는 적어도 아버지에게 맞지는 않잖아 !                  때린 놈은 다릴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릴 뻗고 잔다고 했던가.

가해자는 아니었지만 가해자처럼 느껴지고 피해자는 아니었으나 피해자와 동일한 고통을 느껴야 했던 딸에게 이 말이 원망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딸은 아버지가 짐승처럼 날뛸 때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중재자 역할을 해야 했다. 매 맞는 가족을 지켜야 했던 딸은 싸움을 끝내기 위해 아버지 앞에서 자해를 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이비에스 솔루션 프로그램 << 달라졌어요 >> 에 나오는 사연이다.  이 방송을 보다가 나는 비로소 내가 세월호 참사의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지만 세월호 참사에 집착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느끼는 죄책감은 그녀가 느껴야 했던 죄의식과 연결된다.

피해자의 고통 못지 않게 방관자로서의 무능 또한 괴롭고, 괴롭고, 괴로웠으리라.우리 모두는 세월호가 침몰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했지만(생방송으로 진행된 세월호 현장은 일종의 가정 폭력 현장'이었다. 우리는 가라앉는 자의 부모였으며 국가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아이였다. 그리고 방관자였다)  방관자일 수밖에 없었다. 맞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부채와 죄책감을 느껴야 했던 그녀처럼,  바다 밑으로 가라앉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촛불 집회는 최순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최초 발화점은 세월호 참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집단 죄의식이 촛불의 지속성을 유지한 것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 강한 자는 가라앉지 않는다. "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1),   폐에 공기를 채우면 가벼워지고 물을 채우면 가라앉는다는 사실이 괴롭고, 괴롭고, 괴로웠다 ■






​                                      

1)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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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2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2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2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2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madhi(眞我) 2017-01-14 0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레히트의 글귀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4 10:52   좋아요 0 | URL
피를 흘리지 않고 자유를 얻을 수는 없다고 하죠... 오늘개 산책시키는데 무지 춥더군요... 옷 든든히 입ㅇ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