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비열도의 추자도 같은 세계에서 :
신경숙이 돌아왔다고 ?
신경숙이 << 아버지에게 갔었어 >> 라는 제목의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빙그레 방그레 헬렐레. 오해는 하지 마시라. 한쪽 입꼬리가 유독 위로 올라간 것을 보면 비웃음에 가까우니 말이다. << 엄마를 부탁해 >> 로 대박을 치다 보니 이제는 아버지가 필요한 모양이다. 이 책을 읽지는 않았으나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지만 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안 봐도 유튜브다. 전작에서는 엄마에게 징징거리더니 이제는 아빠에게 징징거리는 모양이다. 신경숙의 신간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궁금했던 것은 작품성이 아니라 이 작품에 대한 평론가의 해제가 부록으로 붙어 있을까 _ 라는 점이었다.
신경숙이라는 브랜드로 단물을 쏙쏙 빼먹었던 평론가들이 표절 논란 이후에 출간된 책에 용기를 내서 해제를 쓸 수 있을까 ? 평소대로라면 신경숙 소설에 해제를 붙이는 것을 가문의 영광쯤으로 여기던 그들이 말이다. 나는 그들이 그럴 용기가 없다는 데 500원 걸겠다. 한국 문단이 겉으로 보기에는 고상해 보여도 파고들면 격렬비열도의 추자도 세계와 같다. 비열하고 추잡스럽다는 뜻이다. 신경숙의 작품 세계가 대부분 엄마와 아버지에 국한된 것을 보면 유아기적 집착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신경숙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듣기에 " 유아기적 집착 ㅡ " 이라는 표현이 거슬리겠지만 신경숙을 조롱하기 위해 고른 표현은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신경숙 문학의 특징은 혼잣말처럼 읊조리기,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혼자서 옹알이하다가 결국에는 말줄임표로 끝내기, 쉼표를 남발하기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태도는 전형적인 미성숙 아동의 문장 구사력이다.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를 대표하는 작가랍시고 한국 문단을 호령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러다 보니 나이 쉰을 훌쩍 넘긴 작가가 툭, 하면 엄마와 아빠를 찾는다. 무엇보다도 그의 사회 인식이 심각한 것은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할 케어의 영역을 부모에게 전가시킨다는 점이다. 가족 문제는 가족끼리 해셜하셔 ~ 뭐, 이런 마인드인 것이다.
그동안 신경숙을 숭배했던 문단 평론가들에게 묻고 싶다(특히 신형철에게). 이게 성숙한 문학이냐, 이게 세계 문학이야 ? 과연 엄마와 아빠에게 매달려서 젖 달라고 질질 짜는 문학을 성숙하다 할 수 있을까 ? 나는 한국 작가들이 왜 그렇게 엄마와 아빠에게 매달리는지 이해가 안 간다. 한국 문단 평론가들이 참말로 철딱서니가 없다고 느낀 것은 << 외딴 방 >> 을 노동소설로 규정했을 때였다. 도대체 어떤 정신머리를 가져야 이런 소설이 노동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일까 ? 신경숙 컴백홈 기념으로 그 전에 써두었던 리뷰로 갈무리한다.
신경숙의 << 외딴 방 >> 에서 보여지는 퇴행적 역사 인식과 오류
눈을 감으세요 / 모두 눈을 감으세요
ㅡ 징병검사장에서, 윤희상
버 지니아 울프는 << 자기만의 방 >> 에서 여성 예술가는 독립적 공간을 위한 < 자기만의 방 > 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 500파운드의 돈 > 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 남성 " 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장소로 " 자기만의 방 " 을 선정한 셈이다. < 방 > 이 버지니아 울프를 대표하는 장소성'이라면 < 부엌 > 은 신경숙 문학을 대표하는 장소성'이다. 하지만 신경숙이 집착하는 부엌이라는 장소성은 버지니아 울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기만의 방이 남성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잰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면 신경숙의 부엌은 남성들과 결탁하여 스스로 그 욕망에 부역하고자 하는 장소로 퇴행한다.
부엌에서 만들어진 밥은 남성(욕망)을 위해 바치는 보시布施 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 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난 거울 노릇을 해왔 " 다고 비판했는데 신경숙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이에 해당된다.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 외딴방 >> 에서 1인칭 여성 화자인 < 나 > 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랑하는 오빠를 위해 저녁상 차리는 것을 최고의 행복이라 믿는다. " 나는 정치 같은 건 몰라, 그냥 오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는 행복만을 느끼고 싶어 ! " 이 깜짝 놀랄만한 언술은 한국 남성들이 여성 대부분을 " 정알못 " 으로 규정 짓는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
저녁 드라마는 여성에게 양보할 수 있지만 저녁 뉘우스는 남성이 독점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신경숙은 < 나 > 라는 어린 여성을 통해서 남성에게 봉사하고 집안 살림을 꾸리는 것이 여성이 갖춰야 할 본질적 의무'라고 강조한다. 이 퇴행적 잰더 인식은 남성적 가치에 순응함으로써,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남성 욕망에 빙의된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가부장제에 봉사한다는 점에서 < 나 > 는 고유한 W가 아니라 M이 뒤집어진 형태의 W다. 내가 이 소설이 굉장히 악질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과 구로공단에 위치한 동남전기주식회사의 열악한 노동 현장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정조준한 소설이면서도 애써 탈정치적 노스텔지어만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주인공 < 나 > 가 노조를 배신하면서 말했던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희망은 소모전이었던 것이다 " )는 변명은 7,80년대 노동 운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신경숙의 퇴행적 사회 인식을 대변한다. 신경숙이 보기에 7,80년대 노동 운동은 쓸모 없는 소모-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는 줄기차게 주인공 < 나 > 의 입을 빌려서 노동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데, 이 행위 자체가 정확하게 강경 자본가 우파의 " 정치색 " 을 띤다는 점에서 < 나 > 가 강박적으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고백하는 언술은 이율 배반에 해당된다. 노동 운동을 단순하게 " 해도 해도 안 되는 ㅡ " 무용한 일로 치부하는 것은
자본가가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협박하거나 회유할 때 자주 사용하는 언술이라는 점에서 << 외딴 방 >> 에서 주인공 나는 < 외피는 구로공단 여공 작업복을 둘렀지만 내피는 자본가 / 기득권 / 수구 보수 남성의 실크 넥타이를 맸다는 점에서 속내를 숨긴 캐릭터 > 로 읽힌다. 그것은 여성W이라는 외피를 둘렀지만 내피는 뒤집어진 남성 M 이라는 간교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광주 시민을 학살했던 학살자(대통령)의 얼굴보다 싫은 것이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는 가난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화자의 철딱서니 없는 논리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지지하기 위해 내세웠던 태극기 집회 무리의 산업화 논리와 다를 것 하나 없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친 - 노동소설이 아니라 반 - 노동소설에 가깝고 친 - 여성소설이 아니라 반 - 여성소설에 가깝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가면극인가. 하지만 문학동네 편집위원이었던 남진우는 이 소설을 "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이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노동소설 " 이라는 놀라운 진단을 내린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아닐 수 없다. 이 헌사는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쓰여진 글이었으니 비평문이라기보다는 세레나데요, 프로포즈'인 셈이다. 사, 사사사사사...... 아니, 좋아합니다 ??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가까운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증언록이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노동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정평이 난 그녀의 풍부한 울림을 담은 문체나 감성을 상찬하는 것을 넘어서 우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걸까. 대상을 나타나게 하면서 사라지게 하는 글쓰기의 비의. 이 비밀스러운 힘을 포착할 때 우리는 신경숙 문학의 또다른 매력 앞에 서게 된다.
- 남진우, 수물의 어둠에서 백로의 숲까지 : 신경숙의 외딴 방에대한 몇 개의 단상 중
반복해서 말하지만 << 외딴 방 >> 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정알못'이라고 강조하지만 유감스럽게도 < 나 > 는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 입장을 당당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말하는 존재'이다. 이 소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고 조선일보가 남진우를 앞세워서 조선일보 지면에 대대적인 작품 홍보를 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문학동네가 조선일보 비호 아래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문학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한국 문학사에서 1970-80년대 실천문학을 정치색에 함몰된 저질 프로파간다 문학으로 평가절하하면서 문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하여 탈정치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문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전환 시도인 셈이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신경숙 작가이고 신경숙 문학의 최고봉이 << 외딴 방 >> 이다. 이 소설 또한 1970-80년대 노동 운동을 평가절하하면서 탈정치화를 선언한 구로공단 여공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문학동네와 신경숙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탈정치화를 주장하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인간은 정치적이다. 이 전제를 바탕으로 하자면 인간을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탈정치화를 선언한 신경숙 소설뿐만 아니라 그를 옹호한 문학동네 또한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이익집단이다. 비극은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신경숙은 문학을 " 사적 내면화 " 라는 틀거리 안에 가두고는
외부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눈을 감고 내면의 이야기를 하자고 속삭인다. 눈을 감으세요. 모두 눈을 감으세요.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두 눈 부릅뜨고 외부를 바라보아야 한다. 컨베이어 벨트에 목이 잘리는 노동자가 있고 지금도 철탑 위에서 408일 동안 농성을 하는 노동자가 있다.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을 하는 것은 쓸모 없는 소모가 아니라 숭고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한때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을 희망 없이, 하지만 절망도 없이 수행한 그들의 희생 덕이다. 나는 ...... 기꺼이, 신경숙 문학에 침을 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