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알코올과 당신의 아밀라아제 :
출판기념회와 뒷풀이

- < 너의 육체는 전쟁터다 > 바바라 크루거, 포토몽타주 기법
풍경 하나. 출판기념회가 끝나면 대개 뒷풀이를 하기 마련이다. 뒷풀이 문화라고 해봐야 탱탱하던 꼴뚜기 다리가 흐느적거리는 문어 다리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
출판기념회 뒷풀이 구성원은 대동소이하다. 평론집을 낸 문학과 교수와 그 교수 밑에서 시다바리 인생을 살아야 했던 제자, 동료 교수, 문학 담당 기자 몇 명. 여자가 술을 따라야 맛이 나는 꼰대들이다 보니 예쁜 제자를 옆에 끼고 술을 마시는 것은 당연하지. 술은 몸을 뜨겁게 만드는 묘약. 몸이 뜨거워지면 사내새끼란 어리나 늙으나 좆을 세우기 마련. 그때부터는 노교수의 혓바닥이 젊고 예쁜 대학원 여학생 입 속으로, 봄에 피는 쑥도 아니면서, 쑤욱~ 들어간다. 혓바닥이 엉킨다. 타인의 아밀라아제가 알코올과 섞이다 보면 역겨운 맛이 나지만 방긋 웃는다. 선생님은 한 말씀 하신다. " 너의 아밀라아제가 무척 마,디,꾸,나 ! " 기자가 보고 있고, 동료 교수도 보고 있고, 제자도 보고 있으나 항의를 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동료 교수의 좆도 홀로 서기를 하다 보니 나 홀로 설 수는 없다는 욕심에 염치에도 불구하고 뒷풀이 주인공에게 한마디 한다. " 나도 그 학생 입 구멍 한 번 빌립시다 ! " 일동, 하하하하하. 포르노 영화 줄거리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링크을 걸어 둔다.
http://www.nocutnews.co.kr/news/4672813
그 술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한 대학원생은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 히마리 없는 늙은 혓바닥의 침입이 육체적 살해라면, " 나도 하자 " 는 테이블 건너편 교수의 말 한 마디'는 그녀를 공창(公娼)으로 전락시킨 인격 살해가 아니었을까 ? 이런 일은 흔하다. 어제 함께 술을 마신 s 님도 자신이 모시던 늙은 문학과 교수의 추태를 고발했다. 여성 제자들과 술을 마신 교수가 느닷없이 소리쳤다고 한다. " 내가 오늘 밤, 좆 잡고 혼자 호텔방에서 자야겠니 ? ( 너희 중에서 한 명은 오늘 밤 나를 위해 육보시를 해야 된다는 투정) " 박진성과 박범신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남성 중심의 한국 문단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다. 추태로 얼룩진 것이 한국 문단이다. 내가 한국 문학을 읽지 않는 이유는 밤에는 권력을 이용해 좆을 세우기 바쁘신 어르신들이 낮에는 자유, 민주, 정의, 예술 따위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좆같아서 참......
누군가의 평론집은, 누군가의 소설집은, 누군가의 시집은 가해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 반짝반짝반짝 빛나는 문학적 성취 " 이다. 또 누군가의 평론집은, 누군가의 소설집은, 누군가의 시집은 물컹한 가래 같은 히마리 없는 늙은 혓바닥을 받아내거나 그 장면을 애써 무시하거나 침묵한 결과의 산물이다. 여성 문인(혹은 지망생)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데에는 수컷들로 구성된 작가와 평론가와 문학과 교수가 문단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 문단 권력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부들부들 떨었다는 문단의 집단 지성을 보면 한국 문학, 그 영원한 씹새스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한국 문단은 밤이 되면 방석 깔아 놓은 술집에 앉아서 타락한 문학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 개탄과 함께 제자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자기 혓바닥을 제자의 입속으로 쑤셔넣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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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여성)의 육체는 전쟁터다. " 이 문장은 페미니즘 아티스트 바바라 크루거가 포토몽타주 기법을 동원하여 만든 작품 제목이다. 백남기 농민의 육체를 강탈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국가 권력과 문인의 성폭력을 접하면서 다시 되뇌이게 되는 문장이다. 자고이래로 여성은 몸의 주체로서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했고, 이 비극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국가는 자궁을 통제 관리하려 들고, 남성들은 여성의 몸을 강탈하기 위해 서로 다툰다. 그러다 보니 여성 몸은 항상 전쟁터'다. 여성 몸은 당신을 위한 추파춥스가 아니지만 수컷들은 물컹물컹한 가래처럼 히마리 없는 혓바닥으로 여성 몸을 핥느라 정신이 없다.
44사이즈로 시작되는 여성 옷 사이즈는 1981년 대한민국 여성 평균 키가 1m55cm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44(s),55(m),66,77,88이라는 옷 사이즈 표기 방식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평균이거나 평균 이상인 여성에게 44사이즈는 불편한 옷에 해당되지만 모든 여성들은 44사이즈를 욕망한다. 그렇다면 자기 몸보다 작은 크기의 44사이즈 옷은 코르셋이요, 전족(纏足)이나 다름없다. 44사이즈는 가장 작은 성인 옷에 해당되지만, 현대 여성은 44사이즈 옷을 입기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 이제 몸은 허기와 싸우는 전쟁터가 된다. 그렇다면 44사이즈에 대한 욕망의 주체는 여성일까 아니면 남성일까, 누구의 욕망이 투사된 결과일까 ? 코르셋과 전족이 남성 욕망을 채우기 위한 오브제라는 점을 감안하면 44사이즈는 남성이 만든 족쇄다.
이렇듯 여성 몸은 남성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된다. 남성은 여성의 몸을 체(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식(食)과 색(色)으로 인식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한갓 빨고 싶은 추파춥스로 보는 것이다. 유감이다. 사람과 사탕은 구별이 가능한 단어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