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에서 그것으로 !
셰익스피어의 명성은 황당할 정도로 지나치게 높아져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그에게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다. 아예 없다. 그는 옛날 소설들에서 얼개를 가져와서는 그 이야기들을 극적인 틀에 맞출 뿐이다. 그가 들이는 노력이라고는 당신과 내가 그의 희곡을 다시 산문적인 이야기로 바꿀 때 드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ㅡ 이 주장에 대하여 영문학을 전공했거나 문학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주먹 쥐고 일어나 나를 향해 원 펀치 쓰리 강냉이를 털었을 것이다. " 무식한 페루의 남미 새끼 ! 네가 문학을 알아 ? "
우우, 오해는 마시라. 셰익스피어에게 저주를 퍼부은 사람은 페루애가 아니라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니까(제임스 호그에게 보낸 편지). 평소 바이런의 인성을 쓰레기'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지만 그가 셰익스피어를 평가한 부분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 로미오와 줄리엣 >> 에 등장하는 비약泌藥(줄리엣은 가짜 독약'을 삼켜 가사 상태에 빠졌다가 관 속에서 눈을 뜬다는 계획을 꾸민다)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줄리엣이 " 죽은 척하는 생태 " 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뭔 짓인가. 이런 얼어죽을 동태 같으니라구...... << 베니스의 상인 >> 은 더 가관이다.
베니스의 재판관은 계약서에 < 살 > 만 적혀 있을 뿐 < 피 > 는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 안토니오의 살은 베되 피를 흘려서는 안 되며,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샤일록의 전 재산은 몰수하고 사형에 처한다 " 고 선언한다. 결국 샤일록은 재판관의 선처(?)로 목숨은 부지하지만 전 재산을 잃고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한다. 오, 불쌍한 샤일록 ! 이것은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다. 놀랍게도 << 베니스의 상인 >> 은 히틀러 나치 시대 때 가장 인기 있는 연극이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샤일록을 연기했던 독일 배우는 나치 부역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법정에서 판사에게 소리쳤다.
" 배우가 최선을 다해 연기한 것이 죄라면 유대인을 혐오하는 연극을 쓴 셰익스피어부터 무덤을 파고 그 해골을 기소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 " 이 독일 배우의 당당한 외침에 당황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이 그를 기소했기 때문이었다. 마, 마마마마많이 당황하셨세여 ? << 햄릿 >> 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 햄릿 >> 은 무대 위에 오를 등장인물들이 모두 죽어서 어쩔 수 없이 상연이 중단된 연극이다. 해태 프로야구 김응룡 감독의 성대모사를 빌리자면 : 아 ! 오필리어도 없고, 아 ! 플로니어스도 없고, 아 ! 거투르드도 없고, 아 ! 클로디어스도 없고, 아 ! 레어티즈도 없고, 아 ! 햄릿도 없고......
슬래셔 무비처럼 등장하는 족족 죽으니 연극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있나. 이 연극은 등장 인물 모두가 죽어야 끝나는 슬래셔 무비와 닮았다는 점에서 최초의 슬래셔 대본이라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문학은 희극일 때는 결혼으로 끝나고 비극일 때는 죽음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단순하다. 이런 작품을 가장 위대한 세계 문학이라고 설레발을 떠는 것은 교양이 없는 짓이다. 바이런의 말마따나 셰익스피어의 명성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었다. 2002년, 노벨 연구소가 주최한 전 세계 유명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책 1위는 << 돈키호테 >> 였다. 투표에 참가한 작가의 절반 이상이 이 작품을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뽑았다.
셰익스피어에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다고 혹평했던 바이런조차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 에 대해서는 " 서사의 예술 " 이라고 극찬했다. 이 문학 작품에 붙는 " 최초~ " 라는 수식어는 찬란하다. 최초의 근대 소설,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최초의...... 이 소설에는 이미 상호텍스트성, 작가의 죽음, 독자 비평과 같은 20세기 문학 개념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다. 그런데 세르반테스를 초월하는 작가가 있었다. 바로 피에르 메나르'다. 그는 << 돈키호테 >> 를 흠모한 나머지 첫 문장의 첫 글자부터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그대로 필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발생한다. 피에르 메나르가 쓴 << 돈키호테 >> 는 세르반테스가 쓴 << 돈키호테 >> 보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를 받는다. " 우리 모두, 대문호 삐에르 메나르에게 경배를 ! " 원본보다 사본이 훌륭한 경우'다. 그런 희한한 일이 가능하냐고 ? 놀라지 마시라. 이 이야기는 호르헤 보르헤스의 <<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 라는 단편에 나오는 픽션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삐에르 메나르가 쓴 << 돈키호테 >> 를 시뮬라크르1)라고 부른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 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바로 시뮬라시옹이다.
현대 사회는 재현과 실재의 관계가 역전되어 더이상 흉내 낼 대상인 원본이 없어서 삐에르 메나르가 쓴 < 돈키호테 > 가 더욱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가 된다. 며칠 전,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손창현 문학 도용 사기 사건은 보르헤스와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문학 혹은 문화 이론을 떠올리기에 손색이 없다. 그는 한국의 삐에르 메나르'다. 손창현은 2018년 백마문학상 수상작인 김민경의 << 뿌리 >> 를 그대로 필사해서 제16회 김장생 신인문학상 수상, 2020포천문학상 최우수상,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제2회 글로리시니어 신춘문예 당선, 계간지 소설미학 2021년 신년호 신인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최거를 이룬다.
원본(김민경의 뿌리)이 한 개의 문학상을 수상한데 비해 사본(손창현의 뿌리)은 무려 다섯 개의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원본을 초월한 사본의 탄생인 셈이다. 그런데 그가 창조한 시뮬라크르-들은 문학상 공모 작품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각종 아이디어 공모전, 사진전, 정책 논문 그리고 자신의 프로필마저 모두 가짜였다. 나는 이 지점에 전율했다. 그는 한갓 문학 작품이나 필사하는 필경사의 운명을 초월해서 그 스스로 시뮬라시옹 해서 시뮬라크르가 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 발현된 미학의 결정판이란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은 시뮬라시옹을 통해서 < 그 사람 > 에서 < 그것 > 으로 전환한 물성이 되었다. 이제 더이상, 우리는 그를 그 사람이라고 호명하면 안된다. 그는 " 그것 " 이다.
덧대기 ㅣ " 그것 " 은 국민의힘 중앙위원회 국방안보분과 부위원장이었으나 이번 사태로 인하여 국민의힘중앙위원회국방안보분과부위원장에서 해촉되시었다. 최은혜 국민의힘 중앙위원회 국방안보분과 간사 님께서는 페이스북을 통해 " 그것 " 이 제명되었음을 만천하의 국민의힘 동지들에게 고지하시었다.
1) 시뮬라시옹 : 프랑스 철학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이론으로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뮬라시옹(Simulation)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을 '시뮬라크르'(Simulacra)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다름 아닌 가상실재, 즉 시뮐라크르의 미혹 속인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사물이 기호로 대체되고 현실의 모사나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들이 실재를 지배하고 대체하는 곳이다. 이제 재현과 실재의 관계는 역전되며 더이상 흉내낼 대상, 원본이 없어진 시뮬라크르들이 더욱 실재 같은 극실재(하이퍼리얼리티)를 생산해낸다. 더이상 원본은 없고 어느 의미에서는 원본과 모사물의 구별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뮐라시옹의 질서를 이끌고 나아가는 것은 정보와 매체의 증식이다. 온갖 정보와 메시지를 흡수하지만 그것의 의미에는 냉담한 스폰지 또는 블랙홀 같은 존재가 현대의 대중이다. 사유가 멈추고 시간이 소멸된 현대사회에서 역사의 발전은 불가능하며 인권이란 미명 아래 강요된 정보에 노출된 대중과 시뮬라시옹의 무의미한 순환이 있을 뿐이다. 이같은 사고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지적 허무주의자, 정치적 보수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보드리야르가 자신의 사상 체계를 만들어 가던 1960년대는 프랑스가 본격적인 대량 소비 사회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1940년대 말의 전후 복구기와 1950년대의 경제 구조 형성기를 거친 프랑스에 호황이 시작됐고 거리, 상점, 가정에 물건들이 넘치기 시작했고, 라디오와 TV가 가정필수품으로 자리 잡아 가던 즈음이었다. 넘치는 물건, 넘치는 일자리, 넘치는 이미지 앞에서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넘치는 물건들이 우리의 삶과 어떤 의미 관계를 맺는지를 고찰했다.
- 철학사전2009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