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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평점 :
사 서 고 생 하 는 느낌 :
찰떡과 개떡
문학은 항상 새로운 형식에 대해 응답했다. 지금은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신경숙도 옛날에는 기성'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이 돋보였던, 혜성처럼 등장한 기라성 아니었던가.
주먹 불끈 쥐고 핏대 세우며 대의를 향해 소리쳤던 당대 문학과는 달리 신경숙이 독자에게 조곤조곤 귀엣말로 속삭였을 때 우리는 새로운 작가의 출현에 열광했었다. 그는 목에 핏대 세우던 문학이 주류였던 시절에 " 히마리 없는 말 " 로 승부를 본 작가였다. 히마리 없는 말이 힘껏 내달리는 말을 이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신경숙은 증명했다(그랬던 그녀의 히마리 없는 말을 상징하는 쉼표와 말줄임표의 과도한 사용이 이제는 지적 사항으로 바뀌었다). 장정일과 하일지도 마찬가지였다. 채찍과 경마장, 그들은 각자 좋아하는 성적 취향의 도구로 거들먹거리는 주류를 " 사정없이 " 후려쳤다.
새로운 것을 갈망했던 젊은 평론가들은 사정 없이도 사정없이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그들의 소설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최근 8월 땡볕의 쇠불알처럼 축 늘어져 있던 문단이 정지돈의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에 환호를 보내는 데에는 정지돈 소설이 가지고 있는 실험성 때문이리라. 정지돈의 첫 번째 소설집 << 내가 싸우듯이 >> 에 대한 평단의 환대와는 달리 관객은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자서전도 아니고 명태전도 아닌 형식에 당혹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볼멘 목소리가 감지된다. 호들갑 떠는 평단의 지지에 주눅이 들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이들이 판단을 유보한다는 의미로 ★★★ 를 주는 모양새'다.
그런데 나는 정지돈 소설이 과연 새롭고 실험적인 소설'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세계의 인용의 인용의 인용의 인용으로 채워진 " 텍스트는 보르헤스가 이미 오래 전에 써먹은 수법이고, 기록물 - 들의 문서를 발췌, 인용, 배열, 주석을 다는 콜라보도 발터 벤야민이 << 아케이드 프로젝트 >> 에서 선보인 편집 방식이 아니었던가 ? 정지돈이 보르헤스와 벤야민을 끌어와 고다르-풍(여기서 풍은 약간의 경멸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고다르를 호명하는데 나는 왜 그가 강박적으로 고다르를 호명하는 이유를 모르겠다)으로 직조하는 방식은 전혀 새롭지 않다.
이미 작품 속에 작가의 실명을 기입하며 픽션과 논픽션을 자유자재로 엮는 방식은 소설가 손창섭이 50년대에 자주 써먹던 수법이었다. 정지돈 소설집 << 내가 싸우듯이 >> 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 내러티브는 실종되고 텍스트(혹은 특정한 판본)만 호출되는 " 소설이다. 그는 서사'를 뒤집어 사서(司書)의 영역으로 소설을 옮긴다. 그는 서사를 만들어낸다기보다는 실재하는 텍스트를 인용하거나 부재하는 텍스트를 만들어내거나 실재와 부재를 뒤섞은 텍스트를 만들어서 가본(假本)을 내놓는다. 그에게는 지식 저장소인 도서관이 소설가의 집필실인 셈이다.
그것은 벤야민이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그 아래 짧은 코멘트를 붙였던 작업 방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작품론을 변명하기 위해 쓴 << 일기 / 기록 / 스크립트 >> 에서 벤야민에 대한 언급은 없고 엉뚱하게 고다르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은 의아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장탄식을 내뱉었다. 의, 아, 예, 요 ! 당연히 내러티브 중심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단편 << 눈먼 부엉이 >> 에서는 제목 그대로 " 눈먼 부엉이 " 라는 한국어판 판본을, << 창백한 말 >> 이라는 단편에서는 " 창백한 말 " 이라는 텍스트를, << 뉴욕에서 온 사나이 >> 에서는 장이 뉴욕에서 썼다는 << 말라 노체 >> 라는 단편에 대한 언급(호명)으로 채워진다.
한번 호명된 텍스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는 또 다른 텍스트를 호명하게 되는 순환 과정을 거친다. 쉽게 말해서 정지돈 소설집은 자신의 텍스트는 없고 타자의 텍스트(그 텍스트가 실재이든 허구이든)에 대한 끊임없는 오마주로만 채워진 영화 같다. 타자의 텍스트로 자신의 텍스트를 채우는 방식이 작품 의도였다면 할 말은 없지만 개떡 같이 말하면 찰떡 같이 알아듣는 평론가를 위해 쓴 글이라면 유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 읽은 << 눈먼 부엉이 >> 는 좋게 읽었다. 하지만 동일한 형식이 변화 없이 반복되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는 술주정뱅이의 주사를 보는 것 같다. 그의 단편 하나를 읽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지만 단편들로 묶인 소설집을 읽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작가의 시그니처이거등여 _ 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되받아치고 싶다. 아니거등여! 제사 음식이 맛있을 때는 제삿날이 전부이다. 이 소설집은 마치 제사 음식을 열흘 연속으로 먹은 느낌이다. 그는 한국 문학의 문제점이 서사의 과잉에 있다고 보는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 문학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는 서사의 과잉이 아니라 서사의 빈곤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집을 읽고 난 생각은 사서 고생하는 느낌 ?! 이 표현은 중의적이다.
사서(의 고행)를 자처하는 작가의 고생이 훤히 보이고, 또한 이 책을 사서 읽고 내용을 파악하느라 고생하는 독자의 고생도 훤히 보인다. 찰떡 같이 말했는데 개떡 같이 알아듣는 독자는 있어도 개떡 같이 말했는데 찰떡 같이 알아듣는 독자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독자의 잘못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개떡 같이 말해서 개떡 같이 알아들었던 것일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