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정기 모임은 아닌데 정기적으로 모이게 되는 비정규 불규칙 변종 모임이 있다. 말이 좋아 독서 토론 모임이지 문화적 취향을 핑계로 술자리를 만드는 모임이다. 독서 모임이라기보다는 독설 모임 쪽에 가까운데 이 세상 모든 책에 대해 독하게 까는 데에서 쾌락을 얻는 모임이라 하겠다.
비판의 대상이 비단 책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이번에는 " 육칼(육계장 칼국수) " 을 놓고 장장 1시간 동안 욕설을 동반한 조롱을 이어갔다. 비판 이유는 어정쩡한 맛이라는 데 있었다. 육계장 맛도 아니요, 칼국수도 맛도 아니요, 짬뽕 맛도 아닌... 그렇다고 육계장 맛이 아주 안 나는 것은 아니며 칼국수 맛도 조금은 나는 것도 같고 국물 한 모금 마시면 혀끝에서 짬뽕 맛도 약간 나는 것 같다는 게 중론이었다. 육칼 ?! 육칼 하고 자빠졌네. 육칼을 떨어요, 육칼을 ! 이런 아재 개그 - 들. 육칼을 먹은 적이 없는 나는 그들이 내뱉은 조롱에 동참할 수 없었다. 기껏 끼어든다는 게 김풍이 나온 광고 말하는 거지 _ 라고 추임새를 넣는 것이 고작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화에 끼여들고 싶었으나 이내 한계에 다다르고는 했다.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는 탁자를 탁탁 치며 말했다. " 시국이 어려운 상황에 고작 라면 하나가지고 사내새끼들이 이리 호들갑을 떨어야 겠소 ? " 내 옆에 있던 A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 킁킁... 야, 너 머리에서 에프킬라 냄새가 난다 ? " 화들짝 놀랐다. 사실 아침에 에프킬라를 헤어스프레이로 착각하고는 사정없이 머리를 향해 난사했기 때문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모두들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런 육칼 ! 그 다음 품평은 한강의 << 채식주의자 >> 였다. 중론은 형편없다로 집약되었다.
나는 한강의 << 채식주의자 >> 가 특정 음식(육식)에 대한 거부 반응 끝에 결국에는 거식 단계에 이른다는 점을 들어 뱀파이어 서사를 다를 게 없다고 지적했다. 뱀파이어 또한 특정 음식(채식)에 대한 거부 반응을 거쳐 거식 단계에 이르니깐 말이다. 한강은 채식이라는 행위를 통해 폭력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섭식 행위 자체가 둘 다 난폭하다는 점에서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누군가 오, 맛깔나는 해석인데 _ 라고 말했다. 칭찬에 고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져왔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는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한강은 실력이 뛰어난 작가는 아니다.
시적 감수성은 뛰어난데 막상 그녀가 쓴 시는 감흥이 없고, 반면에 소설은 그녀의 타고난 시적 감수성 때문에 오히려 서사가 선명하지 못하고 뭉개지는 경향이 있다 등등. 동의하는 이도 있었고 동의하지 않는 이도 있었다. B는 시적 감수성을 가지고 뛰어난 산문을 쓰는 대가가 몇 있다고 말한 후 대표적인 작가로 롤랑 바르트, 사무엘 베케트, 파스칼 키냐르를 뽑았다. 나 또한 그 말에 격하게 동의했다. B가 말했다. " 시적 감수성이 풍부하면 글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 ? 난 그렇게 보질 않는다. 감수성이 너무 풍부하면 산문은 연애편지처럼 쓰여지게 되거든.
좋은 가수는 슬픈 노래를 부를 때 관객을 울리게 만들지 자신이 노래를 부르면서 울지 않거든. 한강이 실패하는 지점이야. 죽도 밥도 안되는 것이지. 육칼 봐봐. 이건..... 육계장 맛은 나는데 딱히 육계장이라고 할 수도 없고, 칼국수 맛도 나는데 그렇다고 칼국수 맛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짬뽕 맛도 나는데 짬뽕이라고 말하기도 애매모호한 맛이잖아. 난 한강의 작품들이 그렇다고 생각해. " 맙소사, 기껏 화제를 육칼에서 한강으로 돌렸더니 C는 다시 육칼로 돌려세웠다. 고난이도 스킬이었다. 이런 육칼 !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고 동시에 기억도 잃어버렀다.
다음날, 숙취로 인해 눈을 찡그리 뜨자 책상 위에 맥주 1병과 라면 냄비가 뒹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육칼이었다 ! 그런데 어쩌나. 필름이 끓기는 바람에 육칼의 맛을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을 짜내고 짜내도 그 맛을 기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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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 어제 잘 들어갔나, 친구. 육칼 먹어봤어 ? 육칼 끊여먹고 잔다며 ? 너 이 새끼야. 술자리에서 그 얘기 몇 번 한 줄 아냐 ? "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답을 보냈다. " 끓여 먹었지. 맛은 글쎄...... 육계장 맛도 나고, 칼국수 맛도 나고, 짬뽕 맛도 나는데 육계장 맛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칼국수 맛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짬뽕 맛이라고 하기도 뭐하더군. "
하이드 님의 페이퍼 때문에 우리 모임에서 심심풀이 술안주로 자주 등장했던 인물이 강신주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Q 이 책은 앞에서도 말했듯 과거와 현대, 동양과 서양의 철학자들을 아우르고, 기존 철학이 수용하지 않았던 배타적 영역들도 끌어왔으며, 방대한 분량이 특징이다. 그런데 1,500페이지 중 등장한 여성 철학자는 한나 아렌트 단 한 명뿐이다.
철학자 중에 여자가 없다. 물론 20세기 들어와서는 좀 있지만.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입장을 다루나, 아직 인간 보편까지는 수준이 안 올라갔다. 그래서 항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 그 정도 가지곤 안 된다. 중요한 건 자기편만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다른 편마저도 동감하도록 하는 거다. 하지만 지금 시대를 보면 아직도 협소하다. 남성을 이해하고, 여성을 이해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져야 하는데 아직 그 정도까지 안 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참정권이 여성에게 부여된 것이 20세기 들어와서니까. 이 책에 한나 아렌트 한 명 들어온 것이 우리 인류 문명의 현주소라고 보면 된다. 내가 대학원 시절에 가장 황당했던 게 여자인데 공자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나는 넌지시 “너 미쳤냐?”라고 묻기도 했다. 여성의 가치를 부정하다시피 하는 공자를 연구해서 뭐하게. 그런데 공자를 연구하는 이유는 동양 철학에서 유학을 공부해야 주류라는 쪽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철학함이 아닌 전형적인 철학의 논리인 거다. 여성들의 가장 큰 문제가 남성 주류 사회에서 남성한테 인정받으려고 해서 생긴다. 페미니즘을 여기에 한 항목으로 넣을까 생각도 했었는데 수준이 떨어져서 넣지 않았다.
강신주의 논리는 굉장히 단순하고 멍청하다. 쉽게 말해서 여자는 남자에 비해 " 수준이 떨어진다(아직 인간 보편까지는 수준이 안 올라갔다. 그래서 항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 그 정도 가지곤 안 된다) " 는 것이다. 남자에 비해 수준이 미달인 분야가 어디 철학뿐이랴 ? 철학자를 과학자로 바꿔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 과학자 중에 여자가 없다. 물론 20세기 들어와서는 좀 있지만..... " 이런 미러링은 어떤가. " 수학자 중에 여자가 없다. 물론 20세기 들어와서는 좀 있지만...... " 강신주가 매의 눈과 정직한 심장을 가진 이라면 이 < 소수성 >이야말로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을 배타적으로 차별했다는 증거로 사용했을 것이다. 여성이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능력 때문이 아니라 유리벽에 갇혔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이 데이터를 가지고 성차의 우생학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할 증거로 인용한다. 그런 식으로 비판하자면 나는 강신주가 내뱉은 말투로 똑같이 강신주를 비판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 동양과 서양의 철학자를 아우른 1,500페이지 중 등장한 철학자 중에 한국 남성 철학자는 없다. 그 사실은 한국 철학자가 항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이어서 그 정도 가지곤 안 된다. 시대를 보는 눈이 협소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져야 하는데 아직 그 정도까지 안 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철학자 한두 명 정도는 넣을까 했는데 수준이 떨어져서 넣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