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피우는 여자, 담배 피우는 남자
독립출판 << 언니네 마당 >> 여름호를 뒤늦게 받았다. 중간 과정에서 배달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이 잡지에는 청탁을 받고 쓴 내 글이 실려 있다. 제목은 " 잠재적 가해자 " 이다. 원고를 보내기에 앞서 제목을 놓고 잠시 고민했다.
< 나는 데이트폭력의 가해자였습니다 > 라고 썼다가 다시 원안대로 고쳐서 송고했다. 이 자리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잠재적 가해자였고 동시에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였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내 과오에 대한 반성이지 과시는 아니었다. 옛 애인이 10년 전에 거리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남자에게 뺨을 맞은 일이 있었다. 죄목은 여자가 감히 거리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범죄였다. 깜짝 놀랐다. 한국 사회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밖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유죄가 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가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게 되면 어떻게 될까 ? 그 후, 십 년의 일이다.
유모차를 끌고 가던 여성이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에게 금연을 요구하자 횡단보다 앞에서 따귀를 맞은 사건이 발생했다. 여자는 아이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위력을 행사하는 남자를 밀쳤다. 연약한 여성이 밀었다고 건장한 사내가 뒤로 넘어질 리는 없었다.
경찰이 내린 결론은 쌍방 폭행에 의한 쌍방 과실이었다. 여성이 밀친 행위를 정당방위가 아닌 폭력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토록 공평한 君師父의 황홀한 세계. 법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하는 대목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에게 법을 수호하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여성이 아니라 父를 위해 바다에 뛰어내리는 심청이나 夫를 위해 수청을 거부하고 목숨을 내놓는 춘향이다. 남자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찬미 앞에서 할 말을 잊게 만든다.
10년 전의 미러링이라면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뺨을 때려야 하지만 오히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지나가는 여자를 때린 것이다. 이 극단적 상황은 한국 여성 지위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다음은 언니네 마당 여름호에 실린 < 잠재적 가해자 > 전문이다.
잠재적 가해자
이십대 초입이었으니 오래 전 일이다. 나는 영화 서클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그렇다고 친목 모임이라고 하기에는 단단하지 않은 결속력으로 뭉친 영화 모임의 회원이었다. 이들은 모두 시네마떼끄에서 오고가다 만난 사이였는데 뜻이 맞는 사람끼리 의기투합하여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다. 남성 두 명과 여성 두 명으로 이루어진 구성이었는데 내가 가장 나이가 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영화를 감상하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었다. 그리고는 감상한 영화에 대한 리뷰와 각자 맡은 분야의 꼭지 글을 모아서 팸플릿(신문도 아니고 잡지도 아닌 회지라 해 두자)을 발행했다. 이 모든 일은 인쇄소 직원으로 일하는 회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모임 장소를 제공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이 모임의 창립자이자 든든한 스폰서였다. 매달 우편으로 발송되는 팸플릿을 집에서 받아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연애 편지를 쓰듯 열심히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다 같이 모여 영화를 보는데 평소 활발하고 씩씩했던 여성 회원 한 명이 괴성을 지르면서 모니터를 내동댕이치는 일이 발생했다. 쓰러진 모니터 옆에서 여자는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때 상영된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그때 일어난 일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추론하건대, 영화 속 장면 하나는 그녀가 그토록 감추려고 했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들었으리라. 공교롭게도 영화 속 장소가, 공교롭게도 영화 속 악당의 얼굴이, 공교롭게도 영화 속 강간 피해 여성이 입은 옷이, 공교롭게도, 공교롭게도, 공교롭게도…….
우리는 그녀의 신경 쇠약과 히스테릭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레짐작으로 알 수는 있었다. 폭력은 공소 시효가 있지만 악몽은 공소 시효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일 이후, 그녀는 더 이상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고 느슨한 결속력을 자랑하던 모임도 흐지부지 끝났다. 팸플릿은 폐간 소식을 알리지도 못한 채 폐간되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또 하나의 일이 생각난다. 내 옛 애인은 거리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남자에게 머리를 잡힌 채 따귀를 몇 차례 맞았던 일이 있었다. 늦은 밤도 아니었고 으슥한 골목길도 아니었다. 대낮, 남산 도서관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애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울먹이면서 전한 말에 의하면 폭력을 휘두른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남자였다고 한다. 묻지 마 폭행인 셈이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여자가 “ 감히 ”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나는 흡연이라는 개인적 기호(嗜好)가 남자에게는 허용되지만 여자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세기말 사회에 경악했다. 그리고 본 적도 없는 그 남자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는 그 남자가 아니니까. 상대와 나를 분리하고 나서 대상을 타자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이니까. 그러니까, 타자와 나를 구별 짓는 행위는 위안을 주었다. 대상이 흉악한 짐승이 될수록 나는 선한 목자가 되었다. 이 프레임이 자기 기만이었다는 사실은 세월이 꽤 흐른 후에 깨닫게 되었다.
오래된 연인의 관계가 그렇듯이 우리는 잦은 다툼으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마음이 돌아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가 냉정한 얼굴로 돌아서자 나도 모르게 늦은 밤 거리에서 여자의 뺨을 때렸다. 내 안에 잠재된 약자에 대한 폭력성이 눈을 뜬 것이다. 당혹감 뒤에 찾아오는 절망감. 어쩌면 도서관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여자를 때리는 못난 놈이 나였을 수도 있다는 자각을 한 계기였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앞에서 괴로웠다. "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에 대해서 남자는 모두 잠재적 가해자 " 라는 표현은 내 블로그를 자주 왕래했던 사람이라면 이미 익숙한 표현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에 있어서 남성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나는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뿐만 아니라 성차별적 행동을 일삼는 남성도 혐오했으니깐 말이다. 그날, 나는 왜 애인의 뺨을 때렸을까.
스탠리 밀그램은 1961년 << 권위에 대한 복종 연구 >> 실험에서 인간 본성을 탐구한다. 실험 결과, 우리가 그토록 믿었던 평범한 사람의 착한 본성은 온데간데없었다. 실험 결과가 말하고 있는 바는 분명하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잠재적 범죄자라는 사실 말이다. 내가 " 남성은 여성 폭력에 대해 잠재적 가해자 " 라고 지적했을 때 부분을 전체로 확장한다고 지적하는 이도 있었다. 여성 혐오 범죄를 저지르는 남성은 고작해야 1% 미만일 것이라고, 남성 한 명의 죄를 모두의 잘못으로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그러한 프레임 설정이 또 다른 남성 혐오 문화를 만들고 남성을 피해자로 만든다고 말이다. 스탠리 밀그램은 실험에 앞서서 40명의 심리학자와 정신분석의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에게 실험 결과에 대한 예측을 하도록 했는데 대부분은 실험 참가자가 450v의 전류가 흐르는 버튼을 누를 확률은 고작해야 1% 미만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상치는 완전히 빗나갔다. 실험에 참가한 지원자의 65%가 최고 단계인 450v 버튼을 눌렀다. 수성(獸性)이 착한 본성을 이긴 것이다. 어쩌면 당신이 예측한 (여성 혐오 범죄를 저지르는 남성은 고작해야) 1%는 인간의 본성을 과신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며 이성을 통제하는 것은 상황이다. 인간은 상황적 동물이다.
1971년, 독일 브란트 전 총리가 바르샤바에서 무릎 꿇고 사죄를 했던 일이 있었다. 전쟁 책임과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죄였다. 하지만 그는 가해자는 아니었다. 가해자가 아니면서도 가해자의 입장에서 책임을 통감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꼿꼿한 허리가 아니다. 폭력은 공소 시효가 있지만 악몽은 공소 시효가 없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때린 남자는 쉽게 잊지만 맞은 여자는 쉽게 잊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