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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 - 개마고원신서 26
강준만.권성우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봉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
타짜들의 세계
" SF의 90%는 쓰레기다. 그러나 어느 분야든 90%는 쓰레기이기 마련이다 "
SF 작가 씨어도어 스터전은 SF의 90%는 쓰레기 _ 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에 일단 동의한다. " 그래 에쑤에쁘는 쓰레기다, 시바 ! " 그리고는 되받아친다. " 하지만 어느 분야든 90%는 쓰레기다. 고로 당신이 지지하는 장르와 당신이 경멸하는 장르는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 이를 두고 < 스터전의 법칙 > 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정확한 원문 출처는 공상 과학 소설 잡지인 << 벤처 >> 에 쓴 글이다.
" SF 의 90% 는 쓰레기라고 생각한 사람들과 논쟁에서 반박용으로 써먹는 사람들 때문에, 20년 동안 SF 에 대한 비난을 방어하느라 나를 지치게 만든 스터전의 폭로에 대해 다시 한번 말하겠다. 공상 과학 소설의 90% 가 쓰레기, 똥으로 취급된다는 기준을 다른 곳에도 적용한다면, 영화, 문학, 상품, 기타 여러가지 것중 90% 가 쓰레기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니까, 과학 소설 중 90% 는 쓰레기라는 주장 (혹은 사실)은 절대적으로 쓸모없는 말이다. 공상 과학 소설은 다른 모든 예술 장르와 동일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
< 스터전의 법칙 > 을 증명할 만한 사람은 많다. 조지 오웰은 에세이집 << 나는 왜 쓰는가 >> 에서 출간된 책 대부분은 쓰레기라고 말했고, 독서 에세이집 << 나는 이런 책을 읽었다 >> 에서 저자인 다치바나 다카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책의 무게 때문에 아파트 바닥이 내려앉았을 만큼 많은 책을 구입한 그이지만 책에 대한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동안 쌓인 교양과 경험으로 선택한 책인데도 말이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대부분의 책은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이다. 독서광이 되기 위해서는 실패한 선택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그런데 < 스터전의 법칙 > 에 완벽하게 위배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신형철 평론가'다. 그는 주로 출판사의 청탁으로 책을 읽고 해설을 남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 스터전의 법칙 > 을 적용하자면 신형철의 독서 행위 만족도는 조지 오웰과 비슷하거나, 다치바나 다카시의 만족도보다는 현저히 낮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치바나 다카시는 자발적 선택에 의해서 돈을 지불하고 책을 사서 읽은 반면, 신형철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해설을 쓴 게 아니라 출판사로부터 청탁을 받고 해설을 썼으니깐 말이다. 그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 가급적 청탁이 들어오는 해설을 모두 쓰려고 합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의 해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작품 대부분을 칭찬 일색으로 늘어놓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수동적 선택에 의한 독서 만족도는 100%에 가깝다. 그는 칭찬하기도 모자른 판국에 만만한 작품 하나 놓고 두들겨패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고백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비평가의 윤리적 태도를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주례사 비평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강준만/권성우가 함께 쓴(보다 정확히 말하면 강준만의 편역) << 문학 권력 >> 을 다시 읽었다. 필요한 부분은 인용 발췌한다.
문학동네 출판사 사장 김경재 씨의 매각 의사 공표로 출범한 지 1년도 안 돼 폐간 위기를 맞았던 계간지 < 문학동네 > 가 편집위원들과 젊은 작가들이 돈을 추렴해 출판사 자체를 인수함으로써 정성작으로 발간되게 됐다. 문학동네 강태형 주간은 출판사 직원을 한 계좌로 하고 모두 18명이 지분 참여를 했다. - 214쪽
이 사실이 맞다면 문학동네의 책 판매량은 결국 출판사에 투자한 편집위원들과 젊은 작가의 은행 계좌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 손아람의 지적은 새겨들을 만하다. "지난 1 ~ 2 년 간 대형 문예지에서 언급한 작가 혹은 작품을 찾아봤더니 대부분이 자체 출판사 공모전에 당선 됐거나, 출판사에서 책을 낸 사람이었다" 면서
"정확히 말해 창비에서는 20명 중 16명, 문학동네에서는 30명 중 28명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른 번 가운데 스물여덟 번을 문학동네 관련 작가에게 할애하면서, 절대로 '우리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한 작가이기 때문에 지면을 내줬다'고 말하진 않는다. 마치 이 작가의 작품이 비슷한 시기 출간된 다른 작품들보다 문학적으로 탁월하기 때문에 지면을 내줄 가치가 있다는 것처럼 포장을 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건 기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권성우는 << 심미적 비평의 파탄 >> 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문학과지성사나 문학동네에 소속된 상당수의 비평가들이 해당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대해서 공정한 비판과 냉철한 지적을 수행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개인적이 차이가 있겠지만, 특히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자한 비평가의 경우, 자신이 돈을 투자한 우리 화사라는 의식구조, 그리고 단지 돈에 국한되지 않는 상징가치와 상징권력에 대한 보존 열망 등이 자신이 출판사 간행물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소신 있는 비판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 같은 책, 284 쪽
권성우의 지적이야말로 주례사와 정실 비평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여러 차례 문학동네과 조선일보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문학동네 초창기 편집위원 중 한 명인 박해연은 조선 일보 기자'였다. 이러한 의구심은 김정란의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동인문학상은 조선일보사에서 관장하는 문학상인데, 제 28회 동인문학상 예심위원 여섯 명 중에서 세 명이 문학동네 편집위원이다(김원우, 임우기, 황종연, 남진우, 하응백, 신수정). 30회 동인문학상 예심에는 두 명이 참여하고 있지만, 신경숙까지 포함하면 문학동네 관계자가 또 세 명인 셈이다(임규찬, 남진우, 우찬제, 신수정, 신경숙). 이런 식으로 조선일보는 문학동네를 물심양면으로 밀어왔으며,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신경숙과 은희경이 웃자랐던 것이다 - 219쪽.
문학동네가 90년대 출범하여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는 사실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급기에 1999년 1월 6일자에는 < 문학동네 출범 4년만에 90년대 문단 중심에 > 라는 기사가 작성되기도 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박해연이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그는 문학동네 초기 편집위원이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신형철이 아니라 평론가 김미현의 변명에 있다. 그는 < 주례사 비평을 위한 변명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이 주례비평이라는 말에 오히려 모순을 느낍니다. 요즘에는 아무도 해설을 보고 책을 사지는 않아요. 책을 사도 뒤에 붙은 해설은 읽지 않는 경우가 많구요. 비평의 영향력은 이처럼 약화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주례를 서고 싶어도 주례로 생각을 안 하는데 비평이 책의 판매에 도움이 되겠어요 ? 저는 오히려 소설보다 해설이 더 어려워 소설보다도 안 읽히는 것이 비평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 같은 책, 236쪽
김미현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 이 글을 읽었을 때 독자를 지나치게 우롱차 취급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구매자들이 책을 고를 때 해설을 보고 책을 사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해설이 책을 다 읽고 난 독자의 판단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김미현은 놓치고 있다(라기보다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다). 문학 수업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못한 대다수의 독자는 작품을 읽고 나면 일단은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자신이 읽은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나쁜 작품인지를 모른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전문가의 견해에 의지하게 된다. 특정 분야에 특화된 전문가들이 장점만 모아 놓았다 _ 라거나 이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_ 라고 묻거나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_ 고 말하게 되면 일반 독자는 그쪽으로 쏠리게 된다.
김미현은 해설이 책 판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주례사 비평이 비판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 해설의 한 문장을 따서 책을 파는 데 중요한 카피 문구로 사용하고(촌평이라는 방식으로), 판단을 유보한 독자는 전문가 집단의 주장에 동조하며 바이럴 마케팅으로 사용되기(혹은 SNS 상 글쓰기) 때문이다. 해설이 책 판매에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다면 왜 출판사들은 그토록 작품 뒤에 해설을 달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 생각해 볼 문제다.
90년대 이후, 독자가 작가를 발견하거나 비평가가 좋은 작가를 발굴해서 대중에게 소개하는 시대는 끝났다. 출판 자본에 종속된 문예지는 홍보실 직원을 편집위원으로 둔갑시킨 후 상품(작가)를 자체 개발한다. 일종의 OEM 주문 생산 방식이다. 상품을 홍보하는 몫은 당연히 그들 몫이다. 주로 자사 상품을 광고하니 칭찬이 끊이질 않을 수밖에 없다. 광고의 속성이란 과도한 칭찬이지 정직한 비판은 아니지 않나. 이 정도면 간접 광고가 아니라 직접 광고인 셈이다. 독자는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른다. 우리는 만들어진 상품을 구매할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 선택은 어쩌면 그들이 짜놓은 계략의 완성일지도 모른다. 신경숙 문학의 신화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히트 상품일지도 ■
덧대기
다음은 독일에 거주하시는 이웃의 촌평이다 : 정말 해설을 왜 달려 할까요 ? 독일 소설을 보면 해설이 없는 책들이 대부분입니다. 해설이 달리는 경우란 그 책이 고전의 경지에 이르러 전문가의 (정말 전문적인) 해설이 달리는 경우더군요. 처음부터 고전의 지위에 오른 책은 없을 테니, 처음에는 일간지나 주간지 등에 실리는 평들 그리고 그 평들에 실린 문장들을 시간이 지난 후 광고 문구로 사용합니다. 독일 소설들과 해설들은 이런 식으로 소비되는 듯 하더랍니다. 독일 비평가의 " 교황 " 으로 불리던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대학 교육도 받지 않았지만, FAZ 지에서 평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거물 평론가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하고 싶은 말은 다 한다는 것 - 하루키의 소설들을 맥도널드의 패스트푸드에 비교하거나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은 귄터 그라스의 소설을 찢고 있는 만화 장면이 슈피겔 지의 표지 사진에 오를 정도로 방송이든 글에서이든 작가를 깎아내리는 말도 거침없이 합니다. 그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평론계의 "교황"이라는 직함에서 내려오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대중의 관심을 더 받았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