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랑 밖 에 난 몰라 :
신형철, 비평의 에티카
신형철은 어느 언론 인터뷰에서 공감 없이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가 써 온 글은 모두 공감을 바탕으로 쓴 글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말은 마치 자신은 억지로 글을 쓴 적이 없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청탁을 받고 글을 써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밥벌이를 위해서는 때로는 마음에도 없는 글을 짜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형철이 공감 없이는 글을 쓰지 않는다고 자못 비장한 어투로 자신을 포장한다면, 조지 오웰은 텍스트에 공감하지 못하지만 밥벌이를 위해서 칭찬을 남발했던 자신을 비판한다. 그는 << 나는 왜 쓰는가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책을 무차별적으로 평하는 일을 오랫동안 한다는 건 유난히 달갑지 않고 짜증스럽고 피곤한 노릇이다. 그것은 쓰레기를 칭찬하는 일일 뿐 아니라 그냥 두면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책에 대한 반응을 계속해서 날조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 중략 )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서평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책에 대해 과찬하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며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으로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 이 책은 쓸모없다 ' 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를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 일 것이다...(중략) 내가 보기에 최선의 방법은 대부분의 책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중요해 보이는 소수의 책에 아주 긴(최소한 1000단어는 되게) 서평을 쓰도록 하는 것이다. ( 같은 책 287쪽 )
신형철은 명색이 문학 비평가인데 비평(criticism)의 사전적 의미를 잘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경향신문(2008.12.11 비평가 신형철, 4년간 익힌 문학에 대한 사랑 고백) 인터뷰에서“ 비평과 비판은 동의어가 아니다. 작품을 보고 단점을 찾아내 지적하는 것보다 미덕을 찾아내는 일이 더 어렵고 가치있는 일이며 그런 관점에서 글을 쓴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럴까 ? 칭찬의 과잉이 아부이고 지적의 과잉이 트집이라고 했을 때, 트집보다 아부가 더 가치있는 일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아부는 그 대상이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트집은 그 대상이 완벽할 때는 실패하게 되는 질투'다.
영화 << 밀양 >> 에서 전도연의 연기를 두고 트집을 잡는다면 당신은 그보다 더 많은 비판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아부보다는 트집을 잡는 일이 더 많은 제약이 따른다. criticism은 곧 critique이다 1.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답은 명확하다. 비슷한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 비평과 칭찬 > 조합보다는 < 비평과 비판 > 조합이 계통과 계열 면에서 보다 유사한 한통속처럼 보인다. 전자의 조합은 동의어도 아니고 유의어도 아니며 반의어도 아니지만 후자는 유의어에 속한다. 신형철 식 평론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은 " 비판은 칭찬보다 생산적이지 못하다 " 는 그의 태도에 있다. 말이 좋아 " 공감의 비평 " 이지 나쁘게 말하자면 주례사 비평이요, 정실 비평이다.
" 청탁이 들어오면 해석은 가급적 모두 " 쓰겠다는 " 책과 일종의 직업적 관계를 맺고 있는 "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 아름답게 말하는 것 " 이다. < 아름답게 말하는 비평 > 은 청탁이 들어오면 해석은 가급적 모두 써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로서는 최상의 정략적 선택인 셈이다. 저잣거리 입말로 말하자면 " 안전빵 ! " 이다. no 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보다는 yes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출세하는 법이니까. 문학 권력 혹은 주례사 비평을 비판 2 할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이가 신형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공감 없이는 글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 그의 고백을 내가 곧이 곧대로 믿지 않는 이유이다 3. 나는 그가 신경숙의 << 엄마를 부탁해 >> 와 김애란의 << 두근두근 내 인생 >> 에 대한 글에서 쏟아낸 성찬이 의심스럽다.
누가 봐도 큰 옷인데 옷가게 점원이 " 어머, 어쩌면 이렇게 몸에 딱 맞으실까... " 라고 칭찬을 할 때 느끼게 되는 이질감 ?! 무엇보다도 실패한 소설로 기록될 << 두근두근 내 인생 >> 을 두고 " 박수를 아낄 생각이 없다. " 라고 극찬 4 했을 때, 신형철은 문학 비평가보다는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문학을 이야기할 때보다 영화를 이야기할 때 보다 정확한 분석을 내놓는다. 그 이유는 문학과 영화가 서로 이해관계로 묶여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 몰락의 에티카 >> 보다는 << 정확한 사랑의 실험 >> 이 좋다. 그가 영화에 대해 쓴 글은 주례사나 정실 비평이 아니다.
비평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정직은 식재료이고 미문은 양념이다. 싱싱한 대구 생선에는 별다른 양념이 필요없듯이 좋은 비평의 첫 번째 조건은 양념이 아니라 정직이다. 비린내가 많이 나는, 신선도가 떨어지는 생선일수록 양념이 많이 들어간다. 후자는 사심 없이 한발짝 물러나서 좋아하는 것을 진심을 담아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 몰락의 에티카 5 >> 은 나쁘고, << 정확한 사랑의 실험 >> 은 좋다. 비판은 없고 칭찬만 있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어려운 한국 문학에서 고군분투하는 가난한 작가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내놓았는데, 오히려 그러한 공감의 비평이 한국 문학을 고사시킨 것은 아닐까 _ 싶다.
그는 벤야민이 보들레르를 칭찬하거나 김현이 이청준을 칭찬하는 것을 들어 자신을 옹호하지만 벤야민은 < 비평가의 테크닉에 관한 13개의 테제 > 라는 짧은 글에서 칭찬보다는 비판이 비평의 덕목이라고 주장한다. 비평은 도덕적 사안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 후 열정보다는 " 책을 없애버리려는 자만이 비평할 " 자격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비평가가 " 항상 대중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록 해야 " 한다고 말한다. 신형철은 가라타진 고진의 << 근대 문학의 종언 >> 에 반하여 몰락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아가페를 고백하지만, 조건 없는 사랑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비평(가)의 윤리적 태도다.
아가페란 조건 없이 대상에게 다가가는 행위인데 벤야민은 " 비평이란 정확하게 거리를 두는 문제이다. 비평이란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원근법적 조망과 전체적 조망이 중요한 세계 " 라고 말한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처럼, 과연 문학이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믿고 밀어붙이는 행위일까 ?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 > 이 사실은 < 불가능한 것의 세계 > 란 사실을 일깨우는 게 문학의 본질이지 않을까. 열정적 아가페보다는 냉정한 에티카의 정립이 우선이다. 이로써 이 정리는 증명되었다. 비평가로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그이지만 나는 쉽게 그에게 공감할 수가 없다 ■
1) 오길영, << 힘의 포획 >>
2) 그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 가급적 청탁이 들어오는 해설을 모두 쓰려고 합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청탁이 들어온 문학 작품 대부분은 훌륭한 작품이어서 글을 쓴 것일까 ? 내 독서 경험에 의하면 전체 독서의 20%가량 정도만 만족을 느끼는 편인데, 신형철은 청탁 받은 작품마다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놀라운 적중률이다.
3) 손아람은 객관적인 수치를 제시하며 대형 출판사 문예지들의 자체 공모전 혹은 책 출간 작가들의 선호현상을 꼬집었다. 그는 "지난 1 ~ 2 년 간 대형 문예지에서 언급한 작가 혹은 작품을 찾아봤더니 대부분이 자체 출판사 공모전에 당선 됐거나, 출판사에서 책을 낸 사람이었다" 면서 "정확히 말해 창비에서는 20명 중 16명, 문학동네에서는 30명 중 28명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른 번 가운데 스물여덟 번을 문학동네 관련 작가에게 할애하면서, 절대로 '우리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한 작가이기 때문에 지면을 내줬다'고 말하진 않는다. 마치 이 작가의 작품이 비슷한 시기 출간된 다른 작품들보다 문학적으로 탁월하기 때문에 지면을 내줄 가치가 있다는 것처럼 포장을 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건 기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 대형출판사 '공모'와 '문예지'로 작가 지배한다" 중 뉴시스 기사 내용에서 부분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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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람 작가의 지적을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자사 문예지나 자사 출판사의 작품이 아니라면 " 거들떠도 안 본다 " 는 소리이다. 신형철은 편집위원들이 좋은 작품을 골라내다 보니 그리 되었다고 변명을 늘어놓지만 좋은 작품들이 문학동네에만 몰려 있다는 것(28/30)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문학동네라는 문예지는 독립적이라기보다는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책(혹은 작가)를 홍보하는 창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있을 때 작성된 글 모음인 << 몰락의 에티카 >> 는 문학동네의 홍보용 팜플렛이 아닐까 ? 비평가의 덕목은 미문이 먼저인가, 윤리적 태도가 먼저인가 ?
4) 김애란 소설의 장점은 맹랑에 있는데 << 두근두근 내 인생 >> 은 명랑만 할 뿐이다. 김애란 소설에서 맹랑이 빠진 명랑은 거품 빠진 맥주요, 탄산이 빠진 사이다'다. 명랑하지만 맹랑한 구석이 있을 때 김애란 소설은 김애란답다. << 두근두근 내 인생 >> 은 사회적 거리는 제거된 채 낭만적 골목만 비췄다. 나는 신형철이 이 작품을 두고 극찬했던 대목( 장점이 총집결되었다, 이야기의 윤리를 고민했다, 어려운 길을 선택했고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에서 이 소설의 단점을 읽었다. 이 소설은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노출되었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쉬운 길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었다.
http://blog.aladin.co.kr/myperu/7120569 : 우사인 볼트와 김애란
5) << 몰락의 에티카 >> 서문은 가라타니 고진의 << 근대 문학의 종언 >> 에 대한 응답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니까 < 종언 > 에 대한 응답이 < 몰락 > 인 것이다. 가라티니 고진의 종언과 신형철의 몰락은 같은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 문학이 힘을 잃어 한갓 오락거리로 몰락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이제는 문학에서 윤리적 애티튜드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문학은< thing > 이지 < soul > 이 아니다. 신형철은 바로 그 지점에서 반발한다. 그가 서문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윤리적 애티튜드의 회복이다. 그런데, 이 태도는 웃기다. 한국 문학의 몰락을 부추긴 자는 작가라기보다는 출판 자본과 출판 자본에 소속된 편집위원들이다. 작가들이 글만 써서 먹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문예지에 자신이 쓴 작품이 선정되기를 바라거나(손아람 작가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출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사 문예지에 작품을 출품하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폭로한다. 즉, 자사 출신 작가만 키우겠다는 속셈이다), 국가 지원금 혹은 문예지에서 할애한 청탁에 의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편집위원들의 몫이다. 작가들이 국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작가를 선별하는 것도 그들 몫이다. 그들에게 밉보이면 끝이다. 결국, 작가는 출판 자본(에 소속된 편집위원) 아래 굴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신형철은 이 몰락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그는 몰락에 대한 책임은커녕 몰락한 상황에 슬퍼하며 윤리성을 강조한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문학의 윤리성이 아니라 자신의 윤리성에 대한 자아 비판이다. 그는 몰락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그 몰락에 슬퍼한다는 것은 위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