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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내 머리는 소중하니까
O.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다시 펼치니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다른 이야기다. 이렇게 짧은 분량에 이토록 생각할 거리가 많으니 새삼 문학과 철학의 경계가 따로 없구나 싶다. 대단한 장편(掌篇)이다. 스물두 살의 가난한 부부 짐과 델라. 사랑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 상대에게 가장 ‘필요한’ 성탄절 선물을 한다. 델라는 머리카락을, 짐은 시계를 팔지만 그들이 받은 선물은 이제는 소용없는 머리빗 세트와 시곗줄. 나는 두 가지가 걸렸다. 하나는 가난한 남성은 물건을 팔지만, 가난한 여성은 몸의 일부(머리카락)를 파는(팔 수 있는) 현실. 이것이 성매매가 성별 중립적이지 않은 이유다. 선물을 사기 위해 매혈하는 남성은 드물다. 게다가 델라의 머리카락 묘사는 남성들의 판타지가 투사된 듯 사뭇 관능적이다. “지금 델라의 아름다운 머리채는 갈색의 폭포처럼 잔잔하게 흔들리며 몸 주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려 마치 긴 웃옷같이 되었다.”(335쪽)
한겨레 칼럼, 정희진의 어떤 메모 2015. 12.18
정희진은 << 크리스마스 선물 >> 에서 인류의 오랜 불평등을 읽어낸다. 정희진이기에 가능한 신선한 접근이기도 하다. 정희진이 지적한 대로 남자는 < 물(物)의 부분 > 을 팔아서 머리빗을 사고, 여자는 < 몸(身)의 부분 > 을 팔아서 시곗줄을 산다. 남녀 성차에 따른 인식과 해석의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잰더 차이는 신화에서도 종종 엿볼 수 있다. 내 기준에 의하면 나르키소스와 메두사는 동일한 플롯을 가진 서사'다. 나르키소스의 여성판 버전이 메두사이고, 메두사의 남성판 버전이 나르키소스'다. 미(美)를 대표하는 남자와 추(醜)를 대표하는 여자를 한통속이라고 주장하니 혀를 끌끌 찰 만하지만,
두 서사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는 것은 장르를 변주한 데에서 오는 이질감 때문이다. 퀴어 멜로 영화인 < 나르키소스 > 를 호러 영화로 변주한 작품이 바로 < 메두사 > 인 것이다. 플라톤은 공포가 아름다움의 첫 번째 현존이라고 말했다. 오비디우스의 << 변신 이야기 >> 에 따르면 나르키소스는 물 위에 뜬 형상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별처럼 빛나는 두 눈뿐만 아니라 디오니소스(바쿠스)만큼이나 아름다운 머리카락1)에 홀리게 된다. 오비디우스는 놓쳤지만 내가 주목한 부분은 나르시소스의 페티시'다. 그는 포도송이처럼 탱글탱글하며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카락을 보면 꼴린다.
실제로 나르키소스는 물 위에 뜬 자기 모습을 보며 " 아연실색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 그리고는 물에 빠져 죽는다. 눈치가 빠른 이'라면 이 설정이 메두사 - 서사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 나르키소스는 물 속에서 디오니소스( = 나르키소스)처럼 생긴 남자 형상을 보자마자 발기된 채 죽는다. 사실, 그가 본 것은 빛나는 얼굴이 아니라 발기된 남근이다. 음경을 뜻하는 라틴어 fascinus와 범죄적 행위를 뜻하는 facinus가 닮은 꼴이란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나르키소스는 facinus(음경)를 응시해서 fascinus(범죄)에 이르게 된 자다. 자살이란 자기 자신을 향한 범죄 행위이니깐 말이다.
메두사도 마찬가지'다. 원래 메두사는 고르곤의 세 자매 중 막내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무엇보다도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미녀2)였는데 아테네와 미를 겨루다 벌을 받는다. 아름다운 머리채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녀는 여성판 디오니소스인 셈이다. 디오니소스는 다시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그가 죽은 적'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은 나르키소스와 메두사의 " 자기 환시에 매혹된 죽음 " 과 일맥상통한다3). 나르키소스가 물 위에 반사된 자기 모습를 보고 죽는다면, 메두사는 페르세우스의 방패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죽는다. 둘 다 자기 모습에 아연실색하여 죽는 존재다.
물과 방패라는 두 오브제는 모두 거울 이미지'를 대표한다. 아연실색과 대경실색을 동일어라고 한다면 나르키소스가 디오니소스를 닮은 이미지에 아연실색하는 장면은 메두사와 연결된다. 프랑스어 meduser는 " 대경실색하게 하다 " 란 의미를 가진 동사니까. 메두사를 바기나 덴타타(이빨 달린 질)로 해석한 프로이트는 그녀를 본 사람은 돌처럼 굳어 죽는다는 설정에 대해서는 발기 현상이라고 지적했는데, 그는 이 드라마틱한 맹목(盲目)을 거세 공포로 해석한다. 나르키소스와 메두사는 성적 오브제 앞에서 눈먼 존재'다. 신화에서 어떤 대상을 정면으로 본다는 것은 금기'다.
뒤돌아보면 화(禍)을 입는다는 경고도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마치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면 눈이 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오이디푸스가, 호메로스가, 티레시아스가 그런 경우다. 그들에게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정면을 응시하는 것과 같다4).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지점은 자신이 소유한 성적 오브제에 대한 반응이 성차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나르키스소는 자기애에 눈이 멀고, 메두사는 자기혐오에 눈이 먼다. 둘 다 아연실색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남근을 선망하고 메두사는 자신의 성기를 혐오한다. 정희진이 << 크리스마스 선물 >> 에서 머리빗과 머리카락을 통해서 성매매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나는 << 변신이야기 >> 를 통해서 신화가 남성 서사라는 점을 발견했다. 만약에 << 변신 이야기 >> 를 여성이 썼다면(혹은 모계 사회라면) 결과는 지금과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메두사는 물 속에 비친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매혹되어 물에 빠져 죽고, 나르키소스는 방패에 비친 자신의 남근을 보며 경악하지 않았을까. 신화 속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한 번쯤은 " 메두사(méduser) 한 경험 " 을 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점은 본질적으로 마비이자 맹목이다. 콩깍지가 씌이고, 호흡이 가빠지며, 넋 놓고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독(毒)을 읽는다.
상대에게 끌린다는 것은 그 대상이 독을 품고 있다는 증거'이다. 숲길을 걷다가 독을 품은 뱀을 만나게 될 때의 신체 반응은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의 신체 반응과 동일하다. 어찌 할 줄 몰라 넋 놓고 바라보며, 때론 멀리 도망치고 싶지만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아름다운 대상에게 매혹된다. 그것이 사랑이다. 내게도 그런 여자가 있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그녀의 독이었다 ■
1)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으로 머리카락은 포도송이처럼 탱글탱글하고 윤기가 흐르는 신이다. 아름다운 머리카락 선발 대회가 열린다면 1등은 디오니소스'다. 그는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남자'다.
2) 여성의 긴 머리‘는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오브제요, 로망이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숱이 많고, 부드러우며,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카락은 젊음과 건강을 알려주는 지표’다. 이 말은 곧 “ 좋은 번식 능력을 가진 여성 ” 이라는 증거가 된다. << 라푼젤 >> 이라는 동화에서 왕자가 라푼젤의 긴 머리카락을 보고 사랑에 빠진 것도 긴 머리키락이 가지고 있는 좋은 유전자에 대한 무의식적 인식 때문이다.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여자 인형을 봐도 그렇다. 못난이 인형은 대부분 헤어스타일이 짧고(양배추 인형을 보라), 예쁜 여자 인형은 머리카락이 길다. 모발과 성적 판타지는 김훈의 << 언니의 폐경 >> 에서도 나온다. "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의 속옷에 가끔씩 여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염색기가 없는 통통하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었다 … 끄트머리까지 힘이 들어 있었다 … 겨울 속옷의 섬유 올 틈에 파묻힌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떼어내자 더운 방바닥 위에서 머리카락은 탄력을 받고 꿈틀거렸다.(언니의 폐경,32쪽) " 김훈은 번식 능력을 상실한 여자(언니의 폐경)와 대조되는 오브제로 “ 염색기가 없는 통통하고 윤이 나 ” 고 “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 ” 고 “ 탄력을 받고 꿈틀거 ” 리는 머리카락을 전면에 내세운다. 무시무시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진화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긴 머리 여성은 상품 교환 가치가 매우 뛰어난 유전자를 가진 존재다.
3) 디오니소스는 어릴 때 거인이 준 "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거울 " 을 들여다보며 거울에 반영된 자기 모습에 홀려 있는 동안에 거인들이 거울에 빠진 디오니소스를 갈가리 찢어죽이게 된다.
4) 알면 안되는 진실은 보면 안 되는 거울-이미지'다. 오르페우스, 프시케, 악타이온도 맥락은 비슷하다. 오르페우스는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아내를 잃고, 프쉬케는 남편의 얼굴을 보면 안 된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등잔으로 잠자는 남편을 비췄다가 남편을 잃고, 악타이온은 목욕하는 아르테미스를 훔쳐보았다가 죽음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