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fragile we are  :


 

 

 

 

 

 

 


 

 너에게 길을 묻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겉도는 친구를 보게 되면 그 친구에게 신경을 쓰게 된다. 천성이다, 다정한 목소리로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 그런데 사실.......      나 또한 물보다는 기름에 해당되는 쪽이었다.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했고, 주류 집단과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오래 전 일이다. 서대문 도서관에서 ●●●이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가을 볕에 바짝 마른 나물처럼 수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몸이었다. 그를 도서관 휴게실에서 종종 마주쳤지만 어느 누구도 그와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형색이 초라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은 산만했고 눈동자는 늘 불안했다.

그 친구가 휴게실을 벗어나면 여기저기서 이상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저 새끼, 미쳤다며 ? 도서실에서 여러 번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누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뒤를 돌아다보니 그 친구였다. 담배 한 개비를 달라고 했다. 깜짝 놀랐다. 초롱초롱한 그 눈동자. 그 친구는 늘 고개를 숙이고 우왕좌왕하다 보니 얼굴을 정면에서 볼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잘생긴 얼굴이라기보다는 예쁜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나를 형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그의 가방 속에는 사회과부도와 지리 교과서만 들어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하루 종일 지리 책만 펼쳐 놓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 친구에게 왜 지리 과목만 공부하냐고 물었다. 그 친구에게서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 형, 나는 길을 잘 헤매...... 길을 잘 몰라... 길을... 자꾸,  헤매......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수능 시험을 치르고 최종 면접만 남겨둔 상태에서 단국대 천안 캠퍼스로 향하는 하행선 기차를 탄다는 것이 그만 상행선을 타는 바람에 수능 면접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고(그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주머니 속에 칼을 숨기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그 친구의 조현증이 시작된 결정적 순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내가 절실히 깨달은 것은 " 인간은 깨지기 쉬운 유리컵 " 같다는 점이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이 곧 병을 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지난해 겨울 초입.  거리를 걷다가 스팅의 < fragile > 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길을 잃어 병을 얻은, 눈동자가 달 없는 밤보다 어둡고 별보다 반짝거렸던 그 친구 생각을 했다.  how fragile we are, how fragile we are, how fragile we are . 인간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_ 라고 묻는 질문에 마음이 아팠다.  뾰족한 것은 약한 것을 숨기기 위한 위악'이다.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꺠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드랑 큰 울음 한 번 울고 나면

박살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덕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년

깊은 땅 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없이 바위요

바스러진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 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어 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 시집 < 태아의 잠 >, '유리에게' 전문

 

 

그를 꿈에서 본 적이 있다. 꿈길을 걷다가 쇼윈도우에 사람 형상을 닮은 선인장이 장식으로 놓인 가게를 발견했다. 무심한 마음으로 지나쳤다가 이내 되돌아왔다.

저 선인장,  그 친구를 닮았다.  나는 그 친구가 선인장으로 환생했다고 믿었다. 꿈이니까 가능한 믿음이었다. 너른 잎을 돌돌 말아 가시가 된, 불안이 만든 가시투성이 삶.  가시가 장미의 결심이라면 그 가시는 선인장의 불안이었다. 선인장 가시 한 개를 따서 집으로 돌아왔다. 파란색 플라스틱 바가지에 물을 담은 후 가시를 띄웠다. " 물에는 신기한 힘이 있지. 움켜쥔 손을 항상 펼쳐 놓거든...... "   돌돌 말렸던 가시가 풀리더니 너른 잎이 되었다. 생강나무 잎이었다.  꿈에,  꿈 속에, 꿈 속에서의 그 선인장은 생강나무였다.이 좁고, 날카로우며, 위협적인 가시 안에서 사는 넓고, 부드러우며, 촉촉한 잎의 위악적 삶.  잠에서 깬 나는 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인장

 

소라게'가 사는 집은 패각이다. 연체동물의 몸에서 분비된 석회질이 단단한 조개껍데기를 만드는 것이다. 겉은 딱딱한 각질의 세계이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뼈 없는 무른 몸이다. 뼈 없는 몸이 뼈로 만든 집을 만드는 것이다. 달팽이도, 우렁도, 선인장 가시도 마찬가지다.  가시는 말랑말랑한 몸이 토해 놓은 딱딱한 패각의 세계'이다. 그 가시의 배를 가르면 동글동글한 푸른 잎'이 숨어 산다. 그러니깐 날카로운 가시는 푸른 잎이 숨어 사는 방이고, 달팽이집이며 소라껍질이다. 이 좁고, 날카로우며, 위협적인 가시 안에서 사는 넓고, 부드러우며, 촉촉한 잎이라니. 아, 이 위악적 삶의 세계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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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9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9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9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이달의 페이퍼로 선정합니다. 곰발님은 아무래도 아마추어같지가 않아요. 똘기에 매번 감탄합니다. 인간이 프래질하기에 나심니콜라스 탈레브는 안티프래질의개념을 만든거 같네요. 어디 내 머리를 잘라봐, 두개로 늘어날테니. 히드라처럼 안티프래질한 인간을 꿈꿔봅니다.

나를 죽일수 없는 고통은 나를 성장케할 뿐이다, 라구요

yureka01 2016-07-19 15:48   좋아요 0 | URL
동의합니다.^^.이달의 페이퍼.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0 09:30   좋아요 1 | URL
프래질이란 단어만 나오면 전 무조건 스팅이 생각나더라고요. 프래질이라는 단어도 그 노래 때문에 알게 되었으니.... 제가 좀 무식합니다..


유레카 님 감사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07-19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이 떨어지다니요!!! 오랜만에 서재 글을 읽고 감동받고 갑니다. 저도 이 글을 이달의 페이퍼로 추천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0 09:29   좋아요 0 | URL
감동받았다니.. 그 친구랑 연락이 된다면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싶네요..

고양이라디오 2016-07-20 12:30   좋아요 0 | URL
좋은 글에 좋은 댓글들이 달리는 것 같습니다. 곰발님, 여러 사람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셨네요. 저도 이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를 떠올렸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0 12:36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제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게.... 마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삼아 ! 보고 있냐.
많은 사람들이 너를 생각하고 있다.
혹여, 이 글을 보거든 나에게 쪽지를 남겨다오.

꽃등심으로 근사하게 한번 쏘마 !

농담아니다..

영화야 2016-07-19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종종 이 블로그에 글 읽으러 오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댓글을 안 남길 수가 없겠네요. 이런 글을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을 읽고 사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 특히 친척 중에 실제로 조현병을 앓고 있는 누나가 있어서 그 누나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 누나 정말 예쁘고, 순수한 사람이었답니다. 서울 상경해서 잘 지낸다는 소식 들리다가 갑자기 연락이 끊겼었는데, 수년 후 병을 얻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서울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삶이었는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가 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0 09:28   좋아요 1 | URL
제 글이 몇몇 분에게 옛 기억을 떠오르게 했군요.
나향욱, 박근혜 이런 애들은 미치는 경우는 없겠죠.
제가 늘 하는 말이 악인은 미치지 않는다, 라는 말이거든요..
유리처럼 약한 마음이 아니라 강철처럼 강한 놈들이 악인이죠..

clavis 2016-07-19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승자씨도 조현병을 앓았데요.조현병이 뭐지?하고 그 바람에 검색까지 해보았어요..

이 달의 페이퍼..재청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0 09:27   좋아요 0 | URL
네에 저도 알고 있습니다.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명색이 현대 시인 중 가장 사랑받던 이였는데
생활고에 시달린다고....

기억의집 2016-07-20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이 페이퍼 읽고 난 후 심란했어요. 맘이 아프더라구요. 뭐랄까,,,, 착 가라 앉는 게. 천안행 상행기차를 탄 저 사람에게 괜찮다라는 말을 해주었을까요? 까짓 것, 수능 못 보면 어떠냐라고 부모가 말 해주었더라면 조형병이 발병했을까요? 정신의 끈이 끊어졌을 정도라면 주변 압박이 엄청 심했다는 말인데. 제 초등때부터고등학교 친구가 저랬어요. 초등학교때부터 고이 기말까지 전교 일등한 친구였는데,. 고3 올라가서 갑자기 정신끈을 놓더라구요. 그 친구부모의 공부 압박이 너무 심해서 엄청 스트레스 받았는데 우린 그걸 몰랐어요. 몇년 전에 그 친구 소식을 듣는데,,, 누가 그러더라구요. 걔 동네에서 미친년 소리 들으면서 산다고. 그 말 듣는데 맘이 너무 아파서.... 그 친구가 학창시절에 착해도 너무 착한 아이라. 며칠간은 잠도 못 자고 뒤척일 정도로 맘이 아팠던 적이 있어요. 이 페이퍼 읽고 그 친구 생각나서, 한동안 울적하더라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0 09:26   좋아요 1 | URL
이 글에 쓰지는 않았는데 그 친구 지리 교과서 보다가 울 뻔했습니다.
까만 볼펜으로 일일이 글자를 지웠더군요. 왜 연습장에 영어 단어 쓰고 나서 복습한다는 뜻으로 연필로 둥글둥글 색칠하는 친구들 있잖습니까. 그 친구 교과서가 그렇더군요.

늘 배고파 했던 친구였는데, 마음이 짠해서 하루는 내 집에 데려가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려준 적이 있습니다. 늘 배고파, 배고파, 하는 말을 하는 친구였는데.. 그게 다 사랑에 굶주린 탓인가 봅니다.


3시 2017-04-11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www.youtube.com/watch?v=ZW_VSFgxlPc
저도 스팅 이 노래 좋아해서 블로그에 담아두었는데 디따 반갑.가사도 좋아해요
조현병이란게 ...그냥 강물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기도 하나요.제 동생이 그랬는데 .
작년부터 장사가 안 돼서 세 시까지 버티지 못해요.
벌어서 세금으로 그네랑 순시리 호주머니만 불려준 거 가터서 존나 승질 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4-11 09:3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가시 같은 댓글이네요. 마음이 아픕니다.... 토닥토닥
 
밀양 : 일반판 - 아웃케이스 없음
송강호 외, 이창동 / 아트서비스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말의 쾌락, 몸의 통증   :





눈물과 흉터는 닮았다




나는 타자이다(Je est un autre)

 

_ 랭보


                                                                                                                                                                                                                                   

 

눈물과 흉터는 서로 닮았다. 흉터가 과거에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나에게(혹은 타자에게) 증명하는 기표1 면, 눈물은 내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에게(혹은 타자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한 기표2 다. 흉터와 눈물은 모두 고통의 메시지이며 동시에 발화(發話)와 기술(記述) 없이 작성된 이야기다. 이 서사는 혀에 의한 발화(發話)가 아니라 몸에 의한 무언(無言)이라는 점에서 흉터와 눈물은 동일한 오브제'다. 그것 - 들'은 말하지 않고도 선명하게 통증을 증명할 수 있는 기표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 밀양, Secret Sunshine, 2007 >> 은 말보다 눈물과 흉터로 자신의 참회를 증명해 보일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에 대한 영화'다.  피아노 학원 강사인 이신애(전도연 분)는 속물인 여자'다. 그녀는 자신의 초라한 몰락을 견딜 수 없어서 주변인에게 < 있는 척 > 을 하며 땅을 보러 다니기도 한다. 신애가 내뱉은 허세과 위선은 결과적으로 아이의 유괴,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진다 3.

 

▶  신애가 거울-이미지를 통해 보고 있는 것은 타자(학원원장)가 아니라 자신이다. 그녀는 자신과 닮은 욕망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러니까 신애는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에 대한 형벌로 말이 아닌 " 눈물과 흉터 " 로 묵언 수행하는 여인이다. 그것은 영화 << 올드보이, 2003 >> 에서 오대수(최민식 분)가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에 대한 징벌로 혀를 자르는 것과 비슷하다.  그 또한 눈물과 흉터라는 형벌로 죄값을 치르는 자다. 기독교가 " 말씀 " 으로 이루어진 종교라는 점을 감안하면  :  " 이신애와 기독교의 접선 실패 " 는 발화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 분열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언어 체계의 해체'다.  미친 자는 언어가 분열된 자'다. 신애는 < 말씀(언어)의 세계 > 에 진입하지 못한 채  튕겨나간다.  그렇기에 조현병에 걸린 환자는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표와 기의를 분간하지 못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기도 한다.

 

내가 주목한 대목은 이신애가 아이 유괴 살해범인 학원 원장을 교도소 면접실에서 만나는 장면이다. 투명한 벽(유리 혹은 플라스틱)을 사이에 두고,  이신애가 유괴범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장면은 디오니소스가, 나르키소스가, 메두사가 거울 - 이미지'를 통해 자기 모습을 보는 것과 동일하다. 이신애 앞에 있는 유괴범은 타자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다. 유괴범이 자신은 하나님에게 용서를 빌었고 하나님은 이에 응답하여 자신을 용서했다고 말했을 때,  이신애는 유괴범의 욕망이 자신의 목적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신애는 자기가 내뱉은 거짓말이 발단이 되어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여자'다. 그녀는 피해자이면서 어느 정도는 원인을 제공한 여자이기도 하다.

 

이 씻을 수 없는 과오,     그녀는 자기 아이를 죽인 유괴범을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해 주시기를 원한다.  둘 다 참회와는 거리가 멀다.  학원 원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것처럼 연기를 하고,  이신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기 위해 죄인을 용서하는 것처럼 연기한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둘은 동일은 욕망을 가진 자'다. 신애는 아이를 죽인 죄인을 용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주변인에게  아이를 죽인 죄인마저 용서하는, 가련하지만 성스러운 " 피에타 " 를 연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거울에 반영된 상(象)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자는 죽거나 눈이 멀게 된다. 

 

디오니소스, 나르키소스, 메두사가 정면을 응시한 죄로 죽음을 당한다면 오르페우스, 프시케, 오이디푸스는 정면을 응시한 죄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 보면 안 되는 거울 - 이미지는 알면 안되는 진실과 동일어다.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아내를 잃고,  프시케는 남편 얼굴을 보면 안된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한밤중에 램프로 남편 얼굴을 봤다가 남편을 잃고(에로스는 새가 되어 날아간다), 오이디푸스는 알면 안되는 진실을 마주한 죄로 두 눈을 잃는다.  그들은 모두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한 자들이다.   이신애가 투명한 벽을 통해 본 것은 타인의 象도 자신의 象도 아닌,  자신의 욕망이었다.  정면을 응시하자,  그녀는 저 뜨거운 욕망 앞에서 미쳐버린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거울 - 이미지로 끝난다.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서 구원이라는 희망적 메시지를 읽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에 구원따위는 없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디오니소스, 나르키소스, 메두사는 모두 머리채가 아름다운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모두 탄력 있고 윤기 나는 머리를 가진 존재'였다.  그렇기에 이신애가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는 행위는 디오니소스적 운명,  나르키소스적 운명,  메두사적 운명'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1)  " 흉터는 신기한 힘이 있지. 과거가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거든. "       코맥 메카시, < 모두 다 예쁜 말들 > 중

2)  " 내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나는 눈물을 흘린다. "        롤랑 바르트, < 사랑의 단상 > 중

3)   학원 원장는 돈이 많은 척하는 신애가 내뱉는 거짓말을 말 그대로 믿고 아이를 유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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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07-1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창동 감독 영화 보고 싶은데 영화 안 만들고 뭘 하시는지 궁금해요. 요즘 괜찮은 영화가 없어서 극장엘 가지 않아요.
이 영화 보면서 그래, 종교(?)가 그렇지 그러고서 욕 했는데 ㅋ
면죄부의 우스움을 생각했지요. 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인간들의 편리한 해석이 난무하는 세상이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7 20:28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이창동 영화 좀 홍상수처럼 자주 나왔으면 합니다.
볼 만한 영화가 없어요.
뭐, 좀 진지하게 볼 만한 영화가 없다 보니....
이상한 영화만 보게 됩니다..

stella.K 2016-07-17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신이야기가 굉장한가 봅니다.
그걸 읽고 영화를 보면 이해되는 게 많아질까요?
설마 이 영화 처음 보신 건 아니죠?
저도 이 영화 개봉 때 본 것 같은데 다시 보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이야기가 그다지 유쾌한 건 아니라 매번 다시보기에서 제외되곤 했는데
언제고 다시 한 번 봐야겠어요.

전도연이가 연기는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종편 드라마에 출연중인데 똑똑하면서도 차분한 변호사역을 맡았는데
잘하더군요. 내용도 좋은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드라마는 잘 나가다 중간에 삼천포로 빠지는 것도 많아서 섣불리 좋다고
말할 수가 없겠더라구요. 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7 20:27   좋아요 0 | URL
불빈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보다는
이 작품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신화 이야기는 청소년 권장 독서로 그때 소비하지 말고
오히려 나이가 들고 나서 장년 권장 도서로 선정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변신이야기 좋습니다.



+

전도연 연기는 뭐.. 최고죠. 전도연도 좋지만
이 영화에서 송강호 연기를 더 좋아합니다.
이런 연기 스타일은 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samadhi(眞我) 2016-07-17 21:57   좋아요 0 | URL
tvn을 종편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기에 괜히 끼어들어 봅니다. tvn드라마는 알아주지요. 미생이나 시그널만 봐도 알 수 있고요. 그 외에도 괜찮은 드라마를 꽤 만들었지요. tvn이 종편은 아닙니다. cj꺼라고 하는데요. 언젠가 cj가 영화시장을 잠식하듯 종편들 하는 짓거리를 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요. 아직은 종편 처럼 대놓고 그런 짓(?) 하지는 않고 있지요.

전도연 주연의 드라마는 미쿡드라마 굿와이프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거라고 들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8 10:58   좋아요 0 | URL
이제 드라마는 티븨엔이 장악한 듯.
솔까말 이제 지상파 3사 드라마를 티븨엔 드라마와 비교하면
이젠 지상파 드라마가 촌스럽습니다.

stella.K 2016-07-18 13:29   좋아요 0 | URL
제가 말을 잘못했슴다.ㅠ

TVN이 주말 골든 타임 때 내보내는 드라마는 좋은 게 있긴 해요.
8시 반 타임의 드라마들.
그런데 그것 외엔 별로던데...
지상파는 아무래도 모범 드라마를 만들어야겠죠.ㅋ
그래도 괜찮은 것도 해요.
지금은 시청자들이 똑똑해져서 작가가 누구냐를 보고 본다잖아요.
저만해도 그렇고...ㅋ

송강호의 <밀양> 연기를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살인의 추억 때처럼 능청스런 연기가 오히려 좋던데...
푸른소금에서 나왔을 때 송강호가 저런 연기도 가능하구나 새삼 놀랬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9 08:5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요즘은 작가 보고 드라마를 고른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저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잖아요.
그냥 하루 날잡아서 12시간씩 보는 걸 선택하지
주말마다 그렇게는 못 보겠더라고요..


좋은 현상 같긴 해요. 작가를 보고 드라마를고른다는 것..
어느 작가 좋아하십니까..

stella.K 2016-07-19 13:20   좋아요 0 | URL
노희경을 좋아하죠. 아마 드라마 본다하는 사람들 노희경을
안 좋아하고는 못 베길 걸요?
그런데 여자 취향이라 남자는 싫어할 수도 있어요.
김은희 작가도 좋고.
요즘 김우빈, 수지 나오는 <함부로 애틋하게> 이경희 작가도 좋지요.
이경희 작가는 기본적으로 감성이 따뜻하거든요.
곰발님은 김우빈, 수지 별로 안 좋아하시죠?
근데 여기선 괜찮게 나와요. 둘이 연기가 많이 늘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특히 김우빈은 인상이 너무 강하단 생각을 많이했는데
여기선 적어도 어깨뽕을 3단 정도는 빼고 나오더군요.
전엔 다섯개쯤 들어가 있었거든요.
근데 작가 얘기하다 배우 얘기라니...
날씨가 덥긴 더운가 봐요.ㅋㅋ

기억의집 2016-07-18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그러네요. 이신애가 학원 원장과 면회했을 때 자신의 욕망과 그의 욕망이 서로 같다는 거.... 저도 세상을 살면서 나의 내가 살고 시대의 욕망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종종 깨닫곤 합니다. 욕망이란 단어가 참 부정적인 단어죠..... 밀양을 본 적은 없지만, 전 가만 보면 송강호 영화를 거의 못 봤어요. 왜냐하면 송강호 뜨던 시절이 제가 애를 키우던 시기와 맞물려서, 이천년대 국내 영화를 거의 못 보고 애니는 애랑 같이 가서 많이 봤어요, 거의 전도연이 애엄마 연기를 잘 했을까 싶었는데, 스텔라님 글 보니 잘 했나보군요. 이때 칸도 갔다오고 하지 않았나요?

전도연의 굿와이프는 미드로 오시즌까지 봤고, 종종 티비로 6,7시즌 남편이 볼 때 같이 보고 있는데, 저 이 미드 첨 볼때 마굴리스 얼굴 보고 참 못생겼다. 어쩜 저리 여주인공을 저런 여자를 뽑았을까 싶었는데, 진짜 연기 잘한다는. 상대적으로 마굴리스의 이미지와 반대로 전도연은 약해보이는 건 있더라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8 10:56   좋아요 0 | URL
욕망이라는 것 자체, 그 욕망이 내포하고 있는 포괄적 요구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는 욕망을 거세하려고 하잖습니까. 욕망이 네거티브가 아니라 포지티브적 성격을 띈다면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욕망은 감춰져야 하는 것이지 들춰지는 순간 몰락이 다가옵니다.
나향욱이 봐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 한순간에 가는 거 아니겠씁니다...



+

제가 드라말ㄹ 안 봐서 굿와프는 모르겠으나 이게 유명한 미드를 돈 주고 사서 만들었다더군요..
.

마립간 2016-07-18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은 내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에게(혹은 타자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한 기표다. ; 이런 의미에서 남자들은 울지 않는다는 사회적 통념은 남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죠.

그녀는 피해자이면서 어느 정도는 원인을 제공한 여자이기도 하다. ; 이 사실을 피해자에게 언급하기는 쉽지 않죠.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8 10:59   좋아요 0 | URL
남자들은 울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적 통념이라기보다는 남자들은 울면 안된다는 강제적 성격을 띈 요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금지시키는 것. 남자새끼가 울기는... ( 이젠 남자도 울어야 합니다.. )



+

영화에서보면 가족들이 대놓고 전도연에게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달콤한 인생 - 감독판 (2disc)
김지운 감독, 이병헌 외 출연 / 컨텐트존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달 콤 한  인 생   :


거울 앞에 선 당신


 


                                                                                                 드라큘라는 목이 잘리거나 가슴에 말뚝이 박히지 않는다면 불로불사하는 존재'다. 때가 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인간이 보기에 때가 되도 죽지 않는 운명을 가진 드라큘라는 이상한 존재가 아니라 이상적 존재'다. 그가 불로불사하는 데에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드라큘라는 거울 - 이미지가 없다.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다. 혹은 볼 수 없는 자'다.      볼 수 없음, 이 가혹한 맹목이 그에게 영생을 준다. 드라큘라는 눈먼 자'다. 그리스 신화에서 거울 - 이미지는 " 대상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 " 발생하게 되는데 < 보는 행위 > 는 상실이나 죽음의 오브제로 작동한다. 주신(酒神)인 디오니소스(바쿠스)는 " 다시 태어난 자 " 라는 뜻이다.  다시 태어났다는 말은 곧 죽은 적이 있다는 의미이다.  디오니소스가 거울에 반영된 자기 모습에 홀려 방심한 사이,  티탄이 그를 갈가리 찢어죽이게 된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디오니소스는 거울 - 이미지 때문에  죽었다.

디오니소스와 똑같은 운명을 가진 자가 바로 나르키소스와 메두사'다.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반영을 보다가, 메두사는 페르세우스의 방패에 비친 반영을 보다가 죽는다. 셋은 모두 거울 - 이미지에 반사된 상(象)에 매혹된 자들이다. 그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정면을 응시한다.  매혹을 뜻하는 fascinat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fascinus와 관련이 있는데 fascinus는 발기된 음경'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이 거울을 통해 본 것은 모든 성감대로 몰려있는 쾌락-몸'인 성기'다. 소크라테스는 " 너 자신을 알라 " 고 말하지만,  그리스 신화 - 서사'는 " 너 자신을 알면(보면) " 죽는다고 경고한다.

거울 속에 비친 상(象)은 위험한 욕망이다. 라캉은 디오니소스의, 나르키소시의, 메두사의 자기 환시'를 대상 소문자 a 로 해석한다. 인간은 a를 얻기 위해 다가가지만 막상 움켜쥐는 순간 죽음에 이르게 된다.  김지훈 감독이 연출한 << 달콤한 인생, A Bittersweet Life, 2005 >> 은 자신을 정면에서 응시한 자의 몰락을 다룬 영화'다. 조폭 사회는 불알후드(brotherhood)의 세계'다. 그곳은 동성애적 공간이기도 하다. 거칠게 다루는 하드코어 러브인 셈이다.  강 사장(김영철 분)과 선우(이병헌 분)는 유사 부자 관계이며 사제 관계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인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인 관계라기보다는 선우가 강 사장을 짝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권력을 향한 " 자리 싸움 "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 사랑 싸움 " 인 것이다. 선우가 자신의 동성애를 인식하게 되는 시점은 희수가 방송국에서 챌로를 연주하는 장면에서다. 그는 방송국 녹음실 안에서 유리 부스(booth) 너머 희수가 연주하는 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동안 대상(희수)을 흘깃 곁눈질로 쳐다보기만 했던 그가 희수를 정면에서 오랫동안 응시하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선우와 희수 사이에 놓인 유리라는 " 거울 - 이미지 " 로써의 물성(物性)이다. 이 장면은 선우가 타자를 응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디오니소스처럼, 나르키소스처럼, 메두사처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선우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은 희수가 아니라 강 사장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자신이 여성성을 가진 " 바텀(bottom) " 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희수는 선우의 욕망이 투사된 거울 - 이미지이다.  바텀인 선우는 희수처럼 탑인 강 사장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영화 << 달콤한 인생 >> 은 거울(자기 모습을 반사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호텔 바 내부는 " 거울  이미지 " 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온통 반사되는 것투성이'다. 선우는 호텔 바 어디에 서 있어도 반사된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는 밤이 스며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며 황홀해 한다.

이 자기애'는 영화의 주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사랑하는 대상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자기애의 본질은 동성애'이니까.  이처럼 이 영화는 자기 반영에 대한 황홀경을 다룬다.  선우가 늦은 밤, 어둠이 깃든 유리 벽을 보며 샤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거울을 보는 자,  죽는다.   영화 << 달콤한 인생 >> 은 잘 만든 느와르이면서 동시에 잘 만든 동성애 영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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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7-17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런 꿈을 꾸었어요. 너무 달콤해서 슬픈..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7 15:01   좋아요 0 | URL
나레이션이 훌륭한 것인지 이병헌 목소리가 훌륭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독백에 매우 강렬했던 영화입니다. 목소리는 이병헌이 갑인 것 같습니다. ㅎㅎ

아, 댓글... 영화 속 독백이 아니라 나와같다면 님이 너무 달콤해서 슬픈 꿈을 꾸었다는 소리로군요 ?
 
변신 이야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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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는 소중하니까





O.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다시 펼치니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다른 이야기다. 이렇게 짧은 분량에 이토록 생각할 거리가 많으니 새삼 문학과 철학의 경계가 따로 없구나 싶다. 대단한 장편(掌篇)이다. 스물두 살의 가난한 부부 짐과 델라. 사랑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 상대에게 가장 ‘필요한’ 성탄절 선물을 한다. 델라는 머리카락을, 짐은 시계를 팔지만 그들이 받은 선물은 이제는 소용없는 머리빗 세트와 시곗줄. 나는 두 가지가 걸렸다. 하나는 가난한 남성은 물건을 팔지만, 가난한 여성은 몸의 일부(머리카락)를 파는(팔 수 있는) 현실. 이것이 성매매가 성별 중립적이지 않은 이유다. 선물을 사기 위해 매혈하는 남성은 드물다. 게다가 델라의 머리카락 묘사는 남성들의 판타지가 투사된 듯 사뭇 관능적이다. “지금 델라의 아름다운 머리채는 갈색의 폭포처럼 잔잔하게 흔들리며 몸 주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려 마치 긴 웃옷같이 되었다.”(335쪽)

한겨레 칼럼, 정희진의 어떤 메모 2015. 12.18





정희진은 << 크리스마스 선물 >> 에서 인류의 오랜 불평등을 읽어낸다. 정희진이기에 가능한 신선한 접근이기도 하다. 정희진이 지적한 대로 남자는 < 물(物)의 부분 > 을 팔아서 머리빗을 사고, 여자는 < 몸(身)의 부분 > 을 팔아서 시곗줄을 산다. 남녀 성차에 따른 인식과 해석의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잰더 차이는 신화에서도 종종 엿볼 수 있다. 내 기준에 의하면 나르키소스와 메두사는 동일한 플롯을 가진 서사'다. 나르키소스의 여성판 버전이 메두사이고, 메두사의 남성판 버전이 나르키소스'다. 미(美)를 대표하는 남자와 추(醜)를 대표하는 여자를 한통속이라고 주장하니 혀를 끌끌 찰 만하지만,

두 서사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는 것은 장르를 변주한 데에서 오는 이질감 때문이다. 퀴어 멜로 영화인 < 나르키소스 > 를 호러 영화로 변주한 작품이 바로 < 메두사 > 인 것이다. 플라톤은 공포가 아름다움의 첫 번째 현존이라고 말했다.  오비디우스의 << 변신 이야기 >> 에 따르면 나르키소스는 물 위에 뜬 형상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별처럼 빛나는 두 눈뿐만 아니라 디오니소스(바쿠스)만큼이나 아름다운 머리카락1)에 홀리게 된다. 오비디우스는 놓쳤지만 내가 주목한 부분은 나르시소스의 페티시'다. 그는 포도송이처럼 탱글탱글하며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카락을 보면 꼴린다.

실제로 나르키소스는 물 위에 뜬 자기 모습을 보며 " 아연실색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 그리고는 물에 빠져 죽는다. 눈치가 빠른 이'라면 이 설정이 메두사 - 서사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 나르키소스는 물 속에서 디오니소스( = 나르키소스)처럼 생긴 남자 형상을 보자마자 발기된 채 죽는다. 사실, 그가 본 것은 빛나는 얼굴이 아니라 발기된 남근이다. 음경을 뜻하는 라틴어 fascinus와 범죄적 행위를 뜻하는 facinus가 닮은 꼴이란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나르키소스는 facinus(음경)를 응시해서 fascinus(범죄)에 이르게 된 자다. 자살이란 자기 자신을 향한 범죄 행위이니깐 말이다.

 

메두사도 마찬가지'다. 원래 메두사는 고르곤의 세 자매 중 막내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무엇보다도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미녀2)였는데 아테네와 미를 겨루다 벌을 받는다. 아름다운 머리채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녀는 여성판 디오니소스인 셈이다. 디오니소스는 다시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그가 죽은 적'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은 나르키소스와 메두사의 " 자기 환시에 매혹된 죽음 " 과 일맥상통한다3).  나르키소스가 물 위에 반사된 자기 모습를 보고 죽는다면, 메두사는 페르세우스의 방패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죽는다. 둘 다 자기 모습에 아연실색하여 죽는 존재다.

물과 방패라는 두 오브제는 모두 거울 이미지'를 대표한다. 아연실색과 대경실색을 동일어라고 한다면 나르키소스가 디오니소스를 닮은 이미지에 아연실색하는 장면은 메두사와 연결된다. 프랑스어 meduser는 " 대경실색하게 하다 " 란 의미를 가진 동사니까. 메두사를 바기나 덴타타(이빨 달린 질)로 해석한 프로이트는 그녀를 본 사람은 돌처럼 굳어 죽는다는 설정에 대해서는 발기 현상이라고 지적했는데,  그는 이 드라마틱한 맹목(盲目)을 거세 공포로 해석한다. 나르키소스와 메두사는 성적 오브제 앞에서 눈먼 존재'다. 신화에서 어떤 대상을 정면으로 본다는 것은 금기'다.

뒤돌아보면 화(禍)을 입는다는 경고도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마치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면 눈이 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오이디푸스가, 호메로스가, 티레시아스가 그런 경우다. 그들에게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정면을 응시하는 것과 같다4)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지점은 자신이 소유한 성적 오브제에 대한 반응이 성차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나르키스소는 자기애에 눈이 멀고, 메두사는 자기혐오에 눈이 먼다. 둘 다 아연실색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남근을 선망하고 메두사는 자신의 성기를 혐오한다. 정희진이 << 크리스마스 선물 >> 에서 머리빗과 머리카락을 통해서 성매매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나는 << 변신이야기 >> 를 통해서 신화가 남성 서사라는 점을 발견했다. 만약에 << 변신 이야기 >> 를 여성이 썼다면(혹은 모계 사회라면) 결과는 지금과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메두사는 물 속에 비친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매혹되어 물에 빠져 죽고, 나르키소스는 방패에 비친 자신의 남근을 보며 경악하지 않았을까. 신화 속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한 번쯤은 " 메두사(méduser) 한 경험 " 을 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점은 본질적으로 마비이자 맹목이다. 콩깍지가 씌이고, 호흡이 가빠지며, 넋 놓고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독(毒)을 읽는다. 

상대에게 끌린다는 것은 그 대상이 독을 품고 있다는 증거'이다. 숲길을 걷다가 독을 품은 뱀을 만나게 될 때의 신체 반응은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의 신체 반응과 동일하다. 어찌 할 줄 몰라 넋 놓고 바라보며, 때론 멀리 도망치고 싶지만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아름다운 대상에게 매혹된다. 그것이 사랑이다. 내게도 그런 여자가 있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그녀의 독이었다 

 


 

​                                    


1)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으로 머리카락은 포도송이처럼 탱글탱글하고 윤기가 흐르는 신이다. 아름다운 머리카락 선발 대회가 열린다면 1등은 디오니소스'다. 그는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남자'다.

 

2)      여성의 긴 머리‘는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오브제요, 로망이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숱이 많고, 부드러우며,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카락은 젊음과 건강을 알려주는 지표’다. 이 말은 곧 “ 좋은 번식 능력을 가진 여성 ” 이라는 증거가 된다. << 라푼젤 >> 이라는 동화에서 왕자가 라푼젤의 긴 머리카락을 보고 사랑에 빠진 것도 긴 머리키락이 가지고 있는 좋은 유전자에 대한 무의식적 인식 때문이다.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여자 인형을 봐도 그렇다. 못난이 인형은 대부분 헤어스타일이 짧고(양배추 인형을 보라), 예쁜 여자 인형은 머리카락이 길다. 모발과 성적 판타지는 김훈의 << 언니의 폐경 >> 에서도 나온다. "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의 속옷에 가끔씩 여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염색기가 없는 통통하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었다 … 끄트머리까지 힘이 들어 있었다 … 겨울 속옷의 섬유 올 틈에 파묻힌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떼어내자 더운 방바닥 위에서 머리카락은 탄력을 받고 꿈틀거렸다.(언니의 폐경,32쪽) " 김훈은 번식 능력을 상실한 여자(언니의 폐경)와 대조되는 오브제로 “ 염색기가 없는 통통하고 윤이 나 ” 고 “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 ” 고 “ 탄력을 받고 꿈틀거 ” 리는 머리카락을 전면에 내세운다. 무시무시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진화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긴 머리 여성은 상품 교환 가치가 매우 뛰어난 유전자를 가진 존재다.

 

3)       디오니소스는 어릴 때 거인이 준 "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거울 " 을 들여다보며 거울에 반영된 자기 모습에 홀려 있는 동안에 거인들이 거울에 빠진 디오니소스를 갈가리 찢어죽이게 된다.


4)      알면 안되는 진실은 보면 안 되는 거울-이미지'다. 오르페우스, 프시케, 악타이온도 맥락은 비슷하다. 오르페우스는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아내를 잃고, 프쉬케는 남편의 얼굴을 보면 안 된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등잔으로 잠자는 남편을 비췄다가 남편을 잃고, 악타이온은 목욕하는 아르테미스를 훔쳐보았다가 죽음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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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7-16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변신이야기」를 읽었는데 곰곰 생각하는 발님처럼 깊이 있게는 못 읽었습니다 다시 찬찬히 생각하며 읽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6 09:38   좋아요 1 | URL
언젠가 포스트에 쓴 적이 있는데.. 알라딘 검색 지랄같아서 검색에 안 걸리네요.
대경실색은 순간적 마비 현상입니다. 잠깐의 공포인 것이죠.
이것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과 동일합니다. 왜 영화에서 보면 넋 놓고 바라보는 장면 있잖습니까.
플라톤이 말한 공포가 아름다움의 첫 번째 현존이라는 증거죠.
독이 있는 짐승을 공포를 유발하는 데 사실 그것은 공포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입니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ㅎㅎ

yureka01 2016-07-1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신화이야기를 이렇게 맛깔나게 해석하셨습니다..재미나게 읽고 고개만 꺼덕꺼덕.......하여간 곰발님의 해석을 읽으면 뭔가 해석사유력 1상승!~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6 09:57   좋아요 1 | URL
유레카 님도 변신 이야기 함 읽어보십시오. 옛날에 읽었다고 안 읽던 책인데
이거 나이 좀 먹고 다시 보니 정말 재미있습니다.
신화 이야기 재미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6-07-16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하지 못한 좋은 관점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곰곰생각하는발님!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6 09:57   좋아요 1 | URL
네에. 여기는 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추격자나 함 봐야겠습니다.

지나가는이 2016-07-1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혀를 내두르게 되네요 공포와 사랑을 이런 식으로 연결하실줄은
곰님이 말하면 이상하게 설득이 되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6 09:58   좋아요 0 | URL
플라톤의 저 말을 곰곰 생각하면서 변신 이야기를 읽으면 무척 재미있습니다
지나가닌이 님도 읽어보시기를..

마립간 2016-07-16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심리학에서 남자의 `경제력`과 여자의 `성(육체)`가 대칭의 깨침으로 인한 대척점으로 설명한 사실 판단에, 정희진 씨는 `불평등`이란 가치판단을 했군요. 정희진 씨가 데이트 비용의 남녀 공동 부담이라는 저의 주장을 어떻게 판단할지 궁금해집니다.

저는 고민을 했겠지만, 결국 빨간약을 선택했을 것으로 제 자신을 판단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6 10:24   좋아요 0 | URL
정희진 씨는 어느 글에서 데이트 비용의 남녀 부담은 당연한 거라고 말한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마립간 2016-07-18 07:58   좋아요 0 | URL
제가 정희진 씨와 공통점을 곰곰발 님을 통해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자주 인용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과연 남자와 여자가 경제력의 분담이라는 문화-유전 공진화의 결과인 본능을 잘 극복할지는 의문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8 11:0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출처를 알고 있다면 그 글을 링크를 걸겠는데..
하튼,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습니다. 이젠 추렴 문화가 발달해야죠..

저는 추렴 문화 적극 찬성하는 사람입니다..

stella.K 2016-07-16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헨리는 우리가 아는대로 그냥 금슬 좋은 부부의 온정있는 사랑 뭐 이런 걸 표현하려고
쓰지 않았을까요? 자신이 그런 문제작을 쓴 줄 알면 무덤에서 살아 돌아왔을 텐데...

젊을 땐 같은 여자라도 여자의 긴머리가 눈에 안 들어와요.
치렁치렁하게 뭘 저러고 다닐까 싶지만 나이들수록 남자들이 왜 여자의 긴머리를
좋아하는지 알겠더군요. 그러면 뭐합니까? 가질 수 없는 머리인 것을. 뭐 대충 이렇게 되겠죠.

저는 뱀 보다는 아기 낳는 여자의 신음과 오르가슴의 신음이 같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과 절정에 달했을 때가 하필 같다닛!
그리고 남자는 그것에서 쾌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제가 오늘은 좀 표현이 과했나?ㅋㅋㅋㅋ

이미지의 전복이 필요한 것 같긴해요.
양배추 인형을 비롯한 못 생긴 인형은 다 머리가 짧다.
예쁜 인형은 머리가 길다. 이런 거.
누가 압니까? 양배추 인형에도 관능이 없으라는 법 없고,
못 생긴 사람은 머리가 다 짧으라는 법은 없잖아요.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6 14:42   좋아요 0 | URL
헨리 형이 알고 썼든 모르고 썼든.. 상관은 없다고 봅니다.
작가가 쓴 텍스트는 그의 손을 떠나면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라고 말이죠.
저도 헨리 형이 그런 의도로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죠. 워낙 작품이 좋잖아요..

그런데 아기 낳을 때 신음과 오르가슴의 신음이 같다는 표현은
좀 과하긴 한 것 같습니다.

+

제가 언제 글에서도 쓴 적이 있는데 못생긴 인형들은 다 머리가 짧아요..
반면 바비 인형처럼 예쁜 인형은 모두 머리가 길죠..
옛날에는 머리가 성적 기호로써
여자들은 외출을 할 때 머리를 항상 감싸야헸습니다.
대낮에도 머리를 감추지 않고 풀어헤치면 사람들이 창녀라고 했다네요..
서양 그림 보면 중세시대 그림 보면 여자들은 다 캡을쓰고 있죠.
모나리자 그림도 보면 투명 캡을 썼어요.
다빈치가 잔꾀를 부린 거죠..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6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매혹이란 라틴어 단어는 발기한 성기`라는 뜻이다.

변신 이야기를 지금에야 읽었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마음도 크다. 어릴 때 읽었다면 별다른 감흥이 없었을 것.
변신이야기는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다음에 읽어야 제맛이죠.
이 책은 별 다섯 개 만점에 별 13개 준다.

현대의 모든 이야기의 원형은 모두 이 책에 포함되어 있다.

cyrus 2016-07-1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희진님과 곰발님이 캘래버한 듯한 글. 잘 봤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7 11:51   좋아요 0 | URL
제가 정희진 님을 애정합니다 ㅎㅎ
 

 

 

 

 

                                   

뒤로 물러설 수 없음, 벼랑



 

메두사, 광부의 딸



                                                                                                                                                               막장 드라마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혹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을 설정한 후 끝까지 몰아부친다. 설정이 자극적이며 극단적이다 보니 개연성이 없고 황당하며 억지스럽다. 막장 서사의 으뜸은 << 햄릿 >> 이다.

관객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하다. 쉴 틈 없이 등장인물이 죽어나가기 때문이다. 선왕을 필두로 플로니어스 재상도 죽고, 오필리어 공주도 죽고, 거투르드 왕비도 죽고, 클로디어스 왕도 죽고, 레어티즈도 죽고, 결국에는 햄릿도 죽는다. 무대 위에 오른 주요 등장 인물이 모두 죽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 햄릿 >> 은 무대 위에 오를 배우들이 없어서 중단된 연극이다. << 햄릿 >> 은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승 起承 혹은 기승전 起承轉 에서 막을 내려,  結 없이 끝나는 이상한 연극이다. 셰익스피어는 관객들이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려고 등장인물을 연쇄적으로 죽인 것이다. 마치 10대를 겨냥한 슬래셔 무비 - 서사'처럼 말이다.

<< 햄릿 >> 은 최초의 슬래셔 문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햄릿 >> 이 막장이 아닌 걸작일 수밖에 없는 데에는 연쇄적 죽음이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필연이 될 때 그것은 비극이 된다. 막장이란 탄광굴의 끝을 의미한다. 탄광 입구에서 가장 깊숙한 곳이 막장'이다. 이곳은 갱도가 제대로 만들어진 상태가 아니기에 그만큼 위험하며 그만큼  품삯도 높지만 돈이 궁한 광부는 갈 데까지 갈 수밖에 없다. 갈 데까지 간다는 점에서 막장은 섹스 행위와 동일하다. 섹스란 월경이다. 사회적 거리를 좁혀 내부로 침투하는 것이 섹스다. 뜨겁고 검은 구멍 속에서 화려한 궁을 발견하는 것, 더워서 땀이 나고, 호흡이 가쁘다는 점에서 막장 속 광부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동일하다.

프로이트가 관능(에로스)와 죽음(타나토스)는 함께 한다고 했을 때,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영역의 합일은 < 막장 > 이라는 비소성(非所性)에서 찾을 수 있다. " 우리는 많은 동물이 산란을 하거나 짝짓기를 하는 순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무엇이 끝난 것이다. 가장 강렬하게 사랑할 때 무엇이 끝난다 2) ". 그렇기에 " 사랑은 나의 행복이자 나의 불행이며, 사랑은 나의 천국이자 나의 지옥3)" 이 된다. 이처럼 여성의 갱도'는 愛와 死가 공존하는 텅 빈 기호'이다. 그런 점에서 메두사는 나르시소스 신화와 닮았다. 나르시소스 신화에서 서사를 작동시키는 주요 감각은 < 본다 > 는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메두사 신화가 가지고 있는 본질도 < 본다는 행위 > 에 있다.

지난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메두사는 여성 성기에 대한 은유이다. 50마리의 뱀은 거웃이고 얼굴은 여성 성기'이다. 나르시소스가 물 위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봤다면, 메두사는 방패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전자가 자기애에 의한 죽음이라면 후자는 자기 혐오에 의한 죽음인 셈이다. 정신의학에서 자기애와 자기혐오를 동일한 감정으로 보는 이유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기 혐오에 빠지기 쉽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한통속이듯이 나르시소스와 메두사 또한 한통속이다. 공포가 아름다움의 첫 번째 현존이다(플라톤) !  나향욱이 민중은 개·돼지라며 자신은 1%에 소속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했을 때, 나는 속으로 웃었다. 아무리 화려한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당신이나 나나 막장 인생인 셈이다.

인간은 모두 막장에서 석탄을 캐야 하는 광부에 지나지 않는다. 쾌락에는 죽음이 내포되어 있다. 쾌락을 탐닉할수록 위험도 그만큼 높아진다.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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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07-1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나니, 생각해 볼 흥미로운 주제가 떠올랐습니다.

제 글을 통해 아시겠지만, 저는 대칭성의 파괴에 의한 대립적 대칭성으로 해석하는 것을 즐겨합니다.

자기애와 자기 혐오의 대립적 대칭은 (우월감과 열등감이 동전의 앞뒷면이듯) 쉽게 이해가 되는데, 자긍심의 대립적 대칭에 뭐가 있을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5 11:11   좋아요 1 | URL
글쎄요.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군요.
문득 플라톤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공포가 아름다움의 첫 번째 현존이다 !

소조 2016-07-15 12:4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역시 마립간님. 책 사는 것만큼이나 마립간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알라딘을 이용하는 이유..

마립간 2016-07-15 14:13   좋아요 0 | URL
소조 님, 칭찬 말씀 감사합니다. 과찬입니다.

yureka01 2016-07-1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애와 자기혐오는 같다..캬오..그러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