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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마야 모르겐스턴 외, 멜 깁슨 / 20세기폭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아픔이란 고통 뒤에 오는 것이다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그동안 수많은 폭력 영화를 보았지만 이 영화만큼 많은 상처가 난 육체 이미지'를 본 적이 없다. 이 정도면 그로테스크를 초월해서 스팩타클의 장'이라 할 만하다. 이 상처 이미지는 당대 최고였던 분장 전문가인 케이트 반델란과 특수 분장 전문가인 그레그 켄놈이 만들었다. 내가 맬 깁슨의 << 패션 오프 크라이스크 >> 를 비난하는 대목은 " 상처의 리얼리티 " 에 있다. 비도덕적이라고 비난받는 영화 장르들(스플래터, 고어, 호러, 폭력)은 상처를 재현할 때 리얼리티를 회피한다. 왜냐하면 상처가 진짜처럼 보일 때 관객이 느끼게 될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관객은 스플래터, 고어, 호러 영화 속 육체에 거부감이 없다. 그것이 " 가짜 " 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재현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리얼하게 묘사한다. 그것은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다. " 리얼 " 하다는 게 반드시 좋은 요소는 아니다.
맬 깁슨이 배우가 아닌 감독이 되어 연출한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 >> 는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다룬 영화'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전주 영화제와 맞물리면서 이 영화를 그곳에서 본 것 같다(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이때,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를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관객 대부분은 교회에서 단체 관람을 온 모양이었다. 서로 알음알음 아는 사이이다 보니 영화 상영 전부터 영화관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나는 영화관 안에서 타관살이에서 오는 외로움에 덧대어 소외감마저 들어 울쩍했다. " 집에 가면 술이나 한 잔 해야겠구나. "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예수가 피범벅이가 되어 고통스럽게 죽어갈 때 나를 제외한 사람들 대부분이 울기 시작했다. 흐르는 눈물이 부끄러워서 훌쩍이는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작은 울음이 모여서 통곡이 되었다.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종교 수난극이 아니라 스플래터-고어 장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륙 당하는 십 대 역을 예수가 맡았을 뿐이었다. 혼자 소시오패스가 된 느낌.
내가 이 영화에 공감하지 못한 데에는 기독교에 대한 개인적 반감 탓은 아니었다, 예수라는 사내를 그 누구보다 사랑했으니까.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맬 깁슨이 이 영화를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에 집중한 의도는 명백했다. 예수의 고통 앞에서 " 너희는...... 흘러라, 눈물이여. " 가 아니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불편과 불쾌가 변덕스러운 애인처럼 마음 속에서 오락가락했다. 이 느낌은 불편한 것인가, 불쾌한 것인가 ? 내 기준에 의하면 영화가 나에게 불편(한 마음)을 주었다면 좋은 영화인 것이고 불쾌(한 마음)했다면 나쁜 영화에 속했는데, 이 영화는 그 기준이 명확하지가 않아서 애매모호했다. 하는 수 없이 판단중지(epochē)를 내렸다. 아, 몰라 ~
2년 후, 맬 깁슨이 연출한 << 아포칼립토 >> 가 상영되길래 이 영화와 함께 << 브레이브하트 >> 를 연속으로 보았다. 세 영화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 << 아포칼립토 >> , << 브레이브하트 >> 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주제는 " 고통을 견디는 몸 " 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통을 극복하는 남성 몸'이다. 쇠꼬챙이가 살을 찌를 때 느끼게 되는 고통 따위를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 리얼 " 하게 만든다. 이 통각에는 " 판타스틱 " 이 없다. 맬 깁슨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는 < 상처의 리얼리즘 > 을 위해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던 분장 전문가인 케이트 반델란과 특수 분장 전문가인 그레그 켄놈을 고용한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상처가 가짜처럼 보여서 (관객이 느끼는) 통각 지수가 떨어지는 것이다. 목적은 명백하다. 그가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를 만들기로 마음 먹은 데에는 예수의 정신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는 몸에 있었던 것이다. 자고이래로 예수보다 극한 고통을 견딘 사내가 있었던가 ?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 스스로 내린 에포케는 해제되었다. 영화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는 불편한 영화가 아니라 불쾌한 영화'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끔찍하게 도륙당하는 하드 바디 예수 >> 라는 글에서 " 멜 깁슨은 실은 해석하지 않는다.
목회 장면들이 가끔 삽입되지만 끔찍한 고문 장면들이 거의 전부인 이 영화의 서사는 어떤 종교적 질문도 시도하지 않는다 1) " 고 비판한다. 예리한 지적이다. 이 영화를 해석할 수 없는 이유는 서사가 부재하다는 데 있다. 이상하게도 성서에는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크게 다루지 않는다. 몇 줄(혹은 몇 장?!)이 고작이다. 채찍질을 당했다더라_ 가 전부인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도 말이다.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성령에 있라는 것. 맬 깁슨은 성서를 바탕으로 이 영화를 재현했지만 그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 고통을 받는 육체의 감각 " 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서사는 없고 감각만 남았다 2). 맬 깁슨이 보기에 예수는 영적 성웅이 아니라 육체적 영웅이다. 그는 육체적 영웅인 예수를 << 리셀웨폰 >> 시리즈 영화에서 주인공 릭스 형사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 서사보다는 감각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둘 다 갈라진 < 틈 > 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포르노 영화와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포르노는 여성 - 성기에 집착하고 이 영화는 도륙당한 남성 - 상처에 집착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고통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픔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비교적 쉽게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아픔을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을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가 심리적 통각이라면 후자는 육체적 통각이다. 아픔이란 고통 뒤에 오는 것이다. 못이 손을 뚫었을 때 느끼는 통각은 고통이지 아픔이 아니며 고통에는 서사가 없지만 아픔에는 서사'가 있다. 그렇기에 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날들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 여성을 보는 한국 사회의 반응도 이와 유사하다. 한국 사회는 피해 여성의 고통에는 공감하지만 아픔을 이해하는 데에는 항상 실패한다.
내가 맬 깁슨의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를 형편없는 영화로 취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맬 깁슨은 예수의 고통에 집착한다. 고통에는 서사가 없다. 내가 예수에 공감하는 부분은 예수의 고통이 아니라 예수의 아픔이다 ■
1)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471쪽
2) 한국 문학도 서사는 없고 감각만 난무한다. 신경숙 소설이 대표적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감각을 웅성거리는데 막상 서사는 부재한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