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여자 :
낭독의 발견
최민식 _ 그때 유지태의 구두를 무지하게 핥았지. 유지태가 날 보고 웃는 모습이 참 좋았다. 박찬욱 감독의 디렉션이 생각난다. 오대수가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데 우진이 냉정하게 봐야 되는 거 아니냐 했더니 박 감독이 유지태 보고 웃으라고 했다. 유지태가 “여기서 웃어요?” 하니까 박 감독이 “웃어. 재밌잖아. 네가 그토록 데리고 놀고 싶어 했던 놈이 개가 돼서 드디어 네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더 갖고 놀아라”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속으로 그랬지. ‘야, 저 인간 진짜 변태다!’ 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정확한 디렉션이었다. 유지태도 정확하게 잘 표현했고. 위와 아래의 정서가 아주 대비되면서 오대수는 더욱더 비굴해지고 이우진은 더욱더 위에서 찍어누르고 마지막엔 곧 허무해지지 않나. 또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싶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굉장히 행복했다.
- CGV 무비 콜라쥬 중
" 야, 저 인간 진짜 변태다 ! " 배우 최민식이 GV 시간에 박찬욱 감독에 대해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 혀 > 하니 배두나의 고백도 얼핏 떠오른다. 영화 << 복수는 나의 것 >> 에서 송강호가 전기 고문을 할 때 고통을 배가시킬려고 배두나의 귀에 침을 묻히는(혀로 귀를 핥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연기할 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어서 몸부림을 친 적이 있었다고. 이래저래 박찬욱 감독은 변태 같은 구석이 있다. 급기야, 요즘은 " 배운 변태 " 로 통하는 모양이다. 배운 변태 박찬욱 선생 ! 내 취향 또한 변태에 가깝다 보니 막장을 즐겨 보게 된다. 내가 << 오이디푸스 >> 와 << 햄릿 >> 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전 걸작이라는 사실보다는 막장 드라마라는 데 있다. 왕이면 뭐하나. 이 정도면 콩가루 집안을 떠나 미숫가루 집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남들이 " 인간 심연의 어두운 구석 " 운운하며 독후감 문장을 작성할 때,
나는 " 하이고 ~ 이눔의 집구석, 아주 잘 돌아가는구먼...... " 이라고 쓰고 싶었다. B-무비에 대한 애정도 내 변태 기질과 궁합이 맞았기에 가능했다. 영화 << 아가씨 The Handmaiden, 2016 >> 는 영화에 대한 영화 이야기'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 배운 변태 박찬욱 선생 " 의 자의식이 반영된 영화라는 소리'다. 코우즈키(조진웅 분)는 명백히 박찬욱의 도플갱어(이 견해는 내 생각이라기보다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사항이다. 이 지적에 뒤늦게 동의한다)처럼 보인다. 코우즈키(조진웅)와 박찬욱을 동일선상( 同一者 ) 에 놓고 본다면 조진웅이 수집하는 책은 영화에 대한 은유'이다.
종이는 필름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종이는 물에 젖고 필름은 물에 젖지 않는 물성을 가졌다는 것이 다를 뿐. 그런 점에서 음서 낭독회는 영화 시사회'이다. 조진웅이 초조한 눈빛으로 주변 반응을 살피는 장면은 극장에서 관객의 반응을 꼼꼼하게 챙기는 감독은 연상케 한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음독(音讀)을 통해 재현하는 이미지가 포르노 영화 장르라고 했을 때, 조진웅이 초대한 은밀한 부르주아(들)은 귓구멍에 성감대가 달린 음란서생인 셈이다. 박찬욱 감독이 사라 워터스의 << 핑거스미스 >> 를 흔쾌히 영화화하기로 마음 먹은 데에는 종이와 필름이 가지고 있는 " 재현의 기록성 " 에 마음이 끌렸던 것은 아닐까 - 생각한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작품 가운데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충족시킨 영화는 대부분 번안한 텍스트라는 점1) 에서 조진웅이 음서淫書 를 필사하고 음독하는 과정은 박찬욱이 원작 텍스트를 빌려 오롯이 자기 것으로 번안하는 과정을 닮았다2). 제라르 쥬네트의 범주를 빌려오자면 박찬욱(코우즈키)이 실력을 발휘하는 지점은 하이포텍스트(HYPOTEXT : 오리지날)가 아니라 하이포텍스트를 재해석한 하이퍼텍스트(HYPERTEXT)에 있다. 그는 오리지날을 변형시키고, 수정을 가하고, 확장을 시키거나 과감하게 생략한다. << 아가씨 >> 도 원작을 변형, 수정, 확장, 삭제를 통해 만들어진 영화'다.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한 점은 하녀의 대사 한 마디'였다. 하녀 눈으로 본 으리으리한 대저택은 으스으스한 공간처럼 보인다. 하녀가 늦은 밤에 벚나무 아래3) 를 지나가면서 툭 내뱉은 독백은 꽤나 인상 깊다. " 집이 너무 커서 미쳤나 ? " 이 독백은 영화 전체를 요약해 준다. 더러운 욕망이 꿈틀거리는 코우즈키 대저택은 < 추억의 장소 > 가 아니라 < 텅 빈 공간 > 으로 작용한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 장소(topos)는 채워지는 곳이고 공간(atopos)은 부재로 인해 결여된 곳4) 이다. 하녀가 대저택에서 공간의 결핍을 인식하는 계기가 아가씨가 들려주는 서사, 즉 안주인이 목을 매 죽었다는 사연을 들은 후'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대저택의 안주인이 장소(場所 : topos)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순간5) 에 비로소 공간(空間 : atopos)을 인식하게 된다. 장소와 공간에 대한 인식은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경험하게 되는 감정이다. 사랑이 가지고 있는 본질은 장소에 대한 애정이고, 이별 후에 오는 감정은 공간에 대한 인식이다. 영화 << 번지 점프를 하다 >> 에서 서인우(이병헌 분)를 힘들 게 하는 것은 그 옛날 그녀와 함께 했던 것 - 곳, 짓, 말 따위)과 마주칠 때이다. 그는 그녀와 함께 했던 곳에서 그녀의 부재를 확인하게 된다. 한때, 즐거웠던 장소는 이별이라는 사건을 겪으면서 고통스러운 공간으로 변해 있다.
그곳은 이미 부재하는 그녀가 점령한 공간이다 ! 아가씨와 하녀가 대저택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이유도 코우즈키 대저택이 타자들이 점령한 영토'라는 데 있다. 그녀 - 들이 원하는 곳은 아토포스가 아니라 토포스'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처녀지處女地 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오갱끼데스까 ? 와따시와 갱끼데스. 공간(空間)은 자신과 관계된 대상의 부재로 인하여 장소에 구멍(空 : 빌 공)이 생기고 틈(間 : 사이 간)이 벌어질 때 생기는 영토'다. 한자 間 : 사이 간'은 閒 : 사이 간6) 과 같은 말로 두 개의 문 사이로 달이 스며든 형국이다.
얼핏 보기에는 낭만적 풍경처럼 보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으스스한 풍경이기도 하다. 빗장이 풀린 문 사이로 달(月)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달(月)이라는 오브제는 atopos 라는 단어에서 부정과 결여의 접두사 역할을 하는 < a - > 이다. 그것은 결여이면서 동시에 개입하는 오브제'다. 영화 << 아가씨 >> 에서 하녀(김태리 분)가 " 개입하는 오브제 " 라면, 벚나무 아래에서 목 매달아 죽은(영화는 아내가 남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안주인은 " 부정과 결여의 오브제 " 로 작동한다. 영화 또한 환영(幻影)이라는 잡히지 않는 물성을 가진 매체라는 점에서 텅 빈 기호(=헛것)이다.
극장은 하나의 거대한 공간이요, 밤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스며든 달이 그림자를 춤추게 하고 환영을 만든다. 그 옛날, 어느 카페에서 최초의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7) 사람들은 놀라서 혼비백산 도망쳤다고 한다. 그들이 본 것은 스크린에 투영된 기차의 환영(幻影)이 아니라 환영의 실재(實在)였다. 기차는 거기에 없었지만 거기에 있는 오브제였다. 지금 그녀는 그 카페에 없지만 그 카페를 점령한 것처럼 ■
1) 올드보이, 박쥐, 아가씨는 모두 원작 텍스트를 번안한 작품이다. 오리지날 각본으로 만든 영화 中에 친절한 금자 씨를 제외하고는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 걸작은 << 복수는 나의 것 >> 이라고 생각한다. 흥행에 참패한 대표적 영화'다
2) 조진웅이 필사한 책을 부르주아 고객에게 파는 행위는 박찬욱이 영화 판권을 파는 행위를 닮았다
3) 대저택의 안주인은 이 나무에 목을 매달고 죽는다
4) 아토포스는 장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토포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여기서 a는 부정과 결여의 접두사로서, 아토포스는 비장소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장소에도 고정될 수 없어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그에게 붙여 준 것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비장소성이 사랑의 사건에 내재한다고 보면서 "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다 " 라고 말한다. (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179쪽 )
5) 정작 안주인은 바깥에 존재하는 유령이다.
6) 間은 閒의 변형이다.
7) << 열차의 도착, 1895년 뤼미에르 형제 >> 당시 관객들은 기차가 자신을 향해 스크린을 뚫고 다가온다고 착각했다.
덧대기 ㅣ 박찬욱은 영화광이다. 낙원동 서울 아트 시네마에서만 박찬욱을 세 번 만났다. GV 게스트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관객으로서 말이다. 두 번은 구로사와 아키라 특별전에서 한 번은 스즈키 세이준 감독전에서(아니다. 총 네 번을 만났다. 아주 오래 전, 아는 형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다). 이미 본 영화들인 터인데 굳이 영화관의 스크린으로 다시 보는 모양이다. 코우즈키로 빙의된 박찬욱이 일본은 아름답고 한국은 추하다고 말했을 때 불쾌했지만 그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것은 왜색이라기보다는 무국적 탐미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사실 나 또한 일본의 주거 양식을 좋아한다. 또한 그가 프랑스인 서재를 통째로 사들이고 싶다고 고백했을 때도 박찬욱 감독이 가지고 있는 미적 취향을 읽을 수 있었다(영화 박쥐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레캉'이 원작이다). 그는 무국적 변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