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ㅣ 창비시선 394
송경동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명조체의 세계
모 시인으로부터 < 시 > 를 배운 적 있다. 영광스럽게도 " 일대일 개인 교습 " 이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가 제출한 시험지에 그가 빨간펜을 들고 첨삭을 도와줄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은밀한 물밑 거래 따위는 없었다. < 그 > 는 내가 쓴 습작 시를 훑어보고는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시를 선별하는 것이 그가 수업 시간에 했던 전부였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별다른 지적도 없었고, 혹독한 동기 부여'로 나를 억압하지도 않았다. 이런, 미네랄워터 같은....... 이게 무슨 개인 교습인가 ! 마치, 재야의 숨은 고수를 찾아가 권법을 배우겠다고 청하니 물지게 삼 년, 부뚜막에서 밥 짓기 삼 년 하라고 할 판'이다. 그 속셈 내가 모를쏘냐.

극적인 반전은 없었다. 그는 끝까지 시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것보다 나은 저것, 저것보다 나은 그것(시험지)를 추리고 추릴 뿐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입이 댓 발 나올 뿐이었다. 어느 날, 시인은 내게 말했다. " 여기 자네가 쓰고 내가 추리고 추린 시 다섯 편이 있네. 이 시를 가지고 하산하게나..... " 그는 직접 신춘문예 응모 양식을 내게 보내왔다. " 건투를 빈다. " 시인은 내게 딱 두 가지'만 요구했었다. 시를 쓸 때는 반드시 줄 없는 무지(無地) 노트에 연필로 작성할 것. 그리고 시를 응모할 때는 명조체'로 인쇄할 것. 그가 내세운 논리는 간단했다. 백 년 숙성된 천만 원짜리 와인'을 종이컵에 담아 마시면 그 맛을 알 수 없다고.

" 시인도 마찬가지'라네. 시를 심사하는 심사위원도 오랜 습속에 세뇌된 족속이라 타성에 젖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 훌륭한 시가 백 년 숙성된 포도주라고 한다면 명조체는 반짝반짝 빛나는 투명한 와인잔이라네. 자네, 고딕체로 쓰여진 시집을 본 적 있나 ? 모든 시집은 명조체로 쓰여져 있다네. 그것은 불변'이자 상수'이지. 심사위원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항상 글꼴이 명조체인 시'만 읽었다네. 그것은 자네도 마찬가지이고 시를 쓰는 나도 마찬가지'라네. 아무리 좋은 시'라 해도 고딕체로 인쇄된 시는 일단 선입견을 가지게 돼. 왜 그런 줄 아나 ?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이야. 시란 명조체의 세계이거든. 웃기지 않나 ?

시인이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허투루 흘려 들었다. 무슨 얼어 죽을 명조체의 세계'인가, 명태의 세계'라면 모를까. 나는 시인이 < 명조체의 세계 > 를 찬양한다는 소리인지 < 명조체의 세계 > 를 비판하는 소리인지 알쏭달쏭했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계룡산 뜬구름 위에 뒷짐 진 산신령 흉내 내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신춘문예 공모에서 낙선했다.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기에 크게 낙담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때 시인이 가르쳤던 두 가지 요구 사항이 종종 떠오르고는 한다. 명조체로 쓰여지지 않은 시는 시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돌이켜보면 : 본질은 보지 못하면서 껍데기만 보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을까 ? < 시 > 란 언어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는 행위인데 시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은 오히려 고정된 글꼴의 틀 속에서 작품을 평가한다고 말이다. < 인간의 사고 > 란 창의적이라기보다는 반복적으로 학습된 결과의 총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편견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은 집단 이기주의'라는 이상한 프레임으로 유통되었다. 대한민국은 명조체로 쓰여진 세계'다. 그 명조체의 세계'가 형편없어서 노동자들이 주먹 불끈 쥐고 고딕체로 쓰여진 시로 대항하지만, 대다수는 그 시가 아무리 뛰어나도 형편없는 시라고 욕부터 한다, 고딕체로 쓰여진 시집을 본 적이 없기에. 송경동의 <<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 를 읽다가 차마 다 읽지 못하고 시집을 덮는다. 이 시대에, 노동자가 죽어가는 이 시대에 달달한 사랑 시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위선'인가. 노동자 시인 송경동은 차마 명조체로 시를 쓸 수 없어서 깨진 보도블록처럼 생긴 고딕체로 시를 쓴다.
" 상 받는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 듯 종일 부끄 " 러워서 차라리 " 벌 받는 자리는 혼자여도 한없이 뿌듯하고 떳떳1) " 하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유성기업, 기륭전자, 콜트 콜택, 쌍용자동차, 용산 망루, 강정 마을, 밀양 송전탑, 진도 팽목항 거리에서 핏발 서린 " 피맺힌 절규 " 를 쏟아내고 있다. 권력자의 논리대로라면 명조체로 쓰여지지 않은 시'는 시 같지 않은 시시한 시'인데, 시발... 자꾸 눈물이 난다 ■
사진 출처, 출판사 보도자료에서 발췌
1) 시 < 시인과 죄수 >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