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람, 장소, 환대 ㅣ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새와 팔뚝 : 드라큘라는 그림자가 없다
난세(亂世)에 영웅이 탄생한다고 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치세(治世 : 좋은 세상)에는 영웅은 없다는 소리가 된다. 흔히, 치세의 근본은 덕이라 하는데 조선 궁궐에는 덕(duck) 대신 닭이 영웅(英雄 : 수컷 웅은 隹 새 추 + 厷 팔뚝 굉‘이 합친 모양새. 종합하면 팔뚝 굵은 젊은 수컷 새'가 바로 영웅이다) 흉내를 내니 난세라.
청와대를 중심으로 온갖 잡새가 날아드나 정작 오리는 오리무중인 시대, 절망에 빠진 백성은 탄식하야“ 영웅 ”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이때 등장하는 위인이 베트맨, 슈퍼맨, 엑스맨 따위다. 망토는 힘의 원천으로 날개를 대신했다. 슈퍼 액션 히어로 영화 서사'를 10음절 이내로 요약하자면 " 나 한순간에 새 됐어 " 이고, 3음절로 줄이면 " 새 됐네 " 다. 악당들아, 나와라.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꿍짜작 ~ 꿍짝 ! 한때 안철수는 위기탈출 넘버원 씨‘였다. 남대문이 불에 타 기와와 들보가 무너져내린 사고는 앞으로 다가올 불운을 예고하는 나쁜 꿈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목조 건물의 기둥을 쥐가 갉아먹자 사람들은 안철수에게 “ 도와줘요, 넘버원 ! ” 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굵은 팔뚝도 없고, 날개도 없고, 용기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비단 안철수의 잘못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영웅이란 : 난세가 만든, 결핍이 만든 과잉의, 가짜 슈퍼 액션 히어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박혁거세 이후 새-인간’은 없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영웅은 없다. 마이너 뽕끼’가 철철 넘치는 내 서정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난세를 구한 영웅 중심의 역사 혹은 서사‘에 대해 관심이 없다. 슈퍼맨이 날든 말든, 육룡이 나르셨든 말든 관심이 없다. “ 흥, 망토 있다고 유세 떨기는...... ” 오히려 나는 망토는 있으나 날지 않는 캐릭터에게 끌린다. 유유상종이라고나 할까, 드라큘라를 보면 몰락의 통증이 느껴진다. 이런 맛에 비극을 본다. 드라큘라는 그림자’가 없다. 그가 밤에만 활동하는 데에는 햇빛을 보면 타 죽기 때문이라는 정보는 오보일 가능성이 높다.
드라큘라 : (주먹 불끈 쥐며 ) 땡볕 따윈 견딜 수 있어 !
그보다는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태양이 작렬하는 대낮에 외출을 꺼리는 것이다. 드라큘라, 그는 그림자가 없는 사내‘다. 사람이라면 꼭 있어야 할 것이 없게 되면 타인으로부터 무시, 경멸, 조롱, 폭력에 시달리게 된다. 고골의 단편소설 << 코 >> 는 어느 날, 코가 없어졌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소설이다. 있을 때 잘하라고 했던가 ? 코가 가출을 하자, 주인공은 코가 가진 중요성을 깨닫는다. 코는 단순히 냄새를 맡는 기능을 가진 신체 부위가 아니다. 코는 위신과 체면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강동원이 아무리 잘났다 한들, 코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한갓, 볼드모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코는 얼굴의 중심일뿐더러 신체의 중심이다. 신체의 중심이라고 ?! 그렇다. 술 취한 사람이 자꾸 넘어지는 이유는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셨다는 데 있다.
드라큘라는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측면에서 장애를 가진 존재이며, < 그림자 없음 > 은 트라우마이자 스티그마’이다. 드라큘라에게 그림자가 있었다면, 그는 어둠의 왕자가 아니라 해맑은 < 나 긍정 > 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드라큘라‘라는 사내는 그림자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는 것이다. 드라큘라에게 없는 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신체’이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고 놀리지 마시라. 고골의 << 코 >> 라는 단편에서 코는 거리를 활보하고 말도 한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그림자가 말도 하고 돌아다닌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시 정리를 하자. 드라큘라가 잃어버린 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신체‘다. 그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를 얻기 위해 흡혈을 하는 존재’다.
김현경의 << 사람, 장소, 환대 >> 라는 책을 다 읽고 나서 책장을 덮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 저자가 이 책에서 드라큘라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드라큘라였다. 저자 김현경은 말머리를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 그림자를 판 사나이 >> 라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설 속 남자는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는 파는 대신 황금알을 낳는 거위(행운의 자루)을 얻는다. 그가 보기에 그림자는 nothing일 뿐 everything이 아니다. “ 그깟, 거추장스러운 그림자 ! ” 하지만 그림자를 잃어버리자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한다. 몹시 역겨운 기분이 들기 시작한 그는 “ 나는 태양 아래에서 걷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했다. 그러나 태양을 받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 라고 신세 한탄을 한다. 돈이고 나발이고 내 그림자를 돌려주세요.
김현경은 이 단순한 이야기‘에서 그림자의 은유를 단순하게 영혼을 판 대가로 환원하기를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가지는 곤경은 영혼을 잃어버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낮의 햇빛 아래 공공장소에서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데 방점을 찍는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잃어버린 것은 << 장소 >> 다. 그는 장소를 잃어버린 후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김현경은 이 이야기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 27쪽
이 책이 무엇보다도 반가운 이유는 이름을 들으면 배가 고파지는 “ 어빙 고프먼 ” 의 이론을 중심으로 김현경의 입장을 정리한다는 측면이다.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그의 이름이 어빙(Irving)'이 아니라 베가(Vega)라면 꽤 인상적인 인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됐고. 사회학 분야의 대가‘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한국에서는 그를 듣보잡 취급해서 평소 불만이었는데 저자가 어빙 고프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보니 무엇보다도 그 사실이 반가웠다. 저자는 " 학술 논문에도 대중적인 에세이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 " 이라고 했는데, 딱다구리처럼 딱부러지게 말해서 학술 논문과 대중 에세이가 만나 상승 효과를 만든 꼴이 되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는 말. 액션 전문 배우가 메소드 연기에도 탁월한 재능을 선보였다고나 할까 ?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림자를 갖는 것과 같다. 몸에 붙어 다니는 몸의 자리를 표시해주는 무엇, 몸과 닮아 있고 몸을 흉내내지만, 몸의 고유한 표정을 모두 지워버리면서 그렇게 하는 무엇, 몸이 태어날 때 함께 나타나고, 몸이 죽을 때 함께 사라지는 무엇 말이다. 사람으로 인지된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몸이 아니라 그림자로 인지된다는 것이다. 공적 공간에서 교환되는 상호작용의 의례는 개별적인 몸을 향한 것 같지만, 기실 그림자에 바쳐지는 것이다.
- 213 쪽
바로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드라큘라 백작을 생각했다. 아, 불쌍한 드라큘라 ! 독자여,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드라큘라를 무서워하지 말자. 그는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며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일 뿐이다. 올해(2016년)에 읽은 책은 << 오르부아르 >> 와 << 사람, 장소, 환대 >> 이지만, 시간을 되돌려 이 책을 2015년에 읽었다고 가정하면 , 내가 뽑은 문학 부문 1위는 << 오르부아르 >> 이고 비문학 부문은 << 사람, 장소, 환대 >> 가 될 것이다. 그만큼 훌륭한 텍스트‘다. 끝으로 이 책과 비교되는 책이 있다. 진은영의 << 문학의 아토포스 >> 다. 이 책 또한 장소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김현경이 “ 장소성 ” 으로 사회를 들여다본다면, 진은영은 “ 장소성 ” 으로 문학과 실천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이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다. 문제는 결과다. 진은영은 실패했고 김현경은 성공했다.
덧대기
■ http://blog.aladin.co.kr/749915104/7511713 : 진은영의 << 문학의 아토포스 >> 비판 : 만찬 앞에서 빈곤을 말하기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927683 : 드라큘라는 여성 괴물이다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960545 : 코는 신체의 중심일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