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이 신형철에게
스릴러 영화와 신파 영화는 서로 닮았다. 스릴러 영화에서 서스펜스'는 " 간발의 차이 " 로 발생한다. 목격자는 대상(의 죽음, 사건 따위)보다 항상 늦게 도착한다. 살인자가 앉아 있던 쇼파에는 아직도 살인자가 남기고 간 체온이 전해진다. 황급히 창문을 열어 밖을 보면 그림자 하나가 도둑 고양이처럼 획 골목 안으로 사라진다. 모, 든 것이 다 간발의 차이'다. 슬픈 멜로 영화도 " 늦었다는 것에 대한 회한 " 을 담은 장르'다. 김영하가 지적한 것처럼 멜로란 엇갈림의 미학인 것이다. 오고가다 다 만나면 텔레토비지 멜로가 아니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서로 마주치지 못한다. 슬픈 멜로를 이끌고 가는 클리쉐는 모두 " 너무 늦었다 " 는 정서를 깔고 있다.
편지, 도착, 깨달음, 후회'라는 단어 앞에는 " 뒤늦은 - " 이라는 형용사가 자리를 잡는다. 시간은 항상 목격자보다 빠르고 살인자보다 느리며, 이별은 빠르고 기다림은 느리다. 이처럼 스릴러와 눈물은 << 만시지탄 >> 을 담고 있다. 두려움과 슬픔은 동일하다. 생각해 보면 : 이별은 죽음의 상징적 서정'이 아니었던가. 신경숙 작품 가운데 내가 처음 읽은 소설은 << 풍금이 있던 자리 >> 라는 단편이었다. 그때 느꼈던 흥분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핏발 선 눈동자와 불끈 쥔 주먹이 주류 문학이었던 당대를 감안하면 << 풍금이 있던 자리 >> 는 신세계'였다. 신경숙은 개인의 욕망이 죄가 되는 시대에 민중문학의 대의적 명분을 생각해 보라 개인의 욕망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와, 와와 했다.
맛으로 표현하자면 신경숙 소설은 오신채를 넣지 않고도 오감을 자극하는 맛을 내는 요리였으며 콩으로 고기 맛을 내는 채식 요리였다. 신경숙 소설 속 화자는 늘 " 뒤늦게 도착한 목소리 " 여서 지상에 떠도는 유령의 슬픈 후회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이 비애'에 호감을 가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깊은 슬픔'에 지치기 시작했다. 통속의 비애는 갖췄으나 불온의 미덕은 느낄 수 없었다. 과장을 섞어 거칠게 말하자면 할리퀸 로맨스 문고판에서 eros 가 빠지고 sorrow 가 강화된 느낌. 신경숙 소설은 통속소설, 나아가 대중문학에 속했지만 평단은 신경숙 소설을 순문학'이라고 우겼다. 의아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 근대 문학의 종언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도 문학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말하는 이가 고립을 각오하고 해나가고 있는 소수의 작가라면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은 건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 존재가 문학이 죽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에 불과한 무리들이 그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아직 문예잡지가 있고, 매일 신문에 커다란 광고가 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팔리고 있지 않습니다. 참담할 정도의 부수입니다. 그리고 소설이 팔릴 때는 `문학`과는 상관없는 화제에 의한 것인데, 이러쿵저러쿵 문학은 아직 번영하고 있다는 허위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됩니다(65~66쪽) " 내가 신경숙을 지지하는 문단에게 말하고 싶은 말도 똑같다. "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한국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된다. " 하지만 평단의 지지는 뭐랄까.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태도처럼 보였다.
평단은 그녀의 통속이 대중에게 먹힌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간파했고 신속하게 < 통속소설 > 을 < 고급소설 > 로 포장했다. " 선택과 집중 " 은 통했다. 그녀는 어느새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 엄마를 부탁해 >> 로 잭팟'을 터트렸다. 신경숙의 통속과 문단의 전략이 시너지 효과를 낳은 것이다. 문단이 그녀를 지지한 이유는 문단이 독립적으로 자생하지 못하고 대형출판사에 종속되었다는 데 있었다. 출판사 빅 3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 문학동네)는 간행할 때마다 적자를 보는 문예지를 꾸준히 발행하면서 문단의 밥벌이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문단 입장에서 보면 문예지'가 곧 밥벌이 장소'였던 셈이다. 특히, 문학평론가에게 출판사 문예지 편집위원과 기획위원 자리'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어느덧 권력 사슬은 이상한 구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출판사 아래 평단이 자리를 잡고 그 아래 작가'가 깔렸다. 작가는 문학평론가에게 눈도장을 찍히기 위하여 노력하고, 평단은 출판사 눈치를 살폈다. 주례사 비평'은 이 피라미드 구조 안에서 파생된 덕담 문화'였다. 그러다 보니 특정 출판사가 출간한 소설 뒷편에 부록처럼 딸린 평론은 그 특정 출판사 소속 문학평론가가 담당하게 되었다. 말이 좋아 < 평론 > 이지 나쁘게 말하면 < 홍보용 보도자료 > 였다. 출판사 편집인이 해야 될 작업을 문학평론가가 대신하는 경우'였다. 칼칼한 비판은 사라지고 달달한 덕담만 넘쳐났다. 문학평론가라면 < 달 > 보다는 < 칼 > 을 잡아야 하나, 그들은 < 달 > 을 선택했다. 말(言)은 넘쳐났지만 건질 만한 말(言)은 없었다. 평론 評論'에서 言 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平이 남았다.
결과적으로 < 評論 > 이 아니라 < 平論 > 이 되었다. 촉이 무뎌지니 말이야 마리아야 ? 대체, 뭐야 ?! 만약에 신경숙 소설이 흥행성을 갖추지 않았다면 출판사와 문단이 발벗고 신경숙을 밀어줬을까 ? 다시 말해서 신경숙이 박상륭이었다면 ?! 내가 " 신경숙 표절 논란 " 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이응준이 " 허핑턴 포스트 " 라는 비주류 언론에 글을 기고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주류 문예지나 주류 언론이 이응준의 글을 거부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신경숙 표절의 핵심은 신경숙이 아니라 문예지를 끼고 도는 문단이다. 서정주는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다. 신경숙의 표절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문단'이다. 그때 문단이 제대로 자정 능력을 발휘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경숙은 억울하다. 어쩌면 그녀는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쇼파에 남아 있는 온기를 깨닫고 황급히 창문을 열어 밖을 볼 것이다. 명예와 인기'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훅, 사라진다.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심각한 것은 출판사와 문단의 종속 관계를 부끄러워하는 이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신형철은 << 몰락의 에티카 >>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한다. " 4년 전에 첫 글을 발표한 지면이 문학동네다. 편집위원 여섯 분 선생님의 가르침과 격려 덕분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써왔다. 마지막 글을 발표하는 지면도 문학동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 마치 문단이 출판사에게 띄우는 러브레터 같다. 보다 거칠게 말하자면 보스를 향한 충성 서약처럼 읽힌다. 나는 이 서문이 굉장히 불쾌했으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가 우국을 본 적도 없다고 당당히 말한 속내에는 평단이 그동안 자신에게 보냈던 지지를 믿었기 때문이다.
신경숙이 신형철에게 묻는다. " 그때 왜 그랬나요, 네에 ? "
※ 이 글은 신형철을 콕 집어서 비판한 것은 아니다. 문단 전체를 대표해서 신형철을 호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