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은  브루스

스를 무시하면 안 된

 

 

http://blog.aladin.co.kr/749915104/6280102   ㅣ  식스센스, 그 어디에도 없는 남자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귀신'은 사연이 많은 혼령이다. 억울한 일이 있기에 저승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귀신이 대부분 여성인 것은 가부장 사회'에서의 여성 잔혹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귀신은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다. 내 말을 들어달라고, 내 억울한 사연을 들어 달라고,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떠나겠다고 말이다. 만약에 당신 앞에 귀신이 나타났을 때 (무서워서) 눈을 감으면 죽을 것이고, (무섭지만) 귀를 열면 살 것이다. 내 말 무시하지 마시라. 정부의 메르스 대처법보다는 실용적이니까. " 낙타를 만지지 마세요. " 귀신의 출몰에 의해 죽은 수많은 사또는 대부분 남성연대 소속일 가능성이 높다. 혹은 일베 유저이거나 ! 

반면 귀신이 전하는 사연에 귀를 기울인 사또는 페미니스트'일 가능성이 높다. 혹은 페미니스트를 지지하거나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유령은 억압된 자'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을 분석하면서 억압된 것의 회귀(return of the repressed)라는 멋진 표현을 썼다.  신경증은 << 억압 >> 의 결과'이다. " 억압된 것 " 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내부에 축적된다. 이런 과정은 의식 밖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시간이 흐른 후에 억압에 따른 증후가 발생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두고 " 억압된 것의 회귀 " 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이 출몰하는 현상이야말로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 할 수 있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프로이트'는 뛰어난 글쟁이'다.

좋은 문체 수집가인, 필경사 신경숙 달인이 프로이트 문장을 표절하지 않은 것은 진짜 보석을 보는 안목이 부족한 탓이다. 그녀가 소설 나부랭이 따위를 필사하지 않고 프로이트 문체를 흉내 냈다면 지금과 같은 추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곰곰 생각하면 며칠 동안 한국 사회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했던 추문도 억압된 것의 회귀'로 볼 수 있다. 다들 아시다시피 신경숙 표절 의혹 제기'는 이미 15년 전에 벌어진 논란이었다. 신경숙은 이 의혹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대응했고, 문학 권력은 보고도 못 본 척 생깠다. " 피식, 네까짓 게 째려보면 나보고 어쩌라고 ! " 언론도 동참했다. 말 그대로 문학 동네에서 주차 문제로 벌어진 사소한 말다툼 따위로 치부했다. 여기에는 각자의 잇속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변인은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 가만히 있으라 ! " 고 협박하고는 했다. 여기저기서 조리돌림이 시작되었고, 의혹'은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왜소한 죽음에 대해 귀를 기울인 문학 동네 사람들은 없었다. 의혹은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속삭였다. " I'll be back ! "  그 후......  15년이 지난 2015년. 죽은 줄 알았던, 그래서 영원한 침묵이 계속되리라는 의혹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의혹이 귀신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 옛날, 우리가 알던 힘 없는 의혹이 아니었다. 의혹은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서 신경숙 앞에 나타나 맞짱을 뜬 것이다. 우아한 하이킥과 힘 있는 무쇠 다리, 화려한 암바 기술과 헤드롹. 무엇보다도 째려보기 신공은 압권이었다. 아, 저 눈은 그 옛날 메두사......    

그런 점에서 이응준은 귀신과 살아 있는 권력을 이어주는 무당인 셈이다. 그는,  죄 없다. 몸을 잠시 귀신에게 빌려주었을 뿐. 만약에 15년 전에 의혹이 제기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개선 방안을 모색했다면 지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문단은 신경숙을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대형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문학에 " 한류 " 라는 딱지를 붙이며 특허 등록을 마쳤지만 결과는 참담한 결실로 돌아왔다. 신경숙 사태는 된 놈만 밀어준다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편애'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설령, 신경숙이 승승장구하여 노벨문학상을 탄다고 해서 수족관 속 개불처럼 쪼그라든 한국 문학이 부활할 가능성은 제로'다. 서효인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 최고의 작가를 만들어 한국 문학의 대표적 상징을 만드는 것보다는 1만 명의 독자를 가진 50명'의 작가가 있는 사회가 훨씬 건강하다 "  

대만의 영화 산업'을 보면 답은 보인다. 대만은 허우 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차이 밍량 같은 대표적 상징(아시아 영화를 떠나서 세계 영화계 사람들이 이들에게 보내는 존경을 보라) 을 만들었지만, 대만 영화는 철저하게 몰락했다. 대만 사람은 대만 영화를 보지 않았고, 차이 밍량은 세계 영화제를 떠돌며 자신이 만든 영화를 상영하는 것에 대한 슬픔을 말한 적 있다. 차이 밍량 영화는 대만에서 상영되지 않는다. 서효인 시인 말대로 1만 명의 독자를 가진 50명의 작가'가 절실한 이유이다. 한국 문학이 한국인에게 외면하는 데에는 끼리끼리 놀고 있는 집단에 대한 혐오가 작용했다. 젊은 작가는 문학 평론가를 위해 글을 쓰고, 문학평론가는 출판 자본을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출판 자본 권력은 그들을 위해 문예지와 문학상이라는 일자리를 마련한다.

그 어디에도 독자는 없다. << 공포의 변증법 >> 이라는 탁월한 평론집을 쓴 프랑코 모레티는 문학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문학 평론가가 아니라 독자라고 말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문학 동네 사람만 모른다. 의혹은 15년 전 약속을 지켰다. 억압받는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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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중배 기자 = "내가 나에 대한 비판의 글을 많이 읽지 않았고 못 읽어요. (비판이) 아주 많아요. 어떻게 읽겠어요. 그걸 읽고 감당할 자신이 없고, 기분만 나빠지고, 어떤 글은 뼛속까지 속이 상하는데요."

24일 문단에 따르면 소설가 신경숙의 이 같은 해명과 달리 그가 비판과 비판적인 비평에 상당히 예민하고 억압적으로 반응해왔다는 취지의 증언이 나왔다.

평론가 권성우는 지난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2000년 무렵 선배 평론가와 모 석간지의 대담 서평을 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신경숙의 '바이올렛'의 미덕과 한계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나중에 대담서평을 담당하던 문화부 기자로부터 신경숙이 신문 문화부장을 통해 항의를 했다고 들었다. (중략) 글을 통해 반론을 펼치면 되지, 문화부장이라는 문화권력을 통해 항의를 한다는게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가 안된다." 

그에 따르면 한 문인은 '현대문학' 내 기고의 장인 '죽비소리'에 신 씨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익명으로 비판한 뒤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신 씨가 편집위원을 비롯한 출판사 고위층에 "왜 이런 비판이 실리느냐, 실제 필자가 누구냐"고 항의했다는 것.

권 씨는 문학과지성사가 발간하는 '문학과사회'의 경우 신씨가 직접 사장인 원로 비평가에게 자신에 대한 비판글이 게재된 것을 항의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며, "대담비평은 직접 겪었고, 다른 내용은 전언이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사실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는 "'외딴방'은 정말 감동적이며 뛰어난 소설이며 그의 모든 작품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며 그러나 "그 무렵부터 신경숙에 대한 기대를 조용히 거두었다. 어떤 고리타분한 도덕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글쓰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윤리를 얘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이명원 경희대 교수는 23일 한국작가회의-문화연대 주최 토론회에서 신 씨가 자신을 비판한 박철화 평론가에 대한 반박의 내용을 비판하면서 "표절에 대한 작가적 윤리나 책임 문제에 대해 자의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반대로 문제 제기자를 고압적으로 타매하는 양상만 눈에 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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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phor 2015-06-24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당하십니다.
회초리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향해 내리치는 자신에 깃들어 있는 귀신의 회초리가 ......
아니면 독자들이 나서서 도리깨질을 해야 눈을 뜰것이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5 05:57   좋아요 0 | URL
우국 표절 문장 보면 그닥 훔치고 싶은 문장도 아니던데
한 작가가 그 이미지를 자신의 언어로 만들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걸까요 ?
아니면 시간이 없어서 급히 맘무리했을까요..

stella.K 2015-06-2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숙은 한동안 자숙하겠다고 그러고
창비는 신간을 출고를 하지 않겠다고 그러고
그러면 사건이 일단락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검찰에 고발까지 당했다고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솜방망이 아닌가요?
그렇다고 교도소에 보내는 것도 그렇고. 애매해요.
이래서 작가는 명예직인가 봅니다.

프랑코 모레티가 아주 쓸모있는 말을 했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5 05:56   좋아요 0 | URL
모레티 워딩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납니다만... 뭐, 저런 비스무리한 말이었습니다.
신경숙 그냥 문학 인생 끝난 거죠.

권력의 단맛을 너무 좋아하셨어요...

samadhi(眞我) 2015-06-24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곪을대로 곪아서 터지면 새살이 돋게 마련이니, 이번 일을 기회로 피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네요. 고질적인 출판업계의 병폐, 무반성에는 기대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작가든 평론가든-이 자각하면 더 좋을테구요. 어느 곳에나 자본에 종속된 가엾은 우리네 중생들이네요. 영혼이나 양심 같은 것을 가볍게 팔아넘기는 애처로운 일상.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5 05:59   좋아요 0 | URL
헌 부대 꿰매서 담지 말고..
그냥 헌 부대 버리고 새 부대에 새것을 담았ㅇ면 합니다.
버려야죠. 고치면 안 됩니다. 새것 사는 게 낫습니다.

개인적으로 뭐 바뀌겠습니까 ? 이 시스템 그대로 가리라 생각됩니다.
문예지를 끼고 도는 권력 삼각형(문학평론가가 출판사 직원이 되는... 연예기획사 소속으로 뛰는.. )
이 바뀔 것 같지는 않습니다.

2015-06-25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5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5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5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다맨 2015-06-25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숙이 자신에 대한 평을 나쁘게 썼다고 해서 신문사 부장이나, 문예지 편집위원들한테 가서 거세게 항의했다는 것은 (곰곰발님께서 인용하신 기사가 나오기 전에) 저도 오래전에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심지어 어떤 분(김정란이었던 듯한데)은 인쇄 직전까지 갔다가 평론집 출판이 이유도 없이 취소되었다는 `카더라`도 들었던 적이 있구요... 여러 모로 씁쓸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5 13:57   좋아요 0 | URL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권력의 쭈쭈바를 너무 많이 드신 것 아닌가 하는.....
확실히 사자가 없으면 늑대가 왕이 되고, 늑대가 없으면 토끼가 왕이 된다는 진실은 사실인가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5 14:04   좋아요 0 | URL
작가에서 소설에 대한 비평은 당연한 것이고 운명인데 칭찬만 받고 쓴 비판은 어떻게 해서든 문제 제기를 하는 자세에 경악했습니다. 대부분 작가는 그런 상황에 처하면 직접 반론글을 제기하고는 하는데... 놀랍군요. 장정일이 존경스럽네요. 적어도 그는 스스로 반론을 제기했으니 말입니다. 비겁하고 데스크 윗대가리 찾지 않고 말이죠...

5DOKU 2015-06-27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작가를 만들어 한국 문학의 대표적 상징을 만드는 것보다는 1만 명의 독자를 가진 50명`의 작가가 있는 사회가 훨씬 건강하다˝

구구절절 공감합니다...ㅠ_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7 08:03   좋아요 0 | URL
마찬가지로 삼성을 한국 기업의 대표적 상징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500개의 우량 중소 기업을 가진 구조가 더 튼튼한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의자와 침대 광고의 공통점은 편안함을 강조 한다는 점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의자는 항상 인체공학적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 의자 > 를 제작할 때 반드시 편안함 을 염두에 두고 의자를 만들지는 않는다. 패스트푸드 식당 의자는 손님이 의자에 앉을 때 일부러적당히 불편 하도록 설계한다. " 허리가 뻐~      근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 "  손님이 패스트푸드 식당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평균 10분 내외'라는 데에서 불편한 의자가 한몫했다. 롯데리아 의자를 생각해 보면 쉽게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등받이 없는 딱딱한 의자는 빨리 먹고 빨리 나가라는 은유. 미국 맥도날드 식당에서 오래 머문다는 이유로 한인'을 내쫒았던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빠르다.

패스트푸드 식당에 걸린 가훈은 “ f. a. s. t ” . 그러니까 맥도날드 한인 추방 사건은 패스트 한 곳에서 슬로우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무거운 엉덩이는 허물'이다(반면 백화점이나 쇼핑몰에서 무거운 엉덩이는 미덕이 되고 가벼운 발은 악덕이 된다. 고객이 쇼핑몰에 오래 머무를 수록 매출은 오른다).  누군가는 이 사건을 두고 장과 김치(발효 음식 : slow food)로 대표되는 한식 문화와 패스트푸드인 햄버거 문화가 충돌한 사건이라 말하지만, 한식 문화가 slow food 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오랜 세월 끝에 깊은 맛을 내는 장 문화가 슬로 푸드 요리'라면 어머니가 과연 짜장면은 싫다고 하셨어, 라고 말하셨을까 ? 짜장면도 장 요리에 해당하니 슬로 푸드인 셈이다. 그렇지 않은가 ?

직장인으로 붐비는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주문하면 5분 안에 세팅되고 10분이면 밥을 해치우는 환경에서 " 슬로우 " 라는 말은 뭔가 어색하다.  한 발 물러나서, 한식이 slow food 라고 가정해도 “ slow food ”“ fast food ” 처럼 먹으니 결과는 << slow foodfast化 >> 인 셈이다. 문학 권력에 의해 문학이 소비되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소설은 대표적인 슬로 푸드이지만 그것을 소비하는 형태는 패스트푸드되었다일단, 출판사와 결탁한 문학평론가(출판사 소속 문예지 편집위원, 기획위원1)는 상품 가치가 있는 작가를 집중 관리한다. 그들은 통속소설을 고급소설로 둔갑시키기 위해 온갖 칭찬 릴레이가 이어진다. 배울 만큼 배웠으니 " 말빨 " 로 대중을 현혹하기란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닐까.

비유를 들자면 패스트푸드처럼 만들어지는 김치찌개를 슬로 푸드로 소개하며 건강 요리'로 선전하는 꼴이다. 신경숙 소설은 바로 이 과정을 거친다상품이 출시되면 출판사 산하 문학평론가들의 집중 관리가 시작된다. 천박하게 말해서 영혼 없는 칭찬이요, 마사지 작업'이다. 마사지 과정을 거치면 평범한 대중소설도 걸작이 된다. 이것을 문학 전문 기자들이 그대로 옮긴다. 그 결과 신경숙 소설은 숙성 과정 없이 신속하게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진입하게 된다. 대표적 슬로 푸드인 문학이 패스트되어 소비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흥행성과 대중성을 갖춘 소설로 둔갑한 작품이 김애란의 첫 장편 << 두근두근내인생 >> 이다. 이 소설은 실패한 소설로 볼 수 있다.

대중음악 가수가 4분짜리 댄스곡만 부르다가 4시간짜리 춘향가 완창에 도전한 느낌이라고 할까 ? 백 미터 단거리에서 우승한 육상 선수가 동시에 이 백미터 단거리 경기도 우승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백 미터 단거리 선수가 사 백미터 중거리 경기에서도 우승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단거리와 중거리(장거리)는 호흡법과 주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김애란은 그동안 단거리(단편소설)에 익숙한 호흡법과 주법으로 중거리(장편소설)에 도전하다 보니 호흡이 툭끊긴다. 그러다 보니 << 두근두근내인생 >> 은 단편을 억지로 길게 늘린 것처럼 읽힌다. 김애란 특유의 쫄깃한 맛이 없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평단은 이 소설에 대한 영혼 없는 칭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신경숙을 대체할 만한 유일한 젊은 작가는 김애란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문단이 김애란을 전략적으로 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이다. 결국 완성도 면에서 실패한 소설은 마사지 작업 ”을 거쳐 훌륭한 작품이 되고, 빠르게 소비되었다빨리빨리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파는 음식은 대부분 패스트푸드이다. 한식이 슬로 푸드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대중식당에 의해 유통되는 음식은 어떤 식으로든 패스트푸드일 수밖에 없다. fast food(대중소설)fast food‘로 광고하는 것은 윤리적 문제가 없지만 fast foodslow food'라고 선전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출판사 문예지에 소속된 문학평론가를 동원하여 자사 상품을 고급소설(slow food)로 선전하는 것은 과장 광고. 그 수혜를 고스란히 받고 자란 대표적 상품이 바로 신경숙 소설이다. 신경숙은 탁월한 실력을 가진 작가.

이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통속소설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그렇다. 대중소설이 고급소설보다 질이 떨어진다는 소리'가 아니다. 대중소설을 고급소설로 둔갑시키는 문단 시스템이 역겨울 뿐이다 ■

 

 

 

 

 

 

덧대기

 

햄버거는 대표적인 패스트푸드'다. 열량이 높아서 정크푸드'라고도 한다. 하지만 맛이 좋아 대중이 즐겨 찾는 음식이기도 하다. 신경숙 작가'에게는 미안한 소리이지만 < 신파 > 는 " 감정의 과잉 " 에서 비롯된다. 내가 신경숙 소설을 통속소설'이라고 하는 이유는 작가가 절제의 미학보다는 감정의 과잉'에 빠졌다는 데 있다. 넘쳐흐른다는 점에서 신경숙 소설은 햄버거'다. 하지만 출판 자본'은 < 햄버거 > 를 5년 숙성시킨 김치로 요리한 < 오모가리 찌개 > 라고 광고한다. 신경숙 소설'이라는 기획 상품은 순식간에 한국을 대표하는 한류 음식으로 소개된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출판 자본이 광고하는 " 오모가리 찌개 " 를 먹으니 자꾸 콜라 생각이 나는 것이다. 햄버거를 먹을 때마다 이 세상에 콜라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햄버거를 먹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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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6-2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명은 짧을수록 좋다. ˝ 표절 지적 맞다는 생각.... ˝ 이라는 문장은 군더더기다. 표절과 맞다`만 연결해서 ˝ 표절 맞다 ! ˝ 라고 하면 되는데 이쪽 사람들은, 신형철도 그렇고, 말을 비비꼰다. 표절(지적)맞다(는 생각).


표절 지적 맞다는 생각.


에서 신경숙은 신춘문예 지원자의 작품을 심사하는 투로 말한다.
하지만 신경숙은 심판이 아니라 선수다. 심판은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가넷 2015-06-23 13:24   좋아요 0 | URL
잘못을 시인할때는 군말없이 인정만 하면 되는건데... 안 그래도 더워지가 보니 찌증도 늘어나는데, 인터뷰한 걸보니 더 짜증이 나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3 13:37   좋아요 0 | URL
사과과 아니라 변명이죠. 나는 죄 없어요, 건망증이 죄`일 뿐 ! 쉽게 말해서

(독자의) 표절 지적 맞다는 생각이 든다... 는 말은.

당신의 표절 지적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마리아입니까.


글고.. 시 제목 표절한 것을 두고 그때는 그런게 관행이었다고 말하는데
이 말 어디서 많이 본?

맨날 정치인 청문회 할 때 부동산 실명법 위반하면 정치인들 만날 하는 소리가 그때는 그게 관행이었다는 말....



팔리지도 않는 옛날 소설집 절판한다고 손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돌궐 2015-06-23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면서 그다지 감흥이 없었는데, 남들이 다들 칭찬하니까 뭐라고 함부로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문학의 `문`자도 모르는 주제에 허세 쩐다는 얘기 들을까봐. ㅋㅋㅋ 이게 다 말씀하신 마사지 작업의 부작용이네요.
제가 읽어본 김애란 소설책(두 개밖에 없지만) 중에선 강렬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는 단편집 <비행운>이 훨씬 더 좋았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3 13:03   좋아요 0 | URL
김애란 소설을 애정하는 편이라 다 읽었는데 내인생만 빼고 다 좋습니다. 내인생에 쏟아지던 그 찬란한 멘트에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처럼 평론가 떼거지들이 몰아주기 칭찬을 하니 선점 효과가 있어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줍니다. 이게 무슨 비평인가요..

stella.K 2015-06-2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지 첫 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는 데 저는 김애란과의 인연을 잘못 맺어
별로 읽을 맛이 안 나더군요.
첫인상이 좋은 작가는 후에 좀 떨어지는 작품을 내도 또 좋은 작품 쓰겠지 그런 믿음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신경숙도 제겐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신경숙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후배랑 마구 깠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게 벌써 20년 전 바라보는 일인데...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집단주의 성향이 있어서 그 당장은 말 못하고 후에 일터지면
그때가서 뭐라고 하는 게 많아요.
문평가들 누구 한 사람만이라고 입바른 소리를 했더라면 우리나라 소설계가 지금 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그게 참 아쉬워요.
지금 중고샵에 가면 신경숙 소설 나온 것들이 많던데 그게 이번 사건을 반증하는 걸까 괜히 그쪽으로
머리가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곰발님 신경숙이 너무 저격하시는 거 아닙니까?
창비에서 곰발님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 같아요.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3 13:53   좋아요 0 | URL
제가 창비 책 팔아준 게 얼마인데요.. 백 만원 넘을 거 가틈... 나름 창비의 븨아이피`입니다.
뭐라 그러면 지랄할 거입니다.

사실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은 꽤 있었씁니다. 그게 다 비주류 평론가의 입이다 보니 전혀 라인을 타지 못했어요.
권성우, 강준만, 김명인 등도 계속 문학 권력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듣는 이 아무도 없었죠.



신경숙의 초기 대응도 바로 이런 믿음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습니까.

라스콜린 2015-06-23 18:51   좋아요 0 | URL
창비는 아직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저격되어 마땅합니다.
신경숙씨는 일단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 맨트와 진정성에 대한 다른 말도 있지만, 작가로서 한 말이므로 일단은 독자로서 수긍할 만 합니다. 후의 그 진정성은 이후의 행동으로 평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표절`을 옹호했던 창비와 문예권력 `문단`은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표절을 옹호하던 문단관계자는 심지어 `우리가 이렇게 싸우면 일본에서 더 좋아한다`라는 황당한 발언까지 남겼습니다. 이들은 더 가여야 마땅합니다. 이들이 오히려 더 고개 숙여 사과해야 합니다. 창비는 마땅히 공식채널로 그간의 표절에 대한 그 출판사의 태도와 이번 사태에서 표절을 옹호한 것에대한 깊은 사죄를 해야합니다.
이들이 사과할때 까지 불매운동과 안티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4 07:30   좋아요 0 | URL
창비도 웃기지만 문동이야말로 이번 사태의 주인공입니다....

파트라슈 2015-06-23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근두근 내인생 처음 몇 장 읽다가 바로 반납해버렸습니다~ 여성작가들 작품 저한테는 안 맞음..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4 07:29   좋아요 0 | URL
단편집들은 매우 훌륭합니다. 함 읽어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수다맨 2015-06-23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재용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것을 봤는데, 삼성 일가에 대한 애정이나 호감은 조금도 없지만 그래도 사과나 해명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같은 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나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과 같은 에두르는 말보다는 훨씬 더 직설적이고 영리한 사과문이었습니다.
때로는 돈 많은 자본가들이 문인/학자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주제 파악과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할 줄 알거든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4 07:28   좋아요 0 | URL
주제 파악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인데 신경숙은 주제 파악을 잘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때론 보수 꼴통이 진보보다 가정적인 사람이 많죠.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 저는 신경숙은 기대도 안했기에 상관없지만 신형철이 그렇게 보기 싫더라고요..

마립간 2015-06-2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 <이미지 인문학>을 읽고 생각을 정리 중인데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어서, ... fast food의 윤리적 문제는 무엇일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4 12:11   좋아요 0 | URL
패스트푸드 값싼 정책`을 위해서 낙농가를 쥐어짜죠.... 낙농 산업이 기업화됩니다. 개인 카우보이들은 수지타산이 안 맞고 말이죠... 그러다 보니 생육 기간을 단축시키려고 소에게 소고기를 먹이고.. 뭐 이런 악순환..
 

 

 

 



상다리 부러지는 대접을 받다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冊을 읽다 보면 << 포틀래치 문화 >> 를 소개하는 부분이 나온다.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경조사가 있을 때 손님을 초대해서 대접을 하는 풍습이다. " 포틀래치 " 라는 말은 " 식사를 제공한다 " , " 소비한다 " 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말로 하자면 "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즐겁게 놀다 가셔 ~ " 다. 그런데 잔치 규모가 사뭇 다르다. < 상다리 부러지는 대접 > 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과시욕인데, 포틀래치'는 상다리 규모를 넘어서 개인 파산에 가까운 소비 규모다. 아이구야, 잔치 다음날은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다. 귀중품을 쌓아놓고 나눠주는가 하면 귀중품을 파괴하기도 하고, 자신의 노예를 죽이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부의 분배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돈 지랄'이었다. 그렇다면 남의 집 잔치에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대접을 받은 손님은 이득을 보았을까 ?

그렇지는 않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손님은 더 큰 규모로 잔치를 열어 부를 분배해야 하고 돈 지랄을 해야 한다. 만약에 잔칫상이 부실하면 부족 구성원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메리카 인디언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나 다름없다. 내가 " 포틀래치 문화 " 에서 깨달은 것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다. < 준다 > 는 것은 < 받는다 > 는 것을 전제로 한 시혜'다. 신경숙 표절 사태로 본 < 침묵의 카르텔 > 도 " 주는 쪽 " 과 " 받는 쪽 " 이 서로 이득을 취하기 위해 공생하는 관계에서 발생한 권력 지형이라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가 욕심을 내는 자리는 문예지 편집위원이나 기획위원 혹은 문학상 심사위원 자리'다.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출판사( 대형출판사는 모두 자체적으로 문예지를 발간한다. 문학상도 출판사와 관련이 있다) 에게 잘 보여야 한다.

 

" give " 가 있어야 " take " 가 있는 법. 주례사 비평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신인 작가도 이 카르텔에 동참한다. 젊은 작가 입장에서 보면 독자가 좋아할 작품보다는 문학평론가가 좋아할 작품을 쓰는 게 유리하다. 그러다 보니 작품은 점점 어려워진다.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단어는 현대인의 불알(불안)과 고독, 소외, 상실 따위다. 먹을 만큼 먹은 먹물 집단이다 보니 그들 구미에 맞는 미끼를 던져야 한다. 사실,  문학평론가 입장에서 박상륭 소설에 대한 평론을 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귀여니 소설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일이다. 그놈은 멋있었다, 라고 말하는데 무슨 놈의 랑시에르이고 호모 사케르인가 !  문학평론가는 귀여니 소설 앞에서는 합죽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젊은 작가는 평론 쓰기 좋은 떡밥만 양산하는 것이다. 

젊은 작가들이 노리는 최종 목표는 문학상이니 문학평론가의 관심과 지지가 없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젊은 작가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불알친구 장례싲장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문학상 뒷풀이에는 꼬박꼬박 참석한다. 나, 와떠염 ~  기염 기염.   마지막으로 출판사는 유능한 작가'를 단골 손님으로 모셔야 한다. 무명작가 시절에 연탄 백 장이라도 넣어줘야지 대형 작가로 성장하면 찾아온다. 출판사가 마련한 " 기브 " 는 문예지'다. 가난한 젊은 작가에게 문예지는 사막의 오아시스'다. 작품을 선보이는 장이기도 하고 원고료를 챙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란 아이들이 성공하면 쌀 지게미 먹고 자란 시절을 회상하며 끈끈한 우정을 과시한다. 결국 출판사 - 문학평론가 - 젊은 작가'는 서로 " 기브 " 도 하면서 " 테이크 " 도 한다.

여기서 파생하는 것이 < 그들만의 리그 > 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온실이다. 온실 밖 권력의 독점과 횡포에 대해서는 입이 찢어지도록 비판을 하면서도 정작 문단 내 권력의 독점과 횡포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그들은 티끌은 볼 줄 알면서 들보는 못 보는, 근시도 아니면서 난시도 아닌, 그렇다고 사시도 아닌 요상한 안목을 가졌다. 시국 선언 따위에 이름을 걸며 침몰하는 대한민국을 걱정하기에 앞서 당신들의 달달한 혈맹으로 인하여 썩어가는 발목을 근심해야 할 때'다. 신경숙, 창비, 신형철이라고 따로따로 불러본다. 그리고 한통속이라고 뭉뚱그려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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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22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한통속이 좋다고 여긴 독자들은 이번 신경숙 사태에 크게 실망했을 겁니다. 몇 달 전에 한국소설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사라졌다는 뉴스를 봤는데 이 때 몇 몇 출판사들이 한국소설이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는 현실에 걱정 코스프레를 했다는 사실에 소름 돋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21:02   좋아요 0 | URL
독자 입장에서는 김애란 << 두근두근 >> 이 좋은 소설일 수 있지만 평론가 입장에서 보면 이 소설은 어설픈 장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을 비판하는 평론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 이명인 만 빼고..) 이 소설이 걸작이라면 귀여니 소설도 걸작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김애란 단편집 2개가 기똥찬 작품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두근두근은 확실히 실패작처럼 보였습니다. 출판사가 밀어주는 작가의 작품을 평론가는 무조건 성찬하는 버릇이 있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21:28   좋아요 1 | URL
한국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는 대중의 지적 수준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질려버렸기 때문입니다. 프랭코 모레티 평론집 < 공포의 변증법 > 을 읽고 있는데 확실히 한국 평론집과 차이가 있네요. 드라큘라를 자본론과 연결하는 대목의 신의 한수입니다. 반면 한국 평론은 소설도 재미없고 평론도 재미없고....

만화애니비평 2015-06-2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흐름이 필요하고, 그건 오덕!
일본은 그렇게 가고 있는데 말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3 06:55   좋아요 0 | URL
이제 오덕의 세계로 가야 하나요 ?

수다맨 2015-06-23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신경숙이 표절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했다는데, 거칠게 말하면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르겠습니다. 우국을 읽은 기억은 없지만 자기도 이제 자기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하네요 ㅎㅎㅎ 무슨 유체 이탈 화법도 아니고, 끝까지 자기의 의도적 잘못은 아니라고 우기는 게 어딘지 보기 그렇네요. 그리고 남진우와 백낙청은ㅡ대외적 활동도 활발한 사람들인데ㅡ여전히 침묵 모드 중이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3 11:28   좋아요 0 | URL
박근혜 어투를 닮았어요.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죠.
나는 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자가 보기에는 표절로 볼 수 있다.
이게 막걸리`죠. 더 짜증이 날 뿐입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1




                                        신경숙 표절 논란이 발생'했을 때 문학 권력이 재빠르게 대응할 전략'을 크게 두 가지로 예상했었다. 첫째는 신경숙은 출판사 뒤에 숨고 출판 권력( 출판사, 문예지 편집위원 )  이 나서서 작가를 옹호할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조선일보2가 신경숙을 옹호할 것이라는 점이다. 조선일보를 콕 짚은 이유는 신경숙이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이라는 데 있다( 남진우는 " 안티 조선 문인 킬러 " 다). 일단, 창비는 버릇대로 " 표절이라 볼 수 없다 " 는 입장을 내놓았다가 후폭풍이 일자 신속하게 입장을 철회했다. 일단 찔러보고 반응을 살피려는 전략이었는데 예상 밖으로 리액션이 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중을 못 먹는 감 정도로 생각하는 그들은 대중의 분노를 " 들끓는 냄비 근성 " 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문학평론가'에게 입장을 묻는 전화벨이 울리자 스타 평론가들은 진퇴양란에 빠졌다. 버릇대로 출판 권력을 옹호하자니 여론이 두렵고, 강한 스매싱을 날리자니 보스(출판권력)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하지만 이미 여론은 겉잡을 수 없이 흘렀고 표절의 증거는 매우 선명해서 부정을 할 수는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신형철이 내놓은 입장 표명에는 " 표절 " 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 표절이 확실하다 " 라고 말하는 대신 " 같은 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 는 말로 에둘러 인정한다. 만약에 여론이 지금처럼 들끓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 ? 다음은 조선일보가 신경숙을 에둘러 지지하는 글이다.

 

 

 

 

"신경숙씨가 '옛날에 책에서 읽고 수첩에 메모해 둔 문장을 나중에 열어보곤 내가 쓴 글로 착각했다'라고 해명했으면, 진작에 이 논란은 잠잠해졌을 텐데…"

문학 평론가 A씨가 '신경숙 표절 논란'을 지켜보며 내뱉은 탄식이다. 신경숙씨의 단편 소설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문장 일부를 표절했다는 논란이 작가의 어설픈 해명과 창비 출판사의 무책임한 대응으로 더 확산되고 있다. 신씨가 언론과의 접촉을 끊은 채 침묵하고 있기에 비난 여론이 더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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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응준씨가 지난 16일 표절 논란을 제기했을 때 문단에선 "명백한 표절"이라는 반응 못지않게 "표절로 낙인 찍는 것은 지나치다"는 신중론도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은 한때 문학 청년들의 필독서였다. 신씨가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의 영향을 받아 무심코 글을 썼을 수도 있다. "작품 전체가 다르므로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다"는 동정론도 나왔다. 소설 '전설'과 '우국'은 주제와 소재 , 줄거리를 따져 보면 네모와 세모처럼 다른 작품이다. '우국'은 현실에 맞서 자기 의지를 표명하려고 동반자살하는 남녀의 이야기다. '전설'은 현실(6·25)에 눌려 이별하게 된 남녀의 이야기다. 한쪽은 운명에 저항하려고 삶을 포기하는 것이고, 한쪽은 운명에 의해 삶이 훼손된 것을 다뤘다.

그러나 신씨가 17일 단편 '전설'이 실린 책 '감자 먹는 사람들'을 낸 창비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내 "해당 작품 '우국'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자 순식간에 문단에서도 옹호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평론가 B씨는 "신씨와 연락이 닿은 동료 문인들이 논란 초기에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좋다'고 권했지만, 신씨가 이런 동료들과도 상의하지 않은 채 창비에 이메일을 보냈다"며 "모두 당황했고, 이제 문단에서 신씨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신씨로서는 억울하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문인들은 창비 출판사도 질타하고 있다. 창비가 "몇몇 문장의 유사성을 근거로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신씨를 옹호해놓고선 하루 만에 "표절을 제기할 만하다"고 입장을 번복했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평론가 C씨는 "창비가 논쟁의 불을 질러놓곤 불길이 커지자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다"고 힐난했다.

문인들은 "이제 신경숙씨가 결자해지(結者解之)하는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신씨를 설득하려 했다는 어느 문인은 "독자들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라며 "작가로서 독자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씨와 연락이 닿는 문인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신씨가 침묵과 고립을 고수할수록 신씨를 공격하는 목소리만 더 커진다. '우국'과 '전설'이 상황 설정에서도 유사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표절 논란으로 한국 문학 전체가 조롱거리가 됐다. '옥에 티'가 쌓여 실뭉치가 되더니 어느덧 눈덩이처럼 커졌다. 신씨가 침묵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러면 동료 문인들도 도울 것이다. 이번 논란은 문단이 함께 치유해야 할 상처가 됐기 때문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기자는 메모광인 신경숙이 메모장 속에 있는 문장을 자신이 쓴 글로 착각하고 소설 속에 삽입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니까 << 신경숙 표절 사건 >> 은 < 고의 > 가 아니라 < 착각 > 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수일 뿐이니 비난보다는 동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 정도면 노골적인 " 신경숙 편들기 " 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일기예보는 미래학이 아니라 통계학'이다. 과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다. 내 예상도 미래 예측이 아니라 지난 것들의 통계값을 통해 조선일보의 입장을 예측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녀는 현재 윤희상 시인의 시 제목을 표절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신경숙 단편 제목인 << 무거운 새의 발자국 >> 과 << 멀리, 끝없는 길 위에 >> 는

윤희상 시인의 시 << 무거운 새의 발자국 >> 과 << 멀리, 끝없는 길 위에 >> 를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기 했다( 맙소사, 이 시들은 모두 시집 <<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 에 수록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고의가 아니라 착각이란다. 미래를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악습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앞날을 예측하기란 누워서 떡 먹기'다. 이명박의 미래는 이명박의 도래이고, 박근혜의 미래는 박근혜의 도래'일 뿐이다. 이응준은 문단의 자정 능력을 믿는다고 신소리를 하지만 나는 문단이 자정 능력을 갖췄다고 믿지 않는다. 노무현은 권력은 자본에게 넘어갔다고 뼈아픈 후회를 했었다. 마찬가지다. 이제 문학은 자본에게 넘어갔다 ■ 











 

  1. 줄리안 반스 소설 제목
  2. 나는 동인문학상 주체가 동아일보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문학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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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6-22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요. 곰발님도 제목을 줄리안 반스의 소설 제목을 그대로 쓰셨지만
그렇게 기존에 있는 책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 쓰는 경우가 있잖아요.
고 김소진 작가도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그대로 가져왔구요.
제목 정도야 그냥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문학계의 표절 수위가 어느 정돈지 이번 계기를 통해 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정`해야죠. 아무리 자본주의 제단 앞에 바쳐졌다고 해도. 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13:56   좋아요 1 | URL
다른 문제죠. 박현욱의 << 동정 없는 세상 >> 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이 제목은 프랑스 영화 << 동정 없는 세상 >> 고 같죠. 하지만 이걸 두고 표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잘 알려진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는 출처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 나보기가 역겨워 > 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면 그건 표절일까요 ? 그럴 리 없죠. 누구나 알고 있기에 굳이 김소월의 시에서 따왔습니다, 라고는 말하지 않으니 말이죠.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죠.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일 뿐더러, 최소한 문장을 카피할 때 원저자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풀무 2015-06-2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사태로 생뚱맞게 (? 혹은 당연히?) 떠오른 영화가.. 예전에 김한민 감독 [최종병기 활]이 멜 깁슨 감독작 [아포칼립스]를 거의 대놓고 구성과 여러 장면들 베꼈다는 논란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도 표절 논란이 굉장했었는데 공식적으로 표절이다 아니다 아무런 결론도 없이 유야무야 되더니 몇 년 후 김한민 감독은 문제의 [명량]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전 신경숙 작품 중에 제대로 일독했다할 책은 [엄마를 부탁해] 딱 한 권인데.. 평소 한국문학에 별 관심도 없던 제가 다 심란해집니다. 뭐 어찌 보면 그간 곰발님이 여러 차례 포스팅으로 지적해온 곯은 이면들이 터진 것 같아 새삼스럽지도 않지만서두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14:42   좋아요 0 | URL
이 말 들으면 뚜껑 열리겠지만 문단 돌아가는 꼴을 보면 ˝ 딸딸이 집단 ˝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찌나 칭찬이신지.... 다 걸작이에요. 문단의 성찬에 의하면 노벨문학상 400명은 배출되어야합니다.
 

 

 

 




신경숙이 신형철에게



                                     스릴러 영화와 신파 영화는 서로 닮았다. 스릴러 영화에서 서스펜스'는 " 간발의 차이 " 로 발생한다. 목격자는 대상(의 죽음, 사건 따위)보다 항상 늦게 도착한다. 살인자가 앉아 있던 쇼파에는 아직도 살인자가 남기고 간 체온이 전해진다. 황급히 창문을 열어 밖을 보면 그림자 하나가 도둑 고양이처럼 획 골목 안으로 사라진다.  모,        든 것이 다 간발의 차이'다. 슬픈 멜로 영화도 " 늦었다는 것에 대한 회한 " 을 담은 장르'다.  김영하가 지적한 것처럼 멜로란 엇갈림의 미학인 것이다. 오고가다 다 만나면 텔레토비지 멜로가 아니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서로 마주치지 못한다. 슬픈 멜로를 이끌고 가는 클리쉐는 모두 " 너무 늦었다 " 는 정서를 깔고 있다.

편지, 도착, 깨달음, 후회'라는 단어 앞에는 " 뒤늦은 - " 이라는 형용사가 자리를 잡는다. 시간은 항상 목격자보다 빠르고 살인자보다 느리며, 이별은 빠르고 기다림은 느리다. 이처럼 스릴러와 눈물은 << 만시지탄 >> 을 담고 있다. 두려움과 슬픔은 동일하다. 생각해 보면 : 이별은 죽음의 상징적 서정'이 아니었던가. 신경숙 작품 가운데 내가 처음 읽은 소설은 << 풍금이 있던 자리 >> 라는 단편이었다. 그때 느꼈던 흥분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핏발 선 눈동자와 불끈 쥔 주먹이 주류 문학이었던 당대를 감안하면 << 풍금이 있던 자리 >> 는 신세계'였다. 신경숙은 개인의 욕망이 죄가 되는 시대에        민중문학의 대의적 명분을 생각해 보라       개인의 욕망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와, 와와 했다.

맛으로 표현하자면 신경숙 소설은  오신채를 넣지 않고도 오감을 자극하는 맛을 내는 요리였으며 콩으로 고기 맛을 내는 채식 요리였다. 신경숙 소설 속 화자는 늘 " 뒤늦게 도착한 목소리 " 여서 지상에 떠도는 유령의 슬픈 후회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이 비애'에 호감을 가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깊은 슬픔'에 지치기 시작했다.  통속의 비애는 갖췄으나 불온의 미덕은 느낄 수 없었다. 과장을 섞어 거칠게 말하자면 할리퀸 로맨스 문고판에서 eros 가 빠지고 sorrow 가 강화된 느낌. 신경숙 소설은 통속소설, 나아가 대중문학에 속했지만 평단은 신경숙 소설을 순문학'이라고 우겼다. 의아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 근대 문학의 종언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도 문학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말하는 이가 고립을 각오하고 해나가고 있는 소수의 작가라면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은 건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 존재가 문학이 죽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에 불과한 무리들이 그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아직 문예잡지가 있고, 매일 신문에 커다란 광고가 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팔리고 있지 않습니다. 참담할 정도의 부수입니다. 그리고 소설이 팔릴 때는 `문학`과는 상관없는 화제에 의한 것인데, 이러쿵저러쿵 문학은 아직 번영하고 있다는 허위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됩니다(65~66쪽) " 내가 신경숙을 지지하는 문단에게 말하고 싶은 말도 똑같다. "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한국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된다. " 하지만 평단의 지지는 뭐랄까.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태도처럼 보였다.

 

평단은 그녀의 통속이 대중에게 먹힌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간파했고 신속하게 < 통속소설 > 을 < 고급소설 > 로 포장했다. " 선택과 집중 " 은 통했다. 그녀는 어느새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 엄마를 부탁해 >> 로 잭팟'을 터트렸다. 신경숙의 통속과 문단의 전략이 시너지 효과를 낳은 것이다. 문단이 그녀를 지지한 이유는 문단이 독립적으로 자생하지 못하고 대형출판사에 종속되었다는 데 있었다. 출판사 빅 3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 문학동네)는 간행할 때마다 적자를 보는 문예지를 꾸준히 발행하면서 문단의 밥벌이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문단 입장에서 보면 문예지'가 곧 밥벌이 장소'였던 셈이다. 특히, 문학평론가에게 출판사 문예지 편집위원과 기획위원 자리'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어느덧 권력 사슬은 이상한 구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출판사 아래 평단이 자리를 잡고 그 아래 작가'가 깔렸다. 작가는 문학평론가에게 눈도장을 찍히기 위하여 노력하고, 평단은 출판사 눈치를 살폈다. 주례사 비평'은 이 피라미드 구조 안에서 파생된 덕담 문화'였다. 그러다 보니 특정 출판사가 출간한 소설 뒷편에 부록처럼 딸린 평론은 그 특정 출판사 소속 문학평론가가 담당하게 되었다. 말이 좋아 < 평론 > 이지 나쁘게 말하면 < 홍보용 보도자료 > 였다. 출판사 편집인이 해야 될 작업을 문학평론가가 대신하는 경우'였다. 칼칼한 비판은 사라지고 달달한 덕담만 넘쳐났다. 문학평론가라면 < 달 > 보다는 < 칼 > 을 잡아야 하나, 그들은 < 달 > 을 선택했다. 말(言)은 넘쳐났지만 건질 만한 말(言)은 없었다. 평론 評論'에서 言 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平이 남았다.

결과적으로 < 評論 > 이 아니라 < 平論 > 이 되었다. 촉이 무뎌지니 말이야 마리아야 ?  대체, 뭐야 ?! 만약에 신경숙 소설이 흥행성을 갖추지 않았다면 출판사와 문단이 발벗고 신경숙을 밀어줬을까 ? 다시 말해서 신경숙이 박상륭이었다면 ?!  내가 " 신경숙 표절 논란 " 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이응준이 " 허핑턴 포스트 " 라는 비주류 언론에 글을 기고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주류 문예지나 주류 언론이 이응준의 글을 거부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신경숙 표절의 핵심은 신경숙이 아니라 문예지를 끼고 도는 문단이다. 서정주는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다. 신경숙의 표절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문단'이다. 그때 문단이 제대로 자정 능력을 발휘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경숙은 억울하다. 어쩌면 그녀는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쇼파에 남아 있는 온기를 깨닫고 황급히 창문을 열어 밖을 볼 것이다. 명예와 인기'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훅, 사라진다.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심각한 것은 출판사와 문단의 종속 관계를 부끄러워하는 이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신형철은 << 몰락의 에티카 >>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한다. " 4년 전에 첫 글을 발표한 지면이 문학동네다. 편집위원 여섯 분 선생님의 가르침과 격려 덕분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써왔다. 마지막 글을 발표하는 지면도 문학동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 마치 문단이 출판사에게 띄우는 러브레터 같다. 보다 거칠게 말하자면 보스를 향한 충성 서약처럼 읽힌다. 나는 이 서문이 굉장히 불쾌했으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가 우국을 본 적도 없다고 당당히 말한 속내에는 평단이 그동안 자신에게 보냈던 지지를 믿었기 때문이다.

신경숙이 신형철에게 묻는다. " 그때 왜 그랬나요, 네에 ? "  







※ 이 글은 신형철을 콕 집어서 비판한 것은 아니다. 문단 전체를 대표해서 신형철을 호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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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5-06-2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 권만 읽고도(후기 작품) 신경숙의 상투, 진부에 질려서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신경숙의 비애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청승으로 읽힐 것이라 치부하구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는 것이지만. 초기작품은 그래도 좋았다고 하여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도무지 구미가 당기지 않네요. 제가 좋아하는 3대 출판사가 그런다는게 참 속 쓰리네요.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글쟁이에게 점점 더 불리한 세계가 되어가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1 13:03   좋아요 0 | URL
초기작은 신선해고 좋았씁니다. 이게 반복되니까 슬슬 재미가 없어지더라고요. 풍금, 왼쪽 방 ㅎㅎㅎ 이런 거 좋았거든요. 2000년 이후 작품이 망가진 듯한 느낌이 개인적으로 들었습니다.

수다맨 2015-06-2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이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나네요.

˝지금도 문학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말하는 이가 고립을 각오하고 해나가고 있는 소수의 작가라면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은 건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 존재가 문학이 죽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에 불과한 무리들이 그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아직 문예잡지가 있고, 매일 신문에 커다란 광고가 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팔리고 있지 않습니다. 참담할 정도의 부수입니다. 그리고 소설이 팔릴 때는 `문학`과는 상관없는 화제에 의한 것인데, 이러쿵저러쿵 문학은 아직 번영하고 있다는 허위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됩니다(65~66쪽)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1 14:34   좋아요 0 | URL
이미 문학의 사회적 기능은 사망 선고를 했죠. 이제는 상품으로 팔리는 상품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비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죠. 더군다나 누가 요즘 소설 책 읽습니다. 수다맨 님 빼고..ㅎㅎㅎㅎㅎㅎ고진의 지적처럼 저는 신경숙 소설이 ˝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한국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된다고 ˝ 생각힙니다. 확실히 수다맨 님은 내 글의 본문에 첨가할 글을 예리하고 뽑아서 주시네요... ㅎㅎㅎㅎ 이것도 본문에 삽입하다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