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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계절
마이크 리 감독, 레슬리 맨빌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나는 행복합니다
행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산다
- 브레히트
스 티븐 킹의 중편소설 <<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 에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문장이 나온다. 어쩌면 이 문장 때문에 이 소설 전체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 앤디는 지질학을 좋아했다. 그의 세심한 성격과 잘 맞았나 보다. 빙하기와 수백만 년에 걸친 산맥의 생성. 지질학은 시간과 압력에 대한 연구이다. 사실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
인간 관계를 다루는 심리학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은 개인이 살아온 시간과 그 사람이 그 시대를 관통하면서 느꼈던 사회적 압력에 대한 보고서'이다. 그렇기에 심리학자가 환자의 짓눌린 마음결을 들여다보는 일은 지질학자가 지층의 단면을 관찰하는 일과 같다. 공교롭게도 영화 << 세상의 모든 계절 >> 에 등장하는 중산층 부부 톰과 제리는 직업이 지질학자(: 톰)와 심리상담사(: 제리)다. 노년의 부부는 우리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산다. 주중에는 직장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과 압력의 영향을 연구하고 주말에는 가족 농장에서 텃밭을 가꾼다.
부부는 직장 생활도 훌륭할 뿐만 아니라 가정생활도 환상적일 정도로 모범적이다. 또한 교우 관계도 원만하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친구와 이웃을 초대하여 키친 싱크 토크1)를 즐긴다. 선량한 부부는 그들에게 진심이 담긴 우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톰과 제리 부부가 행복을 대표한다면(프로타고니스트) 불행을 담당하는 쪽은 매리'다(안타고니스트). 주정뱅이와 말실수는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여서 매리는 늘 주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캐릭터'다. 철딱서니 없다고나 할까 ? 그녀는 술에 취한 목소리로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강조하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표와 기의가 어긋난 언어를 구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감기에 걸리는 일과 사랑에 빠지는 일보다 더욱 숨기기 어려운 것은 행복을 숨기는 일이다. 행복은 눈에 잘 띠는 형광색이다. 키친 싱크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 마이크 리 감독은 영화 << 세상의 모든 계절 >> 을 통해 행복과 불행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 영화는 행복의 시점으로 불행을 관찰한다. 톰과 제리 부부는 불행한 사람들을 연민하며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연민에는 한계가 있다.
매리가 톰과 제리 부부의 가족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자 부부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부부는 매리를 냉정하게 거절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웃과 동료를 초대했던 부부는 그해 겨울에 매리를 초대하지 않는다. 이 선량한 부부가 이웃에게 보내는 조건 없는 선의는 위악도 아니고 위선도 아니다. 그것은 타자라는 한계가 가지고 있는 운명적 배타성이다. 행복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을 위로한답시고 내뱉는 말은 불행한 사람에게 위로보다는 상처를 주기 쉽다. 행복한 사람은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불행한 적이 없으니까.
톰과 제리 부부의 완벽한 행복 때문에 자신의 불행이 더 커 보이는 매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이 클수록 톰과 제리 부부에게 매달리지만 그럴수록 불행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반면에 톰과 제리 부부는 이웃의 불행을 통해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민폐를 끼치는 사람은 매리가 아니라 어쩌면 톰과 제리 부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훌륭한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이 영화의 엔딩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모임에 초대받지 않은 매리는 초대받은 가족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다.
카메라는 가족 모임에서 소외된 매리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여준다. 식탁 주변의 즐거운 소음이 묵음으로 전환될 때 어떤 관객은 비로소 매리에게 동일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가 끝나면 마치 압핀에 고정된 메모지처럼 꼼짝달싹 못한 채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자신을 본다. 신랄하지만 씁쓸하고 쓸쓸한 장면이다. 국내 프로야구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10개 구단 응원가 중 가장 유명한 응원가가 한화 이글스의 "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 라는 사실에 모두 다 동의할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한화는 경기에 지기 위해 탄생한 구단.
그런 구단의 팬들이 날마다 지는 경기를 보며 행복할 리는 없다. 하지만 자신은 항상 행복하다고 말한다, 불행했던 매리가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불행은 행복에 대하여 관심이 많지만 행복은 불행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불행한 사람은 행복을 좇고 행복한 사람은 불행을 멀리하기보다는 오히려 곁에 두고 지켜본다. 너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니까 !
1) Kitchen-sink Realism : 이는 말 그대로 부엌의 싱크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리얼리즘 드라마를 말한다. 하층계급 가정 내의 문제점을 보여줌으로써, 영국사회 전체의 모순이 저절로 드러나도록 만든 사회성 짙은 드라마다. 가족 간의 이야기가 드라마의 중심에 있다 보니, 중요한 장면들이 주로 부엌에서 진행됐고, 그래서 키친-싱크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생겼다. 영화의 대부분이 집 몇 채, 심하게는 집 한 채에 있는 몇 개 방과 부엌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작품들도 있다. 부엌. 우리에겐 여전히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영국의 리얼리스트들은 생존의 절대조건으로 부엌을 상정했고, 부엌에 정치성을 부여했다. 토니 리처드슨, 카렐 라이츠, 린제이 앤더슨 같은 쟁쟁한 감독들은 1960년대 영국 영화계에서 키친-싱크 리얼리즘을 이끈 선구자들이다. 잘생기고 멋진 사람들이 아니라 노동자, 빈민 같은 이 사회의 문제적 계급이 주인공으로 나와, 그들 특유의 투박한 악센트로, 마치 현실 그대로의 기록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덕분에 영국의 리얼리즘 미학은 확실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만 트뤼포의 공세에 맞설 영화 담론의 대중적 영국 스타가 없었던 게 그런 편견을 심화시킨 측면이 있다. ( 한창호,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