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야,  오함마 갖그 와라잉 :












김봉곤의 그렇고 그런 생활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을 " 그렇고 그런 생활 소설 " 정도로 읽어서 내가 이 소설에 대해 내놓을 촌평도 " 그저 그렇고 그런 단편소설 " 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파스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쓴다고 말했는데 젊은작가상 수상 작가이자 한국 문단의 떠오르는 샛별에게 충고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문학은 날것을 요리해서 익힌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믿는 내게 이 작품은 " 솔직하다 " 는 감상보다는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아서 " 번잡하다 " 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내가 기록한 20자평은 아하, 그저 그렇고 그랬던 그 소설 !   


한국의 현대 소설, 정확히 기술하자면 한국의 순문학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유는 " 그들만의 리그 " 라는 반감이 크게 작용한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소설은 < 잰더 트러블 > 은 집요하게 파고드는데 < 계급 트러블 > 은 실종되었다.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는 삽질의 정석은 온데간데없고 잰더와 계급은 서로 따로 놀고 있다. 나는 현대 한국 문학이 깊게 파는 것인지 아니면 넓게 파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분명한 것은 넓게 파기 위해서 깊게 파고들지는 못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논란에서 중요한 것은 C누나와 김봉곤의 잰더 갈등(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특정 계급의 플랫폼 독점에 있다. 김봉곤은 현재 문학동네 출판사 편집자'다. 그러니까 편집자이자 작가인 셈이다. 문제는 김봉곤이 수상한 젊은작가상이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재정한 문학상이라는 데 있다.  문학동네는 문학동네에서 편집 노동자로 일하는 직원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로 선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내 백일장 대회로 전락한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고 가재는 게 편이라지만 이런 경우는 노골적인 이해 충돌 방지 위반'이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닐까 ? 


한국 문단은 뻔뻔하게도 이 점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 민화의 윤리적 강박성과 정치적 투쟁성을 적용하면 독자를 빙다리 핫바지로 보는 태도'다. 한국 민화 협회장 아귀의 명대사를 빌리자면 "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 소설 쓰고 있네. 미친새끼가..... 소설 재미 없으면 손모가지 날아가 붕게. 아그야, 모하냐. 싸게싸게 오함마 갖그 와라잉 ! " 나는 이 문제를 놓고 문학평론가들이 유감을 표명한 적을 본 적이 없고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논란을 다룬 그 어느 기사도 이 점을 부각한 언론사가 없다는 점에 의아하다.  문학동네가 문학동네 직원을 자랑스러운 문학인으로 선정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자랑스런 대한민국 시민상을 재정해서 이낙연을 대한민국 시민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내가 알고 있는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작가만 해도 김서윤, 정세랑, 김민정, 정영수가 있다). 이제는 출판사가 플랫폼의 소유주가 되어서 유저를 키우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한국 문단은 페어플레이 정신이 실종된 집단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좋은 작품이 탄생할 리 없다. 



■ 덧대기

단편의 미학은 " 압축미 " 에 있다.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이 압도적인 이유도 정교한 압축에 있다. 그래서 좋은 단편은 웅크린 스프링과 같아서 다 읽고 나면 긴장에서 오는 좋은 스트레스와 그 긴장이 해소될 때 발생하는 사유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김봉곤의 단편은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그의 단편에는 긴장도 없고 해소도 없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늘어뜨린 느낌이다. 파스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짧게 쓸 시간이 부족해서 길게 쓴다잉 ! "  파스칼의 명제는 이 세상 모든 편집자의 기본 상식이 아닐까 ?  더군다나 명색이 편집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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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0-07-18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가의 창작방법인 오토픽션(저자와 작품 속 인물이 동일한 이름의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저자 자신의 삶을 문학적으로 서사화하는 창작 방법)에 대해서 얼마 전부터 의심을 품어 왔습니다. ˝여름 스피드˝라는 단편집을 읽었던 적이 있는데 다 읽고 나서는 약간의 감탄(실제 성소수자의 삶을 보여주기)이 나오다가도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기법으로 첫 단편집을 엮는 것은 좋다, 그런데 다음에는 어떤 형식으로 글을 쓸 것인가, 향후 소설에도 이 기법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적어도 내용물은 좀 달라야 하지 않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오토 픽션 작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와 비슷한 창작방법을 보여주는 작가가 저는 찰스 부코스키라고 봅니다. 언뜻 부코스키는 자신의 일상사만 지겹게 우려쓰는 작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각각의 작품들을 보면 저마다 차별성을 가지고 있지요. 팩토텀(부랑자의 삶), 우체국(정규직 노동자의 삶), 여자들(여성 편력사), 호밀빵 햄 샌드위치(유년소설), 할리우드(영화제작기) 등등 이 사람은 똑같은 소재만 쓰는 것 같으면서도 내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결이 새삼 다릅니다. 물론 그 자신이 진창과 같은 삶을 살아왔기에 저렇게 다양한 내용을 소설로 쓸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저간의 사정을 돌이켜보면서 느꼈던 점은 이 작가가 창작 방법의 변화를 도모할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내용물을 크게 바꾸는 데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자신의 삶(출판사 편집자의 일상사)을 계속 종이에 옮겨쓰기에만 골몰했다는 인상마저 듭니다. 이런 인식과 태도의 안이함이 결국에는 타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주면서, 자기 소설의 작품성까지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7-18 18:38   좋아요 0 | URL
성소수자 작가의 오토픽션은 위험한 거 아니겠습니까 ?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이 아웃팅 당할 위험도 높고 말이죠. 자신이야 커밍아웃했으니 상관없겠지만 다른 사람은 그게 아닌데......

전 이 단편 읽으면서 자꾸 파스칼의 편지 내용이 생각나더군요.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쓴다. 미안하다, 친구야..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ㅎㅎㅎㅎㅎ
 




​                            


마침표 없는 문장의 끝   :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1)










                                                                                               남자는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잘났다고 믿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못났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성차에 따른 차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거쳐 학습된 결과'다.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세뇌된 결과'에 가깝다. 


남자는 " 부풀리기 - 모방 " 교육을 통해 남성다움을 배우고,  여자는 " 축소하기 - 모방 " 교육을 통해 여성다움을 배운다. < 쩍벌남 > 과 < 다꼬녀 > 도 결국은 부풀리기 모방 교육과 축소하기 모방 교육의 과잉 결과인 셈이다( 남자들이 헬스 운동에 전념하고 여자는 다이어트 운동에 열심인 이유도 사회적 요구에 순응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남성-몸은 팽창해야 미학적 가치를 얻고 여성은 여성-몸을 축소해야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당연히 여성은 남성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남성은 잘못을 저질러도 당당한 편이다. 


더군다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일수록 그 도끼병이 심하다. 그들은 성적 매력을 상실한 나이인데도 여전히 자신이 젊은 여성에게 매력 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안희정이 그런 부류의 남성'이다. 박원순의 자살 사건을 두고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쌍팔련도에서나 사용했을 법한 " 채홍사 " 와 " 관노 " 라는 단어가 타임라인을 장악하고 있다. 한쪽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들어 상대방이 박원순을 가해자라고 단정하는 일에 대해 화랠 내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 중심주의 입장에서 박원순에 대한 애도 행위가 2차 가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어느 쪽에 손을 들어야 할까 ?   내가 보기엔 둘 다 맞고, 동시에 둘 다 틀리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한다는 것은 반헌법적 태도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피해자 경험의 독점적 해석과 무조건적 지지하는 것 또한 중립적 판단 위반이다(예 : 10대 청소년 두 명이 학원 교사를 성폭행으로 고소한 사건이 발생했었는데 재판 과정에서 10대 청소년의 위증이 밝혀졌다)하지만 무죄 추정의 원칙은 쌍방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성립할 뿐이지  명확한 증거(물증 혹은 자백) 앞에서는 다툼이 무의미하다. 박원순의 자살은 박원순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피해를 호소한 고소인의 주장이 맞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증거가 되었다.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는,  일종의 자백 없는 자백처럼 보인다.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주어도 아니도 술어도 아니고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마침표다.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했다 한들 마침표가 없는 문장은 완성된 문장이 아니다. 박원순이 작성한 문장도 마찬가지'다. 그가 쓴 문장에서 빠진 것은 마침표'다. 마침표 없는 문장은 완성된 문장이 될 수 없다. 애도는 끝났고, 이제는 자비 없이 말하련다. 박원순의 문장은 잘못된 문장이다. 











​                             


1) 한동훈,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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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리부트 - 코로나로 멈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
김미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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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자기계발서











코로나가 창궐했을 때 추운 겨울이 지나면 일상을 되찾을 줄 알았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리는 법이니깐 말이다. 마스크 때문에 자신이 내뱉은 날숨을 다시 들숨으로 마셔야 하는 상황에서도 묵묵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_ 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봄날은 가고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지만 전세계 확진자 수는 감소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 팬데믹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상시적 일상이 되었다. 접촉(off)은 죄악이 되었고 이제는 접속(on)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좋든 싫든 20세기는 히틀러가 만든 세계'였듯이,  좋든 싫든 21세기는 코로나가 만든 세계가 되었다.  코로나가 만든 새시대는 그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보니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 예측 " 이 아니라 " 예방 " 이다. 전자가 공격적 태세라면 후자는 방어적 태세 전환이라 할 수 있다. 


김미경의 << 김미경의 리부트 >> 는 놀랍게도 코로나 이후를 예측하고 그에 따른 해결책을 내놓는다(라고 책 선전을 하고 있다). 세계의 석학들도 모두 한결같이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섣부른 예단을 내놓는 것을 경계하는 마당에 저자는 어떤 근거로 세계를 진단하고 예측하며 그 값을 제시하는 것일까 ?  " 위기는 곧 기회 " 라는 자기계발서의 닳고닳은 신소리를 마치 미래를 꿰뚫는 선견 따위로 포장하는 이 책의 가치는 얼마일까 ? 코로나로 인하여 오프 라인 강연이 취소되는 바람에 (강의 수익이 0원이 되어서) 책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는 100만 유튜버 김미경의 결의가 뻔뻔해 보이는 이유는 세계의 비참을 돈벌이로 활용한다는 데 있다. 


코로나라는 거대한 비극을 이용하여 돈벌이(자기계발서)에 사용하는 방식은 세월호 사건을 재난 모험극 영화로 만들려고 하는 감독의 도덕적 해이'와 무엇이 다를까 ?  동기 부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도록 만드는 " 긍정의 과잉 " 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 농담 >> 에서 이렇게 말했다. 낙관주의는 민중의 아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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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책방 2020-07-06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합 1위군요..ㅠㅠ

곰곰생각하는발 2020-07-06 21:1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수다맨 2020-07-08 1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서 목차만 읽었는데 절로 한숨이 나오는군요. 차라리 어느 사교邪敎 교주의 경전을 일독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 책에도 진실이라고는 별로 없지만 적어도 구라(!)를 그럴듯하게 가공하려는 집필자의 정성이라도 조금은 있지요.
저렇게 뻔하디뻔한 내용을 책으로 내놓은 것을 보니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과히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7-10 16:31   좋아요 1 | URL
이런 책을 왜 읽는지 이해가 안 가는 1인. < 해빙 > 이란 책도 읽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뻔한 이야기여서 왜 이런 책을 읽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진 짜   개 소 리 를   찾 아 서  :












반짝반작 빛나는 쥐덫












                                                                                               다양한 종류의 소리'가 있다. 쉰소리, 헛소리, 새소리, 쇠소리, 개소리, 찍소리, 빗소리, 잔소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좆(개) 같은 소리, 허튼소리, 문소리...... 문소리 ?!  아임소리 !  많고 많은 소리 가운데 인간에게 제일 듣기 좋은 소리는 새소리'일 것이다. 동의 ?  동의하신다면 모두 다 부처핸섬 !  특히 작은 새일 수록 소리가 아름답다. 아침에 높낮이가 서로 다른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바람의 결에 따라 흔들리는, 처마 끝에 달린 풍경 소리 같다. 


굳이 이 자리를 빌려 강조하지 않아도  새와 숲의 관계는 공생에 가깝다.  새가 찾지 않는 숲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 없다. 숲을 키운 건 팔 할이 새'다. 새가 없다면...... 숲도 없다. 국토 면적의 70%가 산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입장에서 보면 새는 중요한 생태계의 금은보화'이다.  그런데 이 귀중한 새가 어이없는 시설물 때문에 죽는다.  어떤 종은 멸종 위기에 다다랐다.  바로 유리창이다.  새는 유리벽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유리창(벽)에 충돌해 그 자리에서 죽는다.  투명한 유리창도 문제이지만 반사 유리'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새는 유리창에 반사된 象을 허상이 아닌 실상이라 믿고 돌진한다. 하루에 유리창 충돌 사고로 죽는 새는 대략 2만 마리'이고 1년이면 대한민국에서 800만 마리가 유리창 충돌 사고로 죽는다. 어느 책에서인가 건축학은 곧 환경학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이 문장을 인용해서 다른 식으로 변주하자면 좋은 건축가는 좋은 환경가'라는 소리가 된다.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건축가는 좋은 건축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 EBS 건축탐험 집 >> 에 소개된 뜬 집'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 개소리 " 였다.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 건축가의 입말을 빌리자면 환경을 고려해서(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최소한으로) 지은 집이 통유리 집'이다. 누가 봐도 산촌 주변 환경과는 동떨어진,  과시성과 전시성에 촛점을 맞춘 집구석인데 검소한 최소주의1)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의 쾌감 때문에 이 집을 구상했다는 집주인의 설명은 같은 눈높이로 대상을 보려는 평화주의자의 태도라기보다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지배자의 그것을 닮았다. 그렇기에 이 집은 검소하다기보다는 지나치게 폭력적이다. 


도시 속 커튼월(통유리 건물) 때문에 미국에서 해마다 죽는 새가 무려 6억 마리'이다. 건축가라면 유리창의 크기와 유리창 충돌 사고의 연관성을 모를 리 없다. 더군다나 새들이 모여 사는 숲속이라면 더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이 건축가와 집주인은  주변 환경은 무시한 채 개소리를 전시하고 있다. 아마도 이 집은 건축가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집이 될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개소리인 것이다. 통유리창은 집주인에게는 최고의 조망권을 제공하는 공간이겠으나 새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의 덫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쥐덫이다.




​                             


1) 커튼월 건물(통유리 건물)이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기 때문에 다른 건물에 비해 냉난방비가 매우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건축가가 검소 운운하는 것 개소리'다. 디자인을 최소화했다는 것이 검소하다는 증거라면 미니멀한 디자인을 상징하는 아이폰은 왜 그리 비싼가 ? 내가 뜬 집'을 보았을 때 연상되었던 것은 선그라스를 낀 박정희가 높은 연단 위에 올라 육군사관생도를 내려다보면서 훈시를 하는 이미지'였다. 다른 분들(산촌 주민들)이 깜짝 놀랐을 것 같아요 _ 라고 묻는 진행자의 감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건물은 위압적이고 폭력적이다. 첨단 도시에 지어진 건물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숲속에서 이런 건물을 짓는 것은 자연과 주변 환경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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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 지 도   못 하 면 서  :










뜨거워.  몸속에서 밀려나와 !











지피지기는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너를 알고 나를 알면 그 어떤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이지만  본래 인간이란 < 너 > 를 모를 뿐 아니라 < 나 > 에 대해서도 모르는 족속이다. 말이 쉽지 지피지기는 신공에 가까운 내공'이다. < 지피 > 까지는 아니더라도 < 지기 > 만 해도 그 인간은 훌륭한 사람이다. < 남 > 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 나 > 에 대한 관심도 없다. 남자들은 종종 여자의 생리가 오줌을 누는 것과 같다고 믿곤 한다.  그러다 보니 김훈의 << 언니의 폐경 >> 과 같은 " 저세상 텐션의 발광 다이오드적 삼파장 극성 " 이 탄생하는 것이다. 





- 얘, 어떡하지. 갑자기 왜 이러지...
- 왜 그래, 언니?
- 뜨거워. 몸 속에서 밀려나와.

나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나도 생리날이 임박해 있었으므로 핸드백 안에 패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룸 라이트를 켜고 패드를 꺼내 포장지를 뜯었다. 내 옆자리에서 언니는 바지 지퍼를 내리고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나는 언니의 엉덩이 밑으로 바지를 걷어내주었다. 언니의 팬티는 젖어 있었고, 물고기 냄새가 났다. 갑자기 많은 양이 밀려나온 모양이었다. 팬티 옆으로 피가 비어져나와 언니의 허벅지에 묻어 있었다. 나는 손톱깎이에 달린 작은 칼을 펴서 팬티의 가랑이 이음새를 잘라냈다. 팬티의 양쪽 옆구리마저 잘라내자 언니가 두 다리를 들지 않아도 팬티를 벗겨낼 수 있었다. 팬티가 조였는지 언니의 아랫배에 고무줄 자국이 나 있었다. 나는 패드로 언니의 허벅지 안쪽을 닦아냈다. 닦을 때 언니가 다리를 벌려주었다. 나는 벗겨낸 팬티와 쓰고난 패드를 비닐봉지에 담아서 차 뒷자리로 던졌다.

<언니의 폐경> 일부 발췌


이 소설에서 묘사된 생리 장면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김훈은 겨울 내내 얼었던 마당의 수도가 봄볕에 녹아 느닷없이 녹물을 쏟아내는 수돗물처럼 언니의 생리를 묘사한다.  더욱 황당한 것은 동생의 행동이다.  생리가 시작되면 가까운 휴게소로 차를 몰아 24시 편의점에서 팬티를 구입한 후 언니를 화장실로 안내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이 될 텐데  동생은 차 안에서 칼로 언니의 팬티를 찢는다. 언니의 행동은 더욱 기괴하다.  언니는 "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다리를 벌린다. "  


문장 안에 들어갈 조사 하나 때문에 열흘 동안 깊은 고민에 빠졌다는 완벽주의자가 여성 생리에 대한 기초 조사도 없이 궁서체스러운 문장을 뽑아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뜻밖에도 내가 이 장면에서 연상되었던 것은 전우가 총상 입은 동료 병사의 지혈을 막는 이미지'였다.  김훈은 철저하게 남성의 시각으로 두 여자의 곤경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발췌한 장면이 자매애보다는 전우애로 읽히는 대목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작품이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의문은 쉽게 풀렸다.  심사위원 5명 모두 늙은 남자였다. 두 눈에 쌈심지를 켜고 잘잘못을 따지는 심사위원 눈에는 이 장면이 매우 자연스러웠던 모양이다.  아카데미상이 아카데미 회원(성공한 50대 백인 남성)의 욕망을 그대로 반영하듯이 한국의 문학상 또한 한국 문단에 소속된 늙은 남성의 욕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런 인간들이 " 일상 속에 느닷없이 침범한 곤경 앞에서 무력한 여성을 묘사한 걸작 " 이라며 설레발을 떨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어르신, 생리에 대한 대처는 초등학생이라면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문단 어르신들 하는 꼬라지를 보면 이 양반들은 차 안에서 생리하면 911 이라도 부를 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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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괭이 2020-06-23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소설 안 읽었는데 거두절미하고 넘 웃겨요ㅋㅋ 생리는 무슨 중병이나 사고로 인한 과다출혈이 아닌데 저기서는 아닌가요?? 저러다 죽거나 뭐

곰곰생각하는발 2020-06-27 23:26   좋아요 1 | URL
가만히 보면 김훈은 이 소설을 마치 밀리터리 소설처럼 쓴 것 같습니다. 총상 맞은 동료 병사를 지혈하는 장면처럼 보이잖아요. 아니 어떻게 이런 엉망인 사실을 심사위원들이 왜 아무도 비판을 하지 않았는지.. 정말 의문입니다.. ㅎㅎㅎㅎ

푸른괭이 2020-06-28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칼의 노래>, <남한 산성>을 좋아하지만, 남성성(낭만주의, 영웅주의, 마초 등)이 너무 도드라지는 작가라 <언니의 폐경>은 제목만 보고도 그냥 걸렀어요^^; 김훈 선생님이 생리에 지나치게 에로틱하게, 뭐랄까, 사춘기 남자애들처럼 접근하신 것 같네요. 딸을 키우는 아빠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밑에 쓰신 레이먼드 카버 소설과는 사뭇 다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6-29 17:02   좋아요 1 | URL
아, 저도 칼노래, 남산성 매우 좋아하는 소설인데 어느 순간부터 지나치게 남성성이 도드라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 언니폐경 > 같은 경우는 그가 아예 여성의 정체성에 대하여 티끌만큼도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조사 하나 가지고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는 분이 이렇게 사전 조사가 허술한 작품을 썼다는 것이 믿어지질 않는다고나 할까요 ?